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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2일 토요일(금요무박) 낙동정맥 7 회 (황장재~피나무재)
S 산악회
낙동정맥 7 회차: 황장재~갈평재~ 대둔산~명동재~느즈매기~왕거암~대궐령~별바위봉~피나무재
산행거리 : 약 27 km (대둔산, 왕거암 왕복 포함) 산행시간 : 약 11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918189
거리 27.2 km
소요 시간 11h 44m 2s
이동 시간 11h 26m 3s
휴식 시간 17m 59s
평균 속도 2.4 km/h
최고점 888 m
총 획득고도 1,291 m
난이도 힘듦
낙동정맥 (洛東正脈) 07 – 대둔산, 왕거암, 별바위봉
주왕산
양산박
그 산에는 단풍만 있는줄 알았지
구석구석 바위만 멋진줄 알았지
예쁜 꽃만 피어나는줄 알았지
거기에는 아픈 전설이 있었어
옛날 당나라에 쫒겨온 주왕이
숨어살던 곳이래 바로 거기가
신라장군 마일성에 철퇴를 맞아
흘린 피가 계곡을 흘러 흘러서
붉디붉은 수진달래 꽃이 되었대
아비는 죽었지만 아들 딸 살아
대전사 백련사 절을 짓고서
아비의 극락왕생 빌었다나봐
날 씨 : 새벽에 눈 비 내리고 종일 바람이 거세게 붐. 미세먼지 나쁨..
옷차림 : 세 겹옷
해돋이 : 비구름에 덮여 일출 풍경없음. 내기사 갈림길에서 명동재 가는 도중 날이 밝음.
한주의 날씨: 일요일 눈내리고 주초에 한파가 몰아침.
프로로그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황망히 물러가려던 동장군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주려는 듯 느닷없이 늦은 한파를 몰고왔다. 2월 16일 일요일에 서울을 비롯한 경기 북부 그리고 강원도 지역에 눈이 내리더니 기온이 뚝 떨어진다. 월요일에 러시아에서 온 세르게이에게 왜 한파를 몰고 내려왔느냐고 농담삼아 꾸짖으니 미안하다며 농담으로 대답한다. 러시아 하바롭스크는 현재 영하 20도 보통날씨라는 말에 기가 죽는다. 평소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니 우리나라 겨울은 그저 포근하기 그지없겠다.
실제로 올 겨울은 너무 밋밋하게 지나가는 것 같다. 벌써 남쪽에는 매화가 꽃을 피우고 지금 찾아오는 추위는 꽃샘추위라 한다. 봄이 턱밑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심리적인 계절은 자꾸 뒷걸음치는 느낌이다. 지지난주까지 잡힐 듯하던 국내 코로나 바이러스 (COVI 19)가 신천지 교회를 통한 확산으로 갑자스럽게 위험한 단계로 치닫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2월 24일 월요일) 우리나라 감염 확진자 수가 800 명을 넘었고 사망자도 7명이나 된다. 대부분 신천지 교인들과 관련되거나 의료진이다. 대구와 경북 지역이 주요 감염지역이고 서울 경기는 그나마 감염자 수가 적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토요일이 장인 제사라서 대구에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금요일 하루 휴가내어 경주 관광을 하고 토요일 처가에 가는 것으로 계획했었데 갑자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악화되면서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아리러니하게도 나는 이 상황이 반가운 면도 있었다. 대구에 가는 대신 낙동정맥 7구간 산행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4월 낙동정맥을 마치면 별도로 혼자서 이 구간을 땜빵할 생각이었다.
이를 굳이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하여튼 이번 구간을 빠져야 할 판이었는데 이어가게 된 것은 우여곡절이 담긴 일이다.
