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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덕응방(德應房)
정의
조선시대 내사복시(內司僕寺)에 소속되어 가마[輦]와 안장[鞍]을 관리하던 곳.
개설
덕응은 ‘덩’에서 음을 취해 만든 단어이며 덩은 공주나 옹주가 타는 가마를 말한다. 덕응방이 소속되어 있던 내사복시는 사복시(司僕寺)에 소속된 관아로서 궁중에서 왕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던 기관이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면서 정3품아문의 관청으로 정비되었다.
덕응방은 그중에서도 가마와 안장을 관리하였으며[『문종실록』 즉위년 9월 19일] 경복궁에서 광화문(光化門)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창경궁에도 홍화문(弘化門) 오른쪽에 있었다.
위치 및 용도
광화문을 들어서면 양쪽에 담장이 있고 동쪽에는 협생문(協生門), 서쪽에는 용성문(用成門)이 있다. 협생문은 1칸짜리 사주문으로 이 문을 지나가면 봉의문(奉宜門), 광청문(廣淸門)을 통하여 동궁과 내전 권역으로 들어가고, 용성문을 통과하면 내사복시를 비롯하여 궐내 각사 등이 있는 권역으로 들어간다.
용성문 안쪽 경복궁의 서남 모서리에 위치한 내사복시의 건물들은 말이 있는 마랑(馬廊)과 수레를 보관하는 연고(輦庫), 말의 먹이를 보관하는 마량고(馬粮庫), 관련 관원과 마부의 처소로 구성되어 있다. 배치 형태는 내사복 본청을 중심으로 그 뒤에 덕응방이 있고 본청의 우측에 연고, 본청 전면에 좌우로 마랑이 있으며 마랑 오른쪽에 왕의 말을 끄는 종7품 잡직 마부의 처소인 견마배청(牽馬陪廳) 4칸이 있다. 덕응방의 우측에는 신당(神堂)이 있다.
변천 및 현황
고종대 이전의 경복궁을 그린 그림에는 사복시의 위치를 표시하지 않았으나 성종대에 경복궁 덕응방에서 세조의 어진을 채색한 것으로 보아[『성종실록』 7년 5월 5일] 조선전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에는 홍화문의 오른쪽에 해당하는 창경궁 남동쪽 궁장 안에 사복시가 있다. 배치 구성과 각 건물의 구성은 경복궁의 내사복 일곽과 마랑의 칸 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일치하고 있어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경궁의 내사복시와 마랑 일곽의 구성을 본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창경궁의 내사복은 경복궁과 달리 활을 쏘는 사정(射亭)이 2칸 있는 것인데, 이는 송나라 효종이 원나라를 대항하여 목마(木馬)로 적을 막고 철장(鐵杖)으로 물리쳤다는 고사에 따라 효종조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후에 이 정자를 없앴다가 1742년(영조 18)에 고쳐지었다.
형태
내사복시 영역의 중심 건물은 정면이 5칸이며 측면은 앞·뒤에 툇간이 있는 2칸 규모이고 오른쪽에 누마루, 방 2칸, 대청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덕응방의 모습은 창경궁과 창덕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東闕圖)」를 통하여 추정할 수 있다. 가마를 보관해야 하므로 전면에는 기둥 사이에 큰 널판문을 달고 뒤쪽은 통풍을 위한 살창을 달았다. 평면 크기는 내사복시 영역에서 가장 큰 정면 8칸에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반면 마구간인 마랑은 전면에는 벽체나 창호가 없이 개방되었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동궐도(東闕圖)」「북궐도형(北闕圖形)」
덕홍전(德弘殿)
정의
일제시대 덕수궁의 알현실로 조성된 건물.
개설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혼전인 경효전(景孝殿)으로 건립되었으나,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개조된 이후 덕홍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덕홍전으로 교체된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외빈과 신료들을 접견하였다[『순종실록부록』 5년 12월 2일].
위치 및 용도
덕홍전은 경운궁 내 함녕전(咸寧殿) 서쪽, 중화전(中和殿)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경효전이라고 하여 혼전의 제례에 이용하였으나, 나중에 덕홍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알현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용도로 건립되었다. 경효전은 명성황후의 전호(殿號)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돌아가시자 최초로 정해진 시호는 순경(純敬), 전호는 덕성(德成), 능호는 숙릉(肅陵)이었다. 당시 빈전(殯殿)은 경복궁태원전(泰元殿)으로 정했고, 혼전(魂殿)은 경복궁문경전(文慶殿)으로 정했다. 그러나 고종은 왕비의 장례를 바로 진행하지 않았다. 1896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으며,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새롭게 경운궁을 정비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왕비를 위한 빈전으로 경복궁의 경소전(景昭殿)을 경운궁에 이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96년 9월 4일에 왕비의 시신을 경복궁 태원전에서 경운궁 경소전으로 옮겨 모셨다. 또한 1897년(고종 34) 1월 6일에는 왕비의 시호, 능호, 전호를 모두 새롭게 교체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 능호는 홍릉(洪陵), 전호는 경효(景孝)로 개칭하였고, 3월 2일에 시호를 다시 명성(明成)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1897년(광무 1)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에도 왕비의 장례를 바로 치르지 않고 대신 조선이 황제국에 오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가 되었으며[『고종실록』 34년 10월 12일], 빈전에 나아가 왕후를 황후로 추존하였고, 명성황후의 국장은 11월 21일에 거행되었다.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은 이미 경소전으로 정해져 있었고, 우주(虞主)를 봉안한 이후 경효전의 역할을 담당했다.
