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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시감상
문임무숙삭과 / 권필
聞任茂叔削科 權韠
宮柳靑靑鶯亂飛(궁류청청앵란비) 궁궐 버들 푸르고 꾀꼬리 어지러이 나는데
滿城冠蓋媚春暉(만성관개미춘휘) 성안에 가득한 높은 사람 봄 햇살에 아첨하네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락) 조정에서 함께 태평의 즐거움을 축하하는데
誰遣危言出布衣(수견위언출포의) 누가 바른말 하여 포의로 쫓겨났나?
〈감상〉
이 시는 「궁류시(宮柳詩)」라고도 하는데 임숙영(任叔英)이 지은 대책문(對策文) 때문에 과거에서 떨어진 소식을 듣고 지은 시이다. 광해군(光海君)의 비(妃)인 유씨(柳氏)의 척리(戚里)들이 방자하게 권세를 부리자, 권필이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하였는데, 마침내 이 시로 무옥(誣獄)에 걸려들어 광해군의 친국(親鞫)하에 혹독한 형신(刑訊)을 받고 감사(減死)되어 경원부로 귀양 가는 도중, 동대문 밖에서 동정으로 주는 술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 시에서 말한 궁궐의 버들은 유씨를 비유한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이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신해(辛亥, 1611년)조(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봉산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이 도적을 잡아서 매우 혹독하게 국문하니, 도적이 죽음을 늦추려고 문관(文官) 김직재(金直哉)가 모반하였다고 하였다. 신율(申慄)이 병사 유공량(柳公亮), 감사 윤훤(尹暄) 등을 통하여 조정에 알리고, 김직재를 묶어 올려 보냈다. 그를 국문하니, 김직재가 황혁(黃赫)과 같이 모의하여 진릉군(晉陵君)을 추대하려 했다고 거짓으로 말하였다. 진릉군은 곧 순화군(順和君)의 양자이며, 순화군의 부인은 황혁의 딸이다. 모두 잡아다가 국문했는데, 황혁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 옥사가 끝나자, 유공량(柳公亮)·신율(申慄) 및 추관(推官)은 모두 녹훈(錄勳)되었다. 옥사가 신해년(1611)에 일어나 임자년(1612)에 끝났다. (『하담록(荷潭錄)』, 『명륜록(明倫錄)』).
황혁 집의 문서를 수색할 때에 문서 가운데서 권필의 시를 얻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국청에서 시어(詩語)에 원망하고 비방하는 뜻이 있다 하여 권필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여, 형벌을 받고 멀리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고, 권필의 형 권도(權韜)도 귀양을 갔다. 권필은 유학(幼學)으로, 시국에 마음이 상하여 과거를 그만두고 외척(外戚)들이 용사(用事)하는 것을 분히 여겨 이 시를 지었던 것이다.
여기서 궁궐 버들이란 왕비 유씨(柳氏)를 가리킨다
(鳳山郡守申慄(봉산군수신율) 捕盜鞫之甚酷(포도국지심혹) 盜欲緩死(도욕완사) 告文官金直哉謀反(고문관김직재모반) 申慄通于兵使柳公亮監司尹暄等聞于朝(신율통우병사유공량감사윤훤등문우조) 繫送直哉(계송직재) 鞫之(국지) 直哉誣稱與黃赫連謀(직재무칭여황혁련모) 欲推戴晉陵君(욕추대진릉군) 晉陵卽順和繼後子(진릉즉순화계후자) 而順和夫人赫之女也(이순화부인혁지녀야) 並拿鞫(병나국) 赫殞於杖下(혁운어장하)
獄成(옥성) 柳公亮申慄及推官皆錄勳(유공량신율급추관개록훈) 獄起於辛亥(옥기어신해) 成於壬子(성어임자) 荷潭錄明倫錄(하담록명륜록) 黃赫家文書搜探時(황혁가문서수탐시) 得權蹕詩於文書中(득권필시어문서중) 詩曰(시왈) 宮柳靑靑鶯亂飛(궁류청청앵란비) 滿城冠蓋媚春輝(만성관개미춘휘)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락) 誰使危言出布衣(수사위언출포의) 鞫廳以詩語有怨誹意(국청이시어유원비의) 請拿鞫(청나국) 受刑遠竄(수형원찬) 道死(도사) 鞸兄韜亦被謫(필형도역피적) 鞸以幼學(필이유학) 傷時廢科(상시폐과) 憤戚里用事(분척리용사) 有此句(유차구) 宮柳蓋指王妃柳氏也(궁류개지왕비류씨야)).”
