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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있습니까? / 눅 2:1-7
어린시절 성탄절이야말로 기다려지는 절기요, 가장 중요한 명절이었다. 교회학교에서는 한달 전부터 행사준비를 한다. 24일이면 크라이막스이다. 집에서 어떻게 잠을 자나? 교회에서 밤을 세며 새벽송 준비를 한다. 새벽 4시가 되면 여러 팀으로 나누어 등과 자루를 들고 성도들 가정을 찾아서 ‘♬ 기쁘다 구주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또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양을 하면 그 집에서 불을 밝히며 ‘할렐루야, 메리 크리스마스’ 하며 예수 탄생 인사를 하고 같이 찬송을 부른다. 가정에서는 과자라든지 떡, 팥죽, 생강차 등을 준비하였다가 주면 자루에 넣어서 새벽송이 끝나면 거두어 왔던 것들을 25일 성탄축하예배가 끝나고 나누어 먹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성탄절은 조용하게’라는 말과 함께 축소되었고, 의미없이 보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탄의 의미는 잊지말아야 하고, 이 날을 중심으로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날이 되어야겠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떤가? 깔끔하고 빈틈없는 분인가? 아니면 어딘가 좀 빈틈이 있고 그늘이 있어서 가까이 하기 쉬운 분이신가?
‘예수 성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은 동방박사이다. 저 멀리 동방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달려와서 세상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를 만나기 위해 곧 바로 헤롯 왕궁으로 찾아갔다. 안내하던 별을 잊어버렷기 때문이었지만, 실상은 그들의 선입관이 더 큰 문제였다. 세상을 다스릴 왕은 당연히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예수님은 왕궁이 아니라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 오셨다. 여관이 아니라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다.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비밀이다. 예수님이 처음 오신 그 날로부터 2천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모든 것이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발전했다. 이제는 어디를 가나 그때의 여관보다 훨씬 시설이 좋은 러브텔들이 즐비하고 식사할 곳도 많아졌다. 이제는 그 날의 말구유는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2천년 전 베들레헴 마굿간 말구유는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나?
몇 년 전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곳을 찾아가 보았다. 지금은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예수탄생교회’라는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고개를 숙여야 들어가는 작은 문을 통과하여 건물안으로 들어간 그곳에는 짐승들도 없었고, 지저분하지도 않았다. 성지로 잘 보존되어져 있는 그곳에서는 2천년 전의 상황을 아무리 생각해 보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마리아와 요셉은 베들레헴 한 마굿간 말구유에다 아기 예수님을 낳았다. 왜 그곳을 선택했나? 성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그것은 그때 사람들이 임산부에게 방을 내어주지 않을만큼 악했거나, 여관의 숫자가 적었거나, 요셉이 방을 얻을 수 있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일상사가 그렇게 만들었다. 호적을 하라고 명받은 사람들은 비슷한 일정에 고향 베들레헴으로 모여들었고, 먼 길을 온 사람들은 제각각 머물 처소를 찾아 적당한 방들을 하나씩 차지하고 쉬었다. 요셉이 아기를 임신한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에서 144km를 걸어서 베들레헴에 늦게야 도착했다. 산모를 위해 좀더 편안한 여관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모든 여관은 만원이었다. 부득불 마굿간에라도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오늘의 이 시대를 욕심과 정욕으로 가득한 죄악이 넘치는 시대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욕심과 정욕을 위한 공간은 많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모실만한 편안한 방은 오늘도 없다고 탄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오해이다. 모두가 바쁘고 피곤한 이 세상에서 제각각 보다 편히 쉬기를 바라는 인간의 본능을 죄라고 나무랄 수는 없다.
성서에 계시된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요 1:2-3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자기 땅에 오심’(요 1:9)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어디에다 모셔야 옳을까? 왕상 8:27절에 솔로몬왕은 7년에 걸쳐서 융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시면서도 자기의 권한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자기의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유권을 주장하시거나 투쟁하지 않았다. 주인도 몰라보고 주인에게 빈방 하나쯤도 내어놓지 못하는 버릇없는 죄인들이라고 정죄하지도 않았다. 피곤에 지친 그들의 삶을 인정하고, 가만히 그들의 곁에 비어있는 마굿간으로 오셨다. 사람들은 그 분이 구유에 오신다는 사실 때문에 불편해 하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리아와 요셉을 보면서 특별히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성서는 이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일상생활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그곳에 태어나셨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렇게 우리 가운데 계신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광고를 하거나 티를 내지도 않고, 아주 평범하 이웃의 한 사람처럼 거저 우리 주변에 그렇게 와 계신다. 그래서 오늘도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지지 않으면 성탄절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채 그냥 지나가고 만다.
