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증: 1364. [역경의 열매] 정덕환 <1-17> “장애인 평생일터 만들라는 비전 주신 하나님”
유도 유망주서 사고로 바뀐 인생… 가시밭길 이겨낸 힘은 주님 향한 믿음
에덴복지재단 이사장실에서 자신의 살아온 간증을 하고 있는 정덕환 장로. 70세의 나이지만 누구보다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다. 파주=강민석 선임기자“주여, 오늘도 성령 충만한 가운데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바른 판단을 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과 행동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새벽 5시 전동휠체어를 타고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향하는 내 입술에서 나지막한 기도가 흘러나온다. 오늘 하루, 주님은 또 무슨 일들을 내게 맡기시고 이루게 하실까. 마음이 설레고 또 기대가 된다.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살리시고 모진 고통과 가시밭길을 걷게 하신 주님이셨다. 그리고 그 시련의 나날 속에서 그나마 놓지 않은 한 가닥 끈이 있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끈은 기도로 이어지며 오늘의 장애인근로사업장 ‘에덴하우스’와 중증장애인 사업장 ‘형원’ 등 11개 시설, 496명의 직원을 수용한 사회복지법인 에덴복지재단을 이루게 하셨다.
또 지난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비전을 새롭게 받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것은 중증장애인의 고용을 대폭 확대해 평생직장으로 만들어 주자는 ‘행복공장만들기 운동본부’를 발족한 것이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보살핌과 시혜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이 땅의 250만 중증장애인들에게 땀 흘려 일하는 노동현장을 제공함으로써 그 삶이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중증장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숱한 아픔과 고통들을 이제는 더 이상 겪지 않길 계속 기도하고 있다.
내 삶은 ‘엄청난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운동선수로 지내다 코치나 체육대학 교수를 지낸 뒤 은퇴해 조용히 노후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 만 70세지만 내 의식과 생각은 젊고 생기가 넘친다. 의욕과 투지에 불타고 있어 정상인보다 더 많은 스케줄과 강연, 업무를 소화해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주시는 힘이요, 은혜요, 능력이 아닐 수 없다.
한때 하나님이 살아계시느냐고 원망하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던 나였다. 참으로 부끄러운 나의 모습으로 기억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역사하신다.
이 놀라운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까지 나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혼돈의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 나눔으로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확인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서울 보문동에서 운수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동네에서 유명한 개구쟁이였다. 사고를 쳐도 막내라 쉽게 용서받아서인지 뭐든 내 맘대로였고 취미는 운동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 종목부터 구기, 투기 종목까지 못하는 게 없었다.
중학교 입학 당시 큰 형이 경동고 유도선수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 동대문체육관에서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대문체육관은 대한체육회장이던 민관식씨가 유능한 선수 양성을 위해 운영하던 곳이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유도는 아무리 연습해도 질리지 않았다. 나는 매력적인 유도에 한없이 빠져들었고 운동신경이 발달하고 체력이 좋아 유도 유망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 "장애인 평생일터 만들라는 비전 주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정덕환 <2> 유도 시합서 승승장구… 영국팀 코치로 초청받아
* [역경의 열매] 정덕환 <3> 유도 대련하다 목뼈 골절… 생명 건졌으나 전신마비
* [역경의 열매] 정덕환 <4> 재활훈련 8개월 만에 처음 스스로 일어나 앉아
* [역경의 열매] 정덕환 <5> 장애인의 현실적 어려움 탓 아내와 잦은 언쟁
* [역경의 열매] 정덕환 <6> "현실에 만족 말고 하나님 주신 사명 찾아보자"
* [역경의 열매] 정덕환 <7> 지하실 빌려 전자부품 조립 '장애인 공동체' 세워
* [역경의 열매] 정덕환 <8> 장애인들 삶의 터전 '에덴복지원'서 쫓겨나
* [역경의 열매] 정덕환 <9> 일거리 늘면서 에덴복지원 80여명 대식구로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0> 눈치 안보고 일할 우리들의 공장·기숙사 완공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1> 비닐봉투 사업, 일은 많은데 결산하면 '적자'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2> 한경직 목사님 도움으로 에덴하우스 법인화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3> 장애인 '연애 사업' 적극 지원… 50쌍 넘는 부부 탄생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4> 에덴재단 성장 뒤에는 아내의 기도와 헌신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5> '장애인 희망 직장 1위는 에덴'이란 말에 뿌듯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6> "장애인 자활의 꿈이 나를 지탱해준 힘"
* [역경의 열매] 정덕환 <17·끝> "장애인 고용 기반 '행복공장' 확산에 더욱 헌신"
◇정덕환 회장 약력=1946년 서울 출생, 1972년 연세대 재학 중 사고로 전신마비지체장애 1급 판정, 1983년 에덴복지원 설립, 현 에덴복지재단 이사장, 에덴선교회 회장, 한국장애인직업재활시설협회 회장, 행복공장만들기 운동본부 회장, 에덴선교교회 장로.
***[역경의 열매] 정덕환 <2> 유도 시합서 승승장구… 영국팀 코치로 초청받아
유도에 관한 한 최고라고 으스댈 때는 내게 닥쳐오는 엄청난 사건 미처 몰라
유도에 막 입문했던 중학교 3학년 때 운동하던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정덕환 장로(뒷줄 가운데).열심히 유도장을 다닌 나는 인정받을 기회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유도 기량이 빠르게 성장해 전국 유도사설도장 대항전에 출전하게 됐다. 각 도장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 2명씩 뽑아 리그전을 치르는 것인데 중학교 3학년인 내가 이 대회에 처녀 출전해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결승전에서 맞붙은 상대는 경희대 체육학과 대학생이었는데 그도 내게 업어치기 한판으로 패배를 당했다.
민관식 관장과 나를 지도한 김종천 사범은 크게 기뻐하며 내가 유도인의 길을 걷는 데 도움을 주셨다. 당장 소공동에 있던 대한유도회 도장에 나가 연습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곳엔 한국 유도계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의 기량도 이곳에서 다듬어졌고 당시 유도 명문고인 성남고에 특기생으로 스카우트됐다. 성남고 유도부 주장을 맡아 전국 대회에서 연전연승하던 나는 종주국 일본으로 건너가 가진 시합에서도 모든 상대를 가볍게 이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고교 3학년 때 이미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선발됐다.
각 대학에서는 나를 특기생으로 입학시키기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했는데 난 망설이지 않고 고교 선배들이 많이 간 연세대를 택했다. 연세대 사학과 66학번 입학생이 된 나는 성격도 활발하고 리더십도 있었던 터라 총학생회 임원도 맡았다. 유명한 연고전이 있을 때면 온통 내 세상을 만난 양 활개를 치고 다녔다.
대학 2학년 때인 1967년 일본 관서지방 유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7전 전승으로 우승해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나의 주특기는 ‘왼쪽 낮은 업어치기’로 누구든 여기에 걸리면 여지없이 한판승으로 져야 했다.
당시는 보통 대학 2, 3학년 때 군대를 다녀오는 게 관례라 나 역시 2학년 말에 육군에 입대했다. 국가대표였기에 육군본부 소속 유도선수로 계속 운동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군생활을 하던 1969년 24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무렵은 그리 이른 나이도 아니었다. 신부는 디자인을 공부하던 김순덕이란 자매였는데 21세였다. 내가 누나와 통화한다고 하는 것이 전화를 잘못 걸어 전혀 모르는 여성과 연결이 됐고 내 전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동생을 소개해준 것이다.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까지 태어나자 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한국에는 아예 상대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당시 누나와 매형이 영국에 살고 있었는데 매형의 연락을 받았다.
