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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아동문학회 2010년 문학기행
어린이의 영원한 동무 권정생 선생님을 찾아서-서정오
▶때 : 2010년 5월 22일 토요일 9시~11시
▶곳 : (1)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권정생 선생님 사시던 집
(2) 안동시 명륜동 권정생 선생님 기념관(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 권정생 선생님이 살아온 자취
1937년 : 일본 동경에서 태어남.
1946년(9살) : 고국으로 돌아옴. 생활고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짐. 어머님 동생과 함께 청송에 있는 외가에서 지냄.
1947년(10살) : 식구들이 안동에 다시 모임.
1950년(13살) : 6·25 전쟁으로 식구들이 몇 해 동안 흩어져 지냄.
1951년(14살) : 부산에서 재봉틀 가게, 책방 일꾼으로 지냄.
1955년(18살) : 전신결핵을 앓기 시작함. 그 뒤 평생 이 병에 시달림.
1957년(20살) : 병이 더 나빠져 고향으로 돌아옴.
1965년(28살) : 집 나와 대구, 김천, 상주, 문경, 점촌, 예천 떠돌아다니다가 석 달 뒤에 돌아옴.
1967년(30살) :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교회 문간방에서 지내며 종지기 일을 함.
1969년(32살) : 동화 <강아지똥>으로 월간《기독교 교육》에서 마련한 제1회 아동문학상 받음.
1971년(34살) : 동화 <아기양의 그림자 딸랑이>로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1973년(36살) :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75년(38살) : 동화집《강아지 똥》(세종문화사) 펴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 받음.
1979년(42살) : 동화집《사과나무밭 달님》(창작과비평사) 펴냄.
1982년(45살) : 조탑동 교회 뒤 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지어 거처를 옮김. 그 뒤 돌아가실 때까지 이 집에서 지냄.
1984년(47살) : 동화집《하느님의 눈물》(도서출판산하)과 소년소설《몽실언니》(창작과비평사) 펴냄.
1985년(48살) : 소년소설집《초가집이 있던 마을》(분도출판사), 동화집《도토리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분도출판사), 동화집《달맞이산 너머로 날아간 고등어》(햇빛출판사) 펴냄.
1986년(49살) : 글모음《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종로서적) 펴냄.
1988년(51살) : 시집(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동화집《바닷가 아이들》(창작과비평사) 펴냄
1990년(53살) : 소년소설집《점득이네》(창작과 비평사) 펴냄.
1991년(54살) : 장편동화집《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도서출판 산하) 펴냄.
1992년(55살) : 동화집《짱구네 고추밭 소동》(웅진출판) 펴냄.
1996년(59살) : 이원수선생 전기집《내가 살던 고향은》(웅진출판), 수필집《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그림책《강아지똥》(정승각 그림, 길벗 어린이) 펴냄.
1997년(60살) : 그림책《오소리네 집 꽃밭》(정승각 그림, 길벗 어린이) 펴냄.
1998년(61살) : 동화집《깜둥바가지 아줌마》(우리교육), 소설집《한티재 하늘1․2》(지식산업사) 펴냄.
1999년(62살) : 동화집《먹구렁이 기차》(우리교육), 장편동화집《밥데기 죽데기》(바오로딸) 펴냄.
2000년(63살) : 동화집《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우리교육), 동화집《아기 소나무와 권정생 동화 나라》(웅진출판) 펴냄.
2001년(64살) : 그림책《황소 아저씨》(정승각 그림, 길벗 어린이), 동화집《비나리 달이네 집》(낮은산) 펴냄.
2007년(70살) : 하늘나라로 가심.
