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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43) - 제 8장 임제선 시학 2. 언어와 미학
2. 언어와 미학
여섯째로 조사선은 견성성불과 돈오성불을 강조하고, 분등선은 더 나아가 초불월조(超佛越祖)를 주장한다. 견성성불은 자신의 본성을 보고 깨닫는 것, 이런 견해는 즉심즉불, 곧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고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주장을 동기로 한다. 즉심즉불은 부처를 초월하는 초불사상이다. 조사선은 부처를 초월하는 초불을 강조하지만 조사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분등선은, 예컨대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는 임제의 말이 암시하듯이, 부처와 조사도 초월하기 때문에 초불월조를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주체로서의 인간, 이른바 무위진인(無位眞人)이고, 분등선이 강조하는 것은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주체이고 이 주체는 모든 권위, 예컨대 경전도 부정하고, 기이한 말과 행동 기언기행(奇言奇行)이 나타난다. 남전이 고양이 목을 베는 것이 그렇다.
일곱째로 조사선은 불리문자(不離文字)를 강조하고 분등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도불가설(道不可設)을 주장한다. 원래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불립문자 이심전심이다. 깨달음은 문자로 말할 수 없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6조 혜능에 의하면 진정한 불립문자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불립문자도 문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문자를 사용하되 사용하지 않은 중도, 곧 불리문자를 강조한다. 그러나 분등선은 다시 불립문자를 강조하고, 도는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편다. 기인기행이 나오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이런 말과 행위는 말하지만 말하지 않고(設而無設), 말하지만 말할 수 없음(設不可設)을 뜻한다. 이런 어법은 혜능이 강조하는 중도의 어법과는 다르고, 노자사상과 관계된다. 그는 말한다. 도를 도라고 하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언어로 표현하지만 진정한 언어가 아니다.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 동군에 의하면 분등선의 어법은 다음과 같다.
(1)동문서답: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진주의 무게는 세근이다."
(2)모순어법: "무엇이 부처인가?" "산 위에 잉어가 있다." 혹은, "석녀가 아이를 뱄다."
(3)어렵게 조작: "무엇이 도인가?" "네가 한 입에 서강 물을 모두 마시면 알려주겠다."
(4)핑계 대고 거절하기: "무엇이 도인가?" "난 지금 머리가 아프다." 혹은, "모른다. 조금 후에 다시 오라."
(5)境相 제시: "무엇이 선인가?" "저 산이 정말 아름답구나."
(6)한 글자로 말하기: "무엇이 도인가?" "去(가거라)"
(7)욕설: "무엇이 도인가?" "주둥이 닫아라."
여덟째로 조사선은 상근기를 대상으로 하고 분등선은 다근기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분등선은 근기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말한다. 마조가 근기에 따라 즉심즉불, 비심비불, 불시물(不是物)을 말한 것이 보기이다.
아홉째로 조사선은 부처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마음이 이미 부처라는 것을 깨달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분등선은 이런 주장을 더욱 강조하면서 법열(法悅)과 선열(禪悅)의 체험을 자유의 경지와 심미적 경계로 나가고, 심미적 경지는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분류된다.
(1)화해(和諧)의 미: 화해는 조화, 화합을 뜻하는 바 체(體)와 용(用)의 원융을 보여주는 미학이다. 예컨대 '백운청산'에서 청산은 체이고 흰 구 름은 용이다. 이런 보기로는 '창공에 흰 구름이 날아간다.' 혹은 '은 주발에 흰 눈이 가득하다.' 등이 있다
(2)자연의 미: 이때 자연은 무정유성(無情有性), 곧 일체 만물이 부처라는 사상과 관련되는 자연이다. "무엇이 청정법신인가?" 라는 물음에 "붉은 해가 청산을 비친다." 라는 대답이 보기이다
(3) 창량(蒼凉)의 미: 창량은 푸르고 서늘한 이미지로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한다. 마르고(枯), 춥고(寒) 파리한 이미지도 같다. 보기로는 '마른 학 늙은 원숭이 울음이 골짜기에 울리고, 가는 소나무 차가운데 대나무가 푸른 연기를 머금는다.
