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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은 어떤 곳
모든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데는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영토의 확장과 율령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통치체계의
확립, 그리고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가 그것이에요.
샤먼의 전통으로 유지될 때만해도 제관(祭官)이 춤추고 주술적인 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조직이
커지고 사회가 분화돼 왕과 귀족, 백성의 신분차별이 생겨나면서 이런 위계를 설명하는데 종교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삶과 영혼의 문제, 두가지를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인 종교의 전파를 위해 고대
제왕들은 막대한 재력이 들어가는 신전과 사찰의 건립에 그렇게 열성적이었던 것이지요.
실제 삼국시대 가람배치에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 순으로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돼 있는 경주 황룡
사지 강당은 오늘날 정부종합청사의 강당이 아니라 로마시대 홀룸 같은 역할을 해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모두 이곳에서 강의를 했어요.
따라서 지금부터 강의하는 불교는 어느 특정 종교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고대 우리 조상들이 국가창출의 원동
력으로 삼았던 불교, 이데올로기로서의 불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고타마 싯다르타가 도를 깨달은 뒤 10대 제자를 통해 불교를 전파했지만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300년이 지난 기원전 3세기가 됐을 때입니다. 불상을 만들지 않아 무불상 시대로 미술사에서
얘기하는 당시에는 산치대탑과 같은 수트파(Stupa·불탑) 외에는 불교적인 장치물이 없었어요.
서기 1세기 들어 오늘날 파키스탄 영토인 간다라지역에서 비로소 불상이 출현하게 됩니다.
간다라는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으로 진출한 마지막 지역이었지요.
헬레니즘 문화가 동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간다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인간의 모습을 빌어 신상(神像)을
만들던 그리스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이때부터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원시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전환하는 불교 교리상의 발전도 불상제작의 전기가 되지요.
“깨우친 자가 부처다”라는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 석가모니도 수많은 부처 중의 하나일 따름이 되며 경전이
찬술될 때마다 수많은 부처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족보가 대단히 복잡해요.
부처 밑에 보살이 있고 보살 아래 천상의 세계를 지켜주는 제석천과 범천, 그리고 사천왕이 있으며, 다시 그
밑에 아라한과 나한이라는 고승, 그 아래로 승려와 대중이 있어 상하로 연결된 것이 불교의 위계(하이어라키)
입니다.
석가모니가 성불하기 전 왕자일 때의 모습을 모델로 한 보살상은 귀공자의 모습, 또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
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불상의 조성을 보면 석가를 포함 우주에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 다녀간 일곱 분의 부처(과거칠불)와 미래에
출현한다는 미륵불 등 시간개념의 부처가 있는가 하면, 방위개념이 들어가 있는 부처도 있답니다.
과거칠불 중 석가모니 직전에 지구에 다녀갔던 분이 다보불이기 때문에 석가와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나 석가탑과 다보탑이 병립해 만들어집니다.
동서남북에 다 부처가 있을 것이란 믿음에서 사방불 개념이 퍼지고 사면석불이 조성돼요.
‘아미타경’이 찬술되는 2세기쯤 되면 인도사람들은 자신들이 남쪽에 있다는 생각에 남쪽에는 석가모니,
북쪽에는 미륵, 서쪽 극락세계는 아미타여래 하는 식으로 사방불 개념이 완전히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또 부처의 좌우 양쪽에 부처를 보좌하는 보살상이 만들어지는데, 아미타여래의 경우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이,
석가모니의 경우 문수와 보현보살이 좌우에 배치됩니다.
‘화엄경’이 찬술되는 시점에 오면 불법 자체를 의미하는 비로자나불이 나타나게 됩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불경으로 들어가면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갖는데,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시 신앙
형태가 어떠했느냐는 것일 겁니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불상을 소개한 ‘The Image of Buddha’란 책을 보면 불상들이 각각 그 나라 사람 중 가장
미남형이거나 이상적인 상으로 변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도는 인도 사람의 이상형으로, 캄보디아는 캄보디아 사람의 이상형으로, 그리고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경주 남산의 불상은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상을 반영한 것이에요.
미국 하와이주의 호놀룰루에 ‘아카데미 오브 아트’라는 미술관이 있는데, 이곳 간다라 미술실에 전시돼 있는
불두(佛頭)를 보면 그리스 신전에서 떼어왔는지 불상에서 떼어왔는지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헬레니즘
을 통해 받아들인 그리스의 영향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32상 80종호란 게 있어요.
거의 모두 부처님의 이상적인 몸매와 보통사람과 다른 신체구조를 32가지, 80가지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나중에 법륜(法輪)으로 형상화되는 평발인 발바닥에 있는 바퀴나 곱슬머리와 머리 위의 군살을
나타낸 나발(螺髮)과 육계(肉?n), 두 눈 사이에서 희고 빛나는 털인 백호(白毫) 등이 모두 32상 80종호에
나옵니다. 이밖에 눈은 은행알처럼 생겼고 몸에서 금빛이 났다는 내용 등도 설명돼 있습니다.