1904년(광무 8) 경운궁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경효전으로 사용하던 경소전 역시 소실되었다. 화재 직후 명성황후의 우주는 준명전(濬明殿) 서행각에 임시 봉안하였고, 후에 수풍당(綏豐堂)으로 옮겨 모셔졌다. 이후 수풍당이 경효전이 되었다. 경운궁 화재 이후 중건 과정에서 경소전이 위치하고 있던 곳에는 원래 모습대로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기록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에는 건물명을 경효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건된 경효전은 동쪽에 4칸의 이안청(移安廳), 서쪽에 4칸의 중배설청(中排設廳)을 두었고, 정면에 내삼문인 융안문(隆安門)과 좌우 각 4칸의 행각을 두었다. 행각 밖에는 12칸의 어재실(御齋室)과 4칸의 숙목문(肅穆門)을 두었다. 또 숙목문 밖에는 25칸의 ㅁ자형 건물인 장방처소(長房處所)와 3칸의 돈례문(敦禮門)을 두었다.
경운궁 중건을 통해 다시 경효전이 만들어졌지만 정작 명성황후의 우주는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등 정세가 매우 불안해지면서 고종 역시 함녕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중명전(重明殿)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고종이 함녕전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명성황후의 우주는 계속 수풍당(綏豐堂)에 머물렀고, 고종이 서거한 이후인 1921년 3월 31일에서야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효덕전(孝德殿))에 모셔졌던 고종의 우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되었다.
그 와중에 경효전을 덕홍전으로, 즉 제례와 관련된 건물을 알현실로 바꾸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1912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덕홍전의 준공’이라는 제목 아래 “창덕궁 이왕 전하의 알현실 되는 인정전(仁政殿)에 의거하여 덕수궁에 건축 중인 덕홍전은 이미 낙성하여 6일 밤부터 점등하였는데 상세히 들은즉 공사비 6만여 원을 들여서 실내 장식과 다른 것들도 극히 화려한데 대벽화는 화백 천초신래자(天草神來子)의 것으로 필치가 용건하여 근래의 걸작이라더라.” 하는 글이 실려 있기도 하다.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건물의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다만 내부 마감은 크게 변했다. 바닥은 혼전[경효전]에 적합하게 전(甎)으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마루로 바꾸었다. 창호에는 커튼을 덧대어 설치했고 내부에 조명기구로 샹들리에를 설치하였다. 기존의 월대를 축소했고 진입 계단에 변화를 주었으며 동쪽의 함녕전, 서쪽의 귀빈실과 통행할 수 있도록 복도각을 설치했다. 현재도 복도각과 연결되었던 부분에는 서양식 판문이 설치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덕홍전으로 변경되면서 경효전 건물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경효전 주위의 부속 건물들은 크게 변했다. 경효전이 있을 당시에는 주변 건물들이 모두 제례와 관련된 건물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 새롭게 바뀐 것이다. 이때에는 기존 관제인 궁내부(宮內府)가 해체되고 이왕직(李王職)이 들어선 시기였다. 덕홍전 공사가 진행되면서 덕수궁 소속 이왕직 청사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고 찬시실, 귀빈실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덕홍전 전면의 삼문은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다. 귀빈실과 덕홍전 전면의 행각은 현재도 경운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만들어진 건물들에 대해 『매일신보』 1914년 1월 1일자 기사에서는 “일선제도(日鮮制度)를 절충한 것”이라고 했다. 즉 조선과 일본의 건축 기법을 모두 합한 건축물이라는 내용이다. 건축물 외형은 조선의 전통 양식을 따른 듯하지만 내부 구조체는 일본의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을 보면 건축 외형이 조선의 전통적인 양식을 따랐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입면 비례가 전통적인 조선의 건축과는 확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매우 수준이 떨어지는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형태
덕홍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평면을 하고 있고, 기둥은 방형기둥을 사용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이익공의 공포를 갖춘 건물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덕홍전은 고종의 알현 장소였으므로 일제시대 총독과 고위 관료들의 신임 인사 및 외교사절들의 인사를 받던 곳이었다.
참고문헌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문화재청, 2009.
이철원, 『왕궁사』, 동국문화사, 1958.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돈덕전(惇德殿)
정의
1901년(광무 5)경 경운궁에 건립된 건물.
개설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의 하나로, 1907년(융희 1) 8월 순종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다.
