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록펠러 (이채윤 지음)
Ⅰ. 어린 시절
자유분방했던 존의 아버지에 비해 신앙심이 무척 깊었던 어머니는 어린 존에게 도덕적이고 엄격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항상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무절제한 낭비는 비참한 가난을 부른다.” 록펠러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어머니가 존을 불러 말했다. “존, 너도 이제 여섯 살이다. 오늘부터는 혼자서 교회에 다니도록 해라.” 그러면서 어머니는 존의 손에 난생 처음으로 20센트의 용돈을 쥐어 주었다. 그리고 기뻐하는 존에게 어머니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존, 이 20센트는 분명 엄마가 너에게 준 거야. 하지만 너는 이 돈을 함부로 써서는 안 돼. 이 안에는 네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몫이 있거든. 20센트 가운데 십분의 일인 2센트는 하나님 몫이란다.” 어머니는 2센트를 따로 떼어 헌금 봉투에 담아 주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것이 ‘십일조’라고 하는 것이고, 앞으로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를 반드시 따로 떼어 두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존은 그날 혼자 교회에 가서 십일조를 드리고 예배를 드렸다.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동안 어린 그의 가슴에 왠지 모르게 기쁨이 솟구쳤다. 그 후로 존은 교회에 가는 것과 십일조 드리는 것을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록펠러가 일곱 살 때였다. 어느 날 농장 덤불에 칠면조 암컷이 드나드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몰래 뒤를 따라가 둥지와 알을 찾아냈고 칠면조를 붙잡아 알과 함께 헛간으로 가져왔다. 어머니는 존에게 칠면조를 길러서 팔아보라고 했다. 늘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어머니는 아들의 자립정신을 일깨웠고 그렇게 해서 록펠러의 첫 번째 돈벌이 사업이 시작되었다. 야생 칠면조는 헛간에서 알을 품었고, 얼마 후 예쁜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왔다. 가을이 되어 새끼들이 다 자라자 존은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칠면조 암컷을 몇 마리 사다가 더 많이 알을 부화시켜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존은 어머니가 거실의 궤짝 위에 놓아 둔 푸른 사발에 동전을 모았는데, 3년 동안 칠면조를 길러 모은 돈이 50달러나 되었다. 그는 그 돈을 아는 사람에게 빌려주고 6개월 뒤 3달러 50센트의 이자를 받게 되었다. 3달러 50센트라는 돈은 그가 열흘 동안 하루에 10시간씩 감자를 캐야 벌 수 있는 액수였다. 그 때 존은 돈이 어떻게 이익을 만들어내는지를 깨달았다. 훗날 록펠러는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때 나는 돈을 위해 일할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위해 일하게 해야겠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당시 가족의 생활은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골드러시를 좇아 서부로 간 아버지가 무일푼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맏아들인 존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야만 했다. 존은 학교에 다니면서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존은 때때로 방과 후에 부두를 거닐며 교역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바라보곤 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존에게 물었다. “존, 너는 장차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소년 록펠러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나는 1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난 꼭 그렇게 될 거야.” 열네 살이 되던 해, 록펠러 가족은 클리블랜드로 이사를 했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새로운 철도가 생기면서 도시 전체가 활기를 띄고 있었다. 록펠러는 새로 개교한 센트럴 공립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록펠러는 학구적인 학생은 아니었지만, 사물을 진지하게 보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할 줄 알았다. 당시 그는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교회활동이나 봉사에 매우 열심이었다. 록펠러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서 ‘어머니와의 세 가지 약속’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그가 대사업가로 성공한 뒤 발표한 자서전에서 고백한 것인데, 존은 자신의 성공비결로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한 세 가지 약속을 평생 동안 지킨 것을 꼽았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
2.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
3. 교회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Ⅱ. 일찍 시작한 사업
