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감리교의 첫 공교회(1885년)와 첫 신학교(1887년)
노 종 해(CM리서치)
1. 한국의 첫 감리교회, 1885년 가을에 설립(10월11일)
한국감리교회의 첫 공교회 설립은 1885년 가을(10월)이다. 왜냐하면 1887년10월9일 이전에도 신도의 공동체로써 교회는 설립되어 존재하여 왔기 때문이다.
아펜젤러의 '1887년7월24일“자 일기(Diaries)를 보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참조-Sunday, July 24, Seoul. Appenzeller Papers : Diaries)
“오늘 나는 내 집에서 우리의 첫 번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의 이름은 박중상이다. 우리학교 학생이며 진지하고 지적인 젊은이다. 그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에 관해서 들었다. 한국에 돌아 온 후 그는 하야까와 형제와 친해졌고 그를 통해 세례받기를 권고 받았다.
이것이 여기에서의 우리 사업의 시작이다. 나는 완전히 주의 손으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주의 손 안에서만 그가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오기 바란다. 그는 언약의 사람이다.“(아펜젤러, 노종해 역, 일기, P69. clsk 1988)
이만열 교수는 아펜젤러의 일기 “1887년7월24일”자를 주시하며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우리교회”(our church)라는 말에 유의해 본다고 하면서, “그는 벌써 이때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1887년 7월 24일 이전에도 신도의 공동체인 교회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이만열:”“아펜젤러”, 연세대출판부 p495.)
첫 감리교회 설립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만열 교수가 눈여겨보며 지적한 “우리교회"(our church)란 말이 1886년4월25일자 아펜젤러의 일기에도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면 정동교회의 창립일은 1886년4월25일 이전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지적하고 나갈 것은 ”1887년10월9일“은 새로운 교회 건물(가옥)의 시작은 되어도 첫 교회의 설립일은 아니란 점이다.
한국 감리교회의 첫 공교회 설립에 대해 더 심층적으로 밝혀 보면 다음과 같다.
첫 공 교회, 정동에 교회 창립을 결정할 수 있는 근거
첫째, 1886년4월25일(부활주일)자 아펜젤러의 일기를 눈여겨보면 정동교회의 창립일에 대한 시기를 밝혀 주고 있다.
1886년4월25일 부활주일(일요일)은 아펜젤러가 한국에 도착한 1주년 되는 기념주일이다. 이 날 아펜젤러는 그의 딸과 스크랜튼 박사의 딸에게 세례를 주었고, 일본공사관 직원에게도 세례를 주어 한국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첫 세례식을 베풀었다.
이날 세례 받은 분은 하야카와 떼쯔야(Hayakawa Tetzya)로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일기에 쓰고 있다. “그는 세례 준비인(학습인, a probationer)으로써 우리교회(our church)로 받아짐으로써 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는 한국에서도 그 신도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좀 더 밝히기 위해 같은 일기를 눈 여겨 자세히 보면, 주일 집회가 모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지난 가을 이 도시(서울)에 왔는데 우리와 사귐을 가지며 주일날 우리의 기도회(our prayer-meeting)에 나와 함께 참석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으며, 내가 그에게 교회의 집회에 대하여 말했을 때 선뜻 참석하였던 분이라”고 기록하였다.(아펜젤러 일기, 1886년4월25일자, Appenzeller, Diaries.)
1886년 4월 25일 아펜젤러의 일기에는 “‘우리교회’(our church)로 받아짐으로써 ,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는 한국에서도 그 신도를 가질 수 있었다”고한 기록을 보면 선교사들의 연합집회인 유니언교회(Union Church)가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또한 분명히 한국 감리교회의 신도의 공동체, 본처(지역)교회임도 알 수 있다.
아펜젤러의 일기 원문은 다음과 같다.
“He came to this city last fall, made our acquaintance, studies the bible with us on Sunday, attends our prayer-meetings and when I spoke to him about uniting with the Church he readily assented..., He was also received into our church as a probationer so that the Methodist Church has its followers even in Korea."
