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긴 제목의 책이다. 총 몇 책이나 되는 지 모르겠으나 零本이지만 오래 된 책인 것 같아서 구입. 더군다나 앞뒤가 많이 낡아서 낮은 가격에 낙찰 받았다. 옥선생의 글을 읽어보니 이 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처음에는 세종 13년에 계미자로 인쇄되었고 ([도서관 고문헌으로 살펴보는 한국활자인쇄사], [국회도서관]vol. 455, 2018년 1,2월호) 이후 여러 차례 목판으로 번각본이 간행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단종 1년(1453) 금산군 번각본이 있고 조선후기 인조 13년(1635) 양주 회룡사에서 간행된 번각본이 있다고 한다. 입수된 [음주전문춘추...]는 조선후기 번각본인 것 같다.
이 책의 시기와 관련하여 볼 수 있는 단서로는 장서인이 두 방 있는데 [李應蓍章] [君瑞翠竹]으로 판독된다. 군서라는 자를 다 찾아보니 이응시가 나온다. 이응시의 자가 君瑞이고 호가 翠竹이다. 이응시(李應蓍, 1594, 선조27~1660, 현종즉위년)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서(君瑞), 호는 취죽(翠竹)·죽창(竹窓). 세종의 7대손이며, 풍양령(豊陽令) 이춘(李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몽상(李夢祥)이다. 아버지는 이정신(李廷臣)이며, 어머니는 정휴복(鄭休復)의 딸이다.
1633년(인조1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43년 장령(掌令)이 되고, 16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뒤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 해에 여색을 멀리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려 왕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1649년(효종즉위년) 직산에 이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사간·교리·승지·대사성·도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1652년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54년 함경도관찰사로 파견되었는데, 도내의 궁벽진 곳을 스스로 돌아보고 미비점을 계(啓)로 올렸다. 이로 인해 왕으로부터 표리(表裏: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 일습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1655년 도민이 청나라에 월경하여 살인한 사건으로 청나라의 항의를 받고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승지에 기용되고, 1658년 대사간, 이듬해 이조참판으로 승진되었다.
효종이 죽자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생활이 검소하며 관직에 충실하여 사람들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재현(才賢)을 제대로 천거하지 못한다 하여 식자들로부터 비난을 들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상 민백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