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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25 전쟁발발/1950.9.15 인천상륙작전/1951.1.4 후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남한을 기습남침한다. 북한군은 서해안의 옹진반도를 시작으로 38선 전선에 총공세를 가한다. 결국 개성, 포천, 춘천, 홍천, 동해안 강릉에 이르기까지 38선 전역이 무너진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준비된 기습공격 앞에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북한군 선두부대는 빠르게 서울로 진격해 들어갔다. 개전 3일만에 대한민국 수도서울은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264번째 시간입니다. 작전명은 폭풍, 그야말로 북한군이 폭풍처럼 밀고 내려와서 사흘만에 서울에 닿았는데~
박상영/작가: 지난 시간에 배웠던 바를 되짚어보자면, 이때 당시만 해도 남한군과 북한군의 군사력 차이가 북한이 월등했었죠. 그래서 초반에 밀릴 수 밖에 없는 실정이 아니었나~
이시원/배우: 그래도 38선 근처에서 한국전젱 발발전에 이미 작은 전투들이 있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까지 함락되는데 3일 밖에 안걸렸다는 건 너무 빠르지 않나요.
김지윤/정치학 박사: 너무 빨라요.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사실 서울을 잡으면 모든게 거의 무너진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경제, 정치, 행정 그건 정말 국민들 입장에서는 엄청 큰 충격이었을 것 같애요.
최원정: 그렇다면 당시 국가 최고 지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었나요?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 대통령이 북한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건 비원이었어요. 낚시 중이었다고, 이틀뒤인 27일 새벽에 국회가 수도를 사수해야 된다는 수도사수결의안을 새벽에 결의하고, 그걸 들고서 경무대를 찾아 갔습니다. 찾아갔는데 대통령이 없습니다.
이시원: 이런 황당한 일이~
정병준: 대통령은 어디갔냐 하면 서울 경무대에 있었던 대통령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프란체스카 여사와 황규면 비서만 데리고 서울을 떠나서 대전을 거쳐서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이시원: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결정해야 될 것들이 많을텐데 알리지도 않고 이렇게 가버린 거죠?
김지윤: 그때 특별열차를 타고 갔는데 기관실이 있고 3등칸 두개를 이어서 두량 짜리를 타고 갔는데 굉장히 초라하고 허름했다. 담요도 덥지 못했다. 으스스한 밤에~ 이런 이야기까지 있으니까 정말 황급하게 트렁크만 들고 간 거예요.
이시원: 마치 도망치든지 빚 독촉에 쫓겨서 야반도주 하듯이?
다니엘: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선조가 피난갔잖아요. 좀 나쁜 도망의 아이콘으로 비치기도 하는데~
최원정: 다니엘은 다 알고 있어요~
정병준: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짐이 곧 국가다 라고 하는 절대왕정 국가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포로가 되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게 된다 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최원정: 선조는 그나마 광해군한테 세자책봉을 하고 분조를 세우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좀 뒷처리는 해놓고 갔거든요.
박상영: 여기는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도망간 상황이라~
이시원: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아니었을까? 전시나 위급한 상황에 최고지도자는 지하 방카 같은 안전한 곳에 들어가서 군사작전 지휘를 하잖아요? 혹시 그럴려고 간게 아닌가?
박상영: 그렇다고 대통령이 대구까지 간거는 후퇴를 해도 너무 했는데~
정병준: 26일 밤 10시에 대통령이 주한 미대사 무초에게 긴급하게 대통령 관저로 와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무초 대사 기록에 따르면 대통령이 나의 안위는 상관없지만 국가가 위태로우니까 나는 피난을 가야되겠다 대전으로 수도를 옮기겠다 라는 발언을 합니다. 무초 대사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대통령이 서울을 지켜야지 시민들이 안심하고 국군도 잘 싸울 수 있습니다. 끝까지 싸워야 됩니다 라고 얘기했지만 그의 생각으로는 대통령이 이성을 잃은 것 같다고.
김지윤: 무초 같은 경우는 흥미로운게 약간 언쟁이 있어요. 그러니까 물론 공산군의 손에 잡히면 안되지만 지금은 가야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 싸우다가 맘대로 하시라고 나는 여기 있겠다 이건 좀 웃기잖아요. 대통령은 떠나고 미국대사는 여기 있겠다고 그리고~그러고나서 나왔는데 바로 27일 새벽에 떠나버린 거죠.
정병준: 대통령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2대 국회의원 중에 27명이 납북되었습니다. 외교관 가운데서도 영국공사 비비안 홀트가 납치되었습니다.
이시원: 피난을 갈려면 계획적으로 전략적으로 가야지~ 패닉에 빠져서 두려움에 떨듯이~ 가버리면 되나요?
최원정: 교수님, 저희가 알기로는 대전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왜 대구까지 갔어요?
정병준: 경무대를 떠난 때가 27일 새벽 3시경 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고서 이틀 이상 대통령 부처가 잠을 못잤기 때문에 기차가 떠나고 얼마 안돼서 두분 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전을 지나서 잠을 깨보니 대구에 와있었습니다. 대구에 오전 11시 40분 경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대구에서 12시 반에 다시 북상하자고 해서 대전에 올라왔습니다.
다니엘: 어떤 설이 있는데요. 이승만 대통령이 충남지사 관사에서 대국민 메시지를 녹음했고요. 뭐라고 했느냐면 서울은 안전합니다. 모두 안심하십시오. 국군이 잘 싸우고 있습니다 라고 이게 사실일까요?
일동: 아니, 말도 안돼!
박상영: 자기는 지금 겁나가지고 한달음에 도망가고~
김지윤: 정확한 내용은 아니고 단지 미국 CIA가 외국 마다 거기서 나오는 정치 프로파갠다 같은 것 듣고 해석하고 분석하는 기관이 있었어요. 그게 일본에서 한국방송을 듣고 감청하고 그랬던 거죠. 거기에 따르면 북한이 침공을 했다. 위급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유엔하고 맥아더 장군이 와서 도와줄거다. 군수물자도 오고 군인들도 올거니까 국민들은 힘들더라도 참고 이겨나가자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었어요.
이시원: 그런데 오해하기 딱 좋은데요~ 국민들은 참고 이겨나가자 참고 있어라 이 말은 서울에 있어라 서울은 안전하다 이렇게 오해하기 딱 좋아요.
정병준: 당시 군 지휘부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26일 국회에 참모총장(채병덕)과 국방장관(신성모)이 출석을 해서 증언을 하게 되는데요. 채병덕 참모총장은 뭐라고 얘기를 했느냐면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허위보고를 하게 됩니다. 또 신성모 장관은 뭐라고 얘기 했느냐 국군이 걱정없이 물리친다 해주를 점령해서 3~5일이면 평양을 점령한다 라고 말도 안되는 거짓보고를 했습니다.
박상영: 북한군이 완전 코 앞까지 와서 서울이 함락될 위기인데 거짓보고를~
최원정: 가짜 뉴스라니~
김지윤: 언론도 그냥 보도를 한 거예요. 그런데 그런 얘기도 있어요. 기자들 중에서 이거 전황이 정말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렇게 보도를 한 기자들도 있어요. 나중에 왜 그랬냐 하니까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이런 얘기를 해요.