그런데 옥성득은 “아펜젤러 일기 보고서의 ‘our Church’(감리교회)를 ‘our church’(우리 정동교회)로 오해한 데서 ‘해프닝’이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1885년 감리교회가 시작된 것과 지역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시작된 것을 구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하였다.(옥성득; ”한국의 첫 개신교회들, 1887년 가을에 설립”, 뉴스앤죠이 2015.12.17. cf, 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9.13. pp232ff. )
그러나 한국감리교회는 1885년 가을에(last fall) “교회”(the Church)는 물론 "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의 지역교회(our church)도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즉, 서울 정동지역에서, 규칙적인 예배(prayer-meetings)와 성경공부(studies the bible)인 신도의 공동체(교회)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정동제일교회”란 명칭은 후에 정해진 것이다.
둘째, 1886년 제2회 한국선교회가 6월10일에 모였는데 이때 보고된 통계에 의하면, “세례준비인(probationer) 1명, 장년세례인 1명, 원입인 100명, 주일학교수 1, 주일학생수 12명, 학교수 1, 학교 교사수 6명, 학생수 30명, 병원 1개 처”로 보고되었다.(1886 Annual Report of MEC, 1886년 연례보고서)
송길섭 박사는 “여기서 원입인 100명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분명치 않다. 여기에 대한 해명도 없다”고 하였다.(정동제일교회90년사, 1977. p60. 주(註)33번 참조)
1886년의 통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1885년도 한 해 동안의 선교활동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1886년 연례보고서는 이러한 통계를 먼저 보고한 다음 이어서 1885년 한 해 동안 활발히 전개된 전도사업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즉, 아페젤러의 활동과 스크랜튼 박사의 의료전도 활동, 스크랜튼 여사의 여성전도활동을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보고들을 마치면서 통계를 보고하였던 것이다.
여기서의 장년세례인은 1886년4월25일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며, “원입인100명“은 스크랜튼의 의료전도활동과 아펜젤러의 전도활동 등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하고 개별적인 접촉으로 성서와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셋째, “1885년 가을”에는 한국감리교회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선교기지와 건물이 모두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DR, 스크랜튼(목사)는 1885년5월3일에 서울 정동에 도착하여 가옥을 구입하고, 6월 말에 “정동병원”을 설립하여 의료선교를 시작하였으며, 의료기구와 약품일체가 도착한 후 9월10일에는 정식으로 “정동병원”을 개원하였다. 스크랜튼 박사의 병원을 통해 가장 빈천한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돌봐주는 의료선교활동을 통해 전도되었고, 스크랜튼과 아펜젤러를 돕는 종사자들과 그 가족들이 최초 교인이 되었다.
또한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7월29일, 정동에 한국가옥을 구입하고 내실(內室) 한 방을 정결하고 새롭게 준비하여서 “우리의 첫 한국인 지성소”(first Korean Sanctuary)로 구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한국인들의 기독교회로 연결된 첫 거룩한 교제가 이루어진 곳이라”하였다. 즉 성소로 “예배실”(Chapel)을 설치하여 복음 전도에 임할 준비를 갖추었다. 실제로 이 예배실에서 성경공부와 예배가 있었고, 최초 세례식도 이 예배실에서 거행하였던 것이다.(참조, The Korea Methodist 1권1호.1904)
정동의 교회는 바로 이러한 아펜젤러의 내실, “지성소”(Sanctuary)에서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우국지사인 익명의 세 한국인과 후에 배재학당이 된 최초 학생들로 조직되고 설립되었다.
1885년 8월 3일에는 이겸나, 고영일 두 학생으로 교육선교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9월7일에는 오인탁, 이종운 두 학생이 입학하였다.
1885년3월5일 일본에 도착한 한국선교사 일행들과 모임 “첫 한국 선교사회“(the first Meeting of the Missionaries to Korea)는 선교 관리자(Superintent of Mission)인 맥클레이(Rev. R.S. Maclay)를 회장으로 일본 도쿄, 아오야마(Aoyama)에서 모였으며, 이 때 일본 유학생 한국인 4명에게 년 말까지 장학금을 지불키로 결의하였다. 또한 ”감리교교리문답“과 전도소책자(tracts), 찬송가(hymns)를 출판키로 결의하였다. 맥클레이는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선교지로 인도하시어서, 선교지는 우리를 환영하고 있다“고 말하였다.(Minutes of the first Meeting of the Missionaries to Korea, March5, 1885.)