어떤 사람이 미국에 여행을 갔다가 나이아가라폭포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 어마어마한 장관을 보면서 황홀해져서 말했다. ‘아!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위대하시다.’ 그를 수행하며 안내하던 사람이 물었다. ‘이 폭포하고 당신 아버지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세상사를 보면서 예술적인 감각을 가지고 말할 수는 있다. ‘야~ 진짜 멋있다. 참 훌륭하다.’ 그러나 그 사건 속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는 없다. 이번 성탄절에 여러분이 만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나? 아기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성탄절이면 가난한 사람들, 고아원, 양로원 같은 곳을 찾는 전통이 생겼다. 좋은 일이다. 주님의 성탄절에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은 귀한 일이다. 우리의 평범한 이웃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보일 때 여러분은 진정 성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동방박사들의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헤롯 왕궁을 찾아가서는 안된다. 세상의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항상 저 높은 곳을 쳐다본다. 대단한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누군가가 메시야적인 발상을 하고, 메시야적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확 바꿀 것이라고 소망한다. 그러다가 찬사는 욕설로 바뀌고, 기대는 절망으로 변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이다.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다. 마굿간의 아기 예수를 보아야 한다. 그날 아기 예수를 본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대로 찬양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절망하지 않고 불평없이 그분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다. 하늘나라를 세워갔다. 진정한 변화는 위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세상 한 가운데 아기 예수로 오신 구유의 아기 예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지는 사람들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오셨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다. 한 인간으로 오셨다.
그러나 아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이 역사를 가르는 시점이 되었다. 공자, 노자, 맹자가 그렇게 했나? 마호메트가 그렇게 했나? 석가모니가 그렇게 했나? 누가 인간의 역사를 가르나?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역사를 갈라버렸다. 놀라운 사실이다. 역사의 시점을 가르는 BC(주전), AD(서기)가 무엇인지 아나? BC는 Before Christ(예수 이전)이라는 뜻이다. AD는 라틴어 Anno Domini, 영어로는 In the year of our Lord(우리 주님의 시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역사를 가르는 시점은 예수에서 나왔다. 영국지역은 예수 이전에 아주 쓸모없는 지역으로 인정받았던 곳이다. 과거 로마 황제들도 영국지역은 우중충한 날씨에다 사람들도 괴팍해서 별로 쓸모없는 지역이라고 했다. 하지만 로마가 버린 우상으로 가득한 이 영국 땅에 예수의 복음이 들어와 위대한 대영제국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기독교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세계의 역사를 이끄는 훌륭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었다. 예수 이전에 독일은 게르만민족, 이동하는 민족, 떠돌이민족이었다. 하지만 예수가 들어감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세계의 철학, 신학, 과학, 음악들이 독일을 통하여 만들어 졌다. 거장들이 탄생하는 곳이 되었다. 미국이 왜 여전히 세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청교도들이 들어와 피땀으로 눈물로 기도하며 세운 땅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찾을 필요도 없다. 한국도 그 중의 한 예이다. 지질이도 못사는 나라, 남의 식민지였던 나라가 예수를 받아들인 후에 변하였다.
나라 이야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목사로서 많은 체험을 하는데 예수를 진실되게 믿는 사람치로 정말로 못사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예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복받고, 예수 때문에 사업에 풍성하고, 예수 때문에 학업도 마치고, 모두가 예수 때문이라고 예수를 자랑한다. 자신이 다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치고 복받는 사람 별로 없다. 내 머리를 믿지, 내 주먹을 믿지 하면서 떠들지만 별로 나은 것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말씀 그대로 심령이 예수로 인하여 가난하게 되는 자가 복이 있다. 자신의 자랑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복을 받게 되어 있다. 솔직히 말해 볼까? 우리가 왜 예수를 믿나? 천국가려고요? 맞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나라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우리의 삶에도 임하게 된다. 이 땅에 임하게 된디. 가정이 천국을 이루고 삶이 천국을 이룬다. 복받는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복받았다는 말이 저는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너무 기복적인 것이 아니냐 하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예수 믿고 복받는 것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사실이 그렇지 않나? 예수 믿는 것은 축복이다. 은혜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지 못하나? 왜 삶의 현장에서 축복을 누리고 살지 못하나?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젼혀 마음에나 생활에나 예수님 믿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마음에는, 생활에는 영 딴판으로 생활한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들의 생활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세상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한다. 왜요? 그 마음속에 예수를 진정으로 모시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져 버리고 차가워 딱딱한 무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 했다. 성탄절을 맞아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되돌아보길 원한다 기도하길 원한다. ‘주님 성탄절을 맞았는데,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인데, 주님, 내가 축복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내 마음에, 나의 가정에, 나의 일터에, 나의 모든 삶에, 모든 것 위에 주님의 은혜의 복을 허락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성서말씀에는 정혼한 한 가정이 나온다. 