산행기
원래 산행 계획이 없었기에 일기예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금요일에야 비로소 토요일 새벽에 전국적으로 비와 눈이 내리고 곳에 따라 강풍이 몰아칠 거라는 기상예보를 접했다. 비의 양은 5 밀리 안팍으로 아주 적은 양이다. 양이 적거나 많거나 비를 맞으면서 산행을 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낮에 천마산에 다녀온 후 약간 피로감이 몰려와 짧은 초저녁잠을 자고 늦은 저녁으로 돼지고기 보쌈을 먹었다. 긴 산행을 앞두고 육류를 섭취하면 산행 중 허기를 덜 느낀다. 밤 열시 집을 나서는데 빗방울이 제법 굵게 떨어진다. 마침 차에 우산이 있어 챙겨 쓰고 신사역으로 향했다.
회원들이 다 모였는데 산대장과 버스가 오지 않는다. 11시 출발이니 보통 15~20분 전에 버스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11시가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전국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다 비까지 내리니 혹시 산행이 취소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으로 회원들끼리 당황스러워하는데 그제서야 버스가 도착한다. 때마침 산대장도 도착하여 조금 늦은 시간에 출발할 수 있었다.
의성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간다. 들머리 황장재는 여기서 멀지 않다.
황장재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황장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의성 휴게소에서 이른 아침을 먹기 위해 잠깐 정차하고 2시 30분에 출발하여 한 시간만인 3시 10분 버스는 황장재에 도착했다. 미리 채비를 갖추고 버스에서 내린 회원들이 다시 우루루 버스에 오른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리는지 아니면 비가 내릴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지 버스에 올라 배낭커버를 씌우고 우의나 바람막이 옷을 챙겨 입고 다시 나간다.
비는 그리 많이 내리지 않는다. 기온도 그리 낮지 않아 두터운 겨울복장으로 산행하기에 적당하다. 여느때와 같이 회원들은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들머리를 찾아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고 줄지어 랜턴 불빛을 따라 이어간다. 처음 능선길을 찾아 오르는 길이 조금 복잡하다. 황장재 방어를 위해 파 놓은 참호를 따라 어느만치 간 다음 무덤을 지나 잔가지 얽힌 수풀을 헤치고 수직으로 더 올라서서야 비로소 정맥길을 찾을 수 있었다. 선두를 따라 가는 불빛이 길게 이어진다.
새벽 3시 20분쯤 산행을 시작한다. 입산금지 비탐구간을 들어간다.
갈평재 (445m)
처음에는 얼마간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가 점점 더 벌어지고 선두는 금방 시야에서 사라진다. 처음에는 비가 내리는줄 알았는데 고도가 높아지면서 눈으로 바뀐다. 바람이 강해지면서 하얀 눈발이 날아와 흩어진다. 금방 녹아버리지만 옷을 적시지는 않는다.
버스에서 산대장이 설명한 것처럼 산길은 계속해서 오르막이다. 때로는 낮게 때로는 높은 봉우리를 지나면 잠시 내려가거나 평평한 길이 이어지지만 전반적으로 오르막이다. 왼쪽으로는 멀찍이 도로가 지나는지 가로등이 훤히 비치고 그 주변에 마을이 있는지 조명빛이 제법 밝게 빛난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지나 2 km 거리에 있는 갈평재 (445m)에 도착했다. 사방이 어두운데 나무에 붙어있는 팻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만큼 특징이 없는 고개다.
갈평재
대둔산(905 m)
갈평재를 지나면서 길은 더욱 가파르게 고도를 높인다. 능선길 오른쪽(청송)에서 왼쪽(영덕)으로 부는 바람은 나뭇가지에 부딪혀 괴기한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든다. 앞서 간 사람들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지고 뒤에 오는 몇 안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깜깜한 밤 첩첩산중 비내리는 산길을 홀로 걸으면서도 비록 벌찍이 떨어져 있지만 앞 뒤에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관리가 소흘하여 쓰러지고 망가진 이정표는 먹구등이 5 km 남짓 남았다고 표시한다. 다음 목적지는 대둔산(905 m)인데 대둔산까지의 거리표시는 없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능선길에 큼직큼직한 암릉이 나타난다.