1885년8월17일 아펜젤러의 집에서 모인 “제1회 한국선교회“ 보고서에 보면 세 명의 한국인 일본 유학생을 받아들인 기록이 있으며, 적극적으로 전도사업해 나가기로 결의하였다.(참조, Annual Report 1885.8.17.)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1885년6월20일, 서울 정동에 도착하여 여성전도사업 용 주택을 구입하였고, 정동병원을 도우면서 여성전도에 착수하였다. 스크랜튼 여사는 여선교사업을 더 크게 학장할 계획을 가지고 1885년10월23일에는 정동에 19채의 한국주택과 6,200여 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여 선교사업 기지를 확보하였다.
해외여선교회선교부(W.F.M.S)의 스크랜튼 여사는 여선교회 첫 보고서(1885년)에서 그녀는 아들 집에서 여성전도에 힘썼으며, 1885년10월23일에 매입한 가옥 중에서 집회하기 좋은 곳을 택하여 “선교사 연합예배”도 모였고, 자신의 여성 집회도 준비하고 있음을 보고서에서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때에 1885년10월 둘째 주일(11일)에는 개신교 첫 성례예식이 거행되었고, 성서번역에 대한 의논도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는 장로교 선교사들도 함께 참여하였고 미국 성서공회 루이스 목사도 참석하였던 것이다. 이 날을 기념하여 1895년10월9일부터 개신교선교1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885년 스크랜튼 여사의 연례보고서(Annual Report)를 보면, 8월에 스크랜튼 여사(Mrs, Scranton)는 미국 공사관과 장로교선교부가 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를 구입하고 인접대지에는 집회하기 좋은 집이 있다“고 했으며, 이때 스크래튼 여사는 그녀를 도와 종사하는 부인들을 얻었다. 10월23일에는 그 인접대지와 가옥을 매입하는 계약이 이루어졌다.
“나는 계약서에 싸인 하며 찬양했다. 해외여선교회에서도 이제 한국에서 정당하게 선교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내지선교와 학교, 시약소가 같이 일하도록 했고, 교회를 위한 건물도 세워지길 희망한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시간마다 나의 아버지께서 아무 실수 없도록 간구한다.
나는 주일(主日)을 귀하게 여기도록 배워왔다. 모든 주간의 중심으로 지켰다.“고 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첫 성찬예식을 행하였는데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Loomis)씨와 미국 마리온호(Marion)의 선장도 참석하였다.“고 했다.(1885 Annual Report of WFMS)
1885년도 가을에는 ‘한국선교회“(지방회)가 설립되었었고, 대규모 정동선교기지가 형성되었다. 정동구역 내에는 ”기도처, 예배실(교회), 병원, 학교“가 설립되었다. 규칙적인 주일예배와 성경공부, 전도인양성반(사경반)도 설립되었다. 당시 예배와 교육 등은 남.여 구분하여 모였다.
한국기독교의 첫 성찬식(1885.10.11. 주일)-공교회 설립의 근거
한국기독교의 최초 성찬식은 1885년 10월 11일 주일날 오후 정동 예배처에서 거행되었다. 아펜젤러 목사와 스크랜튼 여사는 이 감격스런 은혜의 사실을 각각 선교부에 보고하였다.
아펜젤러는 미 감리교 선교부 총무인 레이드(J.M. Reid) 박사에게 보낸 1885년10월13일자 편지에서 한국 최초 성찬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지난 주 일요일, 이달 11일에 우리는 오후에 늘 가지는 기도와 간증 모임에서 성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이 개신교에 의해 거행된 한국 최초의 성찬식이었습니다. 미국 성서공회에 소속되어 있는 요코하마의 루미스(H. Loomis) 목사가 참석해서 이 모임을 인도했는데 <오직예수>라는 제목으로 적절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장로교의 언더우드(H.G. Underwood) 목사와 제가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었는데, 참석한 사람은 11명이었습니다. 제물포에 입항해 있는 미국 선박 마리온(Marion)호의 고급선원 두 사람이 함께 이 예식에 참석 하였습니다.”(이만열 편역, 아펜젤러 연세대 1985. p282)
또한 성찬예식에 대하여 메리 스크랜튼(M.F. Scranton) 여사는 1885년 미 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 제16차 연례보고서>에 보고하였다. 스크랜튼 여사는 1885년 연례보고서에서 이미 거처할 집과 학교와 병원을 겸하기에 충분한 큰 저택을 준비하고 교회를 위한 건물이 마련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어서 주일마다 모이는 작은집회가 있음을 보고하면서 최초 성찬식에 대하여 보고하고 있다. 즉,
“한국에서 주일날인 11일에 우리는 우리의 첫 성찬예식(our fist communion service)을 가졌다. 미국 성서회의 루미스(Mr Loomis)씨, 또한 미국선인 마리온 호의 선장 밀러(Miller)씨도 참여하였다. 성찬식이 집례 된 작은 다락방처럼 떡과 포도주의 자기 몫을 분배 받았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기념하던 밤’(memorable night) 처럼 여기에 참여한 우리들도 주님의 실제로 임재하심을 알 뿐만 아니라 체험 하였다.”(Annaul Report of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C, 1885-1940. p48)
한국 서울 정동에서 베풀어진 개신교 최초 성찬예식은 1885년 10월 11일 주일 오후였음이 밝혀졌다. 이 성찬예식의 집례자는 일본에서 이수정과 함께 <감리교 교리문답>을 번역한 루미스 목사이었고,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와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가 나란히 성찬을 분급하였다.