이러한 것은 권필이 지닌 하층민에 대한 연민과 지배층에 대한 적개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 권필이 쓴 「답송보서(答宋甫書)」에서 이러한 성향을 읽을 수 있다.
“저는 타고난 성품이 오활하고 방자해서 시속과 어울림이 적습니다. 좋은 집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침을 뱉고 지나가고, 누추한 거리의 초라한 집을 보면 반드시 서성이며 돌아보면서 팔을 베고 누워 물만 마시고 있더라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사람을 본 듯이 생각했습니다. 늘 높은 벼슬아치로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하는 자를 만나면 종놈같이 천하게 여겼으나, 기개 있는 개백정으로 향리에서 천대받는 자를 보면 흔쾌히 따라 놀기를 바라며, ‘슬픈 노래를 부르며 강개한 사람을 보기를 바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시속에서 괴상하게 보이는 까닭이지만, 저도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세상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아 장차 산야에 물러나 마음을 거두고 성정을 길러 옛사람이 말한 도라는 것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僕受性疏誕(복수성소탄) 與俗寡諧(여속과해) 每遇朱門甲第(매우주문갑제) 則必唾而過之(칙필타이과지) 而見陋巷蓬室(이견루항봉실) 則必徘徊眷顧(칙필배회권고) 以想見曲肱飮水而不改其樂者(이상견곡굉음수이불개기락자) 每遇紆靑拖紫(매우우청타자) 擧世以爲賢者(거세이위현자) 則鄙之如奴虜(칙비지여노로) 而見任俠屠狗(이견임협도구) 爲鄕里所賤者(위향리소천자) 則必欣然願從之遊曰(칙필흔연원종지유왈) 庶幾得見悲歌慷慨者乎(서기득견비가강개자호) 此僕之所以見怪於流俗(차복지소이견괴어류속) 而僕亦不能自知其何心也(이복역불능자지기하심야) 以此不欲與世俯仰(이차불욕여세부앙) 思將退伏山野(사장퇴복산야) 收心養性(수심양성) 以求古人所謂道者(이구고인소위도자)).”
〈주석〉
〖冠蓋(관개)〗 높은 벼슬아치. 〖媚〗 아첨하다 미, 〖暉〗 빛 휘, 〖昇平(승평)〗 태평. 〖危〗 바르다 위
문임무숙삭과 / 권필
聞任茂叔削科 權韠
祭罷原頭日已斜(제파원두일이사) 제사 마친 들판에 해는 이미 기울고
紙錢翻處有鳴鴉(지전번처유명아) 지전 흩날리는 곳에 갈까마귀만 운다
山蹊寂寂人歸去(산혜적적인귀거) 적적한 산길에 사람들은 돌아가고
雨打棠梨一樹花(우타당리일수화) 팥배나무 한 그루 꽃잎 위로 빗발치네
〈감상〉
이 시는 한식날 지은 것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한식날 제사를 마친 들판에 해는 이미 기울고, 지전을 불태워 흩날리는 곳에 갈까마귀만이 제사 음식을 먹으려고 주변에 서성거리며 운다. 곧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적적한 무덤과 산길만 남았는데, 봄비가 팥배나무 한 그루 꽃잎 위로 빗발친다.
봄비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인생이란 무상한 것이며 덧없는 것이다. 경중정(景中情)을 느낄 수 있는 시이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오자, 석주 권필이 포의로 종사관으로 선발되었는데, 선조대왕께서 석주의 시고를 찾아 들여오게 해서 향안에다 놓아두시고 항상 읊으시었다. 「한식」에, ······이 시는 지극히 곱다. 또 ‘한식 지난 마을에 밥 짓는 연기 오르고, 비 개고 난 저녁에 새들 지저귀네.’는 그 자연스러움의 오묘한 경지가 어찌 ‘부용꽃은 이슬에 떨어지고, 버들가지는 달빛 속에 성글다(소각(蕭慤)의 「추사(秋思)」)’에 뒤떨어지겠는가? 계곡 장유가 말하기를, ‘내가 석주를 보니, 그의 입에서 형상화되고 그의 눈앞에서 구성되는 모든 것이 시가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대개 석주의 시는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인가?