“처남, 한국에만 있지 말고 영국에 와서 한국유도를 알리면 어떨까. 내가 영국유도회 회장인 팔머씨를 만났는데 실력파인 처남만 좋다면 영국에 와서 유도 코치를 맡아 달라고 했거든. 숙식 등 모든 체재비는 여기서 책임지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좋은 조건인 것 같아.”
나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영국에 다녀와 유도 지도자의 길을 걷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겠다고 승낙한 나는 1973년 3월 출발하기로 날짜까지 잡았다. 난 이제 국제적인 유도 지도자가 되어 돌아올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유도에 관한 한 최고라고 으스대며 목을 곧추세웠던 내게 엄청나고도 가혹한 사건이 기관차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1972년 8월 1일의 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3> 유도 대련하다 목뼈 골절… 생명 건졌으나 전신마비
무더위에 등창 생겨 전신에 고통… 어머니·아내 “함께 예배 드리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고 치료하던 때의 정덕환 장로. 얼굴 이외의 모든 부분을 쓸 수 없는 전신마비였다.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대한유도회가 주최하는 특별훈련에 참석하느라 명륜동 도장을 찾았다. 며칠 후엔 후배들과 바닷가로 피서를 떠날 계획을 세워 마음이 즐거웠다.
몸을 푼 뒤 대련에 들어갔다. 내 짝은 1년 선배 김영환 선수였다. 나와 체급도 같고 시합도 같이 출전해 거의 친구처럼 지냈다. 둘이 붙으면 실력이 막상막하여서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틈을 엿보던 나는 장기인 낮은 업어치기로 육중한 그의 몸을 들어 매트에 내던졌다. 이제 그는 허공을 날아 쿵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그런데 그 쿵 소리 대신 내 입에서 ‘윽!’ 하는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멀리 떨어지지 않고 육중한 몸이 내 얼굴 위로 엎어지면서 나의 목을 꺾어버린 것이다. 희미한 의식으로 웅성거림과 함께 누군가가 “목이 부러졌다”란 큰 소리가 들렸다. 난 순식간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널브러졌다.
몸에 목이 짓눌러지면서 목뼈가 부러진 것이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경추 4번 5번이 골절, 탈골된 것이다. 정신은 있는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나는 횡격막 장애로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이 헐떡거렸다. 목이 부러지면 죽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급히 달려온 의사가 내 목을 두 손으로 빼니 ‘뚝’ 소리를 내면서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숨은 좀 쉬어지는데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의사는 호흡이 고르지 않고 상태가 중해 3일 이내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 있음을 아내에게 선고했다. 아침에 네 살 아들 재권이의 재롱을 보며 즐겁게 집을 나섰던 내가 불과 몇 시간 후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신경외과 팀이 달려들어 머리를 깍고 추를 매단 뒤 바로 수술을 시작하려했는데 열이 40도까지 올라 수술이 안 된다고 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병실로 들어온 간호사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목 아래 전신마비로 나는 배설한 것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말로만 듣던 ‘식물인간’, 바로 그 주인공이 내가 된 것이다. 난 몇 번이나 이것은 꿈일 것이라 여겼지만 생생한 현실이었다.
열이 내려 대수술을 했다. 이제 목숨은 건졌다고 했지만 고통은 이제부터였다. 여름이라 금방 등창이 생겨 살이 썩기 시작했고 온 전신의 통증이 나를 24시간 괴롭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내는 초주검 상태로 나를 간호했지만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우리 집은 불교집안이었다. 난 이 때까지 교회란 곳을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절에 놀러 삼아 자주 가곤 했다. 연세대가 미션스쿨이니 학점 때문에 채플에 몇 번 참석은 했지만 기독교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종교였다.
그런데 이 전신마비의 몸이 되니 만약 신이 있다면 나를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몇 번이나 마음으로 울부짖었다. 가끔 찬양단이 병실로 들어와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해주는데 전혀 마음의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내저으며 쫒아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는 내가 고통스러웠다.
이 무렵 어머니가 먼저 교회에 나가셨고 현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던 아내도 무엇인가에 의지하고자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합동으로 내게 하나님을 전했다.
“여보, 당신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함께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어.”
남편을 돌보느라 심신이 피폐해진 아내가 전하는 복음, 그것을 차마 거부할 수는 없었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4> 재활훈련 8개월 만에 처음 스스로 일어나 앉아
병실서 아내가 읽어주는 성경 들으며 기적같은 치료 효과에 기도응답 확신
불의의 사고가 나기 전 아내와 행복했던 한 때. 아내는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인 뒤 정 장로를 전도하고 집안의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졌다.아내가 잔잔한 목소리로 내게 성경을 읽어주었다. 찬송가도 불러주었다. 아내의 목소리가 이렇게 낭랑하고 좋았는지 새삼스러웠다. 건강하게 몸을 움직이고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감사한지 병실에 갇힌 다음에야 새삼 깨달았다.
아내가 고린도전서 10장 13절 말씀을 읽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도움을 받아 이 시험을 감당하고 치료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난 그때까지 물리치료도 안 받겠다고 거절하다가 성경 말씀에 마음을 돌려먹었다. 내 의지로 이제 몸을 움직여보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남을 넘겨 쓰러뜨리고 두 손을 번쩍 들었던 내가 이제 내 몸을 일으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뿌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도와주세요. 제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 27세 한창인 제가, 아내와 아들까지 있는 제가, 누워만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난 새벽 5시에 눈을 떠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이라야 몸을 일으켜 앉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하루에 세 번, 한 시간씩 운동했다. 당시 세브란스물리치료실에는 캐나다에서 온 구애련 선교사가 있었다. 구 선교사는 나의 말초신경을 회복시키기 위해 정성을 다해 내 손을 만져주면서 기도해 주었다. 항상 밝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아 정신적으로도 큰 의지가 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나의 불타는 의지가 도무지 소생할 것 같지 않았던 나의 손을 조금씩 움직이게 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손을 들 수도 감촉도 없던 내가 변화를 보이니 의료진도 환호성을 질렀다.
손의 기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나는 용기를 얻어 이번엔 일어서는 연습에 도전했다. ‘스탠딩 밸런스’라 불리는 이 재활훈련은 서서 3분을 있어야 했는데 누워만 있던 사람이 서니 피가 밑으로 흘러 금방 피부가 퍼렇게 부풀어 올랐다.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 일어나 앉을 수 있어 너무나 기뻤다. 그런데 구 선교사는 이런 내게 숟가락과 죽 그릇을 갖다 주면서 혼자 떠먹어보라고 했다. 반은 흘리며 죽을 떠먹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전신마비로 평생 손도 못쓸 줄 알았던 내가 아내와 어머니의 기도, 구 선생의 헌신적인 재활치료, 나의 의지로 간신히 손까지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어 휠체어 타기까지 성공한 나는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신앙생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말렸지만 가족들과 택시를 타고 당시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도집회에 며칠간 참석했다. 메시지를 통해 크게 은혜를 받았고 신유기도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병원에서는 이제 내게 더 이상 해줄 게 없다며 퇴원을 종용했다. 그나마 병원에 있어야 재활치료를 받으며 편의가 제공돼 버텼으나 결국 휠체어를 탄 채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는 보험이나 보상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 당장 생계가 문제였다.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거나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나였기에 아내가 가장노릇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파출부나 점원, 잡일 정도였고 그나마 열심히 일해도 온 식구가 밥 먹기도 힘들었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5> 장애인의 현실적 어려움 탓 아내와 잦은 언쟁
영적으로 성숙한 아내 덕에 위기 넘겨… 동네서 구멍가게 운영하며 숨통 트여
기도원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후 이화식품을 운영할 때 가게 안에서 활짝 웃고 있는 정덕환 회장.아내는 결혼 전에 배운 양재기술로 삯바느질을 했지만 나는 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냥 밥만 축내며 지낸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일부러 휠체어를 타고 무작정 밖을 쏘다녔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자신에게 뭘 달라고 할까봐 기겁하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척추장애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후배들이 유도 연습하는 연세대 도장을 찾아 지도해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후배들이 좋아해 두 달간 신나서 매일 나갔는데 어느 날, 행정적인 문제가 있으니 이제 그만 나와 달라고 공식 통보를 받았다.