이시원: 아니 한국 군인들을 사기를 북돋을려고~ 아니 패닉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런 가짜 뉴스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북한군이 코 앞에 와 있는데~
정병준: 사실은 49년에도 많은 38선상에서 무력충돌이 있었습니다. 개성 송악산에서는 연대급 사단급이 동원된 전투가 계속 옹진에서 벌어졌지만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49년도에 있었던 그런 충돌이 또 벌어졌나보다 며칠 이러다가 잠잠해 지겠지~ 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큽니다.
최원정: 대통령이 떠난 수도 서울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교에서는 남침하는 북한군을 피하기 위한 사람들의 피난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병: 공병감님, 이제부터 다리 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소개시킬 때까지 좀 더 기다려 주십시오!
최창식 대령(당시 육군 공병감): 명령이다! 폭파하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폭파!
사병: 공병감님!
공병감: 폭파해라!
-------------폭파음과 함께 무너져 버린 한강교, 다리를 건너던 아군과 민간인 수백명이 순식간에 희생당한 참사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난을 간 다음날 새벽 벌어진 일이었다.----------
최원정: 한강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어찌된 일인가요?
정병준: 대통령의 방송연설이 있고 난 다음날 불과 몇시간 됩니다. 6.28. 새벽 1시경에 북한군의 탱크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사실상 국군의 최후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새벽 2시간 반쯤에 국군이 당시 한강을 건널 수 있던 유일한 인도교인 한강대교와 철교 두개를 폭파하게 됩니다.
이시원: 사람들도 있고 차도 있었는데~
김지윤: 그 당시 폭파하던 다리가 세개였을 거예요. 한강철교 한강대교 그리고 광진교, 폭파한 교가 인도교였거든요. 지금은 사실 강남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강남은 아무것도 없었던 때고 시골이고 강북에 많이 살았죠. 다리를 건너와야 되는데 이게 갑작스럽게 폭파가 된 건데~
박상영: 다리 위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폭파한 거잖아요.
최원정: 저 비참하게 넘어져 있는 사람들이 다 죽어있잖아요?
이시원: 그리고 강북에 있던 사람들은 다 피난을 잘 했나요?
김지윤: 못한 거죠. 다리가 끊겨버렸는데 어디서 하겠어요.
이시원: 사람들 진짜 충격받았겠다. 방송들을 때만 해도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북한군은 들어오고 도망갈 곳은 없지 뭐 어떻게 해야 돼요?
다니엘: 사람들 대피시키고 다리를 폭파할 수 없었을까?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나?
김지윤: 아마 서울시내쪽에 적 전차가 들어오기 시작하면 3~4시간 이내에 다리를 폭파하라는 전시매뉴얼이 있었어요. 사실 인민군이 다리 북단에 도착을 한 때는 오전 10시로 기억을 해요. 한강교 폭파시간 보다 7시간 후쯤에 도착을 했죠. 시간이 있었기는 한데 문제는 아무 경고도 없이 폭파를 해버려서 그 당시 죽은 사람수가 몇백명이 되었다는 소리도 있고~
이시원: 정확한 최적의 싯점이 있었을 것 같거든요. 도로나 다리를 폭파 할 때 이런 건 전략적으로 쓰는 거긴하잖아요?
최원정: 폭파 전에 사람들을 막았으면 안되었을까요?
이시원: 통지도 없고 아직 적 전차가 들어온 것도 아니고 들어보면 들어볼수록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정병준: 사실은 다리가 완벽하게 끊긴 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군의 탱크와 자주포들이 3일간 서울에 지체했지만 곧바로 폭파된 철교를 건너서 진격했기 때문입니다.
최원정: 바로 복구가 가능했어요?
정병준: 그러니까 완벽하게 파괴된 거는 아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시원: 전략적으로도 제대로 파괴도 못하고 심정적으로도 너무 일렀고 제대로 된 전략이 아닌데요.
정병준: 전쟁 중이었으니까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박상영: 너무 급해 가지고 터뜨리고 보자 이런 식이었다 라고 봐도 되겠네요.
최원정: 북한에 근접한 도시들, 의정부나 파주 이런 데 가면 유독 대전차장애물인 교각이 많잖아요. 전시에 폭파해 무너뜨려 탱크 길을 막는 바리케이드로 쓴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다니엘: 그게 많이 보이죠. DMZ에 가면 양쪽에서 보이잖아요. 길을 막을려고~ 사실 독일도 그래요 저희가 냉전 때는 큰 터널이나 다리에도 폭발물이 다 설치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함부르크에 기면 엄청 긴 터널이 있어요. 엘브 터널(Elbtunnel)이라고 그 위에 아직 설치되어 있는데~
이시원: 이거로 영화도 만들었잖아요. 웰컴투동막골 보면 신하균씨가 맡았던 역할이 한강교를 폭파 해서 많은 민간인들이 다치고 죽고 이 죄책감 때문에 탈영을 한 역활이었어요.
김지윤: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형주에서 유표 한테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조조가 쫓아오니까 도망을 가는데 그때 십만 백성이 우리는 유비와 함께 가겠다 라며 같이 가요. 유비도 마음 약하니까 데려가겠다고 하는데 가신들은 전부 그러면 안된다 하는데~ 그렇게 십만명이 가다보니까 하루에 십리도 못가고 결국에는 자기 부인도 한 명 죽고, 조자룡만 개고생하고~
최원정: 얘기가 재밋는 화두를 던지는게 함께 가면 다 죽을 수 있다. 어떤 선택을 내리시겠어요?
박상영: 어쨌던 유비가 갖고 있던 그런 애민정신이랄까요. 그런 것들은 분명히 어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존중 받아야하는 가치이기는 하잖아요?
김지윤: 그런데 그렇게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삼국을 통일하겠다고 전쟁은 왜 그렇게 많이 해요. 유비 싫어요!
최원정: 다니엘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정답은 없어요. 시민들이 이렇게 다리를 건너는 상황에서 굳이 폭파를 해야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나, 그런 걸 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다니엘: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걸 직접 본 미국출신 기자인데 마가렛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라는 사람이 있어요. 2차 세계대전도 취재하고,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도 취재했던 사람인데 상도 받고, 그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냐면은 “교량폭파는 서울이 남한의 수중에 있고 단지 북한군 탱크 3대가 서울로 진격하는 시점에 일어났다.” 3대 그러니까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평가를 볼 수 있어요.
정병준: 실제로 폭파 시기에 대해서도 너무 얘기가 많습니다. 조금 이르지 않았느냐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한국군의 상당수가 약4만명 이상과 중장비들이 사실은 한강 이북에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적절히 수송하지 못하고 다리를 끊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고 생각됩니다.
박상영: 너무 이른 시기에 폭파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네요.
정병준: 사실은 적이 교량 바로 앞에 왔을 때 폭파한다 라고 하는 일은 매뉴엘적인 얘기지만~
최원정: 영화 보면 기다리고 있다가 가까이 오면 폭파시키잖아요.
정병준: 그건 반드시 폭파되어야 된다 라고 하는 확신이 들어야지 사실은 폭파가 안되면 그것도 낭패인 거죠.
이시원: 그럴 때 리더의 역할이 진짜 중요한거 같애요. 가장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고 이걸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최적의 싯점과 최적의 전략이 있을텐데~ 이건 지도부가 패닉상태인 것 같애요.