능선길에 바위가 많다.
본격적으로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간다. 국립공원과 산림청으로 이원화된 관리체계가 혼란스럽다.
대둔산 - 우리나라에는 세 개의 대둔산이 있다.
황장재를 출발한지 1시간 30분쯤 지나 국립공원 출입금지 팻말을 지난다. 4.5 km쯤 지나왔다. 주왕산 국립공원내 비탐구간이다. 산행을 하면서 이런 구간을 지날때마다 늘 기분이 찜찜해진다. 국립공원이든 산림청이든 주도적으로 관리하여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산림청은 방관하고 국립공원은 단속만 한다. 그런 길을 산꾼들은 항상 불법으로 산을 탐방하다보니 이렇게 깜깜한 밤에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고도를 계속 높이는데 주변은 옅은 안개에 휩싸인다. 랜턴 불빛에 안개가 비치니 시야가 흐려진다. 그렇게 얼마간 오르다보니 저 앞에서 랜턴불빛이 움직이는게 보인다.
“선두팀인가요?” 내가 묻는다.
“아뇨. 저희는 후미팀입니다. 선두팀은 벌써 지나갔어요. “ 일행이 세 명이다.
“여기가 대둔산 갈림길이에요. 얼마 안되니 다녀오시고 이 무덤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가셔야 해요”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주고 지나간다.
대둔산은 낙동정맥에서 조금 벗어나 있지만 높이가 있어 조금 번거로움을 무릅쓰고라도 꼭 다녀오는 봉우리다. 내가 대둔산에서 내려와 다시 삼거리에 도착하니 내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이 올라온다. 그러니까 앞팀과 뒷팀간의 간격은 약 100여미터 정도이고 시간으로는 10여분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나도 똑같이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서둘러 가파른 길을 내려간다.
먹구등
대둔산을 오를 때 여러 개 전위봉을 지나며 오르막길이 상당히 길게 이어졌던 반면 대둔산을 지나고 나서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무척 짧았다. 잠깐 내려와 제법 널찍하고 펑퍼짐한 숲에서 길이 끊어졌다. 이리 저리 불빛을 비쳐가며 길을 찾아도 낙엽으로 덮인 산길이 너무 희미하여 찾을 수가 없다. 보통 이런 곳에는 선답자들이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시그널이 수두룩하게 보여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헝겁조각 하나 나부끼지 않는다. 핸드폰을 꺼내 램블러 앱을 보면서 이리 저리 둘러봐도 분명하게 산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십여 분 그 자리에서 맴돌다가 희미한 안개속에 시그널 하나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 이럴때 시그널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고도가 높아질 수록 안개가 끼며 랜턴불빛에 의지한 채 산길을 걷는다.
길을 잃고 한참 헤맨끝에 시그널을 찾았다. 그 많던 시그널은 어디로 갔나.
그 시그널이 걸려있는 방향으로 조금 나아가니 비로소 바닥에 뚜렷한 산길이 드러난다. 다시 능선길에 멋드러진 암릉이 펼쳐진다. 이곳을 낮에 지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빗방울이 더욱 굵어지고 바람도 거세진다. 기온이 그리 낮지 않아서 그런지 추운줄은 모르겠으나 옷이 젖으면 안되겠기에 배냥속을 뒤져 비옷을 꺼내 입었다. 일회용 비닐 우비를 여러 번 꽤매었어도 다시 떨어져 팔소매는 너덜너덜하지만 이정도 비는 충분히 가려줄만 하다. 비옷은 바람을 많이 막아준다. 모자를 덮어쓰니 얼굴을 때리던 비바람을 막아주어 몸이 훈훈하다.
멋진 암릉구간
아직 새벽이 오려면 멀었다.
