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 행정‧군사 중심지에 세워진 읍성은 객사와 동헌을 핵심 시설로 각 군현의 주민과 관리를 보호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언양읍성은 1390년(공양왕 2)에 처음 토성으로 축조된 것을, 1500년(연산군 6)에 현감 이담룡이 석성으로 고쳐 쌓으면서 확장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3064척(약 1500m), 높이는 13척(6.3m) 이었다. 성벽은 조선 전기 읍성의 일반적인 형태로 하부는 비교적 큰 돌을 세워 쌓거나 눕혀쌓되 성돌 사이의 빈 공간에는 잔돌로 채운 형태이며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4면에는 각각 문을 내었으며, 성문 위에는 정문인 영화루(남문), 망월루(동문) 등의 누각을 두었다. 성벽 모서리에는 보초병이 망을 보던 각루角樓를 세웠고, 성문 주위에는 문을 보호하기 위한 반원형으로 옹성甕城을 쌓았다. 성문과 각루 사이에는 총 12개의 치성稚城을 두었다. 치성은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병을 쏘기 위해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만든 시설이다. 성벽에서 7m 정도 바깥으로는 너비 3~5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가 있었다. 해자 바닥에는 목익木杙(뾰족한 꼬챙이)이 촘촘히 박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성안에는 각종 관아가 있었으며 동쪽에 동헌이, 서쪽에 객사(구 언양초등학교 자리)가 있었다.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도로와 동문‧서문을 가로지르는 수로水路, 그리고 성내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
*체성, 여장, 옹성, 치성
언양읍성은 조선 시대 읍성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곽은 몸체에 해당하는 체성體城, 군사가 몸을 숨기는 성벽 위의 여장女墻, 옹성甕城, 치성稚城, 해자垓字 등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체성이란 원성이라고도 불리며, 성의 몸체를 이루는 부분을 가리킨다. 기초 부분부터 여장 아래의 미석까지가 해당된다. 체성 성벽 바깥쪽은 수직에 가깝게 견고하게 쌓아 적의 공격을 막고, 성 안쪽은 잔디를 덮어서 경사지게 했다. 언양읍성의 체성 상부 구조물은 1895년 관련 제도 폐지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이 많이 진행됐다. 그러나 하부 구조물은 도시개발이 없던 이른 시기에 사적으로 지정하는 등의 노력으로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여장은 체성 위에 쌓은 낮은 담으로 성 위에서 몸을 숨겨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면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하는 시설이다. 여장에는 원총안遠銃眼과 근총안近銃眼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원총안을 통해서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고, 근총안으로는 가까이 있는 적을 물리친다. 그래서 옆에서 보면 원총안은 수평을 이루고, 근총안은 아래쪽을 향해서 기울어지게 만든다.
*남문 영화루
언양읍성은 고려 공양왕 2년 토성土城으로 처음 만들어졌으며 효과적인 주민 보호와 군사적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조선 연산군 6년에 석성으로 새로 지어졌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광해군 4년(1612)에 재정비하였으나 잦은 재해로 피해를 보았고, 특히 근현대기 남천의 제방 축조를 비롯한 여러 공사에 성에 있는 돌을 가져다 써서 훼손이 더 심해졌다.
한편, <언양읍지彦陽邑誌>(1919년 편찬)에는 동문은 ‘망월루望月樓’, 서문은 ‘애일루愛日樓’, 남문은 ‘영화루映花樓’, 북문은 ‘계건문啓乾門’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언양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1800년대 초반 ‘진남루鎭南樓’에서 ‘영화루’로 이름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는데 1900년 전후에 최종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차례의 언양읍성 남문지 발굴 조사 결과, 영화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구조로 성벽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서 있는 개거식開据式이었음이 밝혀졌다. 초석은 자연석 위에 둥글게 다듬은 높은 주초를 세웠고, 기둥머리 부분에는 날개 모양의 익공翼工 2개를 포개 놓은 이익공을 두었으며,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영화루 앞에는 효과적으로 방어하려고 성문을 둥글게 감싸 안은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두었다. 이 옹성은 성벽의 안팎을 세워 쌓은 협축식夾築式이다. 옹성 안쪽의 너비는 약 15m이고, 동쪽으로 난 옹성 개구부의 폭은 8.3m로 다른 읍성보다 넓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