(4)공령(空靈)의 미:. 텅 빈 허공의 청정함과 신령스런 이미지는 깨달음이 세계를 상징한다. '눈 내리는 밤에 밝은 달을 바라본다.' 배 가득 달을 싣고 갈대꽃에 잠을 잔다.' 이런 텅 빈 영혼의 경지는 정야(靜夜), 명월(明月), 청강(淸江) 등의 이미지와도 관련된다
(5)선열(禪悅)의 미: 선열은 깨달음을 얻은 후 일경(一境)도 겨낭하지 않고 기뻐하는 감정으로 선종 미학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기쁘고 명랑하기 때문이다. '불을 때던 스님이 목어(木魚) 두드리는 소리 듣고 부지깽이를 던져버리고 웃으며 간다.' 혹은 '어떤 스님이 보청 (普請, 대중 운력. 함께 일하기)할 때 북소리를 듣고 이내 호미를 들고 크게 웃으며 돌아가는 것' 이 그렇다.
열째로 조사선은 교외별전을 강조하고 분등선은 자교오종(藉敎悟宗)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조사선은 선과 교, 남종과 북종을 분리하고, 분등선은 선교 융합, 남북의 융합을 강조한다. 이것은 달마의 자교오종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석두 희천은 돈법과 점법의 회호(回互)를 강조하고, 법안 문익은 선교의 통일을 주장한다. 영명 연수가 구체적인 선교합일의 이론을 제시하면서 융합적인 <종경록>이 유행하고 후세 선학의 주류가 된다.(이상 조사선과 분등선의 차이는 동군(董群), <조사선>, 김진무-노선환 역, 운주사,2000, 460~493쪽 참고)
이상 간단히 살핀 조사선과 분등선의 차이를 다시 도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사선 분등선
유학화 장학화
즉심즉불 비심비불
현실주의 이성 초현실주의 감각
청정심 자유
무정무성 견성돈오(초불월조)
불리문자 불립문자와 도불가설
상근기 다근기
깨달음 법열 선열
교외별전 자교오종
물론 이론가들마다 조사선과 분등선에 대한 견해는 다르다. 그러나 내가 동군의 견해를 참고한 것은 이런 견해가 다소 추상적이고 도식적일 수 있으나 두 종파의 차이를 포괄적으로 해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서 조사선을 혜능 조사선과 마조 조사선으로 나누고 시학의 경우 전자를 무주의 시학, 즉리양변의 시학으로 명명하고, 후자를 평상심의 시학으로 명명한 바 있다. 그러나 위 도표를 전제로 하면 이런 분류는 모두 조사선에 포함된다.
그것은 혜능 조사선과 마조 조사선이 별로도 존재하는 게 아니라 후자가 전자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혜능의 무념과 평상심은 모두 간택과 분별이 없는 마음이지만 평상심의 세계는 선을 더욱 일상화하고 세속화한다. 마조선 시학에서 내가 강조한 것은 이런 선의 일상화이다.
(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44) - 제 8장 임제선 시학 3. 임제종 시학
3. 임제종 시학
앞에서도 말했지만 분등선은 당(唐) 5대 조사선이 다섯 분파로 분화하는 것을 말한다. 곧 위앙종, 임제종, 조동종, 운문종, 벙안종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임제종은 중국 선종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전승되었고, 양송(兩宋) 시대에는 양기와 황룡의 두파로 양분된다. 특히 임제종은 남악계, 곧 마조-백장-황벽-임제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마조 조사선의 법맥을 잇는다.
한편 내가 임제종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 불교의 법맥이 임제종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고려 말 태고(太古) 보우(普愚)는 1346년 원나라에 들어가 궁중에서 <반야경>을 설하고 다음해 호주 허무산의 천호암에서 임제의 법맥을 이은 석옥(石屋)을 만나 깨달음을 인가받는다. 그때 석옥은 '불법이 동방으로 가는구나.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으로 지금 그대에게 전하니 끊어지지 말게 하시오.' 라고 말하며 전법의 표시로 가사를 주었다고 한다. 석옥은 임제종이 분화한 양기파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임제가 없었다면 우리 선종도 없을 정도로 임제종은 우리 선종과 관계가 깊다. 성철 스님의 주장에 의하며 한국 선종의 법맥은 임제-석옥-태고-환암-구곡-벽계-벽송-부용-서산-사명-송월로 계승된다. 이런 까닭에 조선 후기 백파(白坡) 긍선(亘璇) 스님은 임제종을 중심으로 당시의 선 이론을 정리한다. 물론 당시 많은 논쟁을 일으킨 주장이지만 스님은 <선문수경(禪文手鏡)에서 선을 크게 의리선, 격외선(여래선, 조사선)으로 나눈다.