그리스인의 모습이 아닌 인도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불상을 만든 굽타왕조를 지나 흰두교가 불교를 압도
해버리면서 인도에서는 더이상 불교가 발전하지 않고 실크로드를 넘어 불상과 함께 동점(東漸)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4~14세기 1000년에 걸쳐 막고굴 등과 같이 중국 둔황(敦煌) 등 실크로드 각지에 석굴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조성한 유적이 나타납니다.
19세기 중엽 모래바람에 덮였던 석굴이 하나하나씩 드러나면서 스타인이나 펠리오, 오타니 같은 서구와 일본의
탐험대(도적떼)가 들어가 벽화와 불상 등 유물을 가져갔습니다.
이중 펠리오가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 프랑스 기메박물관으로 가져간 돈황문서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으며 일본의 오타니(大谷)탐험대가 조선총독부 창고에 갖다놓은 수집품 때문에 우리나라는 중앙아시아
벽화의 세계 최대 컬렉터 중 하나가 됐지요.
중국 북위시대 윈강(雲崗)석굴만해도 불상이 중국화되기전 간다라 양식을 보여줍니다.
선비족인 탁발씨(拓跋氏) 등 중국에 들어와 남북조시대를 연 북방 이민족들은 유교에 필적할만한 이데올로
기로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어요.
북위가 안정되면서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으며 추운 북방민족 출신답게 두툼한 옷을 입은 불상을
만들어냅니다.
또 똑같은 시대지만 남조 양나라에선 훨씬 더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의 불상을 조성하는데 각각 고구려와 백제
불상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 판소리에 “찡그리면 다 서시인줄 아느냐”란 대목이 있어요.
북위시대 불상의 아련하게 잔잔한 미소는 중국의 미인인 서시(西施)가 어금니가 아파 찡그렸는데 웃음이 나와
아픔을 무릅쓰고 웃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켜줍니다.
이런 불상이 북주와 북제를 지나 당나라에 오면 육감적인 불상으로 바뀌게 되요.
당나라 불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게 통일신라가 석굴암을 만들 당시 조성된 높이 약40m짜리 ‘봉선사 비로자
나불상’입니다.
살찐 사람 목처럼 목에 3도, 즉 세 줄이 가 있는데, 불상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에 다가간 것으로 이
불상을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를 끝으로 신유학의 시대로 다시 넘어가는 송나라 이후로는 고전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불상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 고구려 불상은 20여개 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그나마 석불은 남기지 않았고 옮겨다닐 수 있는 조그만 금동불이어서 양식을 가지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중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연가(延嘉)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뒤쪽에 539년 고구려 동사(東寺)라는 절에서
천불을 만들어 유포했는데, 그 중 제29번째 불상이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확실한 고구려 불상임을 알 수
있지요.
옷자락이 무릎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는 평남 ‘원오리 출토 소조보살입상’은 고구려 기왓장에서 보이는 것
처럼 연꽃대좌를 포함한 전체적인 선이 강하고 날카로운게 특징입니다.
반면, 충남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은 연꽃대좌의 양식을 보면 600년무렵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렇게 당시 유행했던 양식을 통해 시대를 감별해내는 것이 미술사가 갖고 있는 큰 힘 중 하나입니다.
가장 백제다운 모습을 보여줘 ‘미스 백제’로 불리는 부여 ‘군수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이나 같은 곳에서 나온
고개가 6시5분 방향인 ‘납석제여래좌상’은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보여줍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삼국시대 불상 중 미소를 띠고 있는 불상들의 경우 입상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부분 좌상이면서 아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통일신라불상과는 달리, 우리와 동일한 지평 속에서 우리를
극락세계로 맞이하고 구제하러 온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시킨게 삼국시대 불상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봐요.
‘서산 마애삼존불입상’처럼 은행알 같은 큰 눈을 하고 활짝웃는 불상은 세상에서 보기 힘듭니다.
서산 마애불이나 석굴암 본존불, 창녕 관룡사에 있는 불상 등은 모두 동동남 15도 방향, 즉 동짓날 해뜨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데, 동지는 일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서울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10월 문을 닫기 전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함께 전시해
근래에 드문 히트를 쳤지요.
지금도 국적을 갖고 논란이 있지만, 거의 등신대에 가깝고 조선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모델로 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한 이들 반가사유상이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 불상의 위대함을 얘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들 반가사유상과 거의 흡사한 일본 코류지(廣隆寺)의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을 본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모든 실존적 고뇌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절대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극찬했지요.
경남 ‘거창 출토 금동보살입상’을 보면 보살상이 가진 존엄성보다는 옆집 수퍼 아줌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입
니다.
바로 이 점이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기반인지도 모르는데, 절대자의 모습
을 이웃집 아저씨와 아줌마 같은 평범한 상에서 찾은 것이 특징이에요.