1855년 8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살의 소년 록펠러는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클리블랜드에 있는 ‘휴이트 앤드 터틀’이라는 곡물 위탁판매회사에 경리로 취직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해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는데, 사장과 동료들은 록펠러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태도에 모두 놀랐다. 하지만 그가 받은 월급은 일한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럼에도 록펠러는 일을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했다. 그는 매일 밤 집에 돌아와서 하루 일과를 되새겨보고 자신을 훈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58년에 이르자 휴이트 앤드 터틀 회사는 곡물에서부터 대리석까지 거의 모든 상품을 취급하며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만큼 성장했다. 회사의 회계장부를 도맡아 처리했던 록펠러는 성장해 나가는 회사의 업무시스템을 배우는 일이 무척 즐거웠다. 1859년 3월, 록펠러는 3년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위탁판매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모리스 클라크와 함께 각자 2,000달러씩 4,000달러의 자본금으로 부둣가의 허름한 창고 건물에 ‘클라크 앤드 록펠러’라는 간판을 내걸고 위탁판매업을 시작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록펠러는 내심 자신감으로 가득 찼지만, 하나님께 겸손함을 달라고 기도했다. “저 자신을 돌아보고 조심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항상 겸손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록펠러는 사무실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하이오와 인디애나의 농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거래할 작물들을 골랐고, 농부들과 친분을 쌓아갔다. 록펠러는 매사에 조심하는 유형이었지만, 때때로 투자를 할 때는 무모해 보일만큼 과단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클라크 앤드 록펠러 회사는 첫 해에 4,400달러, 다음 해에 1만 7,000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며 급성장했다. 더욱이 1861년 4월에 시작된 남북전쟁은 그들의 사업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록펠러는 상품의 구매와 판매 등 영업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클라크 앤드 록펠러 회사는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신용 평가가 높은 회사 중 하나로 성장했다. 록펠러는 열아홉 살에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그는 주로 교회 사무를 보며 교회 재정의 관리 등 행정적인 일에도 깊이 관여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록펠러의 헌금 액수는 놀랄 만큼 늘어났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가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벌어들인 돈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십일조를 드렸고, 그것이 상당한 액수였기 때문에 교회 재정의 정상화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록펠러가 클라크 앤드 록펠러 사를 차린 후 미국은 남북전쟁에 휘말려들었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는 그 미증유의 혼란 속에서 골드러시에 이어 오일러시라는 강력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859년 펜실베이니아 타이터스빌에서 에드윈 드레이크가 최초로 석유 시추에 성공한 지 1년 만에 미국에서는 50개 이상의 유전이 발견되었고, 다시 1년 후에는 유전이 100개를 넘어섰다. 유전지대의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보스턴, 뉴욕, 클리블랜드 곳곳에서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큼 정유회사가 많이 생겨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석유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록펠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진짜 돈’은 석유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운송과 정유를 담당하는 중간상인들이 차지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타이터스빌의 유전이 발견되고 4년이 흘렀을 때, 클리블랜드에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클리블랜드에서 뉴욕, 그리고 석유지대의 중심지와도 직결되는 철도가 놓이게 된 것이다. 록펠러는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예측이 불가능하고 실패할 확률도 높은 유전개발보다는 정유업의 전망이 더 밝다고 내다보았다. 록펠러는 동업자인 클라크, 새뮤얼 앤드류스와 함께 8,000달러를 투자해서 정유회사를 설립했다. 그들이 차린 정유공장은 몇 대의 증류기, 용광로가 전부였고 기술력도 일천했지만, 그곳에 곧 철도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새로 영입된 앤드류스는 화학을 독학한 사람으로 석유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지식을 가진 달인이었다. 그는 석유를 걸러내고, 끓이고, 농축해서 물과 가성소다, 황산으로 정화해 등유로 분리시키는 정유 시스템을 개발했다. 1864년 3월, 록펠러는 로라 스펠먼과 약혼했다. 록펠러는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클리블랜드의 유력한 사업가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로라와는 진작에 결혼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로라의 집안은 든든한 정치적․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로라는 젊고 아름다웠다. 록펠러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로라에게 청혼했고, 그해 9월 8일 두 사람은 로라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록펠러는 평소 과묵한 편이었지만, 로라와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나누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완벽한 배우자가 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돈 버는 일에만 전념하던 남편의 관심을 예술이나 문화, 사교활동 등에까지 넓혀 주었다. 그리고 경건하고 착실한 교육을 통해 아들 록펠러 2세를 록펠러 가문의 손색없는 후계자로 키워냈다.
