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3장 1절의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라는 구문입니다.
‘나의 사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라기를 연상시키고,
이어지는 ‘언약의 사자’와 4장에 등장하는 선지자 엘리야와 연결이 되는 구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예배를 드리는 구별된 백성이길 바라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불의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서 불의한 제물을 바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내게로 돌아오라”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돌아오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떠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죠.
하나님의 호소에도 그들은 어떻게 우리가 돌아갑니까? 이 보다 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반문합니다.
그들의 굳어지고 완악한 심령을 향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봉헌물을 드려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였는가?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우리가 언제 무슨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성전 무용론,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멀리 떠나계신다는 이신론, 하나님의 무능을 이야기하던 그들의 입술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양을 들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여전히 죄악 중에 거하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하여서 ‘나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호소하십니다. 애끓는 마음으로 그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말로, 행동으로, 삶으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속을 썩이다 못해 부모를 대적하는 불효막심한 자녀들처럼 하나님을 경멸하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시고, 우리들이 하나님께 돌아 오기 만을 탕자의 아버지처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한계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이 기다림은 심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이 아니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어제 저는 두 번이나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눈앞에서 교통사고가 나고, 내가 주행하던 차선 바로 앞에서 버스와 승용차가 충동하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제가 양보운전 하지 않았다면 두 번다 그 피해자가 내 자신이었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지 모릅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주님 품을 떠나 있다면 지금 속히 여호와께 돌아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