위치 및 용도
경운궁의 석조전 뒤쪽으로 현재의 포덕문(布德門)은 북동쪽에 있었다. 돈덕전의 ‘돈덕’은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오는 “덕 있는 이를 도탑게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惇德允元].”에서 따온 것이다. 고종황제가 신하들의 알현(謁見)을 받거나 연회를 베풀고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사용하던 곳이었다.
변천 및 현황
처음에는 총세무사인 영국인 브라운([栢卓安, 白卓安], M. Brown)이 관장하던 해관구역 안에 해관청사의 용도로 건축되었는데, 1897년(광무 1) 건립된 대한제국이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어 점차 경운궁의 영역을 확장했던 1901년 하반기에서 1902년(광무 6) 무렵에 경운궁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3년(광무 7) 이후 ‘돈덕전’으로 명명되고, 1904년(광무 8) 경운궁의 대화재 때에도 불에 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전 황제, 일명 덕수궁전하인 고종의 탄신연을 비롯하여 각종 연회가 벌어진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21년 7월에 덕수궁 관통도로가 만들어질 때까지 존재하다가 이후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현판만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규모는 길이 약 127척, 폭 약 95척, 면적은 건평 약 350평, 연평 700평의 서양식 2층 벽돌집이었다. 1층과 2층 외부를 모두 아치형 창으로 표현했고 2층에는 테라스를 설치하였으며, 난간은 오얏꽃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내부 중앙에 6개의 큰 원주(圓柱)가 있는 100평 넓이의 큰 방이 있었다. 남쪽 끝에 외문과 정문으로 나뉘어 있고 영국공사관 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과 러시아공사관을 설계한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인 사바틴(([薩巴丁, 薩巴珍], A.I Sabatin)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법규유편(法規類編)』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홍순민, 『우리 궁궐이야기』, 청년사, 2005.
김태중, 「개화기 궁중건축가 사바찐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12-7, 1996.
목수현, 「대한제국기의 국가 상징 제정과 경운궁」, 『서울학연구』40, 2010.
우동선, 「경운궁(慶運宮)의 양관(洋館)들」, 『서울학연구』40, 2010.
돈례문(敦禮門)
정의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 남쪽에 위치한 삼문.
개설
돈례문(敦禮門)은 창덕궁의 선정전(宣政殿) 남행각에 위치한 문으로 양쪽에 협문을 갖춘 삼문(三門) 형식이다. 선정전의 남행각은 이중으로 구성되어 이중행각에 각각 삼문이 설치되었는데, 내삼문을 돈례문이라 하고, 외삼문을 선정문(宣政門)이라 한다.
1561년(명종 16)에 돈례문에 벼락이 쳤던 일을 기록할 때, 돈례문을 ‘선정전의 어문(御門)’이라 하였다. 다음 날에 상참을 행하기 위하여 돈례문에 왕을 상징하는 깃발을 내다 놓았는데, 이곳에 벼락이 내려 깃대와 문선이 부러지는 일이 있었다[『명종실록』 16년 4월 8일].
위치 및 용도
돈례문은 선정전의 앞마당으로 들어서는 경계가 되는 문이다. 선정전에서 의례를 행할 때 왕의 막차를 돈례문 밖 동쪽에 설치하고 의례가 시작되면 돈례문을 통해 선정전으로 들어선다.
1659년(현종 즉위)에 현종이 즉위식을 행할 때 사례를 살펴보면, 돈례문의 동쪽 협문에 막차를 설치하고 면복을 갖추어 입고 막차에서 나와 선정전 동쪽 마당을 통해 빈전에 들어 대보(大寶)를 받는다. 그리고 돈례문의 서협문을 통하여 선정문의 동협문을 경유하고 연영문(延英門)과 숙장문(肅章門)을 지나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식을 행하였다[『현종실록』 즉위년 5월 9일].
선정전에서 빈전 의례를 행할 때는 돈례문이 빈전의 정문이 되었다. 돈례문 밖에서 문무백관의 배례가 이루어졌다. 돈례문 안으로 들어서서 빈전 안에서 의례를 행하는 사람은 의례를 인도하는 통례(通禮)와 헌관에 한정되었다.
변천 및 현황
돈례문은 본래 이름은 융례문(隆禮門)이었다. 1497년(연산군 3)에 왕의 이름과 같은 음을 갖는다 하여 ‘융(隆)’ 자를 ‘돈(敦)’ 자로 바꿔 돈례문이라 하였다[『연산군일기』 3년 1월 9일].
18세기 후반부터 돈례문이라는 이름은 기록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동궐도(東闕圖)」에 선정전 남행각의 외삼문에는 선정문이라 기록하였으나, 내삼문에는 문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19세기 이후 선정전을 혼전으로 사용하면서 돈례문의 현판을 떼어내고 혼전의 이름을 붙여 사용하면서 점차 잊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1904년(광무 8)에 경운궁에서 화재가 일어난 이후 경운궁 내에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신주를 봉안하는 경효전(景孝殿)을 건립하였는데, 경효전의 외삼문도 돈례문이라 하였다. 고종대에 기록된 돈례문은 경운궁 즉 덕수궁 내에 위치한 문이다.