1865년 초, 잘나가던 회사가 불화로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클라크는 회사 부채가 거의 10만 달러나 된다면서 불만이 많았고, 록펠러는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클라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록펠러는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계속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필요를 느꼈다. 1865년 2월, 록펠러는 7만 2,500달러에 클라크로부터 회사를 인수했고 그 날 이후 회사는 ‘록펠러 앤드 앤드류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추진력이 뛰어난 동생 윌리엄을 회사에 끌어들여 두 번째 정유소를 열었다. 그로부터 제3, 제4, 제5의 정유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미 록펠러 앤드 앤드류스는 클리블랜드 최대의 정유사가 되어 있었고, 2위 업체에 비해 곱절인 하루 500배럴의 정유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록펠러는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되었으나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며 절제 있는 삶을 꾸려 나갔다. 회사일이나 교회일을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록펠러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백만장자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라났다. 아이들은 용돈을 벌기 위해 집안일을 도와야 했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각자의 회계장부를 작성해야 했다. 록펠러는 가족을 이끄는 일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회사를 운영하고 돈을 버는 것 자체가 ‘가족을 위한 것’ 아닙니까?”
Ⅲ. 일생을 바친 석유사업
록펠러는 모든 일에 꼼꼼하기로 유명했지만, 한 번 사람을 믿으면 이따금 무모할 만큼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람이었다. 1863년, 그때까지만 해도 석유사업의 진가를 잘 알지 못했던 그에게 친구 한 사람이 광산업을 권유했다. 그는 친구의 말을 믿고 거금을 들여 탄광을 인수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폐광이나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광산이었다. 아무리 캐고 들어가도 광산에서는 돌덩어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밀리자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서 아우성을 쳤다. 그들은 록펠러를 탄광 안에 가두고 임금 지불을 요구했다. 록펠러는 폐광에 엎드려 처음으로 정신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그는 어떤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피곤해서 그만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시도하다 결국 한쪽으로 쓰러지고 말았는데 난데없이 어떤 큰 손이 다가와 그를 붙들어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문득 정신이 든 록펠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여전히 차디찬 폐광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귓가에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갈 곳에 이미 이르렀느니라.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네가 있는 곳을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밖으로 나와 광부들에게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그의 눈물어린 호소에 몇몇 광부가 마지막으로 한번 록펠러를 믿어보겠다며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땅을 파내려간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석탄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것은 석탄보다 값진 석유였다. 록펠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석유라는 값진 선물을 주신 것은 평생 그 일에 전념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후 록펠러는 석유 이외의 어떤 사업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록펠러는 많은 사람을 사귀지는 않았지만 한번 믿은 사람에게는 전폭적인 신뢰와 권한을 주었다. 그는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석유사업으로 세계를 제패할 꿈을 착착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록펠러는 동업자 새뮤얼 앤드류스와 협의해 또 한 사람의 협력자를 맞아들였다. 그 사람은 록펠러와 평생 동지로 지내게 된 헨리 M. 플래글러였다. 플래글러가 회사에 합류하면서 사업은 일취월장해 1870년, 그 유명한 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을 탄생시키고, 미국 석유 시장의 95%를 점유하는 초유의 글로벌 기업을 만드는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헨리 M. 플래글러는 사업에서나 사생활에서나 록펠러와 평생 우정을 함께 나눈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나중에 자서전에서 록펠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플래글러와 나는 비즈니스에서 비롯된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그것이 우정에서 비롯된 비즈니스보다 더 좋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나는 경험을 통해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스탠더드 오일도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록펠러의 기업 확장 정책에 따라 정유소의 수가 늘어난 반면, 기술부족과 부주의로 화재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펠러는 특유의 리더십으로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무엇보다도 석유사업의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는 직관력을 가지고 있었다. 록펠러는 물류비용에서 경쟁자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이 석유사업에서 성공을 거두는 열쇠라고 확신했다.