김지윤: 그래서 나중에 이게 누구한테 책임이 있는가 이거 가지고 굉장히 이야기가 많은데~책임자를 가려내어야 한다면 일단은 국방장관이 들어갈 수 밖에 없죠.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있었고 장경근 국방부차관이 있었고 채병덕 참모총장이 있었고 참모부장이 있는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렸던 최창식 공병감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다 뒤집어 쓰죠. 그래서 사형을 당해요.
최원정: 사형이요?
김지윤: 군법회의에서 1962년도에 이분(최창식 공병감)의 부인이 재심신청을 해서 받아들여져서 사면은 되는데~ 하긴 사실 안타까운 것은 이 부인도 그때 강북에 있었어요. 아이가 돌도 안돼서, 한강 다리가 폭파될 때 자기 부인도 아이랑 넘어오지 못한 상황이었었거든요. 안타까운 경우긴 하죠. 명령이니까, 수행은 해야 되는 거였고~
다니엘: 책임자로서 사형을 당하고~
최원정: 얼마나 구구절절 한강 다리를 두고 사연들이 많아졌겠어요.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픈데 아무튼 결국 6월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당하고 인민군, 북한군이 계속 내려오잖아요. 이후는 우리는 어떻게 대응을 하나요?
정병준: 위기에 처한 한국정부는 미국과 국제사회에 호소하게 됩니다. 유명한 얘기가 있죠. 이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심야에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시도합니다. 부관이던 휘트니 준장이 전화를 받았는데 “우리 다 죽게 생겼다. 빨리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면 한국에 있는 미국 사람들도 다 죽여 버리고 우리도 따라 죽을 각오다.” 이렇게 했다는 얘기죠.
이시원: 도와 달라는 건지 협박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정병준: 여하튼 위기상황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이 신속하게 대응하게 되는데요.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시간 6월 26일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려서 소련은 당시 보이코트 중이었습니다. 이 안보리에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합니다. 유엔군 사령부의 깃발 아래 미군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굉장히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이었습니다.
이시원: 그래도 북한은 미국이 참석을 하니까 꽤 겁을 먹었을 것 같애요. 세계 2차대전 때 미국이 막강한 군사력을 보여주었잖아요.
정병준: 7월 1일에 일본 규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24사단 21연대 소속의 찰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스미스 부대가 한반도에 상륙하게 됩니다. 수송기를 타고 부산에 내려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올라가서 오산 죽미령 이라는 곳에서 북한군과 대적하게 됩니다. 오산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교전을 벌였지만 스미스 부대는 대참패를 하게 됩니다.
최원정: 첫 교전에서 대참패를요?
정병준: 사실은 대대병력이거든요. 약 406명 부대원 중에 포로가 북한군에게 82명이 되고 총165명이 전사 부상 실종이 됐습니다.
이시원: 좀 느낌하고 다르다.
박상영: 반전이 느껴지는 게 잘 모르는 제가 느끼기에는 미국하면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잖아요. 제 예상으로는 파죽지세로 다 이기고 갔을 것 같은 느낌인데~전혀 그런 상황은 아니었네요.
정병준: 이미 미국은 한국전쟁(Korean War)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고 Korean Conflict (한국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분쟁이라고 불렀구요. 북한은 국가가 아니라 동네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깡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은 정식국가에 대한 교전행위가 아니라 깡패를 때려잡는 치안활동 (police actio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미24사단 소속 병사들은 대부분이 2차 대전 후에 들어온 병사들입니다. 19~20살 정도되는 병사들이었구요. 군대를 만화로만 접한 세대들이었습니다.
박상영: 그럼 애기들이 처음으로 참전을 한 거네요.
정병준: 장교들이나 부사관들은 이미 2차 대전 경험이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었지만 병력은 연대당 2개 대대 밖에 없었구요. 훈련도 안되어있었고, 병사들의 사기나 훈련도 굉장히 약한 상태였습니다.
최원정: 그러니까 참패하지~~
다니엘: 결국 미24사단 사단장까지 전투에 참전하게 되거든요. 딘 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사단장인데 장군이잖아요. 그런데 바주카포를 들고 직접 전투에 나섰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박상영: 사단장이 들고 나올 정도면 거의~
최원정: 사단장이면 어느 정도 높은 거에요?
이시원: 옛날 군대 농담에 대대장이 부대에 온다 그러면 하루 종일 청소를 하구요. 사단장이 오면 산이 하나 없어진다고 그래요. 어디 한번 골프장 짓고 골프나 쳐볼까 그러면 다음날 산이 하나 깎인다고 해요. 그 정도로 높은 사람인데 높은 사람이 바주카 포를 들고 직접 다녔다는 건 아무리 미국에서 오셨지만 헐리우드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김지윤: 전황이 진짜 급박한 거죠. 사단장 하면 뒤에서 지휘해야 되잖아요. 사단장이 전장에서 뛰어다닌다는게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거구. 그래서 저분은 포로 됐어요 (윌리엄 딘(1899~1981)-대전 전투 이후 36일 동안 낙오되었다가 포로가 됨. 1953년 10월까지 포로생활 하다가 귀환함). 사실 미군이 2차 세계대전 때 최고의 전력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미 많은 군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갔어요.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그 당시에 규슈가 가장 가까웠는데, 규슈에 있던 미24사단을 보낸 것인데, 24사단에 있었던 군인들은 어떻게 보면 군전력으로 보았을 때는 가장 떨어지는 부대였거든요. 전체적으로 일본에 와 있던 미군들이 좀 해이해진게 있어요. 점령군으로 왔기 때문에 좀 쉬자 놀자 이런 면도 있고 훈련도 안되어 있고 그래서 지금 한반도로 건너와서 오긴 왔는데 여기는 어디고 우리는 왜 왔는지 잘 모르겠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프라이드는 있어요. 우리가 미국인데 저런 깡패들~이런 의식이 완전 오판이었다는 게 드러났죠.
이시원: 제가 느끼기에는 미국이 참전했다 이러면 그냥 삭~~ 이기는 느낌이 오거든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막상 그런 상황은 아니었네요.
김지윤: 인민군은 그에 반해서 굉장히 정예군이었어요. 국공내전에 참여해서 중국공산당 팔로군의 일원으로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그야말로 실전경험이 무지하게 많은 정예군이 왔었고~
박상영: 방금 국공내전 말씀하셨잖아요. (국공내전 (1927~1950)-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이 벌인 두 차례의 내전, 마오쩌둥의 승리로 중국은 공산화됨). 미국이 중국의 국공내전 때 사실은 참전하지 않았었고 사실 자연스럽게 김일성이나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을 벌일 당시에도 미국이 참전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을 했을 거라고~근데 참전을 했다는게 저한테는 좀 새롭게 느껴지기는 하거든요.
김지윤: 그러니까 국공 내전에 지상군을 투입하고 참전을 안했는데 돈이나 이런건 되게 많이 대주었어요. 간접적으로 많이 지원했는데 문제는 국공내전을 보니까 장제스 라든지 국민당 이쪽사람들을 만나고 오거나 경험한 미국사람들은 전부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거예요. 걔는 안돼! 너무 무능하고 너무 부패했고 국민들한테 인기도 너무 없고 저건 진다. 그래서 트루만 대통령도 그렇고 애치슨 장관도 그렇고 이건 그냥 끝난 거다. 괜히 우리가 발목 잡혀서 우리만 힘들다 라고 그런 생각을 사실 했어요.
이시원: 그런데 한국은 달랐다~~?