연세대 캠퍼스 백양로를 휠체어를 타고 내려오는데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다시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를 한 대 사서 수입상품을 떼어다 파는 일에 도전했다. 수입이 꽤 괜찮아 제대로 해보려고 했더니 이번엔 정상인이 그 일을 가져가 버렸다.
나는 분노하면서 이제 교회도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부터 냈다. 나는 교인이라고 해도 다듬어지지 못한, 하나님을 바로 만나지 못한 엉터리 신앙인이었다.
“여보.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나랑 기도원에 함께 가서 하나님을 만나요. 저도 이젠 더 이상 못 기다리겠어요.”
아내와 나는 천마산기도원을 찾았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내가 주님을 만나야 한다며 준비기도를 일주일간 했고 신앙이 뜨겁던 누님도 내게 10만원을 보내주며 꼭 은혜를 받고 오라고 하셨다. 천마산기도원의 예배모습은 내게 이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성령으로 충만해 기도하는 모습과 방언을 하거나 병이 보는 데서 낫는 것 등은 내겐 신세계였다. 이천석 목사님이 방언을 받고 싶은 사람은 오후 3시에 오라고 해서 찾아갔다.
목사님이 한 사람씩 안수기도를 해주는데 다른 사람은 바로 방언을 하는데 난 방언이 나오지 않았다. 더 기도하라고 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내게 오더니 나를 끌어안고 함께 기도하자며 기도해 주기 시작했다. 얼마를 기도했을까 드디어 내 입에서도 방언이 터지며 회개의 눈물과 감사의 기쁨의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난 몇 시간은 기도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를 얼싸안고 기도해준 이는 남자고등학생이었다.
“오신 날 휠체어를 타고 계셔서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방언을 원하시는데 못 받고 계시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제가 기도했어요.”
이 학생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때 맞춰 보내주신 것이 분명했다. 난 이날부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아내는 “당신을 위해 6년이나 눈물로 기도해 왔다”며 “드디어 당신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아내도 이번에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기도의 문이 열려 새로운 영적세계를 체험하게 되었다. 부부가 큰 은혜를 얻고 기도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니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강한 시험이 다가왔다. 은혜 뒤엔 시험이 온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먼저 아내와 충돌하고 언쟁이 잦았다. 아내만 보면 화를 냈다. 아내도 참다가 한 번 화를 냈는데 난 아예 가출을 해 버렸다. 내가 더 잘못하고 집까지 나오자 처가에서도 화가 났고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이혼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영적으로 더 성숙한 아내였다. 아내의 인내와 기도가 자칫 가정이 깨어질 위기를 넘기게 만든 것이다. 연단을 잘 이겨낸 우리 부부는 1979년 서울 구로동 이화아파트란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동네 입구에 ‘이화식품’이란 구멍가게를 냈다. 가게를 지키며 물건만 팔면 되니 내게 가장 적합한 일이었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6> “현실에 만족 말고 하나님 주신 사명 찾아보자”
병원 찾아다니며 환자들에 간증·전도… 장애인 삶을 양지로 끌어내기로 다짐
이화식품을 운영하던 시절, 큰아들 재권이가 열두 살 아래 동생 재성이를 안고 있다.잡화를 파는 이화식품은 문전성시였다. 나에 대한 소문도 어떻게 퍼졌는지 일부러 찾아주는 주민도 있었다. 아내는 여전히 삯바느질을 하면서 교회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이런 우리 부부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하반신을 쓸 수 없지만 재활 의지와 노력으로 손까지 쓸 수 있게 된 내가 둘째 아들을 얻은 것이다. 이웃 사람들이 더 놀라워했다.
나는 이것이 분명 하나님이 우리 부부에게 주신 선물이고 기적이라고 믿었다. 사연은 이렇다.
우리는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으로 이사한 뒤 구로중앙교회에 출석했다. 1980년 첫 달부터 아내는 교회 철야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해 기도를 했는데 마지막 주간 기도 가운데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여보, 집에 예쁜 흰 꽃이 피는 것을 보며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제게 임신을 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내가 깜짝 놀라서 내게 한 말이었는데 그것이 정말 현실로 이뤄진 것이다. 우리 부부가 합심으로 기도한 덕이기도 했지만 내가 열심히 운동해 체력을 기른 결과, 얼마 전부터 부부생활이 가능해진 결과였다. 아내가 임신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믿음이 약한 나는 노심초사했다. 난 여전히 휠체어에 의지하는 장애인이니 아이도 혹시 장애아로 태어나지는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둘째 재성이는 염려와 달리 건강하고 튼튼하게 태어나 우리를 기쁘게 했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선물을 주시고 가게도 잘되게 해 주시니 내가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목회자가 안 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려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아내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나는 둘째도 태어나고 했으니 재정적으로 안정을 얻어야 하는데 잘되는 가게를 그만둘 수 없지 않느냐며 반대했다. 그리고 가게 일에 더욱 열심을 냈다. 가게가 안정을 찾을 무렵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선물을 많이 주셨는데 이렇게 가게만 운영하며 현실에 만족해야 할 것인가. 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이 있을 것인데 그 일을 기도하며 찾아보자.”
가게는 직원을 하나 구해 맡기고 교회 출석을 열심히 하면서 병원 등을 찾아다녔다. 나의 간증을 들려주며 실의에 빠진 환자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난 대중교통을 탈 수 없으니 삼발이 오토바이를 한 대 사서 직접 운전하며 병원을 찾아다녔다.
“난 사고로 목 아래 전신마비가 되었다가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많이 건강해져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낙심하지 마시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특히 척추를 다쳐 반신마비가 된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에 큰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일부러 나를 찾아와 확인하고 이야기를 듣는 이들도 있었다. 하루는 인천에 산다는 한 장애인을 만나러 갔다. 작은 월세방에서 어머니가 행상으로 벌어오는 돈으로 끼니를 잇는다는데 용변도 처리하지 못하니 방안에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밖에 해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나는 이 형제에 비하면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었다.
“중증장애를 가진 것만으로 평생 방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들이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최소한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불구를 숨기고 싶어하는 부모나 형제 때문에 장애인들이 더 나약하게 살아가는 것 같았다. 난 이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 주고 싶었다. 찾아보면 장애인도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응답을 받았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7> 지하실 빌려 전자부품 조립 ‘장애인 공동체’ 세워
5명 시작 30여명 ‘에덴하우스’로 성장… 방송 소개 뒤 전국서 동참 문의 빗발
삼발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자부품 납품과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때의 정덕환 장로.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던 내가 응답받은 곳은 5명이 모여 사는 장애인공동체였다. 한 집사님의 소개로 찾아갔는데 정부의 보조금 없이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며 지내고 있었다. 너무나 불쌍해 집에 있던 먹을 것을 수시로 공급하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며 전도도 했다. 자연히 이곳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언제까지 장애인이란 이유만으로 도움만 받고 살아갈 것인가. 장애인도 일을 해서 수익을 내는 장애인공동체를 한번 만들어보자. 우리도 일할 수 있음을 사회에 보여주자.”