그는 철도회사와의 운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주변의 정유공장을 흡수 합병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클리블랜드 최대의 정유기업 집단을 이룩함으로써 운임협상에서 철도회사를 압도하는 데 성공했다. 록펠러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사라지자 일일 생산량을 500배럴에서 1,500배럴로 늘려 나갔다. 록펠러는 클리블랜드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석유의 생산․선적․도매 등 석유산업 전반에 걸쳐 모든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전 미국, 나아가서 전 세계 석유 시장을 장악할 계획을 세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원유의 채취는 물론 그것이 소비자들의 손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 중 핵심 과정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록펠러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원유 시추에서부터 정유 시설, 나아가 운송과 유통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을 전격적으로 펼쳤다. 그 일은 1871년 12월에서 1872년 3월까지 석 달 동안 펼쳐졌다. 그 결과 스탠더드는 클리블랜드의 27개 경쟁업체 중 세 곳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투자자들은 회사의 부채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 주식회사 제도에 매료되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의 설립 초기부터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경영방식에서도 항상 앞서갔는데, 오늘날 유행하는 책임 위임 방식을 채택해서 유능한 직원은 빠르게 승진시켰다.
1872년, 그해는 록펠러 개인에게는 물론 미국 경제 전반에 매우 중요한 한 해로 기록되고 있다. 그해는 록펠러와 몇몇 동료들, 동업자들에 의해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가 탄생한 해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한 산업의 여러 분야를 모두 독점하는 최초의 기업 ‘트러스트’의 발명이었다. 클리블랜드에서 독점을 달성하자 스탠더드 오일은 주변지역을 장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뉴욕에서 15개, 필라델피아에서 12개, 피츠버그에서 22개, ‘석유지대’에서 27개 정유사를 흡수했고, 록펠러는 일생일대의 야망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1877년에 이르러 석유지대와 필라델피아, 뉴욕, 피츠버그에서 스탠더드 오일에 맞설 정유사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주도면밀한 그의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석유 수송에 필요한 파이프라인과 탱크차를 자체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산 석유의 생산․수송․정제․판매 단계의 모든 작업을 관리․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그야말로 ‘통합과 집중’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작업이었다. 록펠러는 거기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의 거의 모든 원유 시추와 정유, 그리고 각종 유류 유통 시장을 장악한 것은 물론 세계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원유 무역을 점령했다. 록펠러의 기적과 같은 성공은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들었고, 뒷날 많은 기업가들이 따르는 전범(典範)이 되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독점적 위치에 올랐지만, 잠재적 경쟁자들을 키우지 않기 위해, 항상 저렴한 가격으로 석유를 공급했다.
록펠러는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었소. 그때 우리는 석유산업의 엄청난 가능성을 알아보았고, 그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 경영 경험을 모두 동원해, 10배, 20배, 30배로 열매를 맺었지요.” 록펠러는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사생활은 거의 변한 게 없었다. 그는 다른 재벌들처럼 미술품을 수집한다거나 사치스런 식기 세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업이 크게 번창함에 따라 일에 파묻혀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유클리드 가의 저택에서는 아무런 갈등도 없었다. 집안 식구들은 항상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었고, 누구도 험하거나 격한 말을 쓰지 않았다. 아버지 록펠러가 재계의 모범적인 사업가였듯이 어머니 역시 가정의 모범을 일구어냈다.
록펠러의 아내 로라는 많은 점에서 록펠러의 어머니를 닮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시어머니처럼 청교도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엄격하고 교훈적인 삶을 살 것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기도 시간을 통해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반성하고 검증하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집안의 절약습관에 따라 록펠러 2세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누나들이 물려준 옷을 입었다. 특히 외아들인 록펠러 2세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착실히 배웠다. 어머니는 집안의 이름을 다음 세대로 이어갈 이 심각한 소년에게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록펠러는 아들에게 “늘 진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 부자는 만나서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었다. 그들의 편지는 평생 동안 이어졌는데, 하루에 한 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다.
