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100% 주려하는데
하나님은 100%주려 하는데, 신도들은 거부하고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거룩의 생명을 주려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적 부활생명을 믿지 않는 자는 이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신칭의에 의하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일단 구원을 얻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성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성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거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거나, 의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거나, 거룩한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날마다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살펴보면서 계명을 지키려고 하거나, 빛과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거나 등등의 노력하는 삶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부활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부활생명을 얻게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생의 몸, 영의 몸을 입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100%주신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자가 되며, 빛과 소금이 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가 되며, 의인이 되며, 거룩한 자, 성결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유로 이렇게 된다. 이러한 존재를 한마디로 말하면 부활생명을 가진 자인 것이다. 그래서 열매라고 한다. 열매맺지 못한 자는 부활생명을 가지지 못한 자가 되는 것이다. 죽은 육체가 부활함을 믿는 자나, 죽은 후에 부활한다고 믿는 자는 부활의 열매가 없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12절에서『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호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호스는 ~처럼이 아니라, 로서이다.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되는 자들이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라, 각성시키는 것이다. 비록 육체로 인해서 완전하게 행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뜻(하나님 나라 전파)을 기억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이다.
베드로후서 1장 4-7절에서『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데이아스)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데도레타이)』
데이아스는 신의 성품이 아니라 신성이다. 데도레타이는 주어진다는 것이다. 신성에 참여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인데, 이런 자는 이미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하는 마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각성시킨다. 열심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이 아닌 것이다. 개역개정에서 더하라(niv: make effort로 번역) 라고 하므로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야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100%되게 해주셨는데, 인간의 육체로 인해서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죽은 자, 그리고 현재적 부활한 자임을 각성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100% 주시려고 하는데, 신도들은 받지 않겠다고 하는 근본 이유는 현재적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신도들은 예수믿으므로 구원을 얻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처럼 완전한 의를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지 못얻는지는 예수님의 재림 이후 심판때 가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 구원도 예비된 구원이지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이 인을 친다는 것은 약속이지, 그 약속은 인간의 행동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현재적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활도 예수님의 재림 이후 심판 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구원받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심판받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간다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계되어있지만, 성도에게는 이미 그리스도가 심령 속으로 들어와 그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재림해 들어간 자는 현재적 부활생명이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구원에 이르는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죽은 자는 죄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도들이 현재적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육체를 가진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죄에 빠질 수 있고, 또 언젠가 육체가 죽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으며, 세상에 살기 때문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가지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으므로, 현재적 부활이 자신에게 다가 올 수 없는 것이다. 육체의 눈이 영적인 눈을 가리는 것이다. 말씀(안약)을 통해서 영적 눈을 밝혀야만 현재적 부활이 다가오게 된다.
로마서 6장 5절에서『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왜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죽은 자가 되는가? 하나님께 대하여 죄인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는 죄인은 동물을 통해서 희생제사를 드렸다. 죄인은 죄를 동물에게 전가하고, 동물을 죽여서 피를 제단에 뿌리고(물세례), 동물의 몸을 각을 떠서 불에 태웠다(불세례). 그래서 죄인은 죄 사함을 받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죄인과 죽은 동물 사이에 연관관계를 생각해보면, 죽은 동물이 바로 죄인인 것이다. 동물이 대신 죽었지만, 사실은 죄인이 죽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 동물이 죄를 대신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죽은 동물과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신도의 죄를 대신한다고 믿지만, 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별로 없다는 말이다. 예수께 감사하고 날마다 보혈을 노래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예수와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고 생각하는 자가 얼마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즉 시작부터 믿음이 잘못된 것이다. 아무리 이신칭의 라고 말을 해도 시작이 잘못된 믿음은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은 것이다.
왜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하는가? 바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존재라는 말이다. 성경은 에덴동산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을 잘 생각해야만 한다. 그래서 육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이게 영적 부활이다. 부활은 이전의 영적생명으로 되돌린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