난 과감히 공장이 많이 밀집돼 있는 서울 구로구 독산동의 한 허름한 건물 지하실 한 칸을 얻었다. 이곳에 ‘에덴하우스’란 간판을 걸었다. 비록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장소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이곳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국, 에덴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곳에서 장애인이 두 손만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전자부품 조립을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의욕이 넘치는 투지는 일감을 찾으러 다니면서 여지없이 꺾였다. 하청을 주는 곳, 우리가 할 수 있을 정도의 일감이 있는 공장을 찾아 갔지만 모두 문전박대를 당했다. 장애인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불량품이 나오면 그 손해는 누가 감당하느냐고 고개를 저어버리는 통에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
어쩌다 나를 불쌍히 여겨 일을 맡겨주기도 했는데 이번엔 우리 장애인이 문제였다. 정상인이 할 수 있는 작업량의 30%도 못했고 또 인건비도 너무 낮아서 일만 하는 것이지 생활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의 주특기는 지구력, 즉 끈기다. 이 끈기로 유도 국가대표선수를 했고 이 끈기로 고된 재활훈련을 이겨내 삼발이 오토바이라도 타고 있는 것이었다. 난 매일 눈만 뜨면 전자부품업체들을 찾아다니고 또 다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한 전자업체가 일감과 가격을 넉넉히 맡겨주는 일이 일어났고 우리가 열심히 납기일에 맞춰 일을 해다 주자 더 많은 일감을 주었다. 우리는 장애인을 더 고용해야 했고 나중엔 30여명이 함께 일하는 에덴하우스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집에서 놀며 밥만 축낸다고 미움을 받던 장애인들이 이곳에 와서 봉급까지 받으며 지내니 부모들 입장에선 내가 보통 고마운 존재가 아니었다. 한 차례 위기가 닥쳤다. 우리가 임대한 건물주가 파산, 건물이 넘어가는 바람에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거리에 나앉은 것이다. 집달리들이 기계와 가재도구를 강제로 내놓아 원생 30여명이 길거리에 쭈그리고 있어야 했다. 사회에서 냉대와 멸시를 받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으려는데 거리로 내몰려 버린 것이다.
난 내가 살던 아파트를 담보로 1000만원을 대출받아 구로동 165㎡(50여평)의 월세 건물을 임차했다. 복층이라 내부를 개조해 기숙사와 예배실도 만들었다. 컴컴한 지하실만 있다가 나오니 직원들이 너무나 좋아했다. 궁전이 부럽지 않은 우리 집이었다.
우리의 장애인 작업공동체가 기독교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게 됐는데 전국에서 장애인들이 함께 지낼 수 없느냐고 문의가 빗발쳤다. 무작정 찾아오기도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장애인들이 일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문제는 이들을 수용할 공간도 없지만 일감도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난 에덴공동체 식구들에게 영적재활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확고한 신앙관을 심어주는 것을 1순위로 삼았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8> 장애인들 삶의 터전 ‘에덴복지원’서 쫓겨나
원생 40여명 “일감을 달라” 합심 기도… 건물주인 부도 내 건물 경매로 넘어가
직원이 40명으로 늘어난 서울 구로동 사무실에서 전화로 하청업무를 보고 있는 정덕환 장로.장애인들만 모여 일하는 에덴복지원은 인원이 늘어나면서 문제도 많이 일어났다. 중증장애인이 많아 수시로 병원으로 실려가는가 하면 일거리가 떨어지고 수입이 줄면 금방 식량도 떨어져 나를 조마조마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편이셨다.
우리가 매일 아침 모여 드리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셨기 때문이다. 추위에 겨울 날 일을 걱정하고 있으면 독지가가 나타나 보일러를 놔주었고 쌀이 떨어질 때가 되면 누군가 쌀가마를 갖다 놓았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장애인들이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힘이 되어 주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는 단순한 일감만 받아야 했고 그러니 수공비도 작았다. 그나마 경기가 안 좋으면 일감이 떨어져 원생들이 두 손을 놓고 있어야 했다. 내가 주로 일감을 따와야 했기에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의 비밀’을 깨달았다.
일감이 떨어지면 전 원생이 뜨겁게 ‘일감을 달라’고 합심해 기도하고 나가면 이름도 모르는 분이 찾아오거니 좋은 분을 우연히 만나게 돼 ‘일감’이 생기곤 했기 때문이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처럼 ‘뚝’하고 떨어졌다.
에덴복지원은 원생이 점점 늘어 40여명이 되었다. 당시 장애인만 고용해 이 정도 규모를 가진 곳은 우리밖에 없었다. 나는 이들에게 내가 체험한, 그리스도 복음을 통한 삶의 의미와 감사를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예배와 수요예배, 주일예배를 드리고 저녁에도 기도회를 가졌다.
“여러분. 우리가 지내는 이곳이 협소하고 일도 힘들고 불편한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매사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바로 이곳이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과 뜻이 있음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기도합시다.”
모든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하고 판단하고 처리하려니 너무 힘든 부분도 있었다. 이럴 때마다 장애인공동체 에덴복지원을 만들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을 갈 걸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미국에 계신 형님이 주선해 장애인재활 공부를 할 수 있는 미국의 학교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유학 대신 장애인과 함께 살 것을 선택했다.
빨랫감만 잔뜩 갖고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와 얼굴만 비치는 나를 그나마 아내가 이해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장애인을 돌본다는 것을 아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음지에만 있던 장애인들이 모여 일을 한다니 매스컴에서 앞 다투어 우리 에덴복지원을 보도했다. 당시 인기 TV프로였던 ‘11시에 만납시다’란 토크 프로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분장실에 도착해 녹화를 준비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원장님. 큰일 났어요. 이 건물이 사흘 후 철거되니 우리가 이 건물에서 나가야 한대요.”
건물주인이 부도를 내어 건물이 경매에 넘어간 것은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보증금도 없이 쫓겨날 신세가 될 줄 몰랐다. 이 많은 인원이 이제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앞이 캄캄했다. 녹화를 마치고 돌아와 대책을 논의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사흘 후 정말 집달관이 철거반 20여명을 데리고 와 우리가 쓰던 모든 집기와 살림, 기계를 밖으로 들어냈다. 4월이었지만 밤공기는 차가왔다. 우린 피란민처럼 모닥불을 피우고 밥을 해 나눠먹은 뒤 길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하나님이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9> 일거리 늘면서 에덴복지원 80여명 대식구로
일하고 번 돈으로 자립 행복 누려… 개봉동 땅 구입해 직접 시설 짓기로
경기도 파주 ㈜형원 공장에서 정덕환 장로와 직원들이 함께했다. 오른쪽 두 번째가 홍성규 사장, 왼쪽 두 번째가 박대성 팀장이다.노숙을 하게 돼버린 에덴복지원생들을 위해 구청이며 은행이며 찾아가 하소연했다. 우리가 노숙하는 모습을 본 은행 측이 불쌍해서였는지 단 한 달이라는 조건 하에 다시 지하공장에 들어가 지내도록 허락해 주었다.
난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백방으로 우리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고 간신히 은행 대출을 받아 허름한 단독 2층집을 구했다. 1층은 작업실, 2층은 기숙사로 꾸몄다. 월세지만 좋은 장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 무렵 하나님은 내게 두 명의 귀한 일꾼을 보내주셨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개인의 능력과 달란트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내게 꼭 필요한 분과 때맞춰 손잡게 해주신 것이다.
한 분은 우리 공장 근처에서 공무원시험 공부를 하다 나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찾아온 홍성규씨로 지금 우리 계열 공장인 주식회사 ‘형원’ 사장을 맡고 있다. 그도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지만 특유의 온화함과 탁월한 영업능력으로 오늘의 에덴복지재단을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와 일한 지 벌써 30년이 넘는다. 또 한 분은 손가락 8개를 잃은, 철원 사는 여성 한 분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자신도 무엇인가 의욕적으로 일하고 싶은데 내게 도와달라고 했다. 강원도를 가는 길에 그녀를 직접 만나보게 되었다.