Ⅳ. 록펠러 제국
1885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스탠더드 오일은 본사를 뉴욕으로 옮겼다. 뉴욕 항이 내려다보이는 브로드웨이 26번가에 자리 잡은 스탠더드 오일은 절정의 시기를 보냈다 록펠러는 클리블랜드에서 일하던 직원들을 대부분 데려와 고용하면서 뉴욕에서 살 집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철도업계의 대부호가 살던 맨해튼의 저택을 구입해서 이사했다. 바야흐로 록펠러가 지방 도시의 기업가로서가 아닌 미국 경제의 중심지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가로서 활동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모두 40개의 자기업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중 14개 기업은 독점적으로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영국의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와 이른바 ‘시장 합리화’를 모색함으로써 세계 석유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록펠러는 마케팅 분야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인 아치볼드를 해외로 파견해 미국 내에서와 같은 인수․합병 정책을 펴나갔다. 그들은 경쟁 기업의 주식을 매점해 사들였고, 어떤 경우에는 비밀 주식 거래로 경영권을 잠식해 들어가기도 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1884년에서 1899년 사이에 유럽 석유 시장의 60%를 장악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거의 100%에 달하는 점유력을 과시하면서 미국의 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유럽뿐만 아니라 중동과 중국, 일본, 조선, 동남아시아 등 아시아 국가로까지 진출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대외 정책에서 미국 정부를 대행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 스탠더드 오일의 번영은 곧 미국의 번영을 뜻했고, 각국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의 현지 공사(公司)들은 스탠더드 오일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50대에 이르자 록펠러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무렵, 전혀 예기치 않았던 병마가 그를 덮쳤다. 오로지 사업밖에 모르고 30여 년간 몸을 혹사한 결과였다. 승리자로서 뉴욕에 입성한 2년 동안 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다. 기관지, 신경 계통에 문제가 생겼고, 위궤양도 앓고 있었다. 또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소화불량은 중증이었다. 입원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는 그는 몇 조각의 비스킷과 물로 식사를 대신해야만 했다. 점점 미라처럼 변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 세계 최고의 부자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에 백만 달러씩 벌어들이는 그의 수입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돈을 위해 살아온 그였지만, 결코 돈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정밀진단 결과 병원에서는 록펠러에게 1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자 언론은 록펠러의 죽음을 걱정하기보다는 그 많은 재산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더욱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억만장자 록펠러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무서운 고통 속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이 부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에 대해 굳게 쥐고 있던 고삐를 서서히 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건강을 돌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부디 제 건강을 돌려주십시오.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제가 벌어들인 돈을 세상을 위해 보람 있게 쓰고 싶어서입니다.” 그러자 기도에 대한 응답이 왔다.
록펠러는 이전의 건강한 몸을 되찾아 갔다. 생활도 점차 건강해져서 잠도 잘 자게 되고 음식도 잘 먹게 되었다. 그의 가장 큰 변화는 얼굴에 나타났다. 미소를 되찾은 것이다. 록펠러가 건강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였다. 그는 무심코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귀를 보게 되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나니.”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울림이 생기면서 눈물이 났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고,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선사업을 위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규사업을 벌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많은 권한을 임원들에게 넘기는 작업을 착수했다. 나아가서 그는 자선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록펠러가 자선사업을 전개하기로 결심을 굳힐 무렵, 미국사회에서는 스탠더드 오일의 트러스트를 해체시키라는 압력이 거세졌다. 스탠더드 오일은 유전, 정유소, 탱크차 제작소, 총 20만 킬로미터의 파이프라인, 100여 척의 유조선 선단, 해외 보급로까지 갖춘 회사로서 가장 경쟁력이 높고 시대를 앞서가는 회사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스탠더드 오일을 여전히 자본을 독점하는 독점재벌로 보고 있었다. 1890년, 의회는 ‘셔먼 반(反)트러스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기업 트러스트는 물론 생산, 판매, 무역 거래에서 모든 조직을 금지하고 있었다. 1892년, 오하이오 주 법원은 스탠더드 오일의 오하이오 자회사 트러스트에서 탈퇴할 것을 명령했다. 