원효의 대중불교가 갖고 있는 성격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신라의 불상, 특히 경주 남산자락에 있는 100여군데의 불상 중 삼국통일 전에 조성된 것은 ‘배리 석조삼존불
입상’과 ‘남산 부처골 감실 마애불’,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상’ 등 3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석불상은 여타의 다른 신라 불상과는 모습이 달라 백제 석공을 불러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라불교는 점점 세속화되면서 삼국통일의 밑바탕이 됩니다.
삼국통일 뒤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경북 군위 팔공산의 자연석굴을 이용해 조성된 ‘군위 삼존석불’을
보면 아련한 미소를 짓던 삼국시대 불상의 미소는 사라지고 뻣뻣하다 못해 목에 깁스를 한 채 높은 좌대 위에
앉아 군림하는 모습이에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나아가는 전환을 보여주는데, 불상의 미소는 점점 없어지다가 경주 남산
보리사 불상을 마지막으로 이후 이땅에서 만들어진 불상에선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720년 김지성이 부모를 위해 만든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및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남 장흥 보림사와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과 함께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몇안되는 불상 중 하나입니다.
‘군위 삼존불’에서 보이는 뻣뻣한 목의 불상이 100년 동안 세련돼 그 정점에 나타난 것이 경덕왕(재위 742~
765) 때 만들어진 석굴암 본존불입니다.
옷자락이 몸에 밀착돼 있는 것을 표현할 정도로 돌을 다루는 솜씨가 세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목에 3도가 있는 것이나 젖꼭지 표현, 엉덩이 등을 보면 당나라 때 불상과 마찬가지로 육감적입니다.
아잔타 석굴을 원용해 만들었다고 볼 때 전실은 없었고 빛을 받아들이는 광창이 있었다는 게 석굴암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11면 관세음보살상과 제석천·범천 등의 조각에서 보이는 인체비례나 도들새김을 표현한 두께에 따라 이상
향과 현실감을 표현해낸 점이나 석굴사원 조성과정에서 1000분의 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완벽한 기술
등을 볼 때 한반도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도 석굴암 하나가 남아있다면 이 땅에 살았던 민족은 위대한 민족
이었다고 사람들이 기억해줄 것입니다.
석굴암을 비롯,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안압지 모두 신라문화의 전성기로 고전이
완성되는 8세기 3·4분기인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게 특징입니다.
경주 남산의 불상조성도 경덕왕 때 들어와 본격화됩니다.
혜공왕 이후 신라하대에 조성되는 불상들에선 긴장감이 빠지면서 감정의 과소비 현상이 나타나며 하향곡선을
걷게 됩니다.
반면, 지방에서 일어난 호족들이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철불을 조성하기 시작
하며 이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보림사와 도피안사, 광주 춘궁리 철불이 대표적인 예지요. 이렇게 봤을 때 불상은 어느 한 종교의 신상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산물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자의 모습도 시대에 따라 친절성을 극대화시킨 모습으로, 혹은 석굴암처럼 이상적인 인간상과
신의 인격화가 절묘하게 조화돼 근엄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다시 능력있는 자만이 절대자가 갖고 있는
현실파괴 능력과 변형능력을 기원하는 모습 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되지요.
[유홍준의 우리문화유산을보는 눈] (4)
삼국·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등장과 발전과정
‘화강암 석탑’은 한민족 강인함 상징
우리나라 절에 가면 보이는 것이 거의 다 석탑이기 때문에 석탑이 불교를 믿는 나라의 공통적인 형식이라고
알기 쉬운데, 사실 석탑은 우리 고유의 양식입니다.
인도에서 동점(東漸)한 불교가 중국과 한국, 일본을 거치면서 어느 시점부터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불교건축의
핵심을 이뤘던 탑도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중국은 전탑(塼塔)의 나라, 한국은 석탑의 나라, 일본은 목탑의
나라’식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지요.
조선의 연행사신들이 랴오둥(遼東)반도를 한참 걸어가다 보면 나타나는 것이 랴오닝(遼寧)성 베이닝(北寧)시에
있는 중국 요나라시대 폐사지의 쌍탑이었습니다.
흙을 구워만든 벽돌로 조성한 중국의 가장 전형적인 전탑이지요.
경주 황룡사 9층목탑도 이 쌍탑과 같은 그런 모습이었을 거예요.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다가 들판 위에 랜드마크처럼 우뚝 솟아있는 탑을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외국인으로 근대 일본 미술사를 처음 쓴 미국의 미술사가 어네스트 페널로사는 일본 나라(奈良) 교외의 야쿠
시지(藥師寺)를 지나다가 목탑을 보고 “들판에 서서 호수에 비친 모습이 얼어붙은 소나타와 같았다”고 말했
습니다. 쇼팽의 소나타가 얼어붙어 나와 있는 모습이었다는 얘기지요.
랴오양(遼陽)을 지나 선양(瀋陽)에 들어가기 전에 우뚝솟은 요동백탑(遼東百塔)은 벽돌로 쌓은 중간중간
탑신부가 정교한 조각이 들어간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습니다.