◇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문학
권정생 선생님은 평생을 가난한 이와 약한 이들을 온몸으로 껴안고, 그 자신 또한 가난하게 살아 온 작가입니다. 선생님은 1937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우리 나라로 건너온 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문배달원과 책방 일꾼, 재봉틀 수리공으로 온갖 힘든 일을 다 하다가 열여덟 살 때 큰 병을 얻었습니다. 그 병은 평생을 두고 선생님을 괴롭혔지만, 선생님은 그 병조차 품안에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때때로 병이 너무나 심하게 자신의 몸을 괴롭힐 때는 절망 어린 한숨을 내쉬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서른 살 때 경북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에 머물러 산 뒤로는, 견디기 어려운 병고 속에서도 글쓰기에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리하여 그 뒤 40년 동안 <강아지 똥>, <몽실언니>, <무명저고리와 엄마>,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과 같은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남겼습니다. 그 보석 같은 이야기들은 어린이들의 마음을 울리며 그들의 사랑을 받아, 지금 나이 서른 안쪽인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명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운 이를 향한 사랑과 그들을 괴롭히고 억압하는 힘에 대한 저항, 이것이 권정생 선생님 삶과 문학을 꿰뚫는 사상의 고갱이입니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였으며, 잘 꾸며진 말로 포장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까지 권정생 선생님을 만나 본 사람들 가운데 온몸에서 우러난 그 삶의 향기에 감동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아는 한 한 사람도 없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을 유달리 사랑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이 약자 가운데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수필 <가난이라는 것>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생존 경쟁은 세상의 재물을 많이 차지한 부자들 때문이다. 부자가 없으면 가난한 자도 있을 수 없다. 강대국 때문에 약소국가가 생기고, 잡아먹기 때문에 잡아먹히는 것이다. 모두가 원위치로 돌아와 가난을 지켜야 한다. 가난만이 평화이고 행복을 기약한다. 가난이란 바로 함께 사는 하늘의 뜻이다.” 종종 돈 앞에서 신념조차 꺾이고 마는 우리들이 새기고 또 새겨 보아야 할 말입니다.
선생님의 사랑이 미친 곳은 비단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생물, 이를테면 생쥐와 벌레와 절름발이 강아지 같은 것이 다 선생님의 따뜻한 품안에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선생님이 몸담고 잇던 교회의 나무들이 ‘새마을 운동’으로 마구 베어질 때, 선생님이 어린 대추나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톱질을 멈추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전해 옵니다.
이러한 생각이 <강아지똥>이라는 걸작을 낳았나 봅니다. 이 아름다운 동화는 하찮아 보이는 강아지똥도 얼마든지 귀하고 쓸모 있다는 걸 보여 줍니다. 못생기고 더러워서 버림받은 강아지똥은 깊은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봅니다.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다.”라는 흙의 말을 듣고 희망을 얻은 강아지똥은 스스로 잘게 부서져 거름이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별처럼 고운 민들레꽃을 피웁니다.
선생님의 대표작 <몽실언니>에 나오는 인물들도 하나같이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입니다. 모진 운명 속에서 절름발이가 되어 고통 받는 몽실, 가난에 찌든 아버지와 뒤틀린 새아버지,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는 밀양댁, 병약한 난남과 꼽추 남편까지, 이들의 삶은 형벌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대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삶의 의지를 다지는 길로 이끕니다. 진정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이 분단시대 한국문학의 가장 위대한 성과로 평가받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선생님은 종교도 가난한 이를 버리는 순간 아무 값어치도 없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내려온다면 농사꾼일 것이요, 예수님이 다시 나타난다면 똥짐을 질 거라는 말에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수필 <십자가 대신 똥짐을>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양을 길러 젖을 짜 먹고 양고기를 먹고 살았던 유대나라에선 목자가 가장 귀한 직업이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스스로 목자가 되셨다. 한국에선 농사꾼이야말로 영육을 함께 살리는 하느님의 일꾼일 것이다. 정말 똥짐 지는 목회자는 없는 것일까?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 대신 똥짐을 지실지도 모른다.”
이러한 선생님의 생각은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라는 동화에 더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땅에 내려온 하느님과 예수님은 농촌에 살다가 서울 변두리 철거민 마을로 올라와 막일꾼과 청소부로 일을 합니다. 과천댁과 공주를 만나 함께 살게 된 둘은 노점상을 하다 경찰서에 잡혀가 욕을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생활을 못 견뎌 시골로 돌아가거나 하늘로 다시 올라갈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이북이 고향인 과천댁 할머니 소원이 고향 가는 일임을 알고는, 통일이 될 때까지 이 사람들과 함께 살기로 합니다. 이 멋진 하느님의 모습이 살아생전 권정생 선생님의 모습에 겹쳐 떠오르는 것은 그냥 우연일까요?
선생님은 평생을 병마와 싸우면서도 당신의 몸을 돌보는 일을 사치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고통을 삶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오면서도 선생님은 늘 어린이들을 위해 이야기를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부지런히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외로운 어린이들을 위해 글을 쓰던 선생님도 절망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말년에 선생님은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나는 이제 글을 쓰기 싫어요. 아무리 힘들여 글을 써도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요.”