록펠러는 세계 시장을 100% 지배하겠다는 꿈이 지나치게 높은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의 꿈을 접었다. 대신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 못잖은 또 다른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그는 위대한 자선사업의 트러스트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석유산업을 지배했던 방법을 자선사업에도 적용하기로 작정하고 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자선사업과 기업경영을 접목시키면 자금을 절약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좋은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자선사업이야말로 협동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자본주의 비판 세력들은 정부가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록펠러는 정부가 부를 공정하게 재분배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자선사업으로 재산을 지혜롭게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선사업을 주관할 엄청난 규모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맨 처음 교육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1903년 ‘일반교육위원회’를 창립했다. 이 위원회는 전국적인 규모의 교육 사업을 펼쳤는데, 약 1억 3,000만 달러에 달하는 록펠러의 기부금으로 수천 개의 고등학교, 농업학교, 의대 등을 지원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업은 미국의 전문 의학 교육을 개혁하고 표준화한 것이었다. 특히 24개의 종합대학을 후원했는데 존스홉킨스대학, 예일대학, 하버드대학, 컬럼비아대학, 시카고대학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록펠러는 사업에서 보여준 놀라운 천재성과 성취력을 자선사업에서도 발휘하기 위해 우선 구상 단계에서부터 많은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했는데, 그 중에는 38세의 프레드릭 T. 게이츠 목사도 있었다. 뉴욕 토박이인 게이츠는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된 사람으로 준수한 외모에 감정이 풍부하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1891년 3월, 록펠러는 시카고대학을 후원하기 위해 결성된 침례교회 전국 지도부 모임에서 게이츠를 처음으로 만났다. 논리적이면서 활달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 사무실로 그를 초청했던 록펠러는 게이츠야말로 자신이 앞으로 벌이고자 하는 자선사업을 관리해줄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석 달 뒤, 게이츠는 록펠러가 벌이는 자선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게이츠는 가장 먼저 록펠러에게 록펠러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를 설립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록펠러에게 인류애를 위한 사업에는 시간과 장소, 법의 제약이 없으며, 스스로 영구히 지속되는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점점 커져가는 독점자본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록펠러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록펠러는 그 의견에 동의했고, 그 첫 번째 결실로 1901년 미국 최초의 의학연구소인 ‘록펠러 의학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록펠러 의학연구소는 존스홉킨스대학 의학부에서 최초로 정규직 교수의 완전 고용제를 지원해서 미국 내의 기초의학연구 기반의 확립에 기여했다. 또 연방정부 사회위생국을 20년간 장기 지원하기로 함으로써 실험의학을 기반으로 하는 기초의학을 강화시켰다. 동시에 이 연구소는 황열병의 백신과 소아마비․폐렴 백신을 개발하는 등 중요한 의학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연구소의 중요한 성과는 치료제의 개발뿐만 아니라 공공의료 보건 활동의 전개에서 세계적으로 선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록펠러 연구소에 몸담은 의사들 중 19명이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연구소의 진가를 세계에 알렸다.
1911년 미국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해체를 결정했다. 하지만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해체는 묘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주주들이 각자의 지분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사상 최초로 월스트리트에서 거래되기 시작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의 주식이 유례없는 상종가를 쳐서 이전의 트러스트의 가치를 극적으로 부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음으로 스탠더드 오일 계열의 주식을 살 수 있게 된 일반 시민들이 오히려 스탠더드 오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의 주식가치는 5개월 만에 4배로 늘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2억 달러였던 록펠러의 총재산은 트러스트 해체 이후 10억 달러를 넘어서게 되었다. 록펠러는 이제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Ⅴ. 완전한 믿음