참고문헌
「동궐도(東闕圖)」
돈화문(敦化門)
정의
창덕궁의 정문.
개설
1405년(태종 5) 창건된 창덕궁은 규모가 작고, 아직 완벽한 모습을 갖추지도 못한 상태였다[『태종실록』 5년 10월 13일]. 궁궐의 한계를 정하는 궁장(宮墻)도 1412년(태종 12) 5월 22일에서야 모두 갖추어졌다[『태종실록』 12년 5월 22일].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의 이름은 이때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돈화문의 건설을 거론하는 기사가 이때 처음 나오지만, 창덕궁의 동·서·남·북 문은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돈화문은 『중용(中庸)』의 “소덕천류(小德川流)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따온 이름이다. ‘작은 덕은 흐르는 시내 같아도 큰 덕은 가르치고 이끄는 교화를 돈독히 하니 천지가 위대해진다.’ 하는 뜻이다. 왕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과 돈독하니, 궁궐을 드나드는 모든 관료들의 백성을 대하는 태도 또한 ‘덕(德)’을 잃지 말기를 당부하는 의미일 것이다.
위치 및 용도
궁궐 제도의 규범은 정문에서 주요 전각이 일직선상에 놓이고, 국왕은 남면해야 하므로 남향한 전각을 짓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더욱이 궁궐의 정문은 중앙에 놓여 전체적인 배치 구도상, 좌우 대칭의 무게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궁궐의 서남쪽에 치우쳐 놓여 있다. 궁궐의 정문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간 주작대로가 형성되는 것 또한 고대부터 내려오는 궁궐 제도의 규범이다.
그러나 창덕궁은 궁궐 제도와는 무관한 배치 개념으로 궁궐을 놓았다. 창덕궁 창건 이전에 이미 종묘가 제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북쪽에 창덕궁이 들어앉은 만큼, 협소한 대지를 운용하는 방식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돈화문이 궁궐의 서남쪽으로 치우쳐 위치하게 된 것은 돈화문 앞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가야 하는 대로가 종묘를 관통해 나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살려 낸 운용의 묘였다고 추측된다. 궁궐문의 이용에 있어서도 운용의 묘가 있었다. 돈화문의 동쪽 가까이 단봉문(丹鳳門)이 위치해 있고 동쪽 가까운 곳에는 금호문(金虎門)이 위치해 있었다. 창경궁을 경계로 창덕궁의 동문은 건양문(建陽門), 서문은 경추문(景秋門)이다. 조정의 신료들은 금호문으로 드나들었지만, 대관은 반드시 돈화문으로 출입했다.
태종대 창건된 돈화문에는 종을 궁문에 달아 놓아 새벽에 종을 울려 신하들의 조회하는 일을 엄격히 하였다[『태종실록』12년 9월 15일]. ‘새벽을 알리는 종이 울리니 닭이 울기 전에 왕은 벌써 일어나, 궐문이 열리고 왕이 어좌에 나오시니 조신들이 엄숙히 뜰에 엎드려 절하고 있다.’ 하는 윤회(尹淮)가 지은 「돈화문신종(敦化門晨鍾)」은 이러한 궁궐의 아침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돈화문은 궁궐의 정문일 뿐 아니라 궁궐의 모든 행사에서 궁궐의 안과 밖을 나누는 기점으로 사용되는 공간이었다. 돈화문 안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고 병사들에게 음식을 내려 주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태종 연간, 창덕궁 완공 후에 조영되었으며 이때에는 문루에 공덕을 새긴 종을 주조하여 매달았다. 이후 1450년(문종 즉위) 6월, 창덕궁에서 왕이 죽은 신하를 위한 사제(賜祭)를 행하면서 돈화문을 수리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13일]. 이때 명나라 사신이 조선으로 와 사제에 참례하였기 때문이었다. 1495년(연산군 1) 6월, 연산군은 돈화문 밖 좌우 행랑 가까이에 있는 집을 모두 철거시켜 담을 쌓고 돈화문의 규모를 장대히 하였으며, 모퉁이에 하마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 돈화문도 함께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 창덕궁 복원과 함께 복원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평상시와 같이 종을 주조하여 돈화문에 매달아 두라는 전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여전히 돈화문의 종은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광해군일기』 12년 11월 15일]. 1628년(인조 6)에는 돈화문이 기울어져 개수를 위해 살폈더니 추녀가 손상되어 수리가 시급한데, 추녀를 수리할 만한 큰 재목의 수급이 어렵다고 토로하고 있다. 1721년(경종 1)에는 돈화문의 동쪽 부연 위·아래층이 무너져 급히 수리하였다[『경종실록』 1년 7월 20일].