의리선(義理禪)은 뜻과 이치에 의한 깨달음을 강조하고, 격외선(格外禪)은 이런 품격(의리)을 벗어나는 선으로 교(敎) 밖의 일미선(一味禪), 곧 참선하여 곧장 깨닫는 돈오의 경지이다. 그러나 격외선은 다시 여래선과 조사선으로 양분된다. 여래선은 중근기를 대상으로 하며 삼현의 방편무에 직면하여 깨닫고 법안종, 위앙종, 조동종이 여기 속하고, 조사선은 상근기를 대상으로 하며 삼요(三要)의 문에 직면하여 진공묘유를 터득하는 것으로 운문종과 임제종이 여기 속한다.(백파 긍선, <선문수경>, 김재도 옮김, 백파사상연구소,2011,60~63쪽)
내가 이 책에서 말한 여래선과 조사선은 이런 뜻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중국 선종의 역사를 전제로 분류한 것. 그러므로 백파의 견해는 그가 당신의 우리 선을 임제선의 시각에서 정리하고 이론을 부여한 것에 의미가 크다. 말하자면 임제종이 우리 선불교에 준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백파가 강조한 것은 임제 삼구(三句)이고, 그는 이 삼구를 당시 우리 선에 배치한다. 제1구는 조사선에 해당하고 인공(印空)을 삼요에 대비하여 이 도리를 얻으면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고, 제2구는 여래선에 해당하고 인수(印水)를 삼현(三玄)에 대비하여 이 도리를 얻으면 세상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제3구는 의리선에 해당하고 인니(印泥)를 배대하여 이를 깨닫는 것은 유무를 아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 한 사람조차 구제하지 못한다. 임제 삼구는 임재가 학인을 교율시킬 때 사용한 세 가지 방법으로 후대에 임제선의 중심 공안이 된다. 이 문제는 뒤에 다시 살필 예정이다.
중국 선종 가운데 임제종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성은 일체의 전통과 권위를 파괴한다는 점이고, 현실 속에서 인간이 주체가 되어 불법을 구현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入處皆眞)이다. 도처에서 주인이 되면 가는 곳마다 진리다. 이때 주인은 진정한 나, 참 나를 뜻하고 진정한 자아가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진리가 된다.
선이 강조하는 것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자신의 참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조사선은 즉심즉불을 강조한다. 마음이 바로 부처다. 그러니까 마음 밖에서 따로 부처를 구하지 말라, 전통적인 견성성불이 밖에서 부처를 구한다면 조사선에서는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된다. 본래 엄정한 마음을 단박에 깨달으면 그대가 부처다. 그러나 임제종의 창시자 임제는 마조의 조사선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 마침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고 말한다. 살불살조(殺佛殺祖)다. 올 겨울 동안거 해제일 때 법문하신 조실 무산 설악 큰스님 말씀이 생각난다.
절간에서 부처가 있느냐? 젊은 스님들 숙소에 불과해. 시장 노점상 노숙자 주감 주도 등 중생들의 삶이 팔만대장경이고 부처며 선지식이다.
바람 불고 흐린 겨울 신흥사 동안거 해제일 법당에 자리가 없어서 법당 안마당 의자에 앉아 들은 법문 가운데 한 말씀이다. 부처도 우상이다. 부처도 없다. 시장 노점상 노숙자 주막 주모 염하는 늙으니 남을 속이지 않고 가난하게 살고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경전이고 부처이고 보살이다.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는 임제 스님의 말씀이나 가난하고 청정하게 사는 사람들이 부처이고 조사라는 무산 큰 스님 말씀이나 무엇이 다른가?