암릉이 끝나고 낙엽이 두텁게 깔린 흙길이 이어지고 어렴풋하나마 서서이 날이 밝아옴을 느낀다. 여명은 멀리 산마루금 위로 희끄무레 다가오고 머리위 헤드랜턴이 빛을 잃어간다. 비가 그친 산속에서 맞는 새벽이 신선하다. 산마루금 위에 맞닿아 있는 하늘에 구름이 여명을 받아 선명하게 비친다. 오늘은 비가 내렸으니 일출풍경은 기대하지 않는다.
내기사저수지로 갈라지는 곳에 이르러 먼동이 터온다.
먹구등
내기사 저수지 1.5 km 먹구등 0.7 km 라 써 있는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정식 이정표를 만난다. 6시 40분 새벽은 어두운 밤길을 벗어나 밝아오는 태양 앞에 서 있다. 혹시나 비를 맞으면서 산행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사라지고 내 마음도 활짝 개었다.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있는 산길을 조금 오르니 바닥이 콘크리트로 포장된 헬리포트 나무에 코팅된 종이에 먹구등 No-4라고 써 있다. 나는 또 한 번 ‘등’이라는 접미사에 주목한다. 먹구등의 의미나 유래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강원도부터 지나오는 동안 ‘등’자 접미사를 가진 산봉우리를 여러 개 지났다. 댓재 위에 있는 햇댓등, 낙동정맥 첫구간 구봉산 지나서 만난 대박등, 통리를 지나 면산 가는 길에 있던 면안등(재), 석개재에서 묘봉을 지나서 만난 용인등(봉) 등 이름에 등자가 들어간 지명이 여럿 보인다. 유래도 알 수 없을뿐더러 특별히 조망도 없는 먹구등을 잠시 둘러보고 발길을 서둔다.
명동재
일반적으로 큰 나무가 꽉 드러차 있고 나뭇잎이 푹신하게 깔려있는 숲길과 달리 나무가 그리 크지도 않고 듬성듬성하게 자라고 맨땅이 드러나있으며 가는잎그늘사초만 군데군데 자란 모습이 황량하다는 느낌을 준다. 아마 머지않은 예전에 산불이 휩쓸고 지나가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먹구등을 지나 밋밋한 능선길을 얼마간 걸어가니 헬기장 No-2라 쓰인 팻말이 걸려있다. 달리 산 이름은 보이지 않으나 지도에는 이 곳이 명동재라고 표시되어 있다. 분명 산 봉우리 꼭데기(peak)인데 고개를 의미하는 ‘재’자를 붙였으니 혼란스럽다. 더구나 지난 두 구간에서 만났던 맹동산과 명동산에 이어 또다시 명동재라니 명동은 아무 산에나 붙이는 그냥 사람이름에 붙이는 개똥이 같은 것인가보다.
먹구등에서 명동재로 가는 길
날이 밝아온다.
오래전에 화재가 있었는지 주변 나무가 작고 땅이 메마르다.
명동재 이름표는 없고 시멘트 포장된 헬기장이다. 고개라는 뜻의 '재'자를 쓰지만 봉우리이다.
느즈매기
명동재는 조금 높이 올라간 봉우리인데 그 다음부터는 짧지만 급한 내리막이다. 네 시간 넘게 약 12 km를 쉬지 않고 달린 탓인지 오른쪽 무릎과 고관절에 통증이 조금 느껴진다. 전체 26 km 정도 된다하니 아직 반도 마치지 못했는데 벌써 이렇게 지쳐가니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가급적이면 왼발에 힘을 싣고 속도를 줄이면서 내리막길을 진행한다. 건너편으로 거대한 산 그리메가 펼쳐진다. 저 산을 또 넘어야 한다.
낮은 안부에 내려서니 앞서가던 후미팀이 한적한 곳에서 아침을 먹고 일어나 주섬주섬 떠날 채비를 한다. 앞서 대둔산 초입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다.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친구들끼리 함께 하는 산행이다.