김지윤: 한국은 다른 거죠. 한국 같은 경우는 사실 북한이 자발적으로 혼자서 내려갈 생각은 안했죠. 그 뒤에는 소련이 버티고 있고 소련이 사주를 한 것이다. 왜냐면 그 전에 그리스 내전도 있었고 베를린 봉쇄도 있어서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우리가 막아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한 거죠.
정병준: 여기서 가장 중시해야될 게 속도입니다. 굉장히 빠르게 참전했다. 처음에 미군이 오산에서 패배를 했지만 오산까지 와서 북한군을 상대하게 된게 불과 개전 후에 십일도 안된 싯점입니다.
박상영: 올라온 속도로 볼 때는 정말 빨리 내려온 거예요.
정병준: 그 다음에 대전에서 사단급이 전투를 벌이게 된게 개전 후인 2주내에 벌어진 일이죠. 그 이후에 미제1기갑사단이 들어와서 영도에 주둔하게 되었구요. 다음에 25사단까지 들어와 3개 사단이 한국에 주둔한 된 속도가 불과 한 달도 걸리지 안았어요. 사실은 이런 속도라 하는 것은 미국이 이 전쟁에 임하는 결의와 태도,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죠.
이시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이런 속도로 이런 빛의 속도로 참전하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정병준: 사실은 북한을 상대로한 결의가 아니라 소련을 상대로 한다는 결의로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최원정: 한국은 꼭 구해야 한다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다는 얘긴 거잖아요. 소련 때문이었다.
김지윤: 트루만 정부가 그 당시에 막 냉전이 시작이 되면서 공산주의 위협에 대해서 전혀 만만하게 보지는 않았지요.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강경하게 가던 중이었고 사실은 더 강경하게 가고 싶었는데 국민여론이 그걸 받쳐주지 않으니까 그만큼 못움직이었던 건데~ 한국전쟁이 터지니까 이제는 명분도 있고 이건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죠.
정병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은 미국의 위신, 미국이라고 하는 제국의 위신이 추락하는 걸 막겠다 하는 거죠. 사실 제국이라고 하는게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이 뛰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함부로 덤비지 못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계속 미국이 종이 호랑이 처럼 그리스, 터키, 그 다음에 중국에서 계속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다 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미국의 동맹들이 굉장히 미국의 태도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미국이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 나라 처럼 비추어지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공산주의가 확대됐고요. 특히 중국이 공산화 되고 나서 그리고 나서 코리아 한국이었던 거죠. 그러면 그 다음엔 일본, 맥아더의 말을 빌리자면 그 다음에 우리는 하와이, 필리핀 까지 밀린다는 우려감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사실 미국은 다시 한번 이런 공산주의 도발이 있다면 소련이 도전하게 된다면 그에 걸맞는 태도로 속도로 결의로 응징하겠다 이런 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원정: 그런데 그전에 스탈린을 김일성은 미국이 참전 안할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갖고 내려온건데 김일성이 오판한 거네요.
박상영: 그러게요, 철저한 오판이죠.
최원정: 바로 개입하잖아요.
이시원: 남한과 북한의 전쟁에서 이제 강대국의 전쟁으로 변화되었어요.
다니엘: 그래서 우리가 저번에도 만났던 딘 애치슨이 그런 얘기하더라구요. 애치슨이 그런 얘기 했데요. 한국전쟁이 사실 우리를 구원했다. 왜냐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국방비가 거의 900억 달러였거든요. 한화로 110조원이 넘었는데, 한국 전쟁전 까지는 100억 달러로 확 줄었고, 한국전쟁 이후는 500억 달러 이상으로 다시 돌아갔어요 (제2차 세계대전 약900억 달러-한국전쟁 이전 약 100억 달러-한국전쟁 이후 500억 달러 이상). 어마 어마한 큰 액수가 되었는데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전쟁국가도 되었고 자기 연맹국가도 구원해 줄 수 있는 국가로 어느 정도 이미지를 다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김지윤: 사실 미국이 세계 대전을 거치기전 까지는 세계적인 외교정책전략 이런 게 없었어요. 미국은 우리가 지금 아는 미국, 우리가 보는 미국은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대국이고 독보적으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패권국가 이지만 그 전에는 자기들끼리 꼬냥 꼬냥 살면서 경제성장이나 하고 우리 끼리 잘 살자 했는데, 제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사실상 국제 무대로 끌려 나온 거거든요. 그래서 패권의 후보가 된 거고, 전쟁이 끝나고 나니까 미국 사람들은 아, 이제 전쟁은 그만하고 우리끼리 잘 살던 시대로 돌아가자 라는 정세가 훨씬 더 많았어요.
이시원: 저도 그럴 것 같애요. 전쟁해서 괜히 가족과 떨어져 있기 보다는~
최원정: 왜 그런 죽음을 맞아야 하느냐구 누구를 위해서~
김지윤: 2차 대전이 지나고 난 다음에 그런 정서가 막 생겼는데 사실 트루만 대통령이나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불안한 거예요. 공산주의 위협은 계속 다가오고 있다. 국방력도 사실 향상을 시켜야 되고 그 당시 유명한 문서가 있어요. NSC-68 이라고 해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우리가 세계전략을 짜야된다 라고 얘기를 해요 (NSC-68, 미국가안전보장회의문서/1950.4.14-공산주의 세력봉쇄에 우선순위를 부여한다는 결정을 담은 비밀정책결정문서). 그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사실 안했거든요. 말했듯이 국민들은 편하게 잘 살면 안돼 하고 있는데 행정부 라든지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괴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리스 내전부터 해서 베를린 봉쇄도 있었고 그리고 중국이 넘어가게 되고 한국에서 전쟁이 났대. 소련이 내려온대, 헤드 라인은 소련이 침공했다 였어요.
뉴욕 해럴드 트리뷴 기사제목
Russians are said to be invading; 러시아인들이 침공하고 있다;
Red Tank units Push on Seoul. 붉은 탱크 부대가 서울을 공격한다.
그때서야 미국 국민들이 아, 이제는 안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 행정부에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강경한 군사전략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박상영: 우리는 같은 민족 끼리 서로 총을 겨누고 피를 흘리고 전쟁을 하고 있는데 전쟁이 정작 동맹국들의 우려를 덜게 만들고 일본을 구하고 타이완을 구하고 그러면 미국이 전 세계 패권을 장악하게 만드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 그런 역할까지 하게된 거잖아요.
김지윤: 한국전쟁이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고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건 나중에~
최원정: 찔끔~찔끔~
정병준: 한편으로 스탈린은 이 전쟁을 굉장히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미군이 한반도 진창에서 허덕이고 국방예산을 여기다 쏟게되면 소련은 더 많은 행동의 자유를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니엘: 우리도 한국전쟁 때문에 독일군대가 다시 복귀되었거든요. 그 전에는 일본 처럼 약간 폐쇄되어 있었는데~ 독일 연방군 분데스베어(Bundeswehr)도 그때 생겼거든요.
이시원: 한국전쟁으로 많은 나라들이 군사력 증강을 하면서 문을 열기도 한 것 같고, 일본은 경제가 부흥하고, 독일은 군대가 다시 생기고, 미국은 패권국가로 자리잡고~
박상영: 들어보니까 다른 나라에서 주판알 굴리고 난리가 났는데~ 피해 본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어요. 너무 안타깝네요.
최원정: 너무 안타깝네요. 미군이 빠르게 아주 빠르게 참전을 했지만 수세의 양상은 계속되고 있는데요. 구체적인 전쟁상황 알아보도록 하지요~ 박금수 박사님~!