록펠러는 평소 여행을 좋아했지만, 그 무렵에는 로라의 건강 때문에 거의 집에서 아내와 함께 지냈다. 록펠러 의학연구소와 일반교육위원회의 일은 게이츠 목사와 아들 록펠러 2세에게 맡기고 록펠러는 그야말로 여유 있는 은퇴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는 로라에게 책을 읽어주고, 정원도 개조해서 더 많은 꽃을 볼 수 있게 했다. 또 손자, 손녀들을 불러들여서 정원 가꾸는 법을 가르치거나 용돈을 나누어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면서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록펠러는 뉴욕, 클리블랜드, 플로리다, 메인 주의 실 하버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 뉴저지의 레이크우드에 ‘골프하우스’라고 이름붙인 별장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낼 준비를 했다. 로라의 건강이 악화되자 록펠러 부부는 겨울을 나기 위해 플로리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50번째 결혼기념일과 로라의 75번 째 생일을 맞았다. 이듬해 1915년 3월 12일, 로라는 76세의 나이로 록펠러의 곁을 떠났다. 록펠러는 오랫동안 아내의 평화롭게 잠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록펠러는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서 7,400만 달러를 기부해 ‘로라 스펠먼 록펠러 기념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록펠러가 기부한 기금으로 교회와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을 주로 했고, 나중에는 록펠러재단에 합병되었다. 록펠러는 두 재단에 총 5억 3,0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했는데, 그것은 전 재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산소 호흡기를 사용한 날 록펠러는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느꼈고, 이제 자신에게도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55세 때 처음으로 맞이했던 죽음의 공포, 그리고 그때 자신이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가 떠올랐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주셨고, 그는 건강한 몸으로 43년을 더 살면서 세계 최고의 자선사업가라는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록펠러는 아내의 얼굴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제 죽음의 천사가 자신에게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그동안 저의 약한 부분을 감싸주시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돌보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제 마음에 숨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하나님 아무것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지켜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도를 마치고 록펠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내 안에 숨은 사람’을 마주보았다. “여보, 이제 내가 당신을 만나러 떠나려고 하고 있소. 그 동안 너무 오래 당신과 떨어져 있었던 것 같구려.” 록펠러의 98번째 생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1937년 5월 22일, 그는 이따금 산소 호흡기를 대고 있어야 했지만 정신은 아주 맑았다. 저녁 무렵 록펠러는 간호사에게 몸을 좀 더 높이 일으켜달라고 부탁했고, 간호사가 몸을 일으켜주자 이렇게 말했다. “음, 훨씬 좋군.” 그리고 그는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을 때 그는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새벽 4시 5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인 백 살까지는 살지 못했지만 세계 최고의 부자요, 세계 최고의 자선사업가라는 두 인생을 멋지게 살았다. 또한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1세기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마침내 평화롭고 조용한 죽음을 맞았다. 그가 땅에 묻히던 날, 스탠더드 오일 본사는 물론 미국 전역과 세계의 수많은 관련 기업들이 일제히 5분 동안 일을 멈추고 묵념을 했다. 한 때는 독점자본가의 표상으로 비난도 받았지만, 이제는 최대의 자선가요 인류의 은인으로 칭송받는 사람을 위한 묵념이었다. 록펠러는 자선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네 개의 대규모 비영리 기관을 운영해왔다. 즉 록펠러 의학 연구소, 로라 스펠먼 록펠러 기념재단, 일반교육위원회, 록펠러 재단이다. 록펠러 재단은 1913년에 설립되었다. 록펠러 재단이 내건 주요한 과제는 기아 근절과 인구문제의 해결, 대학의 발전, 미국 내의 기회 균등 및 문화적 발전으로써 이 재단은 인류 역사에 남을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설립 이후 무려 20억 달러 상당의 자금을 전 세계 수천 명의 수혜자에게 제공했으며, 1만 3,000명이 넘는 록펠러재단 특별연구원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 연구원들은 그들의 활동을 통해 록펠러재단을 빛냈다. 록펠러재단의 대부분의 사업은 건강 분야에 집중되었고, 당시 성장분야였던 정신과학과 분자 생물학, 유전학이라는 신생학문의 정착을 후원했다.
록펠러재단의 연구 후원 전략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재단은 대학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대학의 기초연구에 대한 ‘천사 투자자’역할을 자임했다. 기초연구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에 의해 당시 일반적이던 개별 과학자 단위의 연구보다는 집단적인 팀 연구와 학제 간의 협력연구를 유도했다. 이처럼 입체적인 과학 지원 활동의 직․간접적인 수혜자 가운데는 170여 명에 달하는 노벨상 수상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게이츠 목사는 언젠가 이 단체가 스탠더드 오일보다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 예견했고, 그 예언은 들어맞았다. 재단은 록펠러 가문을 세계에서 자선을 가장 많이 베푼 세계 제일의 명문 가문으로 만들었다. 그의 자손들은 100년 이상 경영․자선․정치․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21세기에 이른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