인간 같은 인간, 여우만도 못한 인간
지난 24일 16부작으로 끝이 난 KBS2 월화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마지막 시청률은 16.1%로 집계됐다. 높지 않은 시청률이지만 시청자들의 열띤 반응과 주목을 받으며 아름답게 퇴장했다. 최종회까지 드라마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이날 방송에서 구미호(구산댁/ 한은정 분)는 자신의 딸 연이(김유정 분)를 죽이고 간을 빼낸 윤두수(장현성 분)와의 피 튀기는 접전을 치렀는데, 윤두수가 만신(박수무당/ 천호진 분)으로부터 얻어 온 칼을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고, 그를 연모하던 머슴총각 천우(서준영 분)가 구미호를 대신해 목숨을 잃었다. 위기의 순간 죽은 연이가 다시 나타나 "나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어머니까지 죽이려 하냐"며 손톱으로 윤두수를 찔렀다.
"미안하다. 하지만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너를 죽일 것이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고 울부짖던 윤두수는 결국 구미호의 손에 죽을 것을 원해 죽임을 당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초옥은 어머니에 이어 연이은 아버지의 죽음에 무너지며 "내가 그 때 죽었어야 했다. 내가 죽었으면 어머니, 아버지가 이렇게 다칠 일이 없었다. 아니, 나 같은 건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오열했다.
만신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까마귀, 호랑이, 구렁이, 지네, 구미호, 좀비, 외계인 등 그의 정체에 대해 온갖 억측이 난무했던 만신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최종회에서 죽은 윤두수의 간을 파먹는 끔찍한 장면을 지켜보던 구산댁이 만신의 얼굴에 흰 가루를 뿌리자 그는 윤두수의 얼굴로 변했다. 본래 자신의 얼굴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흉측한 몰골이 드러났다. 만신은 지난 600년간 몹쓸 병에 걸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죽은 인간의 간을 먹고 연명한 괴수였으며, 그에게 간을 먹힌 인간들의 얼굴이었음도 밝혀졌다.
이후 초옥은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를 죽게 한 구미호를 향한 복수심에 연이 행세를 하고 구미호를 좇아 길을 나섰다. 1년의 시간이 지나고, 구미호는 초옥이 탕약이라고 속인 여우피를 조금씩 마셔가며 병색이 짙어진다. 결국 초옥이 휘두른 칼에 죽어가던 구미호는 "니가 연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다. "니가 내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커 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벅찼다. 니가 더 자라 좋은 배필을 만날 때까지 만이라도 함께 하고 싶었다. 니가 나에게 여우피를 먹인 것도, 오늘 같은 날이 올 줄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너는 내 딸이었다"고 가슴 찡한 모성애를 드러냈고, 정신이 혼미해진 초옥은 "제발 죽지 말아달라"며 가슴을 치고는 "어머니"를 외쳤다.
아무튼 이날 최종회까지 드라마는 숱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구미호와 인간 사이의 얽히고설킨 복수극으로 막을 내렸다. 구미호는 자신의 딸 연이을 죽인 윤두수를 죽여 원한을 푸는 듯 했으나 윤두수의 딸 초원에 의해 죽게 됐다. 지금까지 악하기만 했던 구미호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인간과 똑같은 모성애를 가진 존재로 묘사, '구미호 시리즈'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얻었으며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누구 하나 행복을 찾지 못한 채 비극적 결말을 맞았지만 시청자들에게 남은 여운은 해피엔딩이었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면서 공포스럽지만 누구에게나 친숙한 '구미호'라는 존재는 항상 뭔가 2% 부족함을 남긴 채 끝났던 기억이 난다. 이번 '구미호:여우누이뎐' 역시 뭔가 부족한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이전의 구미호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구미호에게서 인간보다 더한 인간미를, 인간에게서 여우보다 더 사악함을 찾을 수 있었고, 불멸의 존재 구미호에게서 인간보다 더 나약함을 보는 듯하지만 다시 살아나는 카리스마를 느끼기도 했다.