-----------------------------네, 안녕하세요 박금수입니다. 미군이 들어왔지만 북한군은 무서운 기세로 남하를 계속하게 되는데요.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탱크였습니다. ~탱크!~ 이럴 때 보병이 탱크를 상대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휴대용 로켓 발사기였습니다. 일명 바주카로도 많이 부르게 되는데요/ 그 당시 국군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2.36인치 바주카포였어요. 그런데 이걸 T-34에 쏴 맞혀 보았자 불만 번쩍이고 안에 있는 사람은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던 것이죠.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더 큰 3.5인치 로켓포가 보급이 됩니다. 근데 2.36인치, 3.5인치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잖아요. 이게 포의 직경인건 아시죠? 그런데 면적이 직경의 제곱으로 크지않아요. 에너지도 그만큼 커지는 거죠. 그래서 2인치 X 3인치를 비교를 해도 2x2=4 3x3=9 파괴력의 차이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시원: 쏙쏙 이해가 돼요.
박금수: 너무 쉽게 설명드리고 있어요.
박상영: 거기다가 센치도 아니고 인치니까~ 차이가 너무 크잖아요.
이시원: 1인치는?
박상영: 2.54센치~
박금수: 그래서 3.5인치 바주카포로는 T-34 탱크를 뚫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전선이 밀리는 걸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선이 계속해서 밀리니까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전격적으로 낙동강 이남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래서 결국 전쟁발발 한달만에 낙동강 전선(포항-다부동-낙동강)이 형성된 것이었죠.
이시원: 낙동강이 뚫리면 부산까지 위험해지는 거잖아요.
박금수: 당시 워커 장군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죠. 이 당시의 낙동강 철수는 철저한 군사전략하에 수행된 것이었습니다. 즉 물러나는 척 하면서 전열을 정비하는 것이죠. 시간을 벌고~ 낙동강을 요새로 삼아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미공군을 활용하면서 당시에 제공권을 장악했던 것이죠. 그래서 낙동강 상공에는 항상 두 대의 전투기가 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15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전투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박상영: 그러면 아군이 제공권을 장악해 버렸으니까 북한군의 전력손실이 상당히 컸겠네요.
박금수: 네, 그렇죠. 여기를 보시면은,
북한군과 유엔군 병력비교
북한군-개전초기-17만 5천명
8월 공세(낙동강 전선)-7만 9천명
유엔군(국군포함)-8월공세(낙동강전선)-14만명
개전초기 6월말에 북한군의 병력수는 보병 10개사단, 4개 경비여단, 1개 탱크여단 등 총 17만 5천명이었어요. 그런데 한달만인 7월말에는 10만명이 되고요. 무려 8월초에는 7만 9천여명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두달도 안되는 사이에 10만명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죠. 반면에 국군과 미군은 그 두배인 14만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증강이 됩니다. 결국 북한군은 바로 이 낙동강에서 막혔구요. 이것은 김일성이 당초에 계획했던, 그것과는 상당 어긋나는 것이었죠.----------자, 군사전황소식이 궁금하시면 돌아오겠습니다. I’ll be back.
최원정: 기다려 주세요. 또 부를게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유엔군이 대치를 하게 되는데 이때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낭보가 날아듭니다.
--------------------------1950년 9월 11일, 일본과 부산에서 국군과 유엔군 7만여명을 태운 함정, 261척이 출항한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인천 앞바다, 1950년 9월 15일 함포사격을 시작으로 상륙작전을 펼친 유엔군은 한 시간 반만에 월미도를 점령한다. 맥아더 장군이 계획한 대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유엔군은 작전 만하루만에 인천을 점령하고 다음 목표인 서울을 향해 전진한다.-------------------------------
최원정: 영화 같다~
이시원: 어떻게 보면 한국 근대전쟁 중에 가장 유명한 작전이 아닐까 싶어요.
정병준: 처음에는 미국방부와 합참도 인천상륙작전에 반대하게 됩니다. 인천이라고 하는 곳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지형적 여건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261척의 함정이 통과해야 되는데 선로가 좁고 군함들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없다 그러니까 국방부와 합참은 인천이 아니라 군산이나 평택으로 하자고 했지만 맥아더가 끝까지 인천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더글라스 맥아더-당시 유엔군 사령관). “9월 15일에 인천에 상륙할 것…그게 싫으면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하시오.”
김지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잖아요. 밀물이 들어올 때는 괜찮은데 썰물이 빠지게 되면은 한 몇 킬로를 군인들이 상륙정에서 나와서 걸어야 돼요.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나를 쏴주세요 라는 것과 똑 같은 상태예요.
이시원: 완전무장을 하고 갯벌에 노출될 것 아녜요~
박상영: 뻘을 달려야 되는 거고~
김지윤: 가장 만조일 때를 골라서 들어가야 되는데 보니까 9월 15일 또는 10월 11일 정도 오는 거예요. 한 달에 한 번~그래서 어느 날을 택하느냐~빨리 가야된다 그래서 9월 15일로 골라서 가게 되는데 굉장히 한정된 시간 내에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
다니엘: 말씀하신 것처럼 수로도 좁고 갯벌 때문에 사실 두시간만에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래서 그 확률이 1 대 5000 이라고 하는데~그런데 1대5000 확률을 주장했던 이유가 무얼까요?
정병준: 사실은 맥아더가 이런 작전을 많이 해봤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섬건너뛰기 작전이라고 하는 일종의 해병대와 해군을 이용한 이런 점령작전을 많이 홰봤구요. 인천이라고 하는 곳은 지형적으로 북한군의 보급선을 끊고 서울로 빨리 진격할 수 있는 점이 있구요. 맥아더의 승부사적 기질이 굉장히 강했구요. 아무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70이 된 장군이었는데 원수였고 누구도 맥아더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었고 명령을 내려도 듣지도 않았습니다.
김지윤: 대통령도 못했어요.
장병준: 그렇지만 가능성은 금방 다니엘의 말처럼 5천분의 1이라고 할 정도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최원정: 짜릿하다!
박상영: 5000분의 1 이라고 하는 그 작은 확률에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의 운명도 걸렸고, 또 중국, 소련 등 세계 여러 대국들의 정세가 걸려있는 거잖아요.
김지윤: 사실은 다니엘이 얘기한 것처럼 5000분지 1이다 보니까 북한도 방심 했는데 중국은 알고 있었어요. 마오쩌둥은 알고 있었어요.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에서 전쟁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전시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를 아는 중국군 장교 참모가 있었어요. 이 사람이 돌아다녀 보니까 상륙작전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왜냐면 미국이 2차 대전 때 60번 정도를 했다고 그래요. 상륙작전은 걔네들이 많이 쓴 수법이야. 쓸지도 몰라 그러면 한반도에서 상륙작전을 할만한 곳이 어디가 있을까 찾아본 거예요. 여섯 군데를 꼽았는데 거기에 군산도 들어가고 인천도 들어갔는데~~ 이 참모가 진짜 똑똑한 게 맥아더의 성향상 이건 인천이다.
이시원: 심리적인 것까지 다 분석을 한 거네요.
김지윤: 그래서 마오쩌둥이 김일성한테 알려주었어요. 인천상륙작전 대비를 해라.
정병준: 사실 기뢰를 뿌려놨습니다.