안타깝구나! 처음에는 시로써 선조대왕에게 인정을 받았다가 끝내는 시로 인하여 광해군에게 화를 당하였으니. 선비가 때를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이같이 달라진다
(天使顧崔之來(천사고최지래) 權石洲韠以白衣從事被選(권석주필이백의종사피선) 宣廟命徵詩稿以入(선묘명징시고이입) 置之香案(치지향안) 常諷誦之(상풍송지) 其寒食詩(기한식시) ······詞極雅絶(사극아절) 且如人煙寒食後(차여인연한식후) 鳥語晩晴時(조어만청시) 其自然之妙(기자연지묘) 何減於芙蓉露下落(하감어부용로하락) 楊柳月中疏(양류월중소) 谿谷曰(계곡왈) 余見石洲(여견석주) 凡形於口吻(범형어구문) 動於眉睫(동어미첩) 無非詩也云(무비시야운) 蓋石洲之於詩(개석주지어시) 眞所謂天授者歟(진소위천수자여) 惜乎(석호) 始以詩受知於宣廟(시이시수지어선묘) 終以詩得禍於光海(종이시득화어광해) 士之遇時(사지우시) 其幸不幸如此哉(기행불행여차재)).”
〈주석〉
〖翻〗 날다 번, 〖鴉〗 갈까마귀 아, 〖蹊〗 좁은 길 혜, 〖打〗 치다 타, 〖棠〗 팥배나무 당
용산월야 문가희창고인성정상공사미인곡 솔이구점 시조지세곤계 / 이안눌
江頭誰唱美人詞(강두수창미인사) 강 언덕에 누가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부르는가?
正是孤舟月落時(정시고주월락시) 바로 외로운 배에 달이 지는 이때에
惆悵戀君無限意(추창련군무한의) 슬프다, 임을 그리는 끝없는 뜻은
世間惟有女郞知(세간유유녀랑지) 세상에서 오직 여인만이 아는구나
〈감상〉
이 시는 용산 달밤에 가기(歌妓)가 고 인성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바로 시를 읊어 조지세 형제에게 준 시이다.
외로운 배에 지는 밝은 달빛 아래 기생이 부르는 처연한 노래가 독자를 더욱 비감(悲感)에 젖게 만든다. 『임하필기』에는 “이동악(李東岳)의 ‘강가에서 누가 미인사를 부르는가(江頭誰唱美人詞)’라는 시구는 다 절창이다.”라고 하였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 「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이안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 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詩)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이몽양(康海·李夢陽, 명(明)의 전칠자(前七子)로 시문(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文)은 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詩)는 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
(吾東僻在海隅(오동벽재해우) 唐以上文獻邈如(당이상문헌막여) 雖乙支(수을지), 眞德之詩(진덕지시) 彙在史家(휘재사가)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불감신기과출어기수야) 及羅季(급라계) 孤雲學士始大厥譽(고운학사시대궐예) 以今觀之(이금관지) 文菲以萎(문비이위) 詩粗以弱(시조이약) 使在許鄭間(사재허정간) 亦形其醜(역형기추) 乃欲使盛唐爭其工耶(내욕사성당쟁기공야) 麗代知常(여대지상) 足窺一斑(족규일반) 亦晩李中穠麗者(역만이중농려자) 仁老奎報(인로규보) 或淸或奇(혹청혹기) 陳澕洪侃(진화홍간) 亦腴艶(역유염) 而俱不出長公度內耳(이구불출장공도내이) 及至益齋倡始(급지익재창시) 稼牧繼躅(가목계촉) 圃陶惕(포도척) 爲季葉名家(위계엽명가) 逮國初(체국초) 三峯陽村(삼봉양촌) 獨擅其名(독천기명) 文章至是(문장지시) 始可稱達(시가칭달) 追琢炳烺(추탁병랑) 足曰丕變(족왈비변) 而中興之功(이중흥지공) 文靖爲鉅焉(문정위거언) 中間金文簡得圃(중간김문간득포), 陽之緖(양지서) 人謂大家(인위대가) 只恨文竅之透不高(지한문규지투불고) 其後容齋相詩入神(기후용재상시입신) 申鄭亦瞠乎其後(신정역당호기후) 蘇相又力振之(소상우력진지) 玆數公(자수공) 使生中國(사생중국) 則詎盡下於康李二公乎(칙거진하어강이이공호) 當今之業(당금지업) 文推崔東皐(문추최동고) 詩推李益之(시추이익지) 俱是千年以來絶調(구시천년이래절조) 而儕類中汝章甚婉亮(이제류중여장심완량) 子敏甚淵伉(자민심연항) 此外則不能知也(차외칙불능지야)).”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에는 이안눌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근일에는 실지(實之) 이춘영(李春英)이 시문에 능하다. 그 시가 비록 번잡한 것 같으나 기(氣)는 나름대로 창대(昌大)하여 작가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여장(汝章) 권필(權韠)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실지의 안목은 높아서 한 시대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나와 여장·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만을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균은 허세가 있고 권필은 말랐으며 이안눌은 융통성이 없다.’고 하였는데 역시 지당한 평론이다