표정이 밝고 두 손가락으로도 뭐든 잘한다고 해 서울로 데려와 사무실 일을 맡겼다. 그녀 역시 지금까지 회사의 모든 공문과 업무를 척척 잘 해내는 일꾼으로 나의 수족이 되어 도움을 주고 있다. 바로 박대성 팀장이다.
어려움을 지난 우리 에덴복지원은 마침 수출이 활성화되는 경제개발 붐을 타고 일거리가 점점 많아지는 특수를 누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일했다. 거의가 휠체어에 앉아 일했는데 등에 땀띠가 나고 엉덩이에 종창이 생겨도 아픈 줄 모르고 일했다.
이제 일거리가 많아지니 일하고 싶어하는 장애인을 더 고용했고 80여명의 대식구가 되었다. 우리는 바쁜 가운데도 틈틈이 모여 휴식하며 찬양을 불렀고 우리끼리 일하고 번 돈으로 자립하고 월급까지 줄 수 있어 모두가 행복했다.
평생 장애인 자녀를 부담으로 안고 살던 부모들은 월급까지 주는 나를 여간 고마워하지 않았다. 나는 수입을 정확히 분배해 일한 만큼 나누려고 노력했다.
또 한바탕 큰 심술이 에덴복지원에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1987년 여름, 태풍 셀마가 북상하면서 비바람을 몰고 왔고 우리 공장 낡은 건물 옆 하수구가 역류하면서 공장 1층이 모두 물에 잠기는 수해를 만난 것이다.
기숙사가 2층인 것이 다행이었다. 나와 직원들은 모두 인근 교회로 대피했고 부품과 작업용품, 기계가 유실돼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우리의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싱마다 황토흙이 들러붙어 태반을 버려야 했다.
“여러분,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그동안 고난을 딛고 일어설 때마다 주님은 우릴 더 크게 성장케 해 주셨습니다.”
이 홍수를 계기로 서울 개봉동에 땅 230평을 사서 직접 에덴복지원 시설을 짓기로 했다. 빚을 내어 땅을 산 뒤 구청의 도움을 받아 기존의 건물을 개축해 사용키로 했다.
그런데 장애인 시설이 들어온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번엔 주민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지역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면 집값에 영향을 주고 자녀교육에도 안 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주민들은 ‘우리 아이는 우리가 지킨다’란 현수막도 걸어 나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10> 눈치 안보고 일할 우리들의 공장·기숙사 완공
경기침체로 은행 경매에 부쳐져… 업종변경 위해 다시 시설 투자
서울 구로구 개봉동 공장에서 일할 당시 휴식시간에 직원들과 밖에서 담소하는 정덕환 장로.장애인들이 열심히 일하며 살아보겠다고 관청의 정식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건축을 하려는 데도 지역주민들은 무조건 반대부터 했다. 공사도 하지 말고 아예 오지도 말라며 길에 드러누워 버렸다. 참 어이가 없었다.
우리 사회가 집단 이기주의가 심하다고 하지만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에 도움을 요청해 주민들을 말리러 온 공무원이 얻어맞아 얼굴을 다치고 돌아갔다. 주민들은 다른 대책도 없이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장애인 복지시설 5곳이 공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곳이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공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관청에서는 민원이 발생하면 알아서 해결하라고 방관을 했다. 그러나 서울 구로구 부구청장은 길에 누운 사람을 업무방해로 경찰에 연행까지 시키며 우리를 도와주었다. 이렇게 몇 번이나 우여곡절을 겪은 후 간신히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드디어 증개축 공장 및 기숙사가 완공됐다. 이곳이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살아도 되는 우리 공장이라고 생각하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우리는 이사를 하고 집을 짓느라 은행에 빚이 많았다.
빨리 열심히 일해 갚아야 하는데 갑자기 경기가 나빠지면서 일거리가 또 뚝 끊겨 버렸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구로공단을 돌고 돌아도 일감이 없다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동안 우리 경제가 저금리 저유가 저환율에 힘입어 고속성장을 하다 브레이크가 걸린 상황이었다. 우리 같은 전자부품 조립업체 타격이 제일 컸다.
자연히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하게 되고 은행은 가차 없이 공장과 땅을 경매에 부쳤다. 원생들 월급도 밀려 원망도 쌓였겠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아 고마웠다. 이로 인해 싸우거나 화를 내지 않았고 떠나는 친구도 없었다.
“주님. 우리 현실 아시죠. 이 어려움을 이길 힘과 용기, 지혜를 주세요. 경매가 낙찰되면 우린 이제 모두 뿔뿔이 흩어져야 합니다.”
매일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그런데 순간 “경기에 민감한 부품조립만 하지 말고 업종을 바꾸면 어떨까”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었다. 직원들을 모은 뒤 우리가 다른 일을 해보자며 아이디어를 내보라고 했더니 빵을 만들어 팔자거나 신발 제작 하청업으로 돌리자거나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쇼핑봉투를 풀로 붙이거나 와이셔츠 상자를 접는 일 등은 일거리는 있었지만 노동에 비해 인건비가 너무 싸 제외시켰다. 그런데 한 직원이 갑자기 ‘비닐봉투’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비닐봉투는 모든 시장에서 또 가게에서 다 사용합니다. 만드는 곳도 많지만 그만큼 수요도 많습니다. 가격은 싸겠지만 장애인이 만들었다고 무시하거나 안 사주는 품목은 아닐 것입니다.”
시장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시장성은 있는데 초기 비닐봉투 제조기계 값이 너무 비쌌다. 직접 가보니 요즘은 공장이 자동화돼 비닐원료만 사다 부으면 비닐봉투가 저절로 제작돼 손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구나 마무리 공정도 단순해 우리 원생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과감히 업종을 변경했다. 시설투자를 위해 또 대출을 받았다. 다행히 재래식 기계를 싸게 판다는 한 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달려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989년 12월 압출성형기 2대와 인쇄기 2대, 가공기 5대가 우리 공장에 설치됐다. 엄청난 모험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11> 비닐봉투 사업, 일은 많은데 결산하면 ‘적자’
시설 자동화 안해 손작업 많아… 장애인 원생 인건비 늘어난 때문
수시로 에덴복지원 공동체를 찾아와 격려해 준 한경직 목사님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정덕환 장로.무리를 해서 비닐봉투 생산기계를 도입한 우리는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장애인이 아닌 기계를 잘 다루는 기술자도 필요해 비장애인도 4명이나 채용했다. 하지만 최대한 장애인들이 공정에 참여하도록 배치했다.
지금까지 전자부품 조립을 받아다 납품하면 개당 수수료를 받는 것이었는데 이젠 생산을 직접 하는 것이니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든 셈이었다. 우리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제품다운 비닐봉투를 만들어 시장으로 갖고 나갔다.
제품을 트럭에 싣고 나갔던 홍성규씨가 한숨을 쉬며 돌아왔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했다. 우리가 만든 인쇄 비닐봉투 제작원가가 시장에서 890원인데, 다른 제품은 750원에 팔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손작업을 해 인건비가 많이 드는데 다른 곳은 모두 자동으로 생산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생들을 놀리고 자동화로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홍 과장, 우리가 힘들어도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되네. 우리의 목적은 돈 버는 것이 아니고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라네. 경쟁이 힘들어도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결국 우리는 제품을 시장에 파는 것을 포기하고 주문을 받아 납품하는 일을 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신문사에서 첫 주문이 들어왔다. 비가 올 때 신문을 배달하면 젖기 때문에 신문을 넣을 길쭉한 비닐봉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기뻤던 나는 정성을 다해 만들었고 이후 조금씩 주문이 늘기 시작했다.
비닐봉투 제작 작업은 시간이 갈수록 기술이 향상돼 인쇄도 선명하고 봉투의 질도 좋아져 소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우리는 신이 나서 시장을 누비며 주문을 받았다. 하루는 직원들과 시장에 나갔다 점심시간이 돼 식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식당에 가면 직원들이 번거로워 식사를 편하게 못하니 난 차 안에서 찹쌀떡을 먹겠다고 했다.
