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의 정치체제는 집정관, 원로원, 시민회로 이루어졌다. 집정관은 총리겸 합동참모회의 의장 겸 야전군 사령관을 합친 관직이다. 브루투스는 집정관에게 큰 권력과 무거운 책임을 주는 한편 장래에 왕이 되지 못하도록 제어장치를 설치했다. 그 제한이란 '집정관은 반드시 시민회에 의해 두 명을 선출하며 그 임기는 1년으로 한다는 것이다. 재선은 가능하지만 반드시 매년 선거세례를 받게 되면 왕처럼 군림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가장 큰 문제는 불과 1년 뿐인 임기로는 장기적인 정책 입안과 그 실시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루투스가 생각한 것이 원로원의 기능 강화였다. 브루투스는 원로원 의석수를 100명에서 300명으로 늘린다. 집정관 후보는 원로원 의원 중에서 선발하였으며, 집정관의 독단과 폭주를 막기 위하여 원로원을 강화하고 확대하였다. 브루투스의 개혁은 로마의 정치체제를 왕의 통치체제에서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엘리트 집단지도체제로 질적 전환을 한 것이다. 정치의 실권은 원로원이라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같은 정치형태를 과두정치체제라고도 한다. 공화정을 수립한 이후 로마는 거의 매년 전쟁을 치러야 했다.
브루투스는 에트루리아군과의 첫 전쟁에서 타르퀴니우스왕의 장남과 결투하여 상대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상대의 칼에 죽는다.
로마인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일치단결하여 결코 굽히지 않았고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없었지만 패하지는 않았다. 전쟁 극복에 성공하자 일치단결된 힘은 붕괴되고 귀족과 평민간의 계급 대립이 표면화 되기 시작했다. 대립이 격화된 가장 큰 이유는 공화정 구조에 있었다. 로마인은 원래 농경민족으로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그들에게 자산은 곧 토지를 의미했다. 그런데 귀족에게만 좋은 땅을 빌려주어 평민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민관 제도를 도입하였다. 공화정 수립 후 15년 만이다. 호민관제도는 평민 계급의 권리를 위한 것이다. 호민관에 오르는 것은 오로지 평민 계급 출신자로 한정하였다. 임기는 1년으로 초기의 정원은 두 명이었다. 호민관에게는 두가지 특권이 주어졌다. 하나는 집정관이 내린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집정관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육체의 불가침권이라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두가지 권력 중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거부권이었다. 거부권은 모든 특권 중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이었다.
그러나 전시에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어 빛좋은 개살구였다.. 그래서 호미관제도는 일시적으로 평민의 불만을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래 가지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다시 평민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그러나 적이 쳐들어 온다고 하면 모든 힘을 합쳐 전쟁에 돌입한다. 로마에서는 항상 두 명의 집정관이 각군단을 이끌고 로마방위를 맡아 두 집정관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마비되어 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특례 조치로서 독재관 제도를 설정하였다. 독재관에게는 정치체제를 바꾸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이 주어져 있엇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정은 누구나 따라야 했다. 이 독재관의 임기는 불과 6개월로 정해져 있었다. 기원전 390년 공화정체제 이후 대략 1세기가 지나 켈트족이 로마를 습격하였다. 로마는 공황상태에 빠져버린다. 그 당시 평민들이 베이로 이주해 버려 로마군의 병력이 반 가까이 줄어든 상태였다. 로마의 지도자들은 힘겹게 군단을 편성해 켈트족을 맞아 대항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로마군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켈트족의 손아귀에 떨어져 버렸다.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된 후 363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켈트족 습격 충격으로 로마인이 맛본 굴욕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켈트족에 의해 동족이 살해당하고 정든 로마 시내가 불타오르는 것을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항전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7개월에 이르는 항전 끝에 로마인은 켈트족과 화평을 맺는다. 켈트족은 숲속에서만 살아온 민족이라 도시 점령은 별 매력이 없었다. 로마인들이 보낸 300킬로그램의 금괴를 받자마자 즉시 돌아갔다. 켈트족 습격사건으로 3세기에 걸쳐 성장을 계속 해온 로마는 다시 무에서 출발하게 된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로마에 귀화한 카밀루스였다. 방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주변 여러 나라를 제압하면서 로마의 동맹국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리하여 로마의 방위체제를 재구축한 그는 로물루스를 잇는 '제 2의 로마 건국자'라고 불리게 됐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후년의 대로마를 이루게 된 원점은 켈트족 습격의 충격에 있다고 했다. 로마인은 켈트족 습격 충격을 뒤돌아보고 한 세기 동안이나 계속된 귀족과 평민 사이에 항쟁이 로마를 폐허로 만든 근본 원인이었다고 깨달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항쟁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해야겠다고 각오한다. 이렇게 하여 창출된 것이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섹시티우스법이다.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의 목적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해소하는데 있었다.
공화정 정부의 모든 관직에 귀족이든 평민이든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다 오를 수 있게 만들었다. 로마에게 소중한 것은 형식의 평등이 아닌 로마 시민으로서의 연대 확립이었다. 원로원 의석을 평민에게도 주어 기회를 균등히 했다. 원로원 개혁에 의해 로마는 진정한 의미의 과두정체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에 의해 평민들의 대표인 호민관 조차 그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해소하고 앞으로는 양자가 융화하고 협조하여 로마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로 고대 로마 중심부인 포로로마노에 '콩코르디아 신전'을 세운다.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된지 약 100년 후인 기원전 270년에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다. 켈트족 습격 충격으로부터 120년 째 되는 해였다. 로마에는 눈에 띄는 영웅은 탄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마는 강한 조직력으로 맞서 마침내 통일할 수 있었다. 장대한 로마사를 쓴 역사가 티푸스리비우스는 만약 로마군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싸우면 조직력에서 우수한 로마군이 최종적으로 이겼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로마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여 패전의 책입자가 된다는 것은 가장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로마에서는 무엇보다도 명예를 존중했다. 일단 전쟁이 나면 귀족도 평민도 모든 것을 내던지고 국가방위에 나서는 로마인이었다. 로마에는 같은 시대의 다른 나라가 갖지않은 두가지 큰 무기가 있었다. 하나는 물건이나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네트워크로서의 도로망 그리고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국가간의 네트워크로서의 로마연합이다. 이 두가지 네트워크 힘으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가 되었다.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로마가 주변국을 누르고 커진 이유는 '패자마저도 자신들에게 동화시킨다는 그들의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기여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이 제정된 약 30년 후 로마는 새로운 동맹관계 형성에 착수한다. 이것이 바로 20세기의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가 '정치 건축의 걸작'이라고 말한 로마연합의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하 것은 로마의 힘을 동맹국에게 인식시키고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로마연합은 로마방위의 소프트웨어였다고 하면 도로망은 하드웨어에 속한다. 로마는 군대 이동이 민첩하게 하기위하여 가도를 부설하였다. 기원전 312년에 시작한 로마 가도부설은 기원전 1세기의 공화정 시대에 본국 이탈리아를 총망라하여 완성되었고 제정시대에 들어서는 유럽, 중동 등 북아프리카에 걸친 제국 전역을 망라해 나갔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기 때문에 수도 로마는 모든 방향에서 오는 적을 경계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