중요한 것은 어디서나 주인이 되고 주인공이 되면 어디서나 부처이고 진리다. 가고 머물고 앉고 줍는 행주좌와 일체가 선이고 진리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모두 이름이고 관념이고 형상이다. 이름에 얽매이지 말고 관념 놀이 하지 말고 모든 형상이 허깨비라는 것을 알라. 부처님은 어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청정하고 차별이 없고 자유로우면 그대가 부처고 시장바닥이 도량이다. 부처와 조사를 비판하고 이들을 초월하는 이른바 초불월조(超佛越祖)사상이 나오는 것은 부처와 조사들의 가르침도 속박이고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불월조가 지향하는 것은 이른바 아불합일(我佛合一)사상, 곧 자아가 바로 부처라는 사상이다. 임제는 말한다.
안으로 향하든 밖으로 향하든 무엇에 봉착하면 그것을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인척을 만나면 친인척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을 얻고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게 투명하고 자유자재가 된다.
向裏向外 逢著便殺 逢拂殺佛 逢羅漢殺羅漢 逢父母殺父母 逢親眷殺親眷 始得解脫 不與物拘 透脫自在
죽이라는 말은 그대로 죽이라는 것이 아니고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라는 뜻. 부처도 이름이고 형상이기 때문에 구속이다. <금강경>에는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만일 모든 현상을 현상으로 보지 않으면 부처를 본다는 말씀이 나온다. 일체 형상을 잊을 때 깨닫는다. 그런가 하면 의상 대사의 <법성게>에는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 일체가 끊어져 깨달아 알 뿐 다른 경지는 없다.
임제가 무엇에 봉착하든 모두 죽이라는 말은 이렇게 이름과 형상을 벗어나라는 뜻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소승불교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이고, 광의로는 소승 대승에 걸쳐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이다. 부모도 죽이라는 말은 부모 역시 이름이고 형상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출가하는 것은 부모와의 인연을 끊기 어렵기 때문이다. 임제가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부모를 죽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이름과 형상을 끊으라는 뜻이다.
임제의 스승 황벽 선사는 찾아온 어머니를 내쫓는다. 선사가 황벽산에 살 때 한 노파가 찾아온다. 그는 노파가 어머니라는 것을 알고도 의연하게 '저 늙은이 에게 물 한모금 쌀 한 톨 주지 말고 내쫓아라.' 말한다. 얼마나 인륜에 어긋나고 인간으로서 박정한 짓인가? 결국 절에서 쫓겨난 노모는 걸인이 되어 떠돌다 병이 들어 죽는다. 그가 노모를 내쫓은 것은 임제 식으로 말하면 노모를 죽인 것. 그러나 이런 행위 때문에 노모 역시 일체 현상이 공이라는 것을 깨닫고 죽은 다음 천상에 태어난다. 아무튼 임제가 강조한 것은 이름, 형상 등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45) - 제 8장 임제선 시학 4. 시를 만나면 시를 죽여라
4. 시를 만나면 시를 죽여라
임제사상을 시에 적용하면 시쓰기에도 이런 죽음의 실천이 요구된다. 시를 만나면 시를 죽여라. 이 말 역시 말 그대로 시를 죽이라는 뜻이 아니고 시라는 이름, 제도, 형식, 법칙, 형상에 구속되지 말고 자유로워지라는 뜻이다. 최근의 우리 시는 너무 시라는 이름, 시라는 제도, 시라는 법칙에 구속되고, 따라서 시인들은 주인이 아니고 노예다. 물론 이때 주인은 임제가 말하는 그런 주인, 부처님을 뜻하지 않고 시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뜻이다. 물론 시인들이 그런 주인이 된다면 더 좋겠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21세기 아닌가? 그러나 우리 시는 아직도 무슨 서정시니 시적 가치니 본질이니 하며 고색 창연한 소리들 아니면 무슨 소린지 모르는 환상 천지다. 사는 게 환상인데 무슨 환상이 필요한지 모르겠고, 후기 산업사회를 살면서 무슨 전통적 서정시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모두 위선 아니면 무식한 자들의 넋두리다. 