조각할 때 정으로 쪼아야 하는 우리 화강암과 달리, 유럽과 중국의 대리석은 연질이기 때문에 조각도로 얼마
든지 새길 수 있는 게 특징이에요.
따라서 우리 석탑이나 석조문화재들은 1000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주지만, 대신
세부적인 것을 장식하는 측면에선 유럽처럼 발전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디테일을 생략한 가운데 형체가 갖고 있는 힘을 묘사한 것은 우리가 훨씬 강했지요.
서양의 로코코미술이 보여주는 화려한 장식성에 비해 고전미술이나 르네상스미술의 차분함이 더 위대하듯,
저는 우리 석조문화재처럼 조금 덜 조각한 것이 더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는 삼국시대 사찰이 하나도 남아있는 게 없지만 일본에는 호류지(法隆寺)가 있어요.
그 곳의 5층(중)목탑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지요.
남북 일직선상으로 남문과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이 배치된 삼국시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호류지의
경우 금당과 탑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이는 입지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봐요.
우리도 남북 일직선상이란 가람배치가 당시 모든 사찰에 적용되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호류지에 가면 우리의 잃어버린 부여나 경주의 옛 사찰 모습을 찾을 수 있지요.
국립경주박물관을 가면 남문, 중문, 탑, 3개의 금당, 강당, 승방으로 이어지고 회랑이 둘러져 있는 옛 황룡사
의 모습을 50분의 1 축적으로 상상복원한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려진 황룡사 9층목탑의 상상복원도를 보면 모두 경주 남산 탑곡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9층탑과
일본 호류지(法隆寺) 5층목탑의 구조를 기초로 하고 있지요.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목탑의 전통은 석탑으로 바뀌면서 사라졌지만 조선시대 만들어진 5층 목탑인 보은
법주사 팔상전과 3층 목탑인 화순 쌍봉사 대웅전을 통해 명맥은 유지됐었죠.
특히 체감률이 급격한 법주사 팔상전에 비해, 쌍봉사 대웅전은 삼국시대 목탑형식을 가장 잘 보존했던 집인데
1984년 4월 초파일 화재로 잿더미가 됐다가 86년 복원됐어요.
한편 중국에서 받아들인 전탑은 경북 칠곡 송림사 5층전탑을 비롯, 안동 신세동 7층전탑과 동부동 5층전탑,
조탑동 5층전탑 등 안동지역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석탑의 등장은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중인 익산 미륵사지 서석탑에서 시작합니다.
흔히 미륵사지를 3탑 3금당 양식이라고 하는데, 황룡사처럼 목탑을 가운데 두고 남북 일직선상으로 가람을
배치했다가 나중에 양쪽에 별원을 만들면서 목탑형식의 석탑을 세운 것이 석탑의 시원이 된 것이지요.
전북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 7세기 경. 국보 11호.
소재는 석탑이지만 모양은 목탑인 석탑의 초기 형태이다. 원래 중앙에 목탑이 있고,
양족에 하나씩 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정희 정부 시절, 보수공사를 한답시고 무너진 탑
경사면에 시멘트를 발라놓아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 일본 관학자들이 1915년 6층까지 남아있던 미륵사지 서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뒷부분을 시멘트로 보강했지만, 최근 다시 붕괴 위험성이 제기되면서 해체작업중입니다.
2층까지 제거된 상태에서 가운데 사각형태의 심초석(주춧돌)이 깨져 있는 것이 확인돼 서둘러 해체하지
않았다면 위험할 수 있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지요.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의 연대를 놓고, 고려 초부터 시작해 통일신라, 백제말기 등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지금은 백제탑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목탑을 흉내낸 미륵사지 서탑이 왕궁리 5층석탑 단계에 오면 석탑으로서 필요한 부재만 남기고 나머지
들은 다 없어지며, 부여 정림사 5층석탑에서 석탑의 형식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국보 제9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익산 왕궁리는 백제 무왕이 천도를 위해 왕궁을 만들었던 곳임이 최근 발굴조사 결과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실제 현장에서 보면 그렇게 늘씬한 탑일 수가 없는데 슬라이드로 보면 스케일이 작아져
오종종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 문화재 중 가장 사진발을 안받는 문화재가 바로 이 탑이지요.
익산왕궁리5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 국보 제289호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
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
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백제의 탑은 여기서 막을 내리고 신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석탑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입니다.
멀리서 보면 벽돌로 쌓은 전탑 같지만 실제는 돌을 하나하나 벽돌모양으로 깎아서 만든 ‘전탑을 모방한 석탑’
이란 의미에서 모전(模塼)석탑이라고 부른 것이지요.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2
의성 탑리5층석탑과 빙산사지 5층석탑도 모전석탑이지만 이들 두 탑은 지붕의 옥개석(지붕돌)만 마치 전탑을
쌓았을 때처럼 계단식으로 만든 것으로 그냥 석탑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언뜻 보면 정림사 5층석탑과 분황사 모전석탑을 합친 모습이지요.