겨울이라 차 안에 히터를 켜고 내가 앉은 자리에 열선을 설치했는데 어디서 타는 냄새가 났다. 그런데 직원들이 돌아오더니 놀라서 황급히 나를 차에서 들어냈다. 열선이 과열돼 내 엉덩이를 태워 화상을 입혔는데도 감각이 없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병원에 실려가 치료를 받았고 2주간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내 입에선 감사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중추신경 마비로 목 아래는 감각이 거의 없는데도 이렇게 사업을 하게 하시고 많은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업은 잘되는 것 같아도 결산을 하면 적자였다. 우리는 운영을 주먹구구식으로 한 데다 인건비가 많이 드는 게 문제였다. 경제학 박사로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UN ESCAP) 사무총장으로 근무하던 매형이 한국에 나왔다가 내게 회사 장부를 가져오라고 했다. 계속 적자라니 경영을 진단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매형은 이렇게 적자폭이 크면 회사가 곧 문 닫게 된다며 지출을 줄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받는 적은 월급을 줄일 수는 없다고 하자 그러면 회사를 법인으로 만들어 정부의 지원을 좀 받아볼 것을 권했다.
이렇게 공동체생활을 하며 사업하는 가운데 가끔씩 우리를 찾아와 격려해주고 쌀과 부식 등 선물을 한아름 가져다주시는 귀한 목사님이 계셨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12> 한경직 목사님 도움으로 에덴하우스 법인화
인건비 지원·쓰레기종량제로 도약… 파주 2000여평 매입 새 공장 착공
1999년 새롭게 지어 이주한 파주공장에서 만드는 쓰레기봉투의 품질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정덕환 장로. 강민석 선임기자적자를 면치 못하던 에덴복지원 사업장이지만 규모는 커져 일부는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생활했다. 이 가운데 자주 와 격려해 주시던 한경직 목사님도 매형처럼 에덴복지원을 법인으로 만들어 보라고 권유하셨다.
“정 원장, 이 시설이 정 원장 개인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면 법인으로 운영하세요. 내가 도움이 되도록 힘써 보겠소.”
법인서류를 준비하는데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서류를 만들자 한경직 목사님은 나를 대뜸 복지부장관실로 데려가셨다.
“에덴복지원은 중증장애인이 모인 곳입니다. 부모조차 포기한 장애인들을 정 원장이 데려다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느라 엄청 고생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라가 정 원장을 좀 도와줄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 달 만에 법인등록증을 받았다. 임의시설이던 에덴하우스가 이듬해부터 정부 지원을 일부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정부는 직원 일부의 인건비를 지원해 주었는데 늘 적자였던 우리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에덴하우스는 법인이 되면서 이사회를 구성해야 했고 내가 이사장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가 안정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시설이 크게 도약할 수 있는 선물을 또 하나 주셨다. 그것은 1994년부터 쓰레기를 비닐봉투에 담아 버리는 ‘쓰레기종량제’가 전면 실시돼 우리도 납품업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린 웬만해선 찢어지지 않고 신축성 강한 쓰레기봉투를 최선을 다해 만들어 서울 각 구청에 보냈고 품질이 좋다는 인정을 받은 뒤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공장이 바쁘게 돌아가고 시설도 확충했다. 나로선 더 많은 장애우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었다.
한때 물량을 다른 곳에 뺏겨 전전긍긍하기도 했지만 조달청에서도 장애인들이 일하는 우리의 특수사정을 이해하고 합법적인 수의계약을 맺어줘 참 감사했다. 정부의 일은 하는 대로 정확히 입금이 된다. 난 수익이 나는 대로 직원들에게 월급 외에도 배당을 해 주었고 모두들 입이 크게 벌어졌다. 우리에게 이런 날도 오느냐며 신나 했다.
일은 많은데 우리 시설은 열악했다. 시끄럽다는 주변 주민들의 항의도 많았다. 기숙사도 비좁았다. 난 또 한번 큰 꿈을 그리기로 했다. 기숙사와 공장이 가까이 있고 24시간 따뜻한 물이 나오고 문턱이 없이 드나드는 대형 식당과 목욕탕이 있는 건물을 머릿속에 그렸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공장 이전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은 드디어 파주에 6612㎡(2000여평)의 땅을 매입하도록 도우셨다. 공사를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기도 주민들이 반대를 시작했다. 공사현장을 경운기로 막고 멍석을 편 채 누워버려 공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 시설이나 공장이 들어오면 왜 무조건 ‘혐오시설’이라고 반대를 하는지 내가 몸이 정상이었다면 그 주민들을 업어치기로 손을 봐주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그러나 조용히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주민 대표들을 우리 공장으로 초청해 일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파주에 공장을 짓는 것입니다. 여기가 비좁아 더 크게 지어 나가려는 것입니다. 주민들이 우려하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일을 없을 것입니다.”
예상보다 공장규모가 크고 열심히 일하는 장애인들의 모습을 본 주민들은 감동을 받았는지 공장 건립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정덕환 <13> 장애인 ‘연애 사업’ 적극 지원… 50쌍 넘는 부부 탄생
파주 공장 짓던 시공사 부도로 큰 위기… 기도 끝에 1999년 완공해 무사히 입주
에덴복지재단 공장에서 일하다 만난 장애인들의 첫 합동결혼식. 맨 오른쪽이 정덕환 장로.파주에서 짓는 공장건축은 정부에서도 지원을 해주어 큰 힘이 됐다. 그러나 건축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당시 IMF의 후유증으로 자재값이 천정부지로 뛰니 건설사가 자재를 미리 사놓는 것이 유리하다고 해 사람 잘 믿는 나는 갖고 있던 정부지원금 6억원을 덜컥 건네주었다.
그런데 얼마 후 공사현장으로 가 보았는데 인부도 자재도 없었다. 사장이 돈을 받고 잠적해 버려 인건비를 못 받은 인부들이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직원들이 사장을 찾으러 백방으로 다녔으나 찾을 수 없었다.
난 너무 걱정이 되어 급성신장염이 생길 정도였다. 아내와 나, 우리 에덴식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밖에 없었다. 이렇게 피 말리는 4개월이 지난 뒤 웬 남자들이 몇 명 나를 찾아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저희 사장님이 저지른 불찰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사가 부도가 나서 그랬습니다. 지금 수감 중이신데 저희 직원들이 다시 회사를 세워보자고 뭉쳤습니다. 당장 공사를 시작해 최대한 빨리 완공하겠습니다.”
어리둥절했다. 우리의 기도가 상달돼 시공사 직원들이 공사를 해주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장애인단체 건물이고 정부지원금을 훼손 한 것에 큰 부담을 느낀 것 같기도 했다.
1999년 4월30일, 우리는 파주의 새집으로 기분 좋게 이사했다. 이렇게 좋은 시설에 우리가 살아도 되는지 모두들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장애인들을 배려해 휠체어가 다니기 편하도록 문턱이 없이 설계되고 기숙사와 식당, 편의시설들이 황공할 정도로 좋았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나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나안땅에 들어오도록 축복해 주셨는데 초심을 잃지 않고 장애인 선교와 복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여기서 만족하고 느슨해지면 안된다고 나를 독려했다.
잘 지어진 파주공장에서 장애인들이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을 언론에서 새로운 각도로 다루어 주었다. 난 장애인들이 좋은 작업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선진복지’임을 늘 강조했다.