한국기독교 최초 성찬식은 무엇보다도 감리교와 장로교 당시 개신교파의 구별 없이 같이 참여하였고, 연합기관인 성서공회 총무에 의해 집례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뜻과 경륜을 찾아야만 한다. 이것은 한국기독교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다.
실제로 이를 기념하여 1895년10월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개신교선교를 기초한 10주년 기념식”을 거행 했다. 의장은 조원시(G.H. Jones) 목사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 뿐만아니라 한국인 지도자들과 교인들까지 연합하여 감사예배와 강연회 및 축하행사와 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감리사인 스크랜튼 목사는 “한국감리교 선교 10년사”를 발표하였고, 교회의 시작을 1885년부터 기술하였다.(The Korean Repository. 1895.10.)
1885년10월11일, 한국 최초 성찬예식이야 말로 정동의 교회 창립일로 써 지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축복의 날인 것이다.(참조, 노종해: “한국기독교 첫 성찬식”, 복음신문 1987.10.25., 11.1.)
한국의 첫 공교회는, 정동에 1885년 가을에 형성
감리교의 교회는 1885년4월5일 아펜젤러의 도착과 함께 시작 되었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례 되는 곳”이므로 아펜젤러의 일기와 초기 한국감리교회 선교연례보고서에 의해 구체적이고 규칙적인 성경공부 모임과 집회가 모였던 “1885년 가을“이며, 그 날짜는 10월 11일 첫 성례가 집행된 날로, 한국 감리교회 첫 공교회 창립일임을 가르쳐 준다. 이 교회는 오늘날 정동제일교회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당시 초기교회에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일본인도 참석하였다. 교회는 세계적이며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아펜젤러의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일기"(Diaries)만 보아도 한국인 구도자, 조사(Helper), 전도인, 등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으며, 초기 성도들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이들은 최초 한국 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었며,정동교회의 최초 교인이었다. 평신도 지도자, 본처 전도인들이였다. 아펜젤러의 "일기"에 표기 된 한국인 성도의 명단(1885-1887년)을 지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이정인, 송씨, 신씨, 장지영, 박중상, 김씨(주사), 한용경, 최성균, 이용섭,김영찬, 최갑길, 유치겸, 윤돈규, 김명옥, 박승면, 문세익, 이무영, 송귀영, 문경호, 노병일, 조명은, 박윤섭, 김창식, 최병헌, 정인덕, 노병선, 노광옥, 민찬홍, 이경직, 양흥묵, 윤창열씨 등이다. 또한 여성 전도자로서는 김사라, 노수산, 메미례, 이슬비씨 등이다.
2. 감리교 첫 신학교 설립(1887년10월)
"베델"(1887.10.9.)은 어떤 곳인가?-"첫 교회"였을까? 아니다, 전도인 양성을 위한 "베델"로 "감리교회의 요람"이며, 신학교가 설립 된 날이어야 한다.
정동의 감리교선교본부 지역, “베델” 건물에 대해서 아펜젤러는 “전도인”(Bible Work)을 위해 마련한 집이요,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권서인”, “평신도 전도인”을 위한 건물이라고 했다. 아펜젤러는 "1887년10월11일, 일기"에서 베델에 대해 “at Bethel the house we purchased for Bible work”라 지적하고 있다.(Appenzeller, Diaries. Tuesday October 11, 1887, Seoul)
실제로 선교보고서를 보면(1888년), 1887년의 베델은 전도인 양성소로 시작되어, “신학교”(Theological School)로 보고하였다. 즉 신학교 1, 교사 3, 신학도 7명으로, 배재학당과 구분하여 보고하고 있다.(1888‘ Report of missionary of M.E. Church. p344.). 실제로 이날을 감리교신학대학은 창립일(1887)로 지키고 있다.