구미호는 자신의 딸 연이를 죽인 윤두수의 목숨을 빼앗아 복수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만신의 계략에 말려 위기를 맞는가 하면 괴수인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흑기사가 돼 준 총각이 윤두수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고, 죽은 딸 연이 유령의 도움을 받는 등 구미호로서의 카리스마를 철저히 농락당하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갓 죽은 사람의 생간을 먹으며 연명해야만 하는 ‘조선판 좀비’ 만신의 죽여 달라는 하소연을 영원히 살아서 고통을 씹으며 살라고 내치는 통쾌한 복수를 함으로써 구미호의 카리스마를 지켜냈다.
복수를 끝낸 구미호는 부모의 복수를 위해 연이의 혼이 빙의된 것처럼 행동하며 자신에게 접근한 윤두수의 딸 초옥이 탕약이라며 속이고 준 여우피를 마신 뒤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구미호는 이미 초옥에게 연이가 빙의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딸을 죽인 원수의 딸에 모성애를 투영함으로써 그 진심에 초옥 역시 후회하게 만들었다. 복수의 끝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화해를 이끌어낸 휴먼 드라마였다.
부조리한 사회 전반의 문제와 여우보다 더 여우같은 인간으로 인해 빚어진 공포와, 그로 인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뇌와 아픔을 느끼며 시작했던 여우의 복수가 오히려 납량물다움을 선사했지만, 모든 주인공이 비극을 맛본 슬픈 결말이었으나 그래도 아름다운 화해와 사랑으로 매조지함으로써 해피엔딩이 되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사랑'으로 종결되었다. 공포물이라기보다는 지극한 모성애가 빛나는 '슬픈' 이야기, '괴수'의 이야기가 아닌 ‘어머니와 딸’에 관한 이야기였기에 납량특집이라고 이름붙이기도 그래 보였다. 그에 비하면 윤두수의 손에 죽어가면서 천우가 하던 말처럼 진짜 괴물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인간 윤두수일 수도 있다. 윤두수가 있어 납량물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주인공 한은정의 가슴 아픈 모성애 연기도 인기몰이에 일등공신이었지만, 두 아역 배우의 완벽한 캐릭터 소화력도 극의 흐름에 한 몫을 차지했다. 어른 세대의 욕심과 복수가 자식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한이 어린 연기를 두 아역 배우는 놀라울 만큼 잘 표현해냈다. 인간도 동물도 아닌 만신의 정체는 구미호와 인간의 피비린내 나는 모정만큼이나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으며 얘깃거리를 남겼다. 극중 만신은 역학과 온갖 비방술에 능한 박수무당이자 혜안을 가진 인물. 연이의 간을 먹여야 초옥이 살 수 있다는 비방을 내려 구미호와 윤두수의 결정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했으며, 윤두수를 한없이 악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 복선이다.
드라마는 끝이 났지만 '만신'의 정체에 대해 드라마는 열린 결말로 매듭을 지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논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구산댁과 연이는 죽어서 함께 행복해보였지만 인간의 간을 먹어야만 살 수 있었던 만신과 초옥이 어쩌면 같은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초옥이 가장 불쌍한 신세일 수도 있다. 앞으로 초옥도 만신과 같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숨어서 인간 세계를 떠도는 신세가 될 거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마지막 회까지 정체가 의문스러웠던 '만신'의 존재는 괴수와 사람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든 브릿지였다.
올 여름에는 유난히 구미호가 극성이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 못 다한 이야기는 이제 바야흐로 얘기의 자락을 깔아가기 시작한 SBS의 수목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로 이어질 것 같다. 작가들이야 안 드럴지 몰라도 보는 사람이 이어지는 얘기로 ‘외전’이든 ‘속편’으로 봐주면 되는 것 아닌가. 여우누이뎐보다 더 새로운 유형의, 좀 더 친근하고 매력적인, 그래서 전혀 납량물답지 않은 퓨전 청춘드라마가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다. 그런 의미에서 여우누이뎐이 시작한 새로운 방식의 구미호 얘기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킬 것 같은데, 아무튼 거기서 구미호(신민아)는 연이, 이승기는 초옥을 짝사랑하던 불쌍한 현감댁 도령, 그리고 이승기가 짝사랑하는 누나는 초옥이, 신민아를 쫒는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의문의 총각은 만신의 환생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름대로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면서 보면 그 재미가 더욱 배가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