겨울눈속에서도 푸르름을 유지하는 비결이 뭔가여?
느즈매기 - 우리말 지명이다.
느즈매기 NO-2 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인다. 명동재와 왕거암사이 양쪽 높은 봉을 사이에 두고 움푹 들어간 모양새다. 2015년 영덕군 달산면 봉산리 주민들이 직접 배우로 참여하여 ‘느즈매기 양설령(兩雪領)’의 전설을 소재로 만든 연극을 공연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어떤건지 궁금하다. 느즈매기는 방금 지나온 명동재와 여기서 1.5 km쯤 앞에 있는 왕거암 사이 깊이 내려간 고개로서 여기서 생겨난 계곡을 따라 주왕산 국립공원내 주왕계곡으로 하산할 수 있다.
왕거암 (907.9 m)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어떤지 알수 없는데다 내가 뒤로 많이 쳐져있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곧바로 진행한다. 앞서 명동재에서 내려올 때 보았던 산세를 보면 꽤 큰 봉우리를 두 개 넘어가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점점 심해져 마음에 부담이 커진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한 발 두 발 서두르지 않고 오르다보니 어렵지 않게 봉우리 하나를 넘어섰다.
청송군답게 푸른 소나무가 멋지다.
그 사이 뒤에 남았던 후미팀 세 명이 나의 느림보 걸음을 추월하여 휭하니 앞으로 지나간다. 오전 8시 30분 아직 남아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심적으로는 여유가 있어보인다.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는데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오늘 산행을 시작한지 처음으로 바람없고 양지바란 곳에 배낭을 내려두고 다리를 펴고 앉아본다. 배낭 속에 담긴 물을 꺼내 작은 페트병에 덜어 담아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빵과 사과도 작은 봉지에 담아 왼쪽 주머니에 넣었다. 길을 가면서 목이 마르거나 허기질 때 조금씩 먹을 참이다.
왕거암 갈림길 - 선두팀은 가메봉까지 다녀오고 난 왕거암만 들른다.
잠시 다리를 쉬고 다시 산길을 오르는데 앞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왕거암 삼거리다. 선두팀에 섞여서 걷는 영우님이 삼거리에 서 있다. 왕거암을 거쳐 2.1 km 떨어진 가메봉(가마봉)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왕거암까지는 0.3 km 떨어져 있으니 서슴지 않고 왕거암으로 향했다. 도중에 가메봉을 다녀오는 선두팀을 만났다. 모두 의기왕성하여 발걸임에 힘이 실린다.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정상석이 있는 왕거암에서 인증한다.
왕거암으로 가는 길 옆에 바위가 우람하다.
왕거암 - 왕이 머둘렀던 자리라는 뜻인가 아니면 거대한 바위산이라서 붙여진 이름인가?
왕거암은 주왕산 이름의 유래가 된 당나라 주왕 전설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중국 당나라 덕종 정원(貞元)15년 (779년)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고 자처하며 남양주를 차지한 후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쳐들어갔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주도는 바다를 건너 신라땅인 주왕산(당시 이름은 석병산)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당의 덕종(德宗)은 신라에 주왕을 무찔러달라고 요청하였다. 신라 조정에서는 마일성을 보내 주왕의 반란군을 토벌하였지만, 주왕의 아들인 주희(周曦)는 살아남아 주왕산에 머물면서 도술을 익히고 후대사람들과 교류하였다는 이야기다. 주왕산 아래에 있는 대전사(大典寺)가 고려 태조 2년 (919) 주왕의 아들 주희가 창건한 절이라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아니고 당의 역사서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전설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주왕산 주변의 지명에 녹아 있어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가 그럴듯하다.