최원정: 그걸 어떻게 제거했어요?
정병준: 그 유명한 월미도 등대를 점령한 KLO 부대가 사실은 기뢰의 위치를 정확히 표시를 해서 소회정이 기뢰를 제거하고 상륙정이 상륙작전을 벌이게 된 거죠. (KLO부대-미국 극동사령부 소속의 한국인 첩보부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팔미도 등대를 밝혀 작전성공에 기여).
다니엘: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구요. 등대도 확보하고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위치를 다 파악했다고~
정병준: 인천상륙작전의 작젼명이 크로마이트(Chromite) 라고 하는 작전명인데 이 작전계획과 후속지도와 명령서를 보면 북한군이 어디에 주둔하고 있고 심지어는 대포가 어디에 있는지 까지도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시원: 이걸 보면 그거 같애요. 정말 작은 확률인데 철저히 조사하고 정보를 잘 모아서~ 우주선들 보면 도킹 하잖아요. 그 작은 확률이 딱 맞아 떨어지는 확률인 것 같애요. (박상영을 향해) 손가락이 이렇게 해서 맞을 확률이~
박상영: 우리는 원래 잘 안맞어~
김지윤: 그런데 이 작전이 일본에서는 굉장히 잘 알려진 누구나 아는 작전이었는데 그래서 영어로 Operation Common Knowledge (누구나 아는 작전) 로 불릴 정도로~ 할것 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거는 맥아더의 사실상 전매특허 거든요.
정병준: 그리고 정보의 기만도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북한도 바보가 아닌 바에는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파악한 곳이 몇군데 있습니다. 진남포 인천 군산 목포 동쪽으로는 원산 입니다. 그러니까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앞서서 진남포나 목포에도 해병대를 보내거나 포격을 하거나 폭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으로서는 분명히 상륙작전을 할 것 같은데 어디 인지를 명확하게 특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김지윤: 교란작전인 거죠. 저기도 뿌리고 여기도 뿌리고~
정병준: 맥아더 참모가 도쿄에서 브리핑을 합니다. 우리 곧 상륙작전 할 거다. 그런데 10월에 할 것 같애 라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6.6)할 때도 노르망디 상륙 위치를 독일 나치가 알지를 못했습니다. 정보보안이 인천상륙작전에도 중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상영: 전쟁은 엄청나게 고도의 정밀화된 두뇌전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최원정: 그런데 아까 분명히 마오쩌둥이 인천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족집게 과외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막지를 못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박금수 박사님!
---------------------------북한은 바로 이 허리공격, 배후공격, 카운터펀치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있었는데도 왜 막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하게된 데는 북한의 주력이 순식간에 낙동강 전선과 수도전선에 갇혀 버리거나, 포위되는 형세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마오쩌둥은 계속해서 김일성에게 뒤통수 조심하라고, 상륙작전을 대비하라 했는데 김일성은 듣지 않고 8월 15일 까지 무조건 부산을 장악하려고 명령을 했구요. 만약에 비겁한 자나 전투지역에서 탈영할려는 자는 그 자리에서 사살하라는 명령 81호까지 공포를 했습니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81호中-비겁자들과 전투 마당에서 도주하려는 자들은 어떠한 지위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할 것), 그러던 와중에 인천상륙 작전이 전개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 그렇군요, 김일성은 진짜 무조건 광복절까지 남한 전체를 점령해야겠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이걸 독일 속담으로 말하면, “욕심이 커지면 무너지기 시작한다.” 라는 말인데~
최원정: 과유불급(過猶不及)~
정병준: 모택동이 당시 이렇게 얘기했다는 겁니다. 낙동강 전선의 유엔군은 호두알 처럼 땅땅하게 웅크린 상태다. 호두알을 아무리 공격해 보았자 이길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포위망을 풀고 뒤로 후퇴해서 유엔군과 한국군을 펼치게 한 다음에 하나씩 분쇄해야 된다. 이런 전략을 내놨다고 합니다.
박금수: 그런데 스탈린은 인천상륙작전 3일후 김일성에게 낙동강 전선에서 4개 사단을 차출해서 서울 방면에 투입을 하라고 충고를 하게 됩니다. 스탈린이 보기에는 낙동강 전선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서울에 빨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그 싯점에서는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죠.
이시원: 마오쩌둥 과 스탈린, 김일성에게는 쪽집게 과외 선생이 두 명이나 있었네요.
박금수: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족집게 과외를 받은 김일성은 사실 과외비가 아깝습니다. 서울방어에 1개 전차 여단과 1개 연대 병력을 보냅니다. 1개 사단에도 못미치는 1개 연대 말도 안되는 적은 병력을 보내게 된 것이죠. 결국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소식이 이제 낙동강 전선에도 전해지고요. 당연히 북한군도 사기가 매우 떨어지겠죠. 북한군이 남침을 시작해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오는데 한달이 걸렸다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서 한달 이상 대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쫓겨서 서울까지 퇴각하는 데는 13일 밖에 안걸렸다고 합니다. 아군은 이 기세를 몰아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박금수 였습니다.
김지윤: 작전을 짜고 전시에 이걸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요. 그렇게 봤을 때 김일성의 그 동안 전쟁경력은 굉장히 초라했던 것이죠. 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던 거예요.
이시원: 진짜 스탈린의 말을 듣고 4개 사단을 낙동강 전선에서 서울에 배치했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거네요.
정병준: 4개 사단이 올라오게 되면 약4만~5만 병력이 투입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돼죠. 그 다음에 사실은 서울의 탈환이 어려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을 지키고 있던 서울-인천 근교에 있던 북한군은 대략해서 만명 정도였습니다. 유엔군을 막기에는 열세인 병력과 화력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네, 드디어 서울을 되찾았습니다(1950.9.28.서울수복). 북한군한테 빼앗긴지 석달만이예요.
김지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1950.9.29에 서울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한테 고맙다고 얘기하고 연설할 때 울먹이기도 하고~
이시원: 서울 사람들은 국군도 돌아오고 미군도 들어오고 그래서 아~ 이제 우리 지켜주는구나~ 하고 굉장히 기쁘고 안도했을 것 같애요.
다니엘: 웬지 그때는 이제 전쟁은 다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정병준: 사실은 당시에 서울대 사학과 교수이던 김성칠 이란 분이 “역사 앞에서” 라는 일기책을 남겼습니다. 이 분도 원래 중학교 때 좌익독서사건으로 구속됐던 소년범이었습니다. 자기 친구들은 모두 좌익이었고 그 유명하던 북한의 인공세상이 어떤 것인지 희망반 기대반이 있었는데 북한 점령을 겪어보니까 너무 끔찍했다. 공산주의의 위악성을 알게 되었다 이분이 뭐라고 썼느냐면 포성이 들리고 유엔군의 폭격이 있는데 그 폭격소리, 대포소리에 가슴이 두근 두근 거리는 희망이 생긴다 라고 썼어요. 대포소리가 무서운게 아니라 인제 그 대포소리에 내가 구원을 받겠구나 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이승만 정부가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한강다리를 끊었고 거짓 방송을 했고 그리고 돌아와서도 자신들이 끊은 다리를 못건넌 사람들을 비도강파 라고 너희들은 북한에 부역했다 라고 처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시원: 살아남은 것도 진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건데 아니 갑자기 부역자라니요. 이게 무슨 말이예요?