1977년 비원(祕苑) 정화 계획의 일부로 돈화문 해체 수리가 있었는데 이때 광해군대의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의 기단과 월대를 지표면과 동일하게 묻어 마차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평지로 만들었는데, 1996년 돈화문 복원 사업으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따라서 광해군대에 복원된 돈화문의 형태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형태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 우진각지붕에 다포식 가구를 한 장대한 문이다.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은 두 짝 판문으로 되어 있고 양쪽 칸은 벽으로 마감해 출입할 수 없도록 하였다. 「동궐도(東闕圖)」상의 돈화문 좌우에 놓인 행각은 문을 지키고 입직하는 군관들이 사용했던 수문장청인데, 지금은 궁장으로 바뀌었다. 또 「동궐도」에서 보이는 팔작지붕과 현재의 우진각지붕은 차이가 있는데, 광해군대의 돈화문 형태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궐도」의 돈화문을 그리면서 생긴 착오라 여겨진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24년(인조 2) 인조반정 초기에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유린당했다. 이괄은 돈화문을 도끼로 찍어 열고 들어갔는데 이후 인조는 이러한 위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도끼 자국 난 돈화문을 개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758년(영조 34), 평양 사람 권이형(權以亨)이 인장을 위조한 죄로 옥에 구속되어 10년이 되어 갔다. 사형이 내려지자 그의 아내 홍조이(洪召史)가 한양으로 와서 남편을 위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화문 밖에 엎드렸다. 한 달이 넘어가자 영조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조는 돈화문 밖에 여인이 엎드린 것을 이상히 여겨 승지(承旨)에게 물었고, 남편의 용서를 청하는 부인의 갸륵한 마음을 가상히 여겨 부인을 정려(旌閭)하고 남편은 사형을 감해 정배토록 하였다. 은혜를 입은 홍조이는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장례 때 흙을 져 날랐고,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제사 때도 돈화문 밖에서 엎드려 있었다. 영조는 뜻을 가상히 여겨 여인에게 후한 상을 내려 주었다[『영조실록』 34년 3월 25일].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국조보감(國朝寶鑑)』
『궁궐지(宮闕志)』
『담헌서(湛軒書)』
『동문선(東文選)』
『만기요람(萬機要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심리록(審理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응천일록(凝川日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동궐(東闕)
정의
도성의 동쪽에 자리 잡았던 창덕궁과 창경궁을 아울러 이르는 별칭.
개설
동궐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아울러 지칭하는 별칭이다. 도성을 기준으로 청계천 북쪽의 경복궁은 북궐, 서쪽의 경희궁은 서궐, 동쪽의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이라고 한 것이다. 인조대 이후 주로 사용된 궁궐은 창덕궁이며,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이 하나의 궁역(宮域)으로 활용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이 두 궁궐을 합쳐 법궁(法宮)으로 인식할 때 동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이궁(離宮)인 경희궁을 서궐로 인식하는 것에 상응하는 개념이었다.
일상적으로 동궐은 이처럼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공동의 후원을 포함하고 있으면서 때로는 종묘까지 아우르는 넓은 영역을 의미할 때도 있다.
동궐이라는 말은 영조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영조실록』 영조대왕행장]. 『조선왕조실록』에서 183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용례가 늘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순조실록』 31년 7월 20일]. 동궐과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유물로 「동궐도(東闕圖)」와 「동궐도형(東闕圖形)」이 있어서 조선후기 동궐의 범위와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동궐, 즉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두 궁궐에서 공통으로 이용하는 후원은 서울의 응봉(鷹峯) 자락에 위치한다. 동궐은 산이 많은 한국의 지형을 가장 잘 활용한 궁궐로 평가된다. 경복궁이 엄정한 남북 축을 중심으로 건물을 배치한 것과는 달리, 동궐은 지형에 맞춘 여러 개의 축을 따라 전각들이 횡으로 배열되는 것이 큰 특징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이 복원되지 않은 상태로 창덕궁을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동궐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궁궐이라 할 수 있다.
평지에 반듯한 직사각형의 궁성으로 둘러싸인 경복궁이 정형적인 공간 구조를 갖춘 데 비해, 응봉에서 내려오는 산자락을 끼고 있는 동궐은 건물의 배치도 지형에 따라 편의적으로 응용되었다. 후원은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창덕궁이나 창경궁 어느 한쪽의 것이 아니라 두 궁궐에서 공유하고 있는 형태이다. 이는 두 궁궐이 서로 구별되는 별개의 궁궐이면서 동시에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으로 묶이는 관계임을 잘 보여준다.
창경궁은 그 자체로 궁궐로서 필요한 공간 구조를 갖추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외전(外殿)이 빈약하고 내전(內殿)이 발달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즉 창경궁은 주로 주거 생활을 위한 공간이 발달된 반면, 도총부(都摠府)를 제외하면 궐내각사라고 할 만한 관서가 구비되지 않았고, 선원전(璿源殿)도 없었다. 결국 창경궁은 명목상으로는 독립적인 궁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창덕궁에 부족한 거주 공간을 보완하는 것을 주된 기능으로 하는 궁궐이었다. 따라서 창덕궁과 묶어서 하나의 궁궐 곧 동궐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상해, 『궁궐·유교건축』, 솔출판사, 2004.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동룡문(銅龍門)
정의
창경궁의 세자궁과 선인문 사이에 위치한 문.