대궐령(大闕嶺)
왕거암에서 삼거리로 돌아와 능선길을 따라 걷는다. 깍아지른 왼쪽 절벽위에는 국립공원에서 안전목책을 설치해놓아 산객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푸른 이끼가 세월의 흔적처럼 묻어있는 바위지대를 지난다. 누가 일부러 쌓아놓은 듯한 형상을 한 바위와 모양이 제단처럼 생겼다하여 제단바위라 부르는 바위 등 멋드러진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걷는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나무사이로 멀리까지 조망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평평한 숲이 넓게 자리잡았다. 나무가 없다면 밭이라도 일궈먹을 수 있을 만큼 넓직하고 평평하다. 옛날 주왕의 대궐이 있었던 자리라 하여 대궐령(大闕嶺)이라 부르는 곳이다. 대궐령 끝 모서리에는 나무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오늘 산행중 처음으로 시원한 조망을 즐긴다.
왕거암은 큰 바위라는 뜻이 맞겠다는 생각이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 마치 청송 소나무가 시위를 벌이는 것 같다..
길 왼쪽으로는 까마득한 바위절벽이 펼쳐진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를 많이 만난다.
소위 제단바위다. 큰 비도 피할 수 있을 만큼 가림막이 넓다.
이 조망처 아래에는 갓바위라 부르는 커다란 바위가 서 있는데 팔공산 갓바위와 마찬가지로 기도발이 잘 듣기로 소문난 곳이다. 갓바위까지 400 미터 떨어져 있는데 가파른 길을 왕복해야 한다. 조망처에서는 맑은 날 영양 풍력단지와 영덕 풍력단지가 보인다고 하나 오늘은 미세먼지 때문에 먼 곳은 보이지 않는다.
대궐령 - 옛날 대궐이라도 지었을 법 넓은 숲이 펼쳐진다.
전망대 아래 갓바위
날이 맑으면 영양 풍력발전단지가 보인다는데 미세먼지로 조망이 좋지 않다.
별바위봉
대궐령부터는 다시 입산금지 구역이다. 국립공원 안에 들어있지만 관리할 수 없어 비탐방로로 지정하여 출입을 금지한다. 이미 20여 킬로미터를 걸어왔으니 이제 남은 길은 길지 않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 여유를 부려본다. 다리는 아프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평이한 흙길이지만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눈앞에 솟아있는 높은 봉우리를 올라가니 콘크리트로 포장된 작은 헬기장이 나온다. 제법 높은 봉우리라 이름이 있을법도 한데 그 흔한 리본 하나 대달려 있지 않다.
능선길에서 만난 늙은 돌배나무
힘들게 오른 798봉 정상에는 이름표 하나 걸려있지 않다.
오른만큼 내려가야 하는 것이 산행의 이치이듯이 봉우리를 지나 조금 순탄하더니 급기야 산길은 아래로 곤두박질 친다. 다행히 암봉이 있는 능선길을 우회하여 완만한 사선을 그으며 한참 내려가니 돌탑이 세워진 넓은 안부가 나온다. 분위기는 마치 산행의 종점을 향해 나가는 듯하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만큼 고도를 낮췄으니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산행의 날머리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느껴진다.
내리막길 옆으로 멋진 바위와 나무들이 신비감을 자아낸다.
급한 경사길에서 내려선 널찍한 안부에 돌탑을 쌓아놓았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선답자 시그널 - 청송군에 있는 주왕산을 산행하며 만난 "신천지" 이름의 시그널이 눈길을 끈다.
숭정대부행동지중추부사청송심공지묘 - 봉분은 보이지 않는데 지체높은 관료였던 청송심씨의 무덤이었음을 알려주는 비석과 문인석 무인석이 남아있다. 이 비석 앞에는 봉분처럼 생긴 것이 보인다.
안부에서 산길은 다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다가 능선을 버리고 산중턱으로 이어지는 우회길을 따라 내려간다. 이대로 가다가 느닷없이 날머리인 피나무재가 나타나면 좋겠다는 생각이지만 아직 별바위봉이 여정에 남아있다. 무척이나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봉우리의 모습이 어떤건지 궁금해진다.