장애인들과 많이 생활하다보니 이성에 대한 관심도 갖고 가정을 이루고픈 열망도 큰데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원생들도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여겨 서로 사귀는 것을 독려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눈이 맞아 데이트도 했고 이어 결혼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파주로 이주하기 전에 이미 5쌍이 합동결혼식을 올렸고 이후 매년 결혼식이 이어졌다. 나는 주례를 서 주며 새로운 부부탄생을 마음으로 기뻐하고 축하했다. 이렇게 에덴을 통해 가정을 이룬 장애인부부가 50쌍을 훌쩍 넘는다. 그래서 우리 에덴에서 가장 잘되는 사업이 ‘연애사업’이라고 내가 우스개 소리를 하곤 한다.
선진국의 바로미터는 장애인복지 수준과 직결된다. 사업을 하고 장애인 관련 직책을 맡으면서 해외 선진국의 장애인 시설과 복지상황을 둘러 볼 기회가 많았는데 참 부러웠었다. 지금 한국의 수준도 해외 선진국과 견주어 많이 좋아졌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인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다.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보고 무시하거나 배려하지 않고 장애인공동체를 여전히 ‘혐오시설’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개선은 어려서부터 가정교육과 학교교육, 사회적 제도가 서로 맞물려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선진복지로 가는 지름길임을 나는 확신한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14> 에덴재단 성장 뒤에는 아내의 기도와 헌신
숱한 질병 겪으며 나를 뒷바라지… 재단 고비마다 판단과 결단 도와
숱한 어려움을 함께 견디며 기도로 힘이 되어준 부인 이순덕 목사와 함께한 정덕환 장로. 강민석 선임기자이번 연재를 하면서 아내 이야기를 많이 못한 것 같다. 사실 오늘의 나와 에덴복지재단이 있기까지는 모든 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그 뒤에는 아내의 눈물과 기도,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두 아들이 잘 자라 제 몫을 하고 있는 것도 모두 아내 덕분이다.
27세 한창 나이에 전신마비 남편을 받아들이고 오랜 병구완과 남편의 온갖 성화를 온몸으로 받아낸 아내는 엄청난 고통으로 마음의 병을 얻었고 이로 인해 대수술을 여러 번 해야 했다. 학창시절 육상선수로 활동하는 등 건강했던 아내가 병을 얻은 것은 모두 나로 인한 마음고생 때문이었다.
아내가 신앙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를 받지 못했더라면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가끔 이야기한다. 아내는 내가 목회자가 되어도 좋고 아니더라도 신앙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하다며 신학교 입학을 권했다. 그러나 내가 몸이 이런데 어떻게 공부하느냐며 거절을 했는데 그럼 본인이 하겠다며 신학교에 들어가 1997년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모든 것을 기도로 의지하고 원생들을 보살피던 아내는 파주 공사가 중단되고 아수라장이던 때 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의사선생님은 전이가 심해 2년밖에 못 산다고 했다. 이미 그 이전에 병을 얻어 신장을 하나 떼어낸 아내였다.
모든 환경이 절망스러웠던 이 때, 병실을 찾아가자 아내는 핏기 없는 얼굴로 봉투 하나를 먼저 내밀었다. “건축은 잘못됐지만 쓰레기봉투 납품은 해야 하잖아요. 이거 비닐 원료값이니 가져가서 쓰세요. 조금씩 모아둔 거예요.”
사고 후 두 아이를 키우느라 안 해 본 일이 없고 손을 너무 많이 써 손가락 관절이 다 휘었던 아내는 유방암을 이겨냈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갑상선암이라고 했다. 평생 직원들 밥해주고 내 뒷바라지만 하며 기도해 온 아내에게 하나님은 왜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내는 언제나 죽음 앞에서 담담했다.
“여보. 당신이나 나나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어요. 우리는 하나님께 붙잡힌 겁니다. 이미 죽음을 경험했기에 무엇도 두렵지 않잖아요. 이런 연단을 통해 이런 큰 사역을 맡겨주신 것이니 매사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도록 해요.”
아내는 에덴복지재단의 중요한 변화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기도 가운데, 또 꿈 가운데 감동을 얻고 중요한 판단과 결단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파주로 이전할 때도 하나님께서 아내를 통해 “마구간이 차면 장소를 옮겨야 하느니라”란 응답을 받고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아내는 숱한 병치레를 하면서 영성은 더욱 깊어졌다. 병원에서도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나 ‘치유와 기적의 하나님’을 자신의 몸으로 입증해 보였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 분명한 것을 아내를 통해 알게 된다.
지금 아내(이순덕 목사)는 파주 공장에 설립된 에덴선교교회 담임을 맡아 특수목회를 열심히 하고 있다. 매일 아침 전 직원을 대상으로 드리는 예배 인도도 아내 몫이다.
또 원래 우리 공장이 있었던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 설립한 에덴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으로도 일하며 장애인들이 자립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있다.
난 매주일 아내의 설교를 들으며 기도의 배우자, 믿음의 배우자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그동안 아내에게 못해준 관심과 사랑을 나누리라 다짐하곤 한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15> ‘장애인 희망 직장 1위는 에덴’이란 말에 뿌듯
장애인 재활 전공 김종인 박사 도움… 고용 늘리는 사업 모델로 OEM 생산
장애인 재활에 관해 학문적으로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김종인 박사(뒤)와 한 학술모임에 참석한 정덕환 장로.쓰레기봉투 수요가 늘어나면서 파주공장 기계는 쉼 없이 돌아갔다. 무엇보다 장애인 고용을 계속 늘릴 수 있는 것이 내겐 최고의 감사였다. 뽑아도 뽑아도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중증장애인들은 너무나 많았다. 장애인 희망직장 1순위가 에덴이라는 말에 참 감사했다. 편한 기숙사에 세끼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고 봉급도 최소 일반인들이 받는 최저 수준은 되었다.
난 업무자동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용이 늘어나지 않는 매출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 한 사람이라도 더 고용할 수 있는 방법을 늘 찾았다.
한국인으론 처음 미국에서 장애인재활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종인(나사렛대학 부총장) 장로가 계시다. 그와 나는 신앙적 코드가 잘 맞는 기도동지로 오랫동안 교류해 왔다. 그래서 김 박사와 오랜 동안 장애인복지 관련 사역을 참 많이 해낼 수 있었다. 난 김 박사에게 장애인고용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지금 생산라인과 방식으론 더 고용하기 힘듭니다. 그러려면 일손이 필요한 신규사업을 해야지요. 영국의 직업재활 시설인 렘플로이(Remploy)는 1만명이 넘는 장애인이 일하는 일터입니다. 여기서 못 만드는 것 없이 다 만들고 상당부분은 국가가 지원합니다.”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웨덴의 삼할(Samhall)이란 공장은 장애인 2만8000명이 700여 작업장에서 근무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제발 우리를 도와 이 같은 프로젝트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 짠 사업 아이템이 ‘주방세제’였다. 가격은 싸지만 모든 가정에서 쓰는 생필품이니 수요는 많다고 본 것이다. 좋은 원료로 믿을 수 있는 친환경 세제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난 김 박사와 함께 장애인 100명 이상을 고용할 수 있는 사업모델임을 정부에 제시하며 공장 건립 지원을 요청해 건축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용기에 상표를 붙이고 단순 작업은 모두 장애인들의 몫이었다. 이렇게 탄생된 회사 ‘형원’은 ‘그린키스’란 상표를 달고 시중에 나왔으나 처음엔 고전을 면지 못했다. 경쟁력에서 우리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데 주방용품을 주로 만드는 대기업 ‘애경’에서 OEM 생산을 요청해 왔다.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우리로선 역부족이었는데 간부들이 우리 공장에 수시로 찾아와 설비시스템과 관리체제까지 잡아주었다. 나중엔 직무교육까지 해주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형원은 현재 연 4000t 이상의 주방세제를 애경에 납품하고 있다. 아직도 상당 부분 부족하지만 중증장애인 다수고용 사업장으로서의 면모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회사일보다 장애인 복지와 재활을 위해 뛰어다닌 내게 일본 가주오 이토가 기념재단에서 주는 기념상 2004년 수상자가 되었다. 아·태지역 장애인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권위 있는 상을 받고 보니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상금 2100만원은 장애인 직업재활센터 건립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또 상을 먼저 수상한 중국 장애인협회 회장 덩푸팡과도 알게 돼 중국과 장애인 상호교류의 장을 열었다. 함께 ‘한·중 직업재활 세미나’도 개최했다. 에덴은 이제 한국을 넘어 국제적인 장애인 사업장 모델로 소개돼 호응을 얻었다. 난 우리의 열정이 세계로 알려지는 것을 바라보며 더 큰 사명감으로 기도하며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해외에서까지 주목받는 에덴이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16> “장애인 자활의 꿈이 나를 지탱해준 힘”
끊임 없이 매달리고 기도하고 도전… 10월 30일을 ‘장애인재활의 날’ 지정
주님이 주신 지혜로 제정된 제2회 장애인 직업 재활의 날 행사를 마치고 보건복지부 관계자들과 함께한 정덕환 장로(앞줄 가운데).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시각장애인에게 예수님은 진흙을 발라준 뒤 1200m나 떨어진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다. 그 자리서 눈뜨게 해 주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예수님이지만 내가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연못까지 걸어가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끊임없이 매달리고 기도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 오늘에 이르렀다.