아무리 힘들여 글을 써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것, 글 쓰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는 선생님의 뼛속 깊이 스며든 절망감을 이해하며 함께 슬퍼하고 부끄러워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절망이 너무 일렀던 건 아닐까요? 겉으로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아니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많은 어린이들은 선생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자라니까요. 그 어린이들 마음속에는 조금씩, 정말 착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가리는 슬기가 싹트고 있을 것입니다. 이 어린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틀림없이 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 놓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어린이를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유언장에 모든 인세를 어린이들을 위해 써 달라는 말을 남겼고,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기념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20년 동안 살았던 다섯 평 오두막조차 깨끗이 헐어서 자연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큰 사람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인가요. 권정생 선생님과 이오덕 선생님의 우정은 남달랐습니다. 두 분은 12년 사이로 세상에 태어났고, 4년 사이로 나란히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때때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던 우리에게 여태 권정생 선생님은 앞길을 밝히는 등불이 돼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든든한 스승 한 분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곁에는 어린이들이 있고, 그 어린이들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뿌려 놓은 씨앗을, 이제 우리가 정성 들여 가꾸어야 합니다. 그 씨앗은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씨앗입니다. (서정오)
◇ 권정생 선생님의 시 몇 편
밭 한 뙈기 사람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느님도 ‘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되고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얘들아 우리는 백두산 산바람 마시고 사는 애들아. 대동강 강물에 멱 감는 애들아. 이곳 산바람을 아니? 낙동강 물 빛깔을 알고 있니? | 너희들도 모두 모두 보고 있겠지.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보름달 두둥실 보고 있겠지. 얘들아 얘들아 우리는 어른을 닮지 말자. 백두산, 금강산, 태백산, 한라산 우리들의 산에 나무가 자라듯 푸르게 나무들이 자라듯이 우리는 한 빛깔 높지도 낮지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아이들 어른들은 담을 쌓고 등을 돌리고 어른들은 높은 자리가 좋다 하지만 사람을 부리는 게 좋다 하지만 얘들아, 우리는 어른들을 닮지 말자. 어른들은 빛깔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단군할아버지 손자들 백두산 산바람 밑에도 귀순이란 애가 살고 있겠지. 깜돌이란 애가 살고 있겠지. 태백산 산바람 밑에도 혜순이란 애가 살고 있단다. 또식이란 애가 살고 있단다. 모두 눈이 새까만 애들 모두 입술이 빨간 애들 설날이 오면 널을 뛰고 연을 날리고 썰매 타고 제기 차고 여름엔 미역 감고 씨름도 하고 보리밥 먹고 팔뚝이 굵고 고추장에 김치 먹고 야무진 애들 보리싹처럼 싱싱하고 인정 많은 아이들 우리는 어른들을 닮지 말자. 해는 천 만 년을 지나도 해이듯이 달은 만 만 년을 지나도 달이듯이 우리는 단군할아버지의 같은 손자들 얘들아, 우리는 어른들을 닮지 말자. |
안동 껑껑이 1 1. 장날 자아 갔디껴? 자아 갔디더. 시개금 눅디껴? 시개금 눅디더. 아이고, 고마버라. 2. 생소깝 생소깝 해 왔니껴? 한 짐 쫏아 왔제요. 내구랍아 어예 땔리껴? 그게 좋제요. 내구랍으만 실컨 울제요. 생소깝 지피만 내구랍고 내구랍으만 실컨 울고 천생 과부는 생소깝 지펴 놓고 실컨 실컨 울어야제요. 3. 이금실 딸네 소식 이금실 솟딤이 어른요 우리 딸 잘 있디껴? 꼬치 몇 근 땄다디껴? 갯밭에 메물이 여무디껴? 사위는 이자 허리 안 아프다디껴? 올 가을 농사 거두만 탈빚 한다디껴? 농협 빚이라도 갚는다디껴? 언제 친정 한 번 안 온다디껴? 애이고 무심타 해도 바뿌이께네 그릏제요. | 4. 뺑끼칠 뺑끼칠 했니껴? 앞짝에만 했제요. 뒷짝에는 어얘니껴? 까짓꺼 뺀질이 타고 휘딱 갔삐리껜데 누가 보니껴? 5. 밥 밥 먹었니껴? 먹었니더. 묵나물 한 죄기 무쳐가주 뒨장 놓고 썩썩 썩썩 비벼 먹었니더. 꿀맛 긑이더. 6. 똥짜바리 성철네 어매요 성철이가 왜 우니껴? 올림삐꾸 회비 안 준다꼬 대고 대고 졸라서 똥짜바리 한 받질 찼삐맀니더. 그래, 성철이 똥자바리 찼비리께네 속 시원으이껴? *책(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에는 본디 ‘~껑?’ ‘~덩.’으로 인쇄되어 있는 것을 ‘~껴?’ ‘~더.’로 고쳤습니다. 선생님은 본디 ‘~껴?’ ‘~더.’로 썼는데, 안동 사투리를 잘 모르는 출판사 편집자들이 ‘~껑?’ ‘~덩.’으로 고친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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