의성탑리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국보 제77호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 1383-1
탑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이다.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
을 세운 모습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塼塔)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목조건축을 본떠 가운데기둥과 모서리기둥 모두를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탑신은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밑면 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이 6단,
아랫면이 5단이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 끝을 떠올리게 한다.
각 부분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곳곳에서 전탑의 조성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성군 춘산면 빙계3리 속칭 서원리는 청송군 보현산 지맥인 빙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자연 경관이
수려하여 일찍이 경북8승의 하나로 이름난 곳이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병풍같이 아름다운 구곡암벽을 끼고 흐르는 맑은 물엔 산영조차 잠겨 선경을
방불케 한다.
또한 이 곳은 빙혈이 있기 때문에 옛 지명이 빙산면이기도 했으며 신라 말기에 창건되었다가 없어진
이 지방의 절이름도 빙산사였다고 한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 간직한 채 묵묵히 서있는 탑이 있으니 바로 빙산사지 5층석탑이다.
이 탑의 높이는 8.15m, 하성기단은 사방 각 4m로 단층이고 제 1탑신의 남면에만 감실을 만들었다.
각 층은 크기가 다른 석재 화강암으로 구성되었고 모든 이음부분에는 적쇠를 박아 조립했으며 층마다
네귀에는 쇠풍경을 단 자국도 눈에 띈다.
옥개석도 전탑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있다.
그 양식과 수법에 있어서는 6km 떨어져 있는 탑리의 5층 석탑을 많이 모방하였으며 다소 시대가 뒤떨
어지기는 하나 모전 석탑으로는 거작이며 우수한 작품이다.
1958년 8월 31일 국보 사정시 국보 제484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10월 1일 국보 재사정시는 제외
되어 보물 327호로 지정되었다.
일제시 동경대학 교수 후지시마 공학박사의 고찰결과 고색이 창연한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신라 예술
을 극치를 엿볼 수 있는 국보적인 존재로 판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엔 신라말기나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랜 풍우로 탑 전체의 파손이 심해 1973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했는데 3층 옥개석 별석의 석함에서
금동사리 장치가 현재 서울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비롯된 쌍탑식 가람배치가 성행하게 됩니다.
특히 사천왕사지는 목탑이었던데 비해, 감은사에서 동·서 석탑이 만들어지면서 3층 석탑과 통일신라시대
쌍탑 가람배치의 기준이 여기에서 생기게 됩니다.
감은사탑은 찰주가 남아 있어 다른 탑보다 훨씬 더 조형적인 매력을 주는 게 특징이지요.
2층의 기단과 3개의 탑신부를 갖고 있는 감은사탑은 탑이 갖고 있는 상승감과 건물의 안정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이후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지는 탑의 기본이 됩니다.
통일신라 3층 석탑의 전형이 창조된 것이지요.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국보 제112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55-9
영어로 말하면 스투파에서 파고다로 전환을 한 것이에요.
이러면서 장중한 목탑에서 절이라는 상징성을 나타내고 제적가간은 비교적 짧은 대신 오래갈 수 있는 석탑
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게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아가는 가장 큰 이유지요. 이와 함께 탑과 금당의 가치전환도 일어나고 불상이
갖고 있는 비중이 커지게 됩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지금은 덕동호에 수몰된, 원효대사가 주지스님으로 있었던 경주 고선사지 3층석탑이
있습니다.
볼륨감이 매우 강하고 넉넉한데 이것이 더욱 세련돼 나타난 것이 8세기 3·4분기인 경덕왕 대에 만들어진
불국사 석가탑입니다. 하나의 고전의 완성으로 이후의 모든 탑들은 석가탑의 변형일 뿐이에요.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국보 제38호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고선사지 3층석탑은 5:5:5로 이루어진 층급받침의 비율과 2중기단으로 보아 감은사지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둔중하고 거대한 느낌이며 옥신부에 문비가 새겨진 최초의 탑이다.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
적인 형태이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탑신도 여러 개의 돌을 조립식으로 짜 맞추었으나,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지붕돌은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는데, 아래로 미끄러지는 네 귀퉁이에서 또렷이 들려있어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밑면에는 계단 모양으로 5단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에서 시작되어
이후 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렇지만 답사를 다니거나 예술감상의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석가탑보다 감은사지 동·서3층석탑과 고선
사지 3층석탑이 우리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줍니다.
이는 정점에 도달한 결과물보다 정상을 눈 앞에 두고 계속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담겨있을 때 더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석가탑 옆에 다보탑이 있는데, 이처럼 3층 석탑의 전형 속에 다보탑과 구례 화엄사 사사자3층석탑, 경주
정혜사지 13층석탑, 중원 탑평리 7층석탑과 같은 변형의 존재가 석가탑이 갖고 있는 전형의 힘을 더욱 빛내
주고 악센트가 되지요.