박상영: 그리고 한강 넘고 안넘고를 가지고 부역자 라고 하는 건 이상한 거예요. 국민들이 뭘 알겠어요?
최원정: 당시 도강파들은 한강을 건넜다 돌아온 사람들은 개선장군 처럼 오면서 잔류자들에게 너희들은 부역자라고 하는 거잖아요. 잔류파들은 너희들은 도망갈 때 언제고 나한테 감히 딱 그렇게 갈리면서 사회 분위기가 흉흉했겠네요?
정병준: 사실은 부역자나 공산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북한이 철수할 때 북한을 따라갔거나 아니면 지하로 잠복했거나 이미 현실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역 정도는 등급을 A,B,C로 나눠서 악질이 아닌 사람은 C등급으로 훈방을 했고, 한국정부가 이런 처벌을 한 데는 크게 세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실제로 부역자들을 처벌해야 될 행정적인 필요성이 있었겠다 또 이 사람들이 북한점령 중에 한국 군경이나 한국정부인사들을 괴롭히거나 납치하거나 살해한 그런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이 들고요. 두번째는 한국정부가 48년 이래 제주 4.3, 여순에 너무 많은 처벌의 관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복 이후에도 그런 관성을 따라간 면이 있구요. 세번째는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과장된 과대처벌이 있지 않았나 당연히 사적인 보복이나 손가락 총이라 불리는 이웃의 지목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역자로 처단되었다고~
박상영: 재판없이 즉결처분되기도~?
정병준: 지방에선 그런 사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최원정: 재판은 했잖아요, 이게 단심이 돼서 문제였던 거지요?
정병준: 그건 서울에서~
박상영: 아~ 이거 너무 심각하네요.
이시원: 쟤 빨갱이예요. 손가락으로 지적하면 정말 바로 사형을~?
정병준: 2000년대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13지역을 사례로 삼은 바가 있는데요. 그 경우에 따르자면 많은 경우에는 부역자라고 지목된 사람들이 특별한 혐의를 입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집단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박상영: 제 롤 모델로 작가분이 계신데 박완서 선생님의 그 사람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라는 작품이 나왔었어요. 거기에 부역자 처단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 심지어 박완서 선생님의 친오빠가 이때 당시 부역자로 몰려서 집에 있다가 끌려 나가서 군인에게서 즉결처분 당하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게 그려지고~
최원정: 본인 숙부도 아마 그렇게 돌아가시고~
박상영: 맞아요, 맞아요,
다니엘: 자료를 보니까, 12월 16일자 UP통신에 의하면 공산주의 부역자, 파괴 활동자, 살인자로 유죄를 선고받은 죄수, 최소 800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사람들이 전원 처형됐었죠.
이시원: 특히나 기준이 모호한 기준도 없는 이런 처벌이 진짜 비극인 것 같애요.
최원정: 사실 부역자 처벌을 제대로 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안하고~
박상영 & 이시원: 그러니까요~ 친일청산을 제대로 했어야지! 친일청산을 A,B,C 등급으로 나누어서 했어야지 왜 이런 순간에만 그렇게~ 부역자 처벌단계를 놔두고 속도를 내고 했는지~
김지윤: 여담이긴 한데 이승만 대통령이 개를 되게 좋아했어요 그래서 경무대에서 개를 세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바쁘게 피난 가다보니까 가방만 들고 개는 놓고 간 거예요. 서울 수복해서 돌아와서 보니까 개 두 마리는 죽고 한 마리가 남아 있었어요. 두 마리는 산으로 도망을 갔다가 다시 돌아온 건지 그 개 이름이 해피예요. 점박이 발바리였다고 하더라구요. 아! 이 해피는 부역을 하지 않았다고 그런 얘기를 했다고~
최원정: 그게 무슨 얘기예요, 지금?
이시원: 국민이 개만도 못하다구 한건데~
최원정: 이제 서울 수복 이야기로 좋게 끝날 줄 알았는데~ 부역자 처벌 얘기들으니까 가슴이 아휴! 무겁네요~
김지윤: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하나 봤어요. 봤는데~ 거기에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여를 했었던 국군이 당시를 회고를 하면서 이야기하는데, 미군과 같이 간 거예요. 자기 또래의 어린 북한군이 항복을 하겠다는 뜻의 의사로 총부리에다 하얀 깃발을 걸고 왼쪽 턱은 총을 맞아서 떨어져나가고 피를 흘리면서 걸어나오는 거예요.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는데요. 그 옆에 있던 미군이 “왜울어? 적군인데” 하길래, 자기가 한 말이 “He is Korean.” 그게 제 가슴에 남더라구요. 계속 보면서 울컥하는 그런 순간이었어요. 전쟁이라는 것은 너무나 냉혹해요. 우리는 우리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지만 그 당시에 세계에서 어떤 시각으로 한국전쟁을 바라보았고 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좀 철저하게 우리가 분석하고 알아야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정병준: 결국 미군의 참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기까지의 최고의 영웅은 맥아더 원수가 되겠습니다. 맥아더에 대한 여러가지 표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공산주의라는 용으로부터 아시아를 구해낸 현대판 기사.”가 있고, 당시 콜린스 미국 참모총장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맥아더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운명에 맞서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처럼 진격했다.” 그리고는 이제 곧 처참한 실패를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시원: 맥아더가 계속 성공 가도를 달렸기 때문에 굉장히 오만해 질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애요.
정병준: 네, 한국전쟁의 비극 중에 하나가 이제 북진 이후에 벌어진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서울을 수복한 후 국군과 유엔군이 이제 북으로 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저희가 다음 주에 또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64회 1950.6.25 전쟁발발에서 정리).
①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남한을 기습남침한다. 북한군은 서해안의 옹진반도를 시작으로 38선 전선에 총공세를 가한다. 결국 개성, 포천, 춘천, 홍천, 동해안 강릉에 이르기까지 38선 전역이 무너진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준비된 기습공격 앞에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북한군 선두부대는 빠르게 서울로 진격해 들어갔다. 개전 3일만에 대한민국 수도서울은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대통령이 북한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을 비원에서 들었다고, 이틀뒤인 27일 새벽에 국회가 수도사수결의안을 가지고, 경무대를 갔으나, 대통령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프란체스카 여사와 황규면 비서만 데리고 특별열차로 서울을 떠나 대전을 거쳐서 대구에 도착했다. 특별열차는 기관실에 3등칸 두량인데 굉장히 초라하고 허름했다.
②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한강교, 다리를 건너던 아군과 민간인 수백명이 순식간에 희생당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난 간 다음날 새벽 벌어진 일이었다. 대통령의 방송연설이 있고 난 다음날 불과 몇시간 뒤, 6.28. 새벽 1시경에 북한군의 탱크가 미아리 고개를 넘자 국군의 최후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새벽 2시간 반쯤에 국군이 한강을 건널 수 있던 유일한 인도교인 한강대교와 철교 두개를 폭파한다. 위기에 처한 한국정부는 미국과 국제사회에 호소한다. 이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심야에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시도한다. 부관이던 휘트니 준장이 전화를 받았는데 “우리 다 죽게 생겼다. 빨리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면 한국에 있는 미국 사람들도 다 죽여 버리고 우리도 따라 죽을 각오다.” 라고 했다는 얘기다.