에덴하우스와 주식회사 ‘형원’은 장애인이 일하는 사회적기업으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장애직원들에게 평균 110만원 정도의 월급과 5대 보험을 모두 제공해줬다. 이는 전국 중증장애인의 평균 월급의 3배 수준이었다. 중증장애 직원 중 숫자를 제대로 세는 이들이 10명도 채 안 되고 정상인이 하루면 할 일을 일주일씩 붙잡고 있어도 이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일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효율성만 따진다면 장애인은 설 땅이 없다.
2009년 한국장애인 작업재활시설협회 회장을 맡아 장애인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었다. 전국에 470여개의 직업재활시설이 있지만 모두가 열악했다. 난 장애인에게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고 당시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이·취임식 날인 10월 30일을 ‘직업재활의 날’로 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다. “10월 30일의 1030은 ‘일(1)이 없으면(0) 삶(3)도 없다(0)’는 뜻입니다. 장애인에겐 그만큼 일이 절박하다는 것이죠. 제정해 주세요.”
우리의 청이 받아들여져 이때부터 10월30일이 ‘장애인재활의 날’로 선포돼 지켜져 오고 있다. 여기에 ‘일이 없으면 삶도 없다’는 1030 슬로건도 반드시 따라붙는다. 그리고 장애인 기업에서 만든 제품을 더 많이 사주는 ‘착한 소비운동’을 전개해 소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응은 싸늘했다. 소비자는 장애인이 만든 물품에 대해 오히려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거나 써보지도 않고 제품의 질이 나쁠 것으로 단정하곤 했다. 내가 소비하는 제품 하나가 누군가에게 큰 힘과 용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드리고 싶다.
2013년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에덴하우스와 ‘형원’을 방문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시설을 한번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것을 지켜주신 것이다. 이미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오신 박 대통령에게 나는 한결같이 장애인 고용 창출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이것이 이뤄질 수 있는 정책을 펴줄 것을 부탁했다. 박 대통령도 이에 공감을 표시하고 장애인 생산품의 판로 개척에도 관심을 갖고 장애인의 자활과 꿈이 실현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하셨다.
나의 사업과 활동이 폭넓게 알려지면서 국가에서 주는 훈장(국민포장 및 석류장)과 도산봉사상, MBC사회봉사대상 등을 받았다. 부끄러웠지만 한편 장애를 딛고 헌신한 것에 대한 선물이라는 생각에 기쁘게 수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수상소감에서 이 말을 거의 빠뜨리지 않았다.
“저는 지금도 세끼 밥을 제 손으로 먹지 못하고 책 한 권, 신문 한 장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겐 꿈이 있습니다. 장애인을 바로 세우고 자활하도록 부축해 주는 것입니다. 그 열정과 희망이 오늘 저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고 장애인의 자활에 힘을 보태주시길 바랍니다.”
***[역경의 열매] 정덕환 <17·끝> “장애인 고용 기반 ‘행복공장’ 확산에 더욱 헌신”
에덴, 국제노동기구 등록 자랑거리… 하나님의 은혜에 더 큰 사명감 느껴
파주 에덴선교교회에서 찬양을 부르고 있는 정덕환 장로. 정 장로의 사명은 이 땅의 중증장애인 일터 마련을 위해 더욱 헌신하는 것이다. 강민석 선임기자에덴하우스와 중증장애인 사회적기업 ‘형원’을 운영하면서 나의 관심은 온통 ‘장애인 고용증대’에 집중됐다.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고 외친 것이다.
우리나라 15세 이상 중증장애인은 95만명이다. 이 중 직업을 가진 장애인은 24%이고 평균임금은 23만원으로 집계되고 있다.
나는 이 문제를 장애인 관련 행사나 정부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앵무새처럼 부각시켰고 관심을 유도했지만 언제나 한계에 부닥치곤 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아예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에 용역을 주어 ‘중증장애인 평생일터 행복공장 모델화 연구’라는 연구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지난해 4월 23일, 행복공장 만들기 운동본부가 에덴복지재단에서 출범할 수 있었다. 우리 운동본부의 슬로건은 ‘해피 드림 잡(Happy Dream Job)’이다. 장애인과 사회 취약계층의 일자리 만들기 운동을 통해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조성하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4대 비전으로 직업복지, 착한소비, 사회통합, 생명존중을 제시하고 앞으로 국내뿐 아니라 북한, 아시아, 전 세계의 장애인 생산시설 확산을 위해 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이 일은 정부의 관심과 지원 속에 잘 진행되리라 믿는다.
아직 한국의 장애인 고용 현주소는 초등학교 수준이다. 행복공장추진본부는 전국 곳곳에 장애인이 마음껏 일하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업장을 만들어 더 이상 시혜적 대상의 장애인이 아니라 일을 하고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 발돋움하도록 돕고자 한다.
이제 연재를 마무리하려고 하니 에덴을 설립해 33년간 운영해 오면서 우리를 도와주신 수많은 분의 사랑과 수고가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분들의 헌신과 지원이 없었더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미미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이나 때론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릴 때 주님은 언제나 내 손을 잡아주셨다. 나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해도 결국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내가 가장 절망스러웠을 때가 결국 주님을 가장 뜨겁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의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은 찬양이다. 얼굴만 살아 있는 내 몸에서 주님을 향해 찬송을 드리면 그 가사 내용들이 나의 신경을 다시 살아나게 하듯 기쁨과 감사가 솟아난다.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란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찬양을 마음껏 드리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된다. 올해 70세이지만 나는 아직 현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오히려 할 일이 더 늘어나고 있음에 감사를 드린다. 아직도 몸은 고통스럽고 도움을 받아야 움직이는 나지만 이런 나를 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큰 사명감을 느끼게 된다.
그사이 에덴하우스와 형원은 ISO 품질경영 및 환경경영 시스템을 획득하고 장애인복지시설의 모델을 제시한 결과로 유엔 국제노동기구(ILO)에 최초로 등록된 기쁜 소식이 있기도 했다. 우리는 말 그대로 ‘행복공장’인 셈이다.
앞으로도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이 땅의 모든 중증장애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직업을 갖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여러분 모두가 기도로 응원해 주시길 특별히 부탁드린다. 아울러 경기도 파주의 에덴이 생산적 복지의 산실이자 장애인 선교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노력해 나갈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