경주 남산 용장골 3층석탑 등 8~9세기 만들어진 3층석탑만도 100개 이상 늘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 석가탑
국보 35호 화엄사 4사자 3층석탑
한국 고대의 건축미술작품 중에서 한국의 석탑처럼 그 다양한 창의성과 공간 조형의 세련된 아름다움을
다시금 재평가 받는 건조물은 없다.
이러한 석탑의 조형(祖形)은 물론 백제시대의 익산 미륵사탑이나 부여 정림사 같은 데에서 볼 수 있지만,
이렇게 비롯된 석탑 양식을 대성, 세련시켜서 사각 삼층으로 된 한국 석탑 양식의 정형을 이룩한 것은
8세기 무렵의 통일신라시대였다.
이러한 석탑들은 본래 중국에서 받아들인 목조 고층 건물을 석재로 바꾸어 세우게 된 데에서 비롯되었
으므로 백제나 통일신라의 초기의 석탑들이 대개는 규모가 클뿐더러 목조 건축물의 구조 부분이나 깊은
추녀의 특색을 나타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양식이 정형화될 무렵부터는 두 층으로 이루어진 기단의 양식과 각 층
크기의 비례를 비롯해서 균제미(均齊美)나 체감율의 적정함이 이를 데 없이 아름답게 세련되었다.
특히 석탑의 크기는 주위의 산천과 법당의 크기에 알맞게 조화되도록 그 규모에 자연스러운 제약이
생겼으며, 또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진 건조물이 아니라 정밀한 비례 계산과 역학적인 설계에 따라서
세워졌음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 석탑들을 정밀하게 실측해 보면 미학상으로나 건축 구조학상
으로나 당초부터 너무나 빈틈없는 세련된 설계였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구례 화엄사 뒤 언덕에 서있는 삼층 사자석탑의 예를 들어보더라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양식을 기본으로 했으면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자주(獅子柱) 양식을 곁들인 탑으로 기교나 창의 면에서
매우 높이 평가해야 할 한국미의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
두 층으로 된 탑 기단의 하층 기단에 해당하는 사면에는 각기 세 분씩 열두 천인상이 양각되어 있어서
제각기 주악과 비천하는 아름다운 해화미(諧和美)를 나타냈으며, 상층 기단에 해당하는 부분은 네
마리의 앉은 사자가 삼층탑을 네 귀에서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는 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자주의 중앙부에는 합장하고 서 있는 승상(僧像) 조각이 서 있는데, 이 승상은 발밑과 머리 위에
장식 조각된 연화좌로 탑의 상하를 떠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절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이 승상은 신라시대의 고승 자장법사의 모습이라고도 하지만 이것
을 밝힐 도리는 없으며, 이 탑 앞에 놓인 배석과 그 앞에 서 있는 삼발 석등 아래 한 무릎 세우고 정좌
해서 합장 공양하고 있는 보살형의 모습은 어쩌면 신라 불교미술인들에게 바치는 경건한 찬양의 자세
라고도 나는 느끼고 싶은 것이다.
산자수명한 지리산 송림은 푸르고, 탑이 서 있는 나지막한 이 언덕은 이 탑이 세워짐으로써 아름다움의
생명력이 샘솟는 곳이 됐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신기로운 일인지, 불교도가 아니지만 나도 가슴에
손을 얹고 고요히 잠기고 싶은 심정의 세계이다. [최순우]
화엄사 사자석탑 공양상
국보 39호 월성 나원리 5층석탑
국보 37호 광주 구황리 3층석탑
국보 40호 정혜사 13층석탑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모든 고전미술이 갖고 있는 고전적 규범으로 비례와 균형, 조화의 3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3가지를 가졌을 때 고전인데 어느 나라 고전이든 이런 요소를 다 가지고 있고, 우리 불국사와 석굴암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본인 건축가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가 쓴 ‘조선 상대건축의 연구’에 나오는 불국사 평면도를 보면
백운교와 청운교, 회랑,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부분과 전체를 이루는 비례의 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축대를 쌓으면서 땅에 박힌 울퉁불퉁한 자연석에 맞춰 인공석의 밑부분을 파낸 것이나, 대웅전 올라가는
계단에 보이는 직선에서 살포시 소맷자락 같이 들려 있는 선을 살린 조각, 연꽃잎을 조각해 놓은 연화교 등
모든 명작들은 정말로 디테일이 아름답지요.
항공사진 외에는 어디에서 봐도 전체를 볼 수 없는 안압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신라 불상이 하대에 들어오면 철불로 바뀌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탑에서도 나타납니다.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개조로 알려진 도의선사가 주석했던 양양 진전사지의 3층석탑은 9세기 석탑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크기도 8m에서 5m 정도로 줄어들어 아담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바뀌고 기단과 탑신부에 8부신중과 사방불이
새겨져 있어요.
국보 제122호 통일신라( 8세기 후반) 높이 5m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진전사의 옛터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이라 전하는데,
주변에서 ‘진전(陳田)’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탑은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받침돌만 남아있을 뿐 상륜부( 相輪部 )가 모두 없어졌으나 기단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1층 몸돌의 세련된 불상 조각은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 석탑 중 하나이다.