최소한의 시적 모험도 없고 그저 그렇고 그런 시들 천지고 그런 시들이 상을 받고 젊은 시인들은 그런 상을 받는 시인들 흉내 내기 바쁘다. 한심하지 않은가? 모두들 시의 노예가 되려고 시를 쓰는가? 나는 임제의 이런 주장을 패러디한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시를 만나면 시를 죽이고 나를 만나면 나를 죽여라. 언어를 만나면 언어를 죽이고 벽돌도 죽이고 나무 꽃 이슬 모조리 죽여라. 지금 당신이 걸어가는 아스팔트 아스파라가스 아편도 죽여라.선배를 만나면 선배를 죽이고 후배를 만나면 후배를 죽여라. 스승도 죽이고 시금치도 죽이고 오늘 점심때 먹은 시금치 고사리 닭고기 닭 뼈다귀 닭 울음 닭 울음도 죽여라. 사랑도 죽이고 증오도 죽이고 순수도 서정도 죽이고 국수 먹다 말고 일어나라. 모자 쓰다 말고 웃어라. 시냇물 시냇물도 죽이고 푸른 하늘 한 사발이 있을 뿐이다.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하고 당신이 웃으면 나도 웃는다. 개구리 거북이도 웃고 이 시는 당나라 선사 임제 스타일로 한번써 본 것. 이런 시도 죽여라. 모두 허망한 이름일 뿐이다.
-이승훈, <모두 죽여라> 전문
졸시 <모두 죽여라> 전문이다. 시를 만나면 시를 죽여야 하는 것은 시도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고, 시라는 이름이 나를 구속하기 때문이다. 자아도 이름이고 언어도 이름이기 때문에 자아도 언어도 죽여야 한다. 벽돌이 있는 게 아니라 벽돌이라는 언어가 있고 형상이 있다. 요컨대 모든 대상은 언어이고 형상이고 이런 형상은 자성, 실체, 본질이 없다. 이른바 상(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을 죽이는 것은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보는 일이고 이때 우리는 부처와 만난다.
결국 이 시에서 내가 주장한 것은 시쓰기를 구성하는 자아-대상-언어를 죽이라는 것. 나아가 우리가 믿고 있는 시라는 것도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순수도 이름이고 서정도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 순수가 있고 서정이 있는가? 그러므로 모두 죽이고 마침내 웃어야 한다. 이 웃음이 자유이고 해탈이다. 이 시대 선승 대정 스님도 '누가 도에 대해 묻는다면 한번 웃음으로 답하리(唯人我問 吾答一笑)' 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저 '푸른 하늘 한 사발' 이 있을 뿐이고, 하늘이 사발이고 나이고 당신들이고 우주다. 일중다(一中多) 다중일(多中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자유를 마시는 것. 그러므로 이런 시도 죽여야 한다.
죽음의 실천으로서의 시쓰기가 요구되는 것은 이 시대 시인들이 모두 권위와 전통에 매달리고, 따라서 자유를 모르고 법열(法悅)도 모르고 선열(禪悅)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김수영을 높이 사는 이유는 최소한 그는 이런자유, 법열, 선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와선(臥禪)>이라는 산문에서 강조한것이 그렇다. 와선은 누워서 하는 선, 그에 의하면 와선은 '부처를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골방에 누워서 천정에서 떨어지는 부처나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부처를 기다리는 가장 태만한 버르장머리 없는 선의 태도' 다. 김수영은 이런 태도로 시를 쓴 시인으로 릴케에 대해 말한다.
헨델은 베토벤처럼 인상에 남는 선율을 하나도 남겨주지 않는다. 그의 음(音)은 음이 음을 잡아먹는 음이다. 그의 음악을 낙천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소름 끼치는 낙천주의다. 나는 그의 평화로운 '메시아'를 들으면서 얼마전에 뉴스에서 본, 마약을 먹고 적진에 쳐들어와 몰살을 당하는 베트공의 게릴라의 처절한 모습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곤 했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피카소가 헨델의 계열이고, 고흐가 베토벤 계열, 그리고 릴케의 안티테제가 보오드렐, 보오드렐은 자기의 시체는 남겨놓는데 릴케는 자기의 시체마저 잡아 먹는다. 그런데 릴케의 시체는 적어도 머리카락 정도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헨델의 시체는 손톱도 발톱도 머리카락도 남아 있지 않다. 완전무결한 망각이다.