개설
동룡문(銅龍門)은 중국 한(漢)나라 때 태자궁의 문루를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이 문루에는 구리로 만든 용이 장식되어 용루(龍樓)라고도 불렸다. 이런 까닭에 동룡문은 창경궁에 만들어진 실제 문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자궁, 즉 춘궁(春宮) 또는 동궁(東宮)을 달리 부르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내용
조선 왕실에서는 원자가 탄생한 것에 대해 “동룡문이 열렸다.”와 같이 표현하였다. 동룡문 대신에 동룡(銅龍) 또는 동위(銅闈)도 역시 세자궁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다[『연산군일기』 11년 8월 26일].
창경궁에 위치한 동룡문은 세자궁의 동쪽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세자궁 담장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어 명확히 세자궁의 동문이라고 지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룡문 동쪽에는 매우 넓은 마당이 만들어졌고 마당 동쪽 끝에는 금천과 선인문(宣仁門)이 있어 이를 통해 창경궁에 출입하였다. 이런 까닭에 동룡문이 문의 명칭으로 고문헌에 나올 때에는 왕이 창덕궁에서 창경궁을 거쳐 외부로 출궁하거나, 세자가 동궁에서 나와 외부로 출궁할 때 통과하는 경유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동룡문은 단칸의 대문으로 남과 북의 담장에 연결된 모습이다. 하지만 대한제국기의 기록인 『궁궐지(宮闕誌)』에서는 ‘동룡문이 1칸, 남과 북행각이 합해서 6칸’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동궐도형」에서도 동룡문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3칸의 마루[廳]가, 남쪽에는 3칸의 방(房)이 놓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19세기에 동룡문의 형태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동궐도」에 따르면 창경궁의 선인문을 지나 동룡문에 들어서면 서북편에 넓은 마당이 펼쳐지는데 마당 북쪽에는 계방(桂坊)이 위치하고, 마당 남쪽에는 춘방(春坊)이 위치한다. 마당의 서쪽 끝에는 2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쪽이 집현문(集賢門), 남쪽이 집영문(集英門)이다. 두 문은 모두 2칸으로 만들어졌다. 북쪽의 1칸은 솟을대문 형식이며, 남쪽의 1칸은 협문(夾門) 형식이다. 1648년(인조 26)에 동궁을 수리한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에는 두 대문에 내건 현판의 형태가 기록되었다. 집영문의 현판은 테두리가 있고 석자황을 칠한 반면, 집현문의 현판은 테두리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집영문의 위계가 휠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이나 세자는 집영문을 통과해 동궁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동궐도」
##그림1_00017959_「동궐도」, 창경궁 세자궁 부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동십자각(東十字閣)
정의
궁궐 정문 좌우에 놓인 망루.
개설
고대 중국에서는 궁(宮)의 정문 좌우에 높은 망루를 설치해서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이 망루를 일컬어 ‘궐(闕)’이라고 한다. 모든 황제국과 제후국의 궁에 이 시설을 설치했기 때문에 왕이 사는 집이라는 뜻의 ‘궁’과 망루인 ‘궐’이 합해져 ‘궁궐’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시대가 변하면서 궐도 형태를 달리했다. 정문 좌우 곁에 붙여서 만드는 대신에 정문과 많은 거리차를 두고 먼 곳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십자각(十字閣)은 일종의 궐 역할을 담당하는 망루로서 경복궁 광화문(光化門) 좌우측 궁장 끝과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좌우측에 설치했다.
내용
원래 십자각은 건물의 평면이 ‘십(十)’ 자 모양을 한 전각을 지칭한다. 대부분 궁궐에서 행각의 모서리는 두 방향의 용마루가 교차하게 된다. 이곳에 높게 누각을 설치할 경우에도 양 방향의 용마루에 맞춰 건물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건물은 평면에서 행각이 ‘십(十)’ 자로 교차하고, 또 용마루가 서로 ‘십(十)’ 자로 교차한다. 이런 건물 역시 ‘십자각’이라고 지칭했다. 대표적인 십자각은 창경궁 홍화문 좌우측에 위치한 건물들이다. 이들에 대한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승정원일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십자각은 대부분 창경궁의 십자각을 지칭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십자각은 모두 4차례 등장한다. 3차례는 조선초 세종 때의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말 고종 때의 기록이다. 1427년(세종 9)의 기록은 경복궁의 성벽 위에 있는 동서십자각이 심하게 기울어져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철거했다는 내용이다[『세종실록』 9년 3월 21일]. 1433년(세종 15)에는 홍례문(弘禮門)의 동십자각, 1435년(세종 17)에는 홍례문의 서십자각에서 부엉이가 울었다는 내용이다[『세종실록』 15년 10월 27일][『세종실록』 17년 12월 15일]. 여기서 십자각의 위치가 홍례문의 좌우쪽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는 십자각의 위치와 크게 다르다. 경복궁 홍례문은 오늘날의 흥례문(興禮門)에 해당한다. 조선초에는 흥례문 좌우측에 십자각을 만들었는데,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흥례문 좌우에 따로 십자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고종실록』에 등장하는 십자각은 화재와 관련한 내용이다. 1866년(고종 3)에 동십자각에 있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가건물에서 불이 나 가건물 800여 칸과 목재가 모두 불에 타 버렸다[『고종실록』 3년 3월 6일]. 같은 날 『승정원일기』를 보면 좀 더 상세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새롭게 경복궁을 중건하는 중이었다. 따라서 경복궁 내에는 궁궐을 짓기 위한 가설건물이 매우 많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동십자각 인근에 만들어 놓은 훈련도감이 담당하는 화사(畫師)들의 가설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가 번져 주변의 치목(治木)을 담당하는 가설 건물로 옮겨 붙어 800여 칸을 태웠는데, 이곳에 보관하던 가공한 목재가 모두 소실됐다는 내용이다.