불국사 삼층석탑의 장중함이 이 탑에서는 아담함으로 바뀌었으며, 불국사 삼층석탑이 중대 신라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이 탑은 지방 호족의 새로운 문화 능력을 과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래층 기단 중대석에는 각 모서리에 우주가 있고 중앙의 탱주로 양분하여 각 면에 2구( 二軀 )씩
비천상( 飛天像 )이 조각되었다.
비천상은 유려한 연화좌(蓮花座) 위에, 날아갈 듯한 천의는 우견편단 (右肩偏袒)의 옷무늬가 뚜렷하고,
2중의 두광과 신광이 있다.
윗층 기단 중대석은 각면 2매씩 모두 8매로, 양쪽에 우주가 있고, 중앙을 탱주로 양분한 8구역에 각각
구름위에 앉아 무기를 들고 있는 웅건한 모습의 8부신중(八部神衆)이 조각되었다.
탑신부의 각층 옥신은 양 우주가 정연히 각출되었고, 초층에는 사방에 앙련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좌불이 조각되었는데 모두 이중의 두광과 신광을 구비, 나발에 육계가 큼직한 여래상으로서 조각수법이
아주 뛰어나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간결하게 만들어졌는데, 1층 몸돌에는 각기 다양한 모습의
불상 조각들이 있다.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풍경( 風磬 )이
달렸던 자리가 남아 있다.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이웃한 선림원지 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전형에서 탈피하면서 장식성이 강해지는 것이 특징이지요.
일종의 매너리즘과 로코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쌍탑인 남원 실상사 3층석탑과 장흥 보림사 3층석탑은 탑의 상륜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석가탑 복원 때
참고가 됐으며 보령 성주사지 석탑 3개는 다른 곳에서 옮아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림원지 3층석탑
실상사 삼층석탑 (實相寺 三層石塔) 보물 37호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쌍탑은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3년(828) 실상사를 창건할 때 조성된 탑으로 높이가 8.4m이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신라(統一新羅) 정형탑(定型塔)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水平)이며 전체의 조형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특히 상륜부(相輪部)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통일신라 정형탑의 원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쌍탑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擦柱)를 중심으로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寶珠)가 모두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다.
보림사 대적광전 앞의 쌍탑인 보림사 삼층 석탑과 석등
“부처님은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거나 “깨우친 자는 부처가 된다”고 주장한 도의선사의 가르침은 지방
호족이라도 능력있는 자는 왕이 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깨우친 고승들의 경우
죽었을 때 부처님에 준하는 예우를 갖추게 했지요.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사리탑인 부도와 부도비로, 진전사지와 여주 고달사지, 곡성 태안사, 남원 실상사,
쌍봉사 등 곳곳에서 도의선사와 적인선사(혜철), 증각대사(홍척), 철감선사 등의 부도와 부도비가 조성됩
니다.
진전사지 부도 도의선사의 부도로 추청
태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 보물 제273호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태안사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대안사는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높으며, 적인선사 혜철(惠哲)은 대안사가 속한 동리산파를 연
스님이다.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 3단의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아래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몸돌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다. 그 옆면에 다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
하였다.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추녀의 곡선은 완만하며, 각 귀퉁이는 급하게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 복발, 보륜, 보주 등이 잘 남아있다.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이도록 한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무겁지만 너그러운 품위를 지녔고,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있어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탑 옆의 비문을 보면,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부도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태안사 광자대사탑(大安寺 廣慈大師塔) 보물 274호
높이 2.8m 고려 950년(광종 원년)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태안사 입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로,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광자대사는 태안사의 2대 조사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부도의 형태는 바닥돌부터 꼭대기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낮은 가운데받침이 올려져 있다.
윗받침에는 16잎씩의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여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몸돌은 앞뒷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높은 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부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완벽한 형태미를 보여주며,
각 부의 구성과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조화롭다
태안사 광자대사비(大安寺廣慈大師碑) 보물 제275호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태안사
대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대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
하였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거북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실상사 증각대사 홍척 응료탑 증각대사 응료탑 (實相寺 證覺大師 凝蓼塔) 보물 제 38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을 불탑이라 하고,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부도라 한다.
부도는 처음에는 불탑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나 지금은 스님의 탑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선종이 유행하자 각 종파에서는 역대 조사의 부도 건립에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이를 신앙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예술적 기교를 다하여 목조 건축의 세부를 모방하여 조각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는 차츰 모양이 간략화되고 탑비도 생략하게 되었다.
증각대사 응료탑은 극락전 왼편에 있으며 실상사를 개창한 홍척국사의 부도로 조성시기는 9세기 후반
으로 추정된다.
지대석은 사각형이고 하대석은 팔각형이다. 중대석 각면의 안상 안에는 팔부중을 1구씩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둥근 모양으로 단엽의 연꽃을 16엽씩 세겹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옥개석은 목조건물을 모방하였고 추녀끝에는 연목을 세겼다.
