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가 모처럼 봄날을 맞았다. 올 시즌 K리그1 21라운드(125경기)까지 총 관중수는 102만2032명이다. 경기당 평균 8176명으로 전년 대비(5468명) 52.8%가 증가했다. 현재 추세면 K리그1은 186만명가량의 관중이 시즌 종료 시점까지 입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K리그1은 유료관중 집계를 시작했는데 124만명을 기록하며 흥행 참패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31라운드에야 100만 관중에 도달했다. 포탈사이트 인터넷 중계(네이버 기준)의 평균 동접자수도 2만1985명으로 2018년 동시점 대비 76.85% 증가한 상태다.
개막 특수가 몰린 3월과 어린이날 특수가 있는 5월을 제외하면 관중수가 하락세를 겪는 흐름도 올해는 사라졌다. 오히려 5월과 6월 들어 전월대비 각각 16%, 9% 증가세를 보이며 흥행에서 꾸준함을 보이고 있다. DGB대구은행파크로 대표되는 관전환경의 개선, 근래 보기 드물었던 치열한 순위 싸움이 빚어내는 명승부, 각급 대표팀을 위시한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호조 등의 요인이 편차가 적은 월별 관중 흐름을 끌어냈다.
상품성이 개선된 K리그는 올 연말 중요한 기회를 앞두고 있다. 2019년을 끝으로 새로운 중계권 계약을 맺게 된다. 10년 넘게 정체 상태인 중계권 규모가 현재의 분위기를 잘 활용한다면 K리그에게 큰 상업적 도약대를 가져다줄 수 있다. 프로축구연맹도 올 시즌 2부 리그를 자체 제작하며 중계의 질을 균일하게 하고, 화요일과 금요일 경기 배정으로 K리그 노출 빈도를 늘리는 등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한 치밀한 준비를 시작했다. 프로 스포츠의 상업적 가치를 좌우하는 중계권 계약의 증대를 위해 K리그가 어떤 고민을 해야 할까?
지난 7월 7일 전북과 성남의 경기가 열린 전주월드컵경기장. 이날은 중국 슈퍼리그의 상하이 선화로의 이적이 결정된 김신욱이 전북 유니폼을 입고 치르는 고별전이었다. 김신욱은 마지막 선물이라도 하듯이 전반 16분 헤딩 선제골을 만들어냈다. 표정에서부터 복잡한 심경이 묻어난 그는 관중석의 전북 팬들에게 큰절을 했다. 그러나 김신욱의 그런 경기 중 고별 퍼포먼스는 리플레이 장면에 가려져 중계를 지켜보는 팬들에게 다 전달되지 못했다. 그가 교체돼 나올 때 관중들과 함께 박수를 치며 기다리던 선배 이동국과 긴 포옹을 하는 장면, 이동국이 쐐기골을 넣은 뒤 벤치로 가 김신욱을 안아주는 장면 역시 리플레이에 가려졌다. 이날 경기의 중심축은 김신욱이었고, 그가 스토리라인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었다.
수원과 전북의 2라운드가 열린 3월 9일의 수원월드컵경기장으로 가 보자. 이날 경기 전 염기훈은 수원 소속으로 300경기를 치른 데 대한 기념 행사를 가졌다. 그를 위한 특별 영상이 전광판으로 나오고 수원 팬들은 이미 레전드의 위치에 오른 주장을 향해 큰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경기는 전북의 4-0 완승으로 끝났고, 경기 전 축하 열기는 실망감으로 싸늘하게 식었다. 경기 후 그라운드 인터뷰 대상은 2골 1도움을 기록한 MOM 로페즈였지만 평이하고, 관습적인 선택이었다. 만일 그 대상이 경기 후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염기훈이었다면 어땠을까? 시즌 초반 팬들의 실망감을 아우르고, 자신의 기념비적인 경기를 하필 악연의 팀이 망쳤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얘기와 그림이 나오지 않았을까?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다. 하지만 ‘프로’스포츠에는 드라마틱한 스토리 전개가 필요하다. 중계 중 벌어지는 무수한 실황 장면에 어떤 시각과 전후 이야기, 역사를 녹이느냐에 따라 스포츠 중계는 다큐멘터리가 될 수도 있고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양한 상상과 참여를 가져다 주는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도 있다.
K리그의 현재 중계 구조는 원재료인 경기 자체를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다. 거기에 양념을 얹어 새로운 스토리를 가공하는 구조가 부족하다. K리그의 구성원인 선수, 팀, 팬을 관통하는 관찰이 약하다 보니, 경기와 리그에 의미와 재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선이 없다.
최근 국내에 중계된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준결승전의 시작과 끝은 모두 리오넬 메시였다. 소속팀 바르셀로나와 달리 대표팀에서는 무관의 한을 풀지 못한 메시에게 얼마 남지 않은 기회라는 건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알고 있었다. 승자는 개최국 브라질이었지만, 경기가 끝난 뒤 중계 카메라는 가혹할 정도로 메시의 표정에 집중했다. 그라운드에 우두커니 서서 황망한 표정을 짓는 메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날 경기의 가장 중요한 컨텐츠가 탄생했다.