(近日李實之能詩文(근일이실지능시문) 雖似宂雜(수사용잡) 而氣自昌大(이기자창대) 可謂作家(가위작가) 然不逮汝章多矣(연불체여장다의) 實之眼高(실지안고) 不許一世人(불허일세인) 獨稱余及汝章子敏爲可(독칭여급여장자민위가) 其曰(기왈) 許飫權枯李滯(허어권고이체) 亦至當之論也(역지당지론야)).”
〈주석〉
〖率爾(솔이)〗 갑작스러운 모양. 〖口占(구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음. 〖昆季(곤계)〗 형제. 〖正〗 바로 정, 〖惆〗 슬퍼하다 추, 〖悵〗 슬퍼하다 창
각주
1 이안눌(李安訥, 1571, 선조 4~1637, 인조 15):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증조할아버지는 이행(李荇)이고, 뛰어난 문장가인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하여 성시(省試)에 응시하려던 중 동료의 모함을 받아 과거 볼 생각을 포기하고 문학에 열중했다. 이때 동년배인 권필(權韠)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동악시단(東岳詩壇)이란 모임을 갖기도 했다. 1599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했다.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나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동부승지와 좌부승지를 거쳐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자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다음 해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1631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 도순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그 후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 때에 병중 노구를 이끌고 왕을 호종하다가 병세가 더하여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도학(道學)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문학에 힘쓰되 평생 “뜻을 얻으면 경제일세(經濟一世) 하고 뜻을 잃으면 은둔한거(隱遁閑居)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살았다. 특히 시작(詩作)에 주력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으면서도 작품창작에 매우 신중해서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시에 대해서 독실히 공부하는 태도를 견지하여 두보(杜甫) 시(詩)는 만독(萬讀)이나 했다고 하며, 여기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聞歌)」가 특히 애창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그가 옮겨 다닌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다. 특히 그의 생애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에 걸쳐 있으므로 전란으로 황폐해진 당시의 상황을 그의 시를 통하여 추적해 볼 수 있다.
곡석주 / 이안눌
哭石洲 李安訥
不恨吾生晩(불한오생만) 내가 태어난 것 늦은 것에 한할 것 없고
只恨吾有耳(지한오유이) 다만 내게 귀가 있는 것에 한할 뿐이네
萬山風雨時(만산풍우시) 모든 산에 비바람 불 때
聞着詩翁死(문착시옹사) 시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네
〈감상〉
이 시는 석주 권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쓴 시이다.