탑신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는 문비와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문비는 아치형이며, 문의 윗부분에는
보상화무늬가 있고, 문에는 자물쇠와 두 개의 문고리가 있다. 사천왕은 날렵한 자세로 서 있는데,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으며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상륜부에는 여덟 잎의 앙화, 보륜, 보주가 있다.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이다.
탑은 기단(基壇)은 8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증각은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시호(諡號)이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부도탑(浮屠塔)으로 높이가
2.4m이며 특히 옥개석(屋蓋石)에 목조건축(木造建築)의 각부를 모각하였으며 탑신(塔身)의 각 면에
신장상(神將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부도는 신라(新羅)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최초의 산문(山門)인 지리산(智異山) 실상산문(實相
山門)의 개산조(開山祖) 홍척국사의 사리탑(舍利塔)으로 신라말인 9세기 후반의 우수한 조각수법(彫刻
手法)을 보여 주고 있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9세기 통일 신라의 다른 부도와 같은 팔각원당형이지만 다른 탑들보다 각 부의 세부조각이 우수하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각 부분이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나타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쌍봉사 철감선사탑(雙峰寺 澈鑒禪師塔)
우리나라 석조문화재 중 조각이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것을 꼽자면 화순 쌍봉사(雙峰寺)의 철감(澈鑒)
선사탑(국보 57호)과 탑비(보물170호)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철감선사 도윤(道允·798∼868)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쌍봉사에서 선종을 크게 전파하여 제자
인 징효(澄曉)가 영월에 법흥사 사자산문을 열어 구산선문의 하나로 되었으니 하대(下代) 신라에서
그의 위상을 능히 알 만하다.
철감선사탑은 우리나라 승탑의 백미로 기단에서 지붕돌까지 그 단단한 화강석을 마치 밀가루 반죽
을 다룬 듯한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준다.
아래 기단엔 뭉게구름 위에 올라앉은 여덟 마리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이 탑을 수호하고, 겹꽃 연꽃
받침에 상다리 모양의 손잡이가 돌려진 윗기단에는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이 탑을 찬양하는
극락조들이 새겨졌다.
몸돌 앞뒤로는 자물쇠가 잠긴 문짝이 있어 여기에 사리가 모셔졌음을 암시하고 네 분의 사천왕과
한 쌍의 비천이 이를 지키고 있다.
모든 조각이 아주 높은 돋을새김이어서 돌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거기에 암수 골기와 지붕의 겹처마 서까래와 연꽃무늬 수막새를 진짜 기와지붕처럼 조각해 올려
놓았다.
그 엄청난 세공이 놀랍기만 하여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교한 작품이 있었던가 감탄이 절로 일어난다.
곁에 있는 탑비의 돌거북 또한 당대의 명작으로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거북의 네 발 중 한 발은
발바닥을 살짝 들어올려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조각적 센스까지 나타나 있다.
이런 훌륭한 조각은 석공 한 사람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9세기 후반 50년간,
팔각당 승탑의 명작들이 쌍봉사 이외에도 보림사·연곡사·태안사·실상사·고달사·선림원·봉암사 등
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하듯 세웠다.
이 아름다운 승탑들은 곧 하대 신라 선종의 활기와 이를 지원한 지방 호족의 문화능력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출처] : 유홍준의 국보순례 [68] 쌍봉사 철감선사탑/ 조선일보
쌍봉사철감선사탑(雙峰寺澈鑒禪師塔) 국보 제57호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195-1 쌍봉사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부도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
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
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
어진 부도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쌍봉사 경내의 북쪽에 있는 이 탑은 8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형을 잘 나타낸 신라(新羅) 최고의
우수한 부도(浮屠)이다.
신라의 여러 부도 중 각부(各部)의 조각이 가장 화려한 최대의 걸작품으로 상·하 각부가 조화되어 있고
장중한 작풍(作風)을 느끼게 한다.
평면이 팔각형을 이루고 있음은 통식에 속하는 2단을 이룬 하대석(下臺石)에는 하단에 운문(雲紋),
상단에 사자(獅子)를 조각했고 상대석(上臺石)에는 앙련(仰蓮) 위에 팔각 괴임대가 있다.
탑신(塔身)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 비천상(飛天像) 등이 조각되었고 옥개석(屋蓋石)
은 기왓골을 조각하되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木造) 건축(建築)의 의장(意匠)까지 보이는 등 석조
(石造) 건축물(建築物)로서는 물론 조각으로서도 극치를 보이고 있다.
건조연대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8년(868)으로 추정된다.
이중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 비천상을 새긴 철감선사 부도가 단일 조각품으로는 가장 화려합니다.
돌거북이에 비를 세우고 용(이무기)머리 지붕돌을 붙인 부도비도 철감선사의 것이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고 있어 가장 생동감을 주지요.
‘절기 게양대’인 강릉 굴산사지의 당간지주와 합천 영암사지의 쌍사자석등 및 돌계단은 우리 문화유산이
자연 속에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줍니다. 정리 =최영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