고종대에 만들어진 경복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에 대해 『궁궐지(宮闕誌)』에서는 모두 ‘9칸이며 이익공(二翼工)’이라고만 기록했다. 경복궁의 십자각은 평면이 사각형이며 지붕은 모임지붕이다. 따라서 앞서의 십자각과는 모습이 다르다. 하지만 십자각 하부에 위치한 성벽이 ‘십(十)’ 자 모양으로 교차하기 때문에 이런 유형의 건물 역시 십자각이라고 칭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궁궐지(宮闕誌)』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그림1_00017944_창경궁 홍화문과 십자각, 『조선고적도보』 10권.
##그림2_00017944_경복궁 동십자각, 『조선고적도보』 10권
등현문(登賢門)
정의
1776년(정조 즉위)에 주합루 동쪽 담장에 설치한 협문.
개설
등현문(登賢門)은 규장각(奎章閣) 건립 당시 주합루(宙合樓) 동쪽 담장에 설치한 문으로 이 문을 통하여 영화당(暎花堂)과 춘당대(春塘臺) 쪽으로 오갈 수 있었다. 『규장각지(奎章閣志)』에는 ‘등현문’이라는 액호(額號)에 대해 ‘택궁(澤宮)인 영화당이 선비를 뽑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 등현문의 편액은 규장각 건립 당시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이던 서명선(徐命善)이 쓴 것이다. 건립 이후 여러 번 수리되기는 했으나, 변함없이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
위치 및 용도
등현문은 주합루 동남쪽에 설치한 문으로 주합루와 영화당 및 춘당대 권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변천 및 현황
등현문은 1776년(정조 즉위)에 주합루·서향각(書香閣)이 건립될 때 함께 설치한 문이다. 등현문 담장 안쪽으로는 연사(燕射)를 위해 불운정(佛雲亭)을 함께 건립하였다. 이에 정조는 등현문에서 내시사(內試射)를 설행하기도 했다[『정조실록』 1년 3월 13일].
현재 불운정이 있던 위치에는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라는 현판이 걸린 ㄱ자형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천석정(千石亭)으로 1798년(정조 22)~1799년(정조 23)에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도 역시 정조가 내시사를 하였다. 등현문은 영화당과 규장각 영역을 왕래하기 위해 설치한 협문(夾門)이므로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다. 등현문은 지속적인 관리와 수리를 거치면서 같은 장소에 남아 있다.
형태
등현문은 신방석 위에 신방목을 얹고 그 중심에 기둥을 꽂아 세워 앞뒤로 용지판을 붙인 후 상부에 창방을 얹어 지붕을 꾸민 일각문이다. 창방 위에 목기연을 2단으로 얹어 상부를 구성한 이모끼[二木只]문으로 우진각 기와지붕이다. 기둥과 판문에는 붉은 칠을 하고 창방과 목기연에는 뇌록 긋기 단청을 했다. 183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東闕圖)」에는 지붕이 맞배로 표현되어 있어 현재와는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규장각지(奎章閣志)』
『내각일력(內閣日曆)』「동궐도(東闕圖)」『홍재전서(弘齋全書)』
만경전(萬慶殿)
정의
고종대 중건한 경복궁의 자경전 북쪽의 침전.
개설
1867년(고종 4)경 경복궁 자경전(慈慶殿)의 북쪽에 침전 일대의 전각으로 조성되었다[『고종실록』 4년 8월 18일]. 1876년(고종 13)에 대화재로 내전의 주요 전각이 소실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소실된 전각을 복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1885년(고종 22) 경복궁으로 환어했다.
주요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이 불타서 없는 상태였으므로 건물을 재건하기 전까지 만경전이 정침전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따라서 내전이 재건되기 전까지 만경전에서 대신과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고종실록』 25년 7월 4일], 왕실의 연회와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열었다.