이안눌이 권필보다 2살 아래이니, 늦게 태어난 것이 한스러울 것은 없고 다만 죽음의 소식을 들은 귀가 있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시옹(詩翁)이라 한 권필은 광해군의 뜻에 거스른 벗 임숙영(任叔英)이 과거에 합격했다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했다가 광해군의 분노를 사서 곤장을 맞고 귀향길에 오르다가 동대문 밖에서 술을 마시다 객사했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에서 이안눌(李安訥)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시는, 근고(近古)에는 이러한 품격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명가(名家) 속에 섞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석주(石洲) 권필(權韠), 눌재(訥齋) 박상(朴祥),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등 여러 문집만은 못하다. 동악(東岳)의 시(詩)는 언뜻 보면 맛이 없지만 다시 보면 좋다. 비유하자면 샘물이 졸졸 솟아 천 리에 흐르는 것과 같아서,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스스로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다. 읍취헌(挹翠軒)은 정신과 의경(意境)이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음운(音韻)이 청아한 격조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산수 간에 노니는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에서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배웠다고 하나 대개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아 당(唐)·송(宋)의 격조를 논할 것 없이 시가(詩家)의 절품(絶品)이라 할 만하다.
눌재(訥齋)는 고상하고 담백하여 스스로 무한한 취미(趣味)가 있으니, 비록 읍취헌과 겨룰 만하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석주(石洲)는 비록 웅장함은 부족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있는데 가끔은 깨우침을 주는 것이 있다. 성당(盛唐)의 수준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당(唐)의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면 너무 폄하한 것이다. 소재(蘇齋)는 19년간을 귀양살이하면서 노장(老莊)의 서적을 많이 읽어서 상당히 깨우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음운이 뛰어나게 웅장하다. 옛사람이 이른바 ‘황야(荒野)가 천 리에 펼쳐진 형세’라고 한 것이 참으로 잘 평가한 말이다.
그러나 그 대체는 염락(濂洛)의 기미(氣味)를 잃지 않았으니, 평생 한 학문의 힘은 역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三淵之詩(삼연지시) 不但近古無此格(불단근고무차격) 雖廁中國名家(수측중국명가) 想或無媿(상혹무괴) 而猶遜於東岳挹翠石洲訥齋蘇齋諸集(이유손어동악읍취석주눌재소재제집) 東岳詩(동악시) 驟看無味(취간무미) 再看却好(재간각호) 譬如源泉渾渾(비여원천혼혼) 一瀉千里(일사천리) 橫看竪看(횡간수간) 自能成章(자능성장) 挹翠神與境造(읍취신여경조) 格以韻淸(격이운청) 令人有登臨送歸之意(영인유등림송귀지의) 世以爲學蘇黃(세이위학소황) 而蓋多自得(이개다자득) 毋論唐調宋格(무론당조송격) 可謂詩家絶品(가위시가절품) 訥齋淸高淡泊(눌재청고담박) 自有無限趣味(자유무한취미) 雖謂之頡頏挹翠(수위지힐항읍취) 未爲過也(미위과야) 石洲雖欠雄渾(석주수흠웅혼) 一味裊娜(일미뇨나) 往往有警絶處(왕왕유경절처) 謂之盛唐則未也(위지성당칙미야) 而謂之非唐則太貶也(이위지비당칙태폄야) 蘇齋居謫十九年(소재거적십구년) 多讀老莊書(다독로장서) 頗有頓悟處(파유돈오처) 故其韻遠(고기운원) 其格雄(기격웅) 古人所謂荒野千里之勢(고인소위황야천리지세) 眞善評矣(진선평의) 然其大體(연기대체) 則自不失濂洛氣味(칙자불실렴락기미) 平生學力(평생학력) 亦不可誣也(역불가무야)).”
기가서 이수 / 이안눌
寄家書 二首 李安訥
其一(기일)
欲作家書說苦辛(욕작가서설고신) 집에 보낼 편지를 씀에 괴로움을 말하고 싶어도
恐敎愁殺白頭親(공교수살백두친) 흰 머리 어버이를 근심시킬까 걱정하여
陰山積雪深千丈(음산적설심천장) 그늘진 산 쌓인 눈의 깊이가 천 장인데
却報今冬暖似春(각보금동난사춘) 도리어 금년 겨울을 봄처럼 따뜻하다 알리네
〈감상〉
이 시는 함경도 북평사라는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집에 편지를 보내면서 지은 시이다.