-김수영, <와선> <김수영전집>2 민음사, 1981, 104~105쪽
도대체 지금 김수영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어제는 비가 오락가락하던 금요일. 저녁 무렵에 강남역에서 전철을 타고 잠실역에 내렸다. 몇 달째 아프던 허리가 악화된 것은 화요일 그러니까 4월 19일 진해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경남문학회 이우걸 시인이 모처럼 초청을 해준 게 고맙고 몇 달 째 여행이라곤 한 적이 없던 터라 덜컥 약속을 했다. 네 시간 고속버스를 타고 창원에 내려 다시 택시를 갈아타고 진해에 닿은 건 어두운 저녁 무렵이었다. 진해시 입구 산자락에 있는 경남문학관에 특강도 하고 다시 창원으로 나와 일식집에서 맥주도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돌아왔으니 몸도 엉망이고 무엇보다 허리가 말이 아니다. 그동안 골다공증 악화로 세브란스 병원 내분비내과를 다니며 약도 먹고 주사도 맞고 지내는 처지에 그 먼 진해까지 다녀왔으니 허리에게 너무 미안하다.
불편한 허리로 어제 저녁 또 외출을 했다. 잠실역 출구로 나가면 롯데마트 앞 광장이다. 바람만 부는 을씨년스런 저녁, 약속 시간이 남아 광장을 오락가락하다가 추워서 길가 마트에 들러 자근 캔 맥주 하나를 사서 마셨다. 지금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와선은 누워서 하는 선, 부처를 찾으려고 천지팔방을 돌아다닌는 선이 아니라 골방에 누어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처나 자기 몸에서 우러나오는 부처를 기가리는 태만한 버르장머리 없는 선이다. 그러니까 와선은 즉심즉불, 내 마음이 부처라는 조사선 가운데 하나이고 마침내 아불합일(我佛合一), 부처와 내가 하나라는 임제선이 발전(?)한 양식이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처는 천장이 부처이고, 천장이 설법을 하는 경지이다. 이른바 무정유정이다. 시냇물도 설법을 하고 돌멩이도 설법을 하지만 와선의 경지에선 골방 천장이 설법을 하고 천장이 부처가 된다. 그런가 하면 골방에 누어 있는 몸에서도 부처가 우러나는 경지다. 일체의 권위 전통을 부정하는 선이 와선인 것 같다.
이런 와선의 미학이 죽음을 실천하는 미학이다. 나는 헨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김수영에 의하면 음이 음을 잡아먹는 음이다. 그럼 무엇이 남는가? 시로 말하면 언어가 언어를 잡아먹는 시다. 보오드렐 역시 죽음을 실천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시체는 남겨놓는데 릴케는 자기의 시체마저 잡아먹는다. 그러니까 보들레르보다 릴케가 한 수 위다. 김수영은 보오드렐이라고 쓰고 난 보들레르라고 쓴다. 누가 맞는지 모르겠다. 와선의 경지에서 이런 게 무슨 문제인가? 보들레르의 시는 자아를 죽인 시, 그러나 죽은 시체는 남아 있다. 하지만 릴케는 죽은 자기 시체도 잡아먹는다. 보들레르는 시체를 남기고 릴케는 시체도 잡아먹는다.
보들레르의 시는 그가 죽인 자신의 시체이고 릴케의 시는 그가 죽인 자신의 시체를 다시 잡아먹고 남아 있는 머리카락이다. 그러나 헨델은 릴케보다도 한 수 위다. 죽음의 실천에 있어서 헨델이 한층 과격하기 때문이다. 릴케는 시체를 잡아먹고 머리카락 정도는 남아 있지만 헨델은 시체를 잡아먹고 손톱도 발톱도 머리카락도 남아 있지 않다. 완전무결한 망각이다. 그러니까 죽음의 실천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하고, 그것은 자신의 작픔도 잊어버리는 경지이고, 그것은 자아도 시도 없는 경지이다. 시를 만나면 시를 죽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