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 魏大模 위대모)선교사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휘트모어(N. C. Whittemore, 위대모)는 1870년 6월 7일 미국 뉴욕주 부르클린에서 태어났다. 뉴욕 파크대학과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896년 10월 내한하여 선천 스테이션(선교거점) 개설을 책임 맡았다. 1897년 봄 처음 평북 선천을 순회한 그는, 이듬해인 1898년 선천읍교회(이후 선천남교회)를 설립하였고, 1901년부터는 의료선교사 샤록스(A. M. Sharocks, 사락수)와 함께 선천에 상주하며 전도하였다. 또 1902년 말에는 양전백을 장로로 안수하였다. 그 후 양 장로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선천남교회에서 휘트모어 선교사를 돕는 동사목사(同事牧師)가 되었다. 그리고 1906년 선천의 교인들이 중등교육기관으로 신성(信聖)학교를 설립하였을 때 휘트모어는 그 학교의 교장이었다. 휘트모어 교장은 북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마련하였다. 그 후 그의 활동은 의주와 강계 그리고 만주로 확장되었다. 1929년 서울 스테이션으로 전임한 휘트모어는, 1935년 귀국할 때 까지 조선예수교서회의 총무로 일하면서 서회 건물을 새로이 마련하는 등 기독교문서운동을 주관하였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1896년 12월 양전백은 평양에 새로 부임한 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가 평안북도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자, 권서직을 그만두고 그의 조사가 되어 동역을 하였다. 이 때부터 양전백은 휘트모어와 함께 선천에 거점을 마련하고 평안북도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를 설립하였다. 선천에서 그는 각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던 두 무리의 교인들을 규합해 1897년 가을 선천읍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각지를 돌며 전도에 힘쓴 결과 1898년 12개 교회에 세례교인이 53명이던 것이 1899년 26개 교회에 세례교인 202명으로 커다란 증가를 기록하였다.
출처: https://4history.tistory.com/26 [역사 스페셜]
노먼 휘트모어(N.C. Whittemore) 선교사(위대모, 1870~?)는 평북 지역에 복음화의 개척 선교사이다. 그는 최북단 도시 선천을 중심으로 선천읍 교회 등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성 학교, 보성 여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육성하였다.
* 선천은 평북의 선교 중심지이며, 여기를 통해 북방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곳은 평양 이전 초기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대부분 사람들이 기독교 성도였다. 또한 선천 신성 학교를 중심으로 민족 운동이 일어났고, 1911년 105인 사건 및 1919년 3.1 운동의 핵심 거점이 된 곳이다. 선천은 양전백, 백낙준, 방효원, 방지일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된 곳이다.
그는 1870년 6월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뉴욕 파크 대학과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1896년 10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내한 후 한국 문화에 적응한 후 선천으로 파송 받았다. 1897년 봄 처음으로 선천을 방문한 이후 정기적으로 순회 방문하며다 1898년 선천읍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0년에는 남만주 지안에 있는 《이양자 교회》를 재건해 달라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요청에 따라 휘트모어와 안승원이 가서 재건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해서 지안의 교회를 봉사하였다. 이것이 중국을 지원한 장로교의 최초 선교 활동이다.
그는 1901년 선천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선천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의사 샤록스(A. M. Sharocks, 사락수)도 함께 선천에 상주하며 환자를 치료하였다. 1902년에는 그의 조사 양전백을 선천읍 교회 장로로 세워 기독교 복음화 및 민족운동의 기둥이 되게 하였다.
* 양전백 목사(1870~1933)는 1896년부터 휘트모어의 조사가 되었다.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기로 졸업하고 장로교 최초로 안수자가 되었다.(최초 안수자 7인 중 한 명) 그는 선천으로 돌아와서 휘트모어를 도우는 사역을 하였다. 3.1운동의 핵심 인물인 33인 중 한 사람이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성 중학교가 민족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그의 역할이 컸다.
휘트모어는 1902년부터 의주 지역을 중심으로 북방 선교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강계, 만주 지역을 방문하고 일대에 복음을 전하는 등 평북 지방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선천에 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인재를 육성하였다. 1906년 선천에 신성 학교를 설립하여 휘트모어가 초대 교장으로 헌신하였고, 북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마련하였다. 1907년 보성 여학교를 세워 여성에게 교육하였다.
* 신성 중학교는 1909년 교육 선교사 매쿤의 교장 부임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매쿤은 이 학교에 다니던 백낙준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서 문교부 장관이 되게 하였다. 또한 매쿤은 숭실대 학장 시절 신사참배 운동을 끝까지 반대하여 추방 당한 선교사이다.
선천에는 1905년 의사 샤록스에 의해 미동 병원이 설립되어 환자를 치료하며 복음을 전하여 성도가 나날이 증가하였다. 1911년 선천읍 교회에 성도가 많아져 예배당이 좁게 되자 선천 남교회를 분리 개척되었다. 그 후 1930년대에는 선천 중앙교회, 선천동 교회 등 여러 교회가 추가로 분리 개척되었다.
휘트모어는 1929년까지 선천에서 사역한 후 서울 선교지부로 이동하여 조선 예수교 서회 총무로 일하면서 기독교 문서 선교활동에도 헌신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6년간 헌신한 후 1935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선교 이야기는 책 《위대모와 평북 기독교》에 기록되어 있다.
[출처] 58. 휘트모어, 도시 전체가 복음화된 평북 선천의 개척자|작성자 둘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