집에 보낼 편지를 씀에 현재의 괴로움을 말하고 싶다. 북방에서의 벼슬살이가 추위를 비롯하여 쉽지 않다. 그래서 몸이 많이 야위었다. 지난해 집에서 보낸 편지와 겨울옷을 해를 넘겨서 받았는데, 집 식구는 남편이 변방에서 고생하느라 야윈 줄도 모르고 옷을 예전 입던 치수에 맞추어 보낸 까닭에 헐겁기 그지없다(「득가서(得家書)」 절새종군구미환(絶塞從軍久未還) 향서수도격년간(鄕書雖到隔年看) 가인불해정인수(家人不解征人瘦) 재출한의저구관(裁出寒衣抵舊寬)).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쓰고 싶은데, 늙으신 어버이를 근심시킬까 걱정하여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늘진 산에 쌓인 눈의 깊이가 천 길인데도, 도리어 ‘금년 겨울은 봄처럼 따뜻합니다.’라고 쓴다.
〈주석〉
〖寄〗 부치다 기, 〖愁殺(수살)〗 매우 근심하게 함(살(殺)은 깊은 정도를 표시함).
其二(기이)
塞遠山長道路難(새원산장도로난) 먼 변방 산은 길고 도로는 험하니
蕃人入洛歲應闌(번인입락세응란) 변방 사람 서울에 닿을 때면 해도 늦었겠지
春天寄信題秋日(춘천기신제추일) 봄날 보낸 편지에 가을 날짜 적은 것은
要遣家親作近看(요견가친작근간) 어버이에게 근래 보낸 편지로 여기시라 함이네
〈감상〉
먼 변방이라 산은 많고 도로는 험하니, 변방 사람이 편지를 가지고 서울에 닿을 때면 연말이 다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봄날 보낸 편지에 가을 날짜 적어 보낸 것은 부모님께서 근래 보낸 편지로 여기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에는 이안눌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사람들이 자민의 시는 둔하여 드날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가 함흥에 있을 때에 지은 시에, ‘비 개자 관가의 버들 푸르게 늘어지니, 객지에서 처음 맞은 삼월 삼짇날이라네. 다 함께 고향 떠나 돌아가지 못한 신세, 가인은 「망강남」의 노래를 부르지 마소’는 청초(淸楚)하고 유려(流麗)하니 중국 사람들과의 차이가 어찌 많다 할 수 있겠는가
(人謂子敏詩鈍而不揚者(인위자민시둔이불양자) 非也(비야) 其在咸興作詩曰(기재함흥작시왈) 雨晴官柳綠毿毿(우청관류록삼삼) 客路初逢三月三(객로초봉삼월삼) 共是出關歸未得(공시출관귀미득) 佳人莫唱望江南(가인막창망강남) 淸楚流麗(청초류려) 去唐人奚遠哉(거당인해원재)).”
그리고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택당 이식(李植)이 하루는 동악 이안눌을 뵈러 갔는데(이식은 이안눌의 재종질(再從姪)이다), 마침 그 자리에 스님 두 분이 찾아와 앉아 있었다. 그때는 정월 초닷새였고, 그전 사흘 동안 연이어 눈이 내렸다. 동악이 즉시 입으로, ‘봄날 닷새에 눈은 사흘 동안 내리고’라고 불렀다. 택당이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며 잠시 대구가 어떻게 놓일까 기다리고 있었더니, 동악이 또 ‘먼 손님 네 분에 스님이 두 분이로구나!’라 하였다.
대구가 지극히 묘하여 택당이 경탄하기를 마지않았다
(澤堂一日往拜東岳(택당일일왕배동악) 適有二緇徒來在(적유이치도래재) 時維正月之初五(시유정월지초오) 而前三日連雪(이전삼일연설) 東岳卽口占(동악즉구점) 春天五日雪三日(춘천오일설삼일) 澤堂睼視(택당제시) 姑俟其對句如何(고사기대구여하) 東岳又吟(동악우음) 遠客四仁僧二人(원객사인승이인) 儷偶極妙(여우극묘) 澤堂驚歎不已(택당경탄불이)).”
라 하여, 이안눌의 뛰어난 시재(詩才)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석〉
〖蕃〗 울타리 번, 〖闌〗 늦다 란, 〖遣(견)〗 =사(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