바로 요셉과 마리아가 나온다. 당시 로마의 호구조사가 있어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고향에 가서 호구조사에 참여하여야 한다. 로마의 법이다. 요셉과 마리아도 나사렛에 살다가 호구조사에 참여해야 되기 때문에 여러 날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이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 예수님을 해산하는 시점이었다. 아이를 낳아야 되는데 방이 없었다. 오늘 말씀에 ‘아기를 낳아 구유에 놓았다’라고 어떤 앞의 설명도 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르면서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인도하고 싶다. 어느 부모가 자신의 첫 아이를 동물들이 있고 냄새나는 그런 곳에서 낳으려 하나? 어느 누가 자신의 아이를 구유에다가 놓고 싶나? 저도 자식을 기르는 부모로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새롭게 말씀이 와 닿게 된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나? 말씀이 말한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써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관이란 것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 베들레헴은 여관이 있는 지역이다. 젊은 부부 한쌍이 첫 아기를 낳는데 여관에서는 방이 없다고 거절당한다. 참 어처구니없는 이런 일이 세상 어디에 있나? 한 가지 사실은 만삭이 된 이 부부에게 아무도, 그 누구도 방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방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2월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당연히 말한다. 구유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 하지만 생각해 보라. 이것은 눈물이다, 아픔이다, 비참한 현실이다. 우리 첫 아이가 태어나는데 어누 누구도 방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은 눈물이다. 두려움 중에 두려움이다. 여관이 없었다면 모를까 여관이 있어서 요셉과 마리안은 여관을 찾아다니면서 애걸했다. ‘아이가 나오려고 해요. 좀 도와주세요.’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그것은 눈물이다. 비참한 일이다. 아마도 여관 주인들이 태어날 분이 온 인류 역사의 출발점이 되시는 메시야이심을 알았다면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본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다면 그렇데 못했으리라 본다. 그분이 축복의 근원임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본다. 우리를 구원할 자임을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왜 그렇게 했나? 몰랐다. 무관심했다. 애정들이 없었다. 사람들이 세상일에 너무 바빠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께 신경 쓸 겨룰이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 아기 예수님께 누워계신 구유에 관심을 쓸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바쁜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훨씬 복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칠 정도로 바쁜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새상 사람들은 흔히 ‘바빠서 ~을 하지 못한다’라고 핑계를 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느냐 죽느냐 하는 영적 문제에도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바쁘게 살았느냐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분주하게 살았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날 여관 주인들을 비롯하여 세상 사람들은 전부 다 세상일에 바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손님을 받아서 대목을 챙기겠다는 열심 하나로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것도 몰랐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다. 아마 나중에 땅을 치며 최고로 후회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베들레헴의 여관 주인이라고 생각된다. 만삭이 된 마리아가 빈방을 찾아 헤멜 때 ‘빈방 없어요!’라고 방문을 쾅하고 소리가 나도록 닫았을 주인들을 생각해 보라. 돈버는 일에, 대목잡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메시야, 그리스도를 외면했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최고의 축복된 일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놈의 바쁜 것 때문에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께서 편안하게 태어날 따뜻한 방 하나 제공하지 못한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었다.
우리는 오늘 성탄절을 맞이했다. 이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도 예수를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요? 성탄카드 쓰면서, 예쁜 선물 포장하면서, 친구끼리 만나 놀면서, 회식에 참여하면서 예수는 잊어버리고 살 수 있다. 쇼핑하다가 잊어버릴 수 있다. 메리 크리스마스 외치면서 사람들의 즐거움만 찾다가 정작 예수를 잊어버릴 수 있다. 우리 생활속에 예수가 있을 곳이 정말로 없을 수 있다. 예수님이 누워야 할 자리가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수 있다. 길거리의 모텔 네온들처럼 반짝거리지만 정작 방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거해야 되는 우리의 마음 속에 ‘방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는 서실이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 방이 없다고 외치는 주인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은 교회에나 있지 왜 이런 곳까지 오지?’ 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8:20절 ’‘ 돼지, 개, 여우, 새 등 세상의 동물들도 자신의 처소가 다 있는데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왜 예수님은 거하실 방이 없나? 왜 하나님의 아들, 우리를 구원할 그분은 머리 둘 곳이 없나? 우리가 방을 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생활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문열어 달라고, 방을 달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분은 거절당한다. 예수님이 머리 두셨던 곳은 어디인가? 생각해 보라. 십자가이다. 무덤이다. 우리를 대속해서 사해주신 바로 그 십자가가 예수님이 거할 처소였다는 사실이다.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쳤던 바로 그 골고다의 언덕이 주님이 거할 처소였다.