위치 및 용도
자경전 북쪽으로 만경전(萬慶殿), 만화당(萬和堂), 통화당(通和堂)이 있고, 서쪽에는 건복합(建福閤)이 있다. 경복궁에서 내전의 전각은 정침인 강녕전과 교태전(交泰殿), 신정왕후(神貞王后)를 위한 자경전 외에 당시 왕실에 생존해 있었던 헌종비 효정왕후(孝定王后)와 철종비 철인왕후(哲仁王后), 헌종의 후궁인 순화궁(順和宮) 김씨(金氏)를 위한 중소침(中小寢)으로 덕필당(德必堂), 만경전, 흥복전(興福殿), 만화당이 있었다. 이 중에서 어느 전각에 누가 거처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비를 모실 만한 위상을 가진 만경전과 흥복전이 두 분의 대비를 위한 전각으로 조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변천 및 현황
만경전과 그 북쪽에 위치한 만화당, 통화전, 건복합은 1867년경 준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1873년(고종 10)의 화재로 소실된 덕필당을 제외하고 이 일대는 경복궁 중건 이후 두 차례의 내전 일곽 화재에서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종이 1885년(고종 22) 경복궁으로 환어한 후 만경전은 내전의 정침을 대신하고, 나머지 전각은 왕실 일가의 주요 거처가 되었다. 1920년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과 희정당(熙政堂)이 화재로 소실되자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 대조전 일곽을 재건했다. 이때 만경전은 대조전의 징광루(澄光樓) 자리로 옮겨져 현재 경훈각(景薰閣)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만화당은 1897년(광무 1) 어진 봉안처로 사용한다는 명목으로 경운궁에 이건되었다[『고종실록』 34년 5월 20일]. 그러나 만화당의 남행각에 있던 치중문(致中門), 동행각의 응춘문(凝春門), 북행각의 형복당(亨福堂)이 경운궁 함녕전(咸寧殿) 행각의 문 이름, 당호와 일치하고 있어서 만화당이 함녕전을 짓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만화당을 이건한 것으로 보이는 함녕전은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되었다.
형태
만경전 일곽은 ㅁ자형의 행각 중앙에 일자형 평면의 만경전이 놓여 있으며 동쪽 전퇴에서 동행각으로 2칸의 복도가 설치되었다. 만경전은 자경전의 복안당과 청연루(淸讌樓)를 제외한 본 건물과 거의 같은 규모로서 툇간을 포함하여 정면 9칸, 측면 4칸이다. 중앙에 3칸의 대청을 두고 양쪽에 대칭으로 온돌방 2칸씩을 두고 있으며 4면에 툇간을 두고 있다. 남행각의 문은 「북궐도형(北闕圖形)」에는 양화문(養化門)·광의문(廣宜門)으로 되어 있으나 중건 시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올린 이름은 대유문(大有門)·유덕문(惟德門)이다. 1887년(고종 24)에 열린 진찬을 정리한 『[정해]진찬의궤([丁亥]進饌儀軌)』에는 대유문으로 되어 있어서 1887년 이후 문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만경전의 동행각에는 함춘문(咸春門)·인양문(寅陽門)이 있고 서행각에는 의춘문(宜春門)·경성문(景成門)과 건화당(建和堂)이 있다. 북행각의 문은 평재문(平在門)이고 남쪽 제수합과 사이에는 일각문인 보화문(輔化門)이 있다.
만화당은 만경전과 규모와 양식이 같고 행각의 규모도 같으나 다만 동·서 행각이 1칸씩 적다. 만화당의 남행각에는 치중문(致中門)·협강문(協康門), 동행각에는 응춘문(凝春門)·선양문(宣陽門)이 있다. 북행각에는 용성문(用成門)·선가당(宣嘉堂)·형복당(亨福堂)이 있고, 서행각에는 가성문(嘉成門)·건추문(建秋門)이 있다.
건복합은 만경전 서행각 바깥쪽에 있다. 남행각만 있으며 남문은 광서문(廣瑞門)이다. 남행각 밖으로 서쪽 사이 담[間墻]에 만유문(萬有門)이 있고 건복합 북쪽 담장 밖으로 서쪽 사이 담에 서양문(舒養門), 북쪽 담장에 담화문(覃化門)이 있다. 북쪽 담장의 북쪽으로 담장이 또 있고 그 담장에 함화당과 집경당 쪽으로 통하는 읍향문(挹香門)이 있다.
통화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작은 규모이고 행각이 ㅁ자로 있는데, 동쪽으로 외행각이 있다. 통화당의 북쪽 담장문은 현강문(顯康門)이고 이 문을 나서면 육우정(六隅亭)이 있다. 그 동쪽에 녹직처소(鹿直處所)와 녹산 출입문인 영선문(永善門)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87년에는 내전의 정침에서 치러야 할 행사로서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팔순을 축하하는 진찬연을 만경전에서 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정해]진찬의궤』와 만경전의 도설(圖說)이 전한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궁궐지(宮闕志)』「북궐도형(北闕圖形)」『[정해]진찬의궤([丁亥]進饌儀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