③ 미국이 신속하게 대응,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시간 6월 26일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다. 소련은 보이코트, 안보리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 유엔군 사령부의 깃발 아래 미군이 한국전에 참전, 굉장히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이었다. 7월 1일에 일본 규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24사단 21연대 소속의 찰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스미스 대대가 한반도에 상륙, 수송기를 타고 부산에 내려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올라가서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대적한다, 오산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교전, 스미스 부대는 대참패, 대대병력 약 406명 중에 82명이 포로가 되고, 총165명이 전사 부상 실종이 됐다. 미24사단 소속 병사들은 대부분이 2차 대전 후에 들어온 19~20살 정도되는 병사들이었고, 군대를 만화로만 접한 세대들이었다. 장교들이나 부사관들은 2차 대전 경험이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었지만 병력은 연대당 2개 대대 밖에 없었고, 훈련도 안되어있었고, 병사들의 사기나 훈련도 굉장히 약한 상태였다.
④ 미군이 오산에서 패배를 했지만 오산까지 와서 북한군을 상대하게 된게 불과 개전 후 십일도 안됐다. 대전에서 사단급이 전투를 벌이게 된게 개전 후인 2주내이다. 그 이후에 미제1기갑사단과 미25사단이 들어와 3개 사단의 한국 주둔은 불과 한 달도 걸리지 안았다. 이런 속도는 미국의 이 전쟁에 임하는 결의와 태도, 자세를 보여주었다. 미국은 북한이 아니라 소련을 상대로 한국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의 위신, 미국이라고 하는 제국의 위신이 추락하는 걸 막겠다 하는 거다. 사실 제국이라 하면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이 뛰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 해야 되는 건데, 미국은 그리스, 터키, 중국에서 계속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동맹들이 미국의 태도에 의구심이 컸다. 특히 중국이 공산화 되고 나서는 코리아였다. 맥아더의 말을 빌리면, 그 다음엔 일본, 그 다음에 하와이, 필리핀 까지 밀린다는 우려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다시 한번 공산주의 소련이 도전하게 된다면 그에 걸맞는 결의로 응징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국방비가 900억 달러였다. 이게 전쟁전 까지는 100억 달러로 줄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500억 달러가 되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쟁국가도 되었고 자기 연맹국가도 구원해 줄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⑤ 미국은 세계 대전전 까지는 세계적인 외교정책전략이 없었다. 미국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대국이고 독보적이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패권국가 이지만 그 전에는 자기들끼리 경제성장이나 하고 우리끼리 잘 살자 했는데, 제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국제 무대로 끌려 나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전쟁이 났을 때 미국은 소련이 침공했다고 표현했다. 뉴욕 해럴드 트리뷴 기사제목은, Russians are said to be invading(러시아인들이 침공하고 있다), Red Tank units Push on Seoul (붉은 탱크 부대가 서울을 공격한다). 미국 국민들은 이제는 안되겠다, 그러면서 행정부에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강경 군사전략을 요구하게 되었다. 한국은 같은 민족 끼리 서로 총을 겨누고 피를 흘리고 있는데 정작 동맹국들의 우려를 덜게 만들고 일본을 구하고 타이완을 구하고 미국이 세계 패권을 장악하게 만드는데 역할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편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즐겼다고 한다. 미군은 한반도 진창에 국방예산을 쏟아붓고 거기서 허덕이면 소련은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한국전쟁 때문에 독일도 군대가 다시 복귀되고, 독일 연방군 분데스베어(Bundeswehr)도 생겼고, 많은 나라들이 군사력 증강을 하고, 일본은 경제가 부흥하고, 미국은 패권국가로 자리잡고,
⑥ 아군은 북한군의 T-34 탱크를 3.5인치 바주카포로 뚫을 수는 있었지만 전선이 밀리는 걸 막지는 못했다. 그래서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전격적으로 낙동강 이남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 결국 전쟁발발 한달만에 낙동강 전선 (포항-다부동-낙동강)이 형성된다. 워커 장군은 낙동강을 요새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늘은 미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다. 낙동강 상공에는 항상 두 대의 전투기가 일본에서 15분 간격으로 전투기를 보냈다.
⑦ 개전초기 6월말에 북한군의 병력수는 보병 10개사단, 4개 경비여단, 1개 탱크여단 등 총 17만 5천명이었다, 그런데 한달만인 7월말에 10만명이 되고, 무려 8월초에는 7만 9천여명으로 줄어든다. 두달도 안되는 사이에 1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국군과 미군은 14만명으로 증강된다. 결국 북한군은 바로 낙동강에서 막혔고, 김일성의 당초계획은 상당 어긋나게 되었다. 이때 1950년 9월 11일, 일본과 부산에서 국군과 유엔군 7만여명을 태운 함정, 261척이 출항한다. 이들은 1950년 9월 15일 바로 인천 앞바다에서 함포사격과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한 시간 반만에 월미도를 점령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유엔군은 작전 하루만에 인천을 점령하고 다음 목표인 서울을 향해 전진한다.
⑧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인천상륙작전에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김일성은 듣지를 않고 8월 15일 까지 무조건 부산을 장악하려고 밀고 내려왔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81호를 공포하여. 전장에서 도주하려는 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할 것을 명령했다, 이런 와중에 인천상륙 작전이 전개되었다. 스탈린은 인천상륙작전 3일후 김일성에게 낙동강 전선에서 4개 사단을 차출해 서울 방면에 투입을 하라고 충고한다. 스탈린이 보기에 낙동강 전선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빨리 서울에다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서 쪽집게 과외를 받은 김일성은 서울방어에 1개 전차 여단과 1개 연대 병력을 보냈다. 1개 사단도 안되는 적은 병력이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소식이 낙동강 전선에도 전해지고, 북한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⑨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오는데 한달이 걸렸고, 낙동강 전선에서 한달 이상 대치를 했다. 쫓겨서 서울까지 퇴각하는 데는 13일이 걸렸다. 아군은 이 기세를 몰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된다. 전쟁 지휘는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렇게 봤을 때 김일성은 전쟁경력도 없었고,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없었다. 스탈린의 말대로 4개 사단을 낙동강 전선에서 빼내어 서울에 배치했으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4개 사단이면 약4만~5만 병력이다. 그러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되어서 서울 탈환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북한군은 서울-인천 근교에 대략 만명 정도 있었다. 유엔군을 막기에는 병력과 화력에서 열세였다.
⑩ 서울을 빼앗긴지 석달만인 1950년 9월28일에 탈환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9.29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한강다리를 끊었고 거짓 방송을 했고 돌아와서도 자신들이 끊은 다리를 못건넌 사람들을 비도강파 로서 북한에 부역했다 라고 규정하고 처벌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부역자나 공산주의자들은 북한이 철수할 때 북한을 따라갔거나 지하로 잠복했거나 이미 현실을 떠났다. 부역 정도를 A,B,C 등급으로 나눠서 악질이 아닌 사람은 C등급으로 분류훈방을 했다, 한국정부가 이런 처벌을 한 데는 크게 세가지 이유가 있다고, 첫번째는 실제로 부역자들을 처벌해야 될 행정적인 필요성이 있었다 또 이 사람들이 북한점령 중에 한국 군경이나 한국정부인사들을 괴롭히거나 납치하거나 살해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한국정부는 48년 이래 제주 4.3, 여순사건에 너무 많은 처벌의 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수복 이후에도 그런 관성을 따라갔다. 세번째는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과장된 과대처벌로 당연히 사적인 보복이나 손가락 총이라 불리는 이웃의 지목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역자로 처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