K리그가 중계권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경기에만 모든 것이 집중된 구조를 경기가 파생하는 컨텐츠 중심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K리그는 긴 시간 아시아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유지해 왔지만 그것을 포장하는 역량이 아쉬웠다. 중국 슈퍼리그, 일본 J리그는 물론 경기력 면에서 K리그에 크게 못 미치는 동남아 각국 리그가 절대적 기준의 경기력이 아닌, 상대적 기준인 내부의 컨텐츠로 중계권 가치를 크게 높이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축구가 아닌 한국의 환경적, 구조적 특징이라 말하기에는 국내에서도 이미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사례가 많다. K-POP, e스포츠, 프로야구 등은 제품의 퀄리티가 아닌 컨텐츠(스토리)를 앞세워 팬층을 확대하고 상업적 가치를 높였다. 경기력 만을 앞세워서는 K리그가 EPL을 비롯한 유럽 축구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선수와 구단의 캐릭터와 역사가 빚어내는 갈등과 감동의 요소, 혹은 성장 과정을 충실히 소개한다면 상대적 비교가 아닌 절대적 몰입을 끌어낼 수 있다. 스포츠가 패배라는, 제품을 기준으로 따지면 불량품까지도 잘 포장해서 팔아야 하는 대상임을 생각하면 당연히 요구되는 요소다.
e스포츠의 경우 일반 유저끼리 펼치는 PC게임 스타크래프트를 10만의 관객이 광안리 해변에
모으는 하나의 프로리그까지 격상시킨 데는 게임성 이상의 선수 개인의 개성을 담은 캐릭터가 있었다. 임요환, 홍진호, 박정석 등은 각자의 플레이 스타일을 반영한 직관적인, 혹은 스토리 중심의 개성 있는 별명으로 캐릭터를 완성했다. 그들이 대결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컨트롤과 전략도 흥했지만 게이머 자체의 캐릭터의 대결이 평범한 게임을 프로리그로 완성시켰다. 그 뒤에는 선수들의 뒷이야기를 충실하게 소개하는 해설자들의 뒷담화 등 파생 컨텐츠가 쏟아지며 상업적 규모는 점점 커졌다.
스토리가 중심이 된 컨텐츠는 프로스포츠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NBA가 마이클 조던이라는 최고의 자산이 은퇴했을 때 선택했던 전략은 새로운 조던을 찾는 프로젝트였다. 각 구단 별로 최고의 유망주에 대한 스카우팅 정보가 해설자에게 전달됐고, 그는 무수한 제2의 조던을 탄생시켰다. 코비 브라이언트, 빈스 카터, 앨런 아이버슨, 트레디시 멕그레이디,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까지 신체조건과 스타일에 상관 없이 좋은 역량을 발휘하는 젊은 선수는 모두 조던이라는 이미 은퇴한 선수와 코트 위에서 싸우고 비교해야 됐다. NBA는 가장 거대한 스타를 잃은 대신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무수한 포스트 조던을 만들며 긴 시간 리그의 흥행을 유지했다. 당장 K리그는 포스트 이동국, 포스트 박주영, 포스트 염기훈을 위한 컨텐츠 전략을 갖고 있을까?
K리그는 안 된다고 하지만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성적도, 흥행도 하위권이었던 대구는 올 시즌 전용구장 건설과 함께 관전 환경을 바꾸고, 팀의 비주얼적 이미지를 과감히 개선하며 흥행의 중심에 섰다. 그 과정에서 조현우, 세징야, 김대원, 정승원 등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구 스타와는 거리가 멀었던 선수들이 이름들 떨쳤다. 조광래 대표이사가 전용구장을 완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 이야기는 그런 대구의 상승세에 대한 몰입도와 충성도를 높였다. 경기장을 찾고, 대구를 응원하는 팬들이나 시청자들은 대구에 자부심을 투영했다. 경기력 상승이 흥행의 몸통임을 부정할 순 없지만 팀에 캐릭터를 부여하고 스토리가 더해지며 날개를 달 수 있었다. 대구 홈 경기를 중계할 때면 작은 전용구장이 주는 분위기와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미 유럽 축구 부럽지 않다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부산은 관전 환경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흥행 면에서 선전하고 있다. 지난 시즌 후반기 부산의 관중 증가세는 K리그2를 넘어 1부 리그에서도 보기 드문 흥행 역주행이었다. 아시안게임이 낳은 스타 김문환을 중심으로 한 스타마케팅을 밀착형 스킨십 중심으로 전개했고 그렇게 모인 팬들은 이동준, 김진규 등 다른 젊은 선수에게 시선을 확장했다. 외국인 선수 호물로는 확실하 지역 컬러를 캐릭터 삼아 국내 선수보다 더 사랑받는 스타가 됐다. 그들은 골이 터지면 매 경기 다양한 단체 셀레브레이션으로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어낸다. 이미지가 애매한 팀이었던 부산은 젊고 활력적인 캐릭터로 거듭나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 중이다.
경기력만 강조해서는 K리그가 결코 EPL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뽀로로가 디즈니를 이기고, BTS가 빌보드 1위를 차지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경기력에만 갇힌 시야를 벗어나면 스토리텔링, 캐릭터, 컨텐츠의 힘을 볼 수 있는 예다. K리그도 경기력 만을 팔아야 한다는 아마추어적인 비즈니스에서 벗어나 ‘스토리를 담은 컨텐츠’ 중심의 프로스포츠 비즈니스로 전환할 때 중계권으로 대표되는 상업적 성취가 가능하다.
출처 - 서호정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