오른쪽 무릎과 고관절에 느껴지는 통증이 점점 심해진다. 특히 내려가다가 올라갈 때 또는 그 반대로 내려가다가 올라갈 때 아픔이 등골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온다. 남은 거리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0 킬로미터 안쪽일터이다. 능선길에 바위가 성벽처럼 쌓여있는 산길을 오른다. 그렇게 힘겹게 올라선 봉우리 앞에는 멀리 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다. 나는 저 능선길이 갈라지는 봉우리가 별바위봉일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가까이 솟아있는 것이 별바위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만일 오른쪽으로 벋은 능선에 별바위봉이 있다면 거기서 또 산길이 어떻게 이어질지 상상이 안간다.
산길 옆으로 잠시 조망이 트인다.
암릉을 타고 오르면 별바위가 있으려나?
하지만 산넘어에는 또 다른 봉우리가 있다. 별바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오른쪽 끝에 있는 높은 봉우리가 별바위봉이다.
나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짧은 내리막에 이어 가파르게 오르던 산길은 능선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산 중턱을 가로질러 사선을 그으며 오른다. 그리고 얼마후 능선에 올라서고 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오후 1시 바위능선이 시작되는데 가는 눈발이 희긋희끗 나부낀다. 설마 예보에 없는 눈이 내리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여유를 부려본다. 조금만 오르면 별바위봉이고 거기서 하산하는데 얼마 안걸릴 테니 오후 3시 되기 전에 피나무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배낭을 풀고 오늘 두 번째로 짧은 휴식을 취한다. 점심요기로 빵과 사과를 먹는다.
별바위봉 오르기 전 잠시 쉬어간다.
곧이어 오른 별바위봉에서는 이제까지의 수고를 다 보상이라도 해주는 듯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 가야할 방향
주산지 (注山池) 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조선 숙종(1771) 8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경종 원년 10월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주왕산 국립공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수 많은 전설이 묻혀있는 골짜기들이 이어진다.
벌바위봉은 그 정상에 풀만 조금 나 있는 그야말로 암봉(岩峰)이다. 대궐령 조망처에 이어 두 번째로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아주 약한 눈발이 날리면서 불어대는 거센 바람에 몸이 날아갈 것 같다. 지나온 길과 그 너머로 이름을 알 듯 말듯한 마루금이 겹겹이 쌓여있고 다른 쪽으로는 별바위 너머로 또 구비구비 능선길이다. 숱한 전설을 품고 있는 주왕산의 신비로운 주산지도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인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광이지만 한가하게 부릴 여유는 없다. 세찬 바람을 뒤로 하고 한발 뒤로 물러선다.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데 세찬 바람에 잠시 서 있는것도 불안하다. 모자를 눌러쓰고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잡고 주변을 둘러본다.
피나무재
이제 별바위봉에 올랐으니 내리막만 남았으리라.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니 여유가 있어보인다. 버스에서 산대장이 설명해준 것처럼 바위 옆길로 내려가는 비탈이 가파르고 작은 돌조각이 섞여있는 흙이 물러 쉽게 흘러내린다. 주먹만한 돌덩이 하나가 굴러 멈추지 않고 가속도가 붙어 더욱 속도를 내어 구르더니 큰 나무에 쿵하고 부딪히고 나서야 멈춘다. 여러 사람들이 조심하지 않고 한꺼번에 내려간다면 사고라도 날 태세다. 나무 둥치를 붙잡고 또 스틱에 의지하면서 조심조심 내려오니 다른 산행기에서 본 적이 있는 통천문이 나타난다. 바위 한가운데가 뻥 뚫려있어 마치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기분이다. 백두대간 석병산에서 본 것과 아주 흡사하다. 내리막길은 통천문이 있는 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또 다시 한참을 미끌어져 내려간다.