전도책자 중에 사영리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그려놓고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있고, 예수님이 중심에 앉아있는 것을 제가 몇 번 설명한 적이 있다. 기억나는가? 4영리란 말은 네가지 영적원리라는 뜻이다. 인생의 문제에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전도소책자이다. 첫 번째 그림은 자신이 중심에 있다. 예수님께 자신의 중심을 내려놓지 않는다. 생활이 어떤가? 어지럽다. 평안이 없다. 불안하다. 어떻게 해야될지 알 수 없다. 예수를 마음속에 모시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중요한 영적인 원리이다. 두 번째로 주님이 중심에 놓여있는 사람이다. 모든 생활에 패턴이 있다. 중심이 잡혀 있으니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다. 평안하다. 바로 주님이 모든 생활을 잡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방을 허용한 바로 이 사람에게는 귀한 축복이 있게 된다. 그림만을 보지 말고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보라. 내 안에 예수님의 자리가 나의 가장 중심에 있는지를 물어보라. 삶의 자리에서, 일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를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진정으로 예수를 모시고 있는가에 있다. 주님께 언제나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가에 있다. 외모를 보지 않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는 분이 우리의 생활을 바로 잡아주신다. 축복이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한가지 신학적인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사람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여관에서 탸어나게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어떤 분은 낮고 천하게 오시는 주님으로 해석한다. 그것도 맞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이곳에는 하나님의 뜻, 귀한 섭리가 담겨져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여관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자신의 독생자를 태어나게 하셨다. 왜요? 왜 하나님은 그런 계획을 가졌나? 여관이라는 곳은 여행자들이나 떠돌이들이 자는 곳이다.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서울에 갔다고 하자. 서울에 친지가 있는데 그곳에서 자지 않고 왜 여관에서 자나? 그 가정에 부담주지 않으려고 여관에서 잘 수는 있지만, 대개 그 집에서 거하게 된다. 가정집에서 자면서 함께 식하하고 교제하고 삶의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사실은 예수님이 여관에서 나지 않으시고 마굿간에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예수님이 떠돌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행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그분은 누구신가? 그분은 우리의 친구이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길 원하신다. 함께 동거동락하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길 원하는 분이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는 자이시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여전히 예수님이 떠돌이인가? 예수님이 여전히 하나의 여행객인가? 여러분, 주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기 원하신다. 우리의 미움을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영원히 거하길 원하신다. 여행객처럼 예수님을 취급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주님을, 성령님을 여행객처럼 취급하지 마라. 그분을 귀하게 맞이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항상 거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자신의 방을 내어드려야 한다. 여러분, 오늘은 성탄절이다. 그저 일년에 한번 맞는 기념일이 되지 말고, 진정으로 내 중심의 방을 그분께 내어드리는 날이어야 한다. 냄새나는 짐승의 우리가 아니다. 내 심령이 비록 좁고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분이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심령 속에 탄생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가슴의 방을, 여러분의 심장의 방을 내어드리자. 편안히 아주 편안히 태어나 쉴 수 있도록 말이다. 내 비록 가난하고 가진 것 없어도, 모셔드릴 만한 자격이 없어도, 내게 분이 넘쳐도, 내 심령의 방을 그분께 빌려드린다면 얼굴 가득 환하게 웃는 그 어린 아기 예수의 모습이 여러분의 심령에 파고 들게 된다.그분께 방을 내어드리자. 내 심령의 방을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음이라.’ 영원 영원히 내 안에 그분이 계시도록 방을 내어드리자.
여러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분이 있나? 우리의 삶에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분이 있나?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 있나?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베들레헴 구유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는 사람은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심판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손가락이 올라가면 우리는 하나님께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의 손가락이 내려가면 우리는 꺼지지 않는 불속으로 내려가게 된다. 우리의 삶을 올릴 수 있는 분, 나에게 축복을 줄 수 있는 분,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기 바란다. ‘주님, 나의 마음 속에 찾아주옵소서. 저의 마음을 주님이 거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 주옵소서. 주님, 나의 마음과 생각 모두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충성스럽게,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열심히 주님께 마음을 바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예수님이 손을 들어 주신다. 올라가게 된다. 축복된 삶을 살게 된다. 한주간 더욱 주님께 헌신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면서 주님을 맞이하는 귀한 성탄절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04 성탄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