"베델“에서 한국인 첫 여성 세례와 성찬식도 거행되었으나, 이들 신분은 전도인으로 ”권서인“(Bible Workers)들이였다.( Appenzeller' Diaries, Monday, Oct 31, 1887. 아펜젤러 역 일기 1887년10월31일. 노종해 역)
아펜젤러는 늘어나는 성경공부반(Bible Class)과 전도인 양성, 신도들을 위해 별도의 가옥을 마련하여 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기위해 1887년9월에 가옥을 구입하고 수리하여 개방한 날이 10월9일인 것이다.
아펜젤러(Rev, H.G. Appenzeller) 선교사의 일기(1887년10월31일)에는 한국기독교의 “첫 여성세례”와 한국인 사역자들만의 “첫 성찬예식”도 기록되어 있다.
“벧엘“의 첫 한국 전도인들의 성찬예식
아펜젤러는 같은 일기(10월31일)에서, “첫 여성세례식“에 이어, 한국인 평신도 전도인이요 권서인들(Bible Workers)을 위한 ”첫 성만찬”을 실행을 감격 속에 기록하고 있다.
“일주일 후 10월 23일 주일에 한국 감리교 최초 성찬식을 가졌다. 이것도 역시 감리교의 요람인 베델의 같은 방에서 열렸다. 최씨, 강씨, 한씨, 최씨의 부인이 참석했다. 박씨는 어디가고 없었다. 스크랜튼 의사도 참석했다. 기도문을 사용하고 모두 진지하게 기도를 나누었다. 이 백성에게 생명의 떡을 떼어 주나니 얼마나 큰 특원인가! 우리 마음이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소서.”(아펜젤러 역 일기 1887년10월31일. 노종해 역)
아펜젤러의 일기(Appenzeller' Diaries, Monday, OCT 31, 1887, Seoul.), 좌측여백에는 친필로 “1st Communion Service in Bethel"(벧엘에서의 첫 성찬식)이라 표기 되어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아펜젤러는 일기 좌측여백에 친필로 “1st Communion Service in Bethel"(베델에서 첫 성찬식)이라 썼다는 점이다. 분명히 최초 성찬식(1885.10.11.)과 한국인들만의 베델에서의 첫 성찬식(1887.10.23.)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펜젤러는 일기에서 이분들이 평신도 전도인(Lay-Preacher)으로 권서인(Bible Worker)들이며, ”베델“은 ”감리교의 요람“(at Bethel the Cradle of Methodism)이라 지적하고 있다.
감리교회에는 오늘날의 “장로”, “전도사”제도가 없었다. 오늘날 한국 감리교의 “장로”는 일제말기 기독교통폐합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감리교회는 전도인을 권사(전도사)라 하였다. 일제 말 감리교의 권사(전도사)와 장로교의 전도사와를 통합하여 “권도사”라 하였다. 당시 감리교회에는 “집사”도 없었다. 속장, 유사, 탁사, 교사 등이 있었다.
평신도 전도인(Lay-Preacher)들은 “장로사 목사”(Elder)의 임명으로, 권사들이 목회자 역할을 한 것이다. 당회는 입교인 전체로 모이지, 장로교처럼 당회원 몇 명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감리교의 “권사”(전도사)는 평신도 전도인으로, 권사과정을 마치고, 장로사인 목사(정회원)의 임명으로 교회를 맡아, 목회사역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세계감리교회의 형성과 부흥은 평신도 전도인(Lay-Preacher)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초기 정동의 세례인 및 성찬식 일지>
1885.10.11. 첫 성찬식(개신교 최초 성찬) 1886. 4.25. 첫 세례식(부활주일 오후3시) -Marion Fitch Scranton -Alice Rebecca Appenzeller -Hayakawa Tezya 1887. 4.10. 세례식, Sugibashi Koichiro | 1887. 7.24. 한국인 세례-박중상 1887.10. 2. 한용경 세례-최초 한글세례문 188710.16. 최초 여성세례식-최씨 부인 1887.10.23. 벧엘에서 한국인 첫 성찬식 1887.12.25. 김명옥 세례-한국어 세례집례 *1885-1887년-한국인 장년 세례인 34명. |
*참고, 아펜젤러 일기만 근거한 통계이고, 선교보교서에는 “장년 세레인이 34명, 교인 165명이다. |
“1888년 선교보고서”(Report of M.E. Church)의 통계를 보면 1887년 감리교회 교세를 알 수 있다. 1887년 교세는 교회 2개 처이며, 성도는 203명에 이른다. 이를 감리교회의 교인구분으로 보면, 회원(입교인) 11, 준회원(세례인) 27명, 원입인 165명, 주일예배 참석자는 평균 55명이며, 회심자 34명, 장년 세례인 34명이라 보고하고 있다.(이상, Annual Report of M.E. Church, 1888. p344.)