이 통천문이 있는 바위를 별바위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통천문 때문인 것 같다. 어두운 곳에서 그 구멍을 통해 밝은 곳을 보면 하나의 커다란 별이라는 느낌도 들 법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참 낭만적인다.
별바위는 별바위봉 아래에 있는 거대한 바위다. 산길은 바위 오른쪽으로 가파르게 이어진다.
별바위 아래쪽에는 바위가 부서져 생긴 구멍이 뚫려있다.
별바위봉에서 내려섰으니 이제 산행이 다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다. 다리 통증은 여전하지만 곧 날머리에 도착할 거라는 기대감에 조금 느린 걸음을 옮긴다. 자가마한 봉우리를 넘어 능선이 성벽처럼 바위가 쌓여있는 길을 따라 내려간다. 나는 그 끝에 반드시 피나무재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걸으면서 산세를 살펴봐도 쉽게 고갯마루로 이어질 것 같지 않다. 왼쪽으로 멀리 차도가 보이지만 그 도로가 어느 지점에서 정맥길과 마주칠지 쉽게 가늠할 수 없다. 완만하게 내려가던 길 앞에 커다란 고개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내가 큰 착각을 했슴을 감지했다. 날머리인 피나무재까지 가려면 아직 갈길이 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산 능선을 따라 형성된 바위능선은 마치 인공을 쌓아올린 산성처럼 보인다.
도대체 피나무재는 어디에 있나? 저 앞에 있는 봉우리를 넘고 또 하나의 봉우리를 넘어야 비로소 피나무재가 나온다.
2시 20분 마감 10분전에 가까스로 날머리인 피나무재에 내려선다.
시간이 촉박하다. 이제 2시 20분이 넘었는데 마감시간인 3시까지 저 고개를 넘어 피나무재에 도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더구나 아픈 다리를 끌고서. 그래도 해보는데까지 해보자는 각오가 일었다. 봉우리를 오르는데 갑자기 힘이 솟는다. 다리에 통증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봉우리를 넘어 내리막길에는 평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걷는데도 아픈줄 모르겠다. 어디에 그런 에너지가 숨어있었는지 아마도 마법에 걸렸나보다.
그리고 2시 50분 마침내 아스팔트 포장된 도로를 만났다. 피나무재다. 오날 산행을 마치는 날머리다. 도로에 내려서면서 산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버스가 서 있는 곳까지 200 여 미터 오른쪽 도로를 따라 내려가야 한다. 나는 세 시 전에 버스에 도착하여 동료 산꾼들의 격려를 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새벽 세 시 반부터 걷기 시작한 산행이 오후 세 시에 끝났다.
빠른 사람들은 가메봉을 다녀오고도 9시간만에 산행을 마쳤다고 한다. 대부분 나보다 한 시간 정도는 일찍 내려와 라면을 끓여먹으며 휴식을 취한 것 같다. 나보다 조금 앞서 가던 세명의 회원들도 정자에서 점심을 먹다가 내가 하산하자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들고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30분 전에 내려온 듯하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보다 늦어 또 다시 꼴찌로 내려왔지만 긴 주왕산 구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슴에 스스로 위안을 보낸다.
에필로그
산행기를 마치는 수요일(2월 26일)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대구와 경북 지방을 중심으로 신천지 교인들이 감염된채로 예배에 참여하고 또 전국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삽시간에 확진사 수가 늘어났다. 확진자가 1,260명 사망자가 12명. 이는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제일 나쁘다.
대응을 잘 못하는 경우 걷잡을 수 없이 바이러스가 확산될거라는 불안속에 올 해 경제전망도 불투명하다. 전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모임을 꺼려하고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기업들도 유연근무제를 실시하여 조를 짜서 교대로 재택근무형태를 많이 취한다. 만일 이런 상황이 2주 내에 진정되지 않는다면 아주 위험한 단계에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정부에서는 총력을 기울여 사태의 조기진화에 힘쓰고 있으나 신천지 교인들의 협조가 따르지 않는다면 이 많은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