또한 신학교 1개 처와 교사3 명, 고등학교(배재, 이화학당) 2개와 교사 7명, 학생 87명이며, 주일학교 2개와 교사 7 명으로, 교회(Church & Chapel)와 학교, 주일학교 등 각각 2개 처는 남.녀가 구분되어 별도의 집회처를 설립하고 있음을 가리켜 주고 있으며, ‘신학교“(Theological School)는 전도인 양성사역인 권서인(Bible Workers)들을 위한 “베델”을 가리킨다. 이는 아펜젤러가 "1887년10월11일, 일기"에서 “벧엘”에 대해 “at Bethel the house we purchased for Bible work”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Appenzeller, Diaries. Tuesday October 11, 1887, Seoul). 실제로 "감리교신학대학"(MTU)은 1887년 이 날을 창립 개교기념일로 여기고 있다.
3. 맺는말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세례 요청을 직접선교로 법에 어긋남을 주저하였고 조심하였다. 당시 정치, 사회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조심스럽게 전도활동을 펼쳐 나갔으며, 세례와 성만찬도 외국인 중심으로 극히 제한되고 조심스럽게 밝혔고, 한국인 세례는 은밀히 실행하였던 것이다. “베델”에서의 첫 한국인 여성세례와 “성만찬”은 전도인, 지도자들의 예식이었고, 이는 전국을 다니며 전도활동하고 있던 ‘권서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감리교회는 1885-1887년에 공교회(Church)와 신학교(Theological School), 학교(High School), 병원(Hospital), 기숙사, 보호소 홈(Home) 등으로 착실히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1888년도 보고서에, 한국인 교인만으로도 199명으로, 장년 세례인 34명, 원입인 165명임을 보고하고 있음을 보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이는 한국감리교회의 본처교회도 이미 설립되어져 부흥성장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또한 1887년 10월, “베델”에서의 “여성세례”와 ”한국인 첫 성찬식“은 전도인 들의 성례, 성만찬이었으며, 여기서 “감리교회의 요람”(Cradle of Meteodisim)인 “신학교”가 구체화 되고, 이미 한국 감리교회의 토착, 지역교회가 설립되어 성장해 나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특히 여성세례와 전도인 양성은 당시 한국 사회의 신분통제를 생각할 때, 기독교 신앙의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며, 지도자로 양성해 나간 사회혁명적 일로도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민족구원의 지도자를 양성하며, 여성지위의 향상과 사명을 새롭게 자각하고, 민족구원과 평화통일, 세계선교의 사명 감당을 결단해 나가야 할 것이다.(rch: 2021.10.6.)
--------------------------------------------------
監理敎 協成神學校 校歌(현,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작사: 梁 株 三 교수(J.S.R.)
1. 삼각산 높은 봉은 뒤에 솟아 있고, 한양강 맑은 물은 앞에 흘러간다.
그 가운데 거룩하고 굉장한 집은, 협성신학교라.
(후렴) 찬양 찬양 찬양하세, 만세반석 위에 있는,
우리 협성신학교를 높이 찬양하세.
2. 삼천리 반도에 각 곳으로부터 온, 진실하고 충성 있는 모든 신도를,
성경진리 제반 신학 열심 교수 해. 교역자를 양성.
3. 하나님이 우리학교를 창립하사, 성신으로 친히 인도하여 주시니.
하늘나라 확장하는 중대기관이, 영원히 되니라.
(“神學世界”, 第一號. 朝鮮京城 監理敎會 協成神學校 刊行, 1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