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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을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 사상과 동방의 신비주의 사상을 종합하여 이를 기독교 사상으로 전달해 준 철학이다.
1. 개요
로마 시대 철학자. 3세기 로마 제국에서 활동했고, 이후 그의 사상은 포르피리오스와 이암블리코스, 프로클로스로 이어져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형성했다. 이는 여러 세대를 거쳐 로마 제국 내에서 번성하여 그리스도교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수많은 교회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슬람 무타질라 학파와 아비센나 등 이베리아 반도에도 영향을 주었고, 결국엔 중세 전반 유럽의 모든 신학에서 신학자들이 연구하는 중요 주제가 되었다.
그의 작품 《엔네아데스》가 모두 그리스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리스어를 전공한 철학자들이 연구를 많이 해서 한 때 고대 후기 그리스 철학자로 묶여 분류되기도 했었지만, 실제로는 중세 초기에 활동했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그를 중세철학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2. 생애
플로티누스는 서기 205년 로마 제국의 이집트 속주 리코폴리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28세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당대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로 유명했던 암모니우스 삭카스 밑에서 11년 간 철학을 배웠다. 다만 암모니우스 삭카스가 직접 남긴 저술이 없어 플로티누스가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39세가 되었을 때 로마황제 고르디아누스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 동행했다가 황제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로마로 가서 정착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에게 가르침을 듣고자 수많은 지성인들이 몰려들었으며, 철학자, 문인, 정치인, 권세가는 물론 황제 갈리에누스까지 모임에 참여 했다고 한다. 이때 황제의 도움을 받아 캄파니아에 플라톤이 원했던 '철학자들만의 도시'를 건설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후 저술에 몰두하다가 270년에 세상을 떠났다.
플로티누스는 로마에 살았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책을 썼다. 그리스어가 당시 철학자들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는 각각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여섯 권의 책 《엔네아데스》[3]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주제별로 다시 편집한 것이다. 1권은 도덕적 주제를 다루고 2권은 물리학, 3권은 우주론, 4권은 영혼, 5권은 지성, 6권은 '하나'와 지각을 다룬다. 포르피리오스는 6년간 스승을 직접 모셨고, 뒤에 몸이 좋지 않아 휴양차 스승을 떠남으로써 스승의 죽음을 목격하진 못했다. 그러나 플로티누스는 그를 신뢰했으며, 그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정리할 수 있도록 맡겼다.
플로티노스의 특이한 사상은 그가 계획하진 않았지만 훗날 '신플라톤주의'[4]라는 철학 사조를 낳아 여러 세대를 거쳐 수많은 지역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사상
플로티누스의 철학은 '헤놀로지(Henology)'다. 헨(ἕν)은 '하나'라는 뜻의 그리스어이므로, 헤놀로지는 '하나에 대한 학문'이라는 뜻. 플로티누스가 말하는 '하나'는 단순히 '한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했을 때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多)은 ‘하나(一)’로 말미암아 존재하는데, ‘하나’는 가장 먼저 존재하는 것으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앞서 있게 된다. 따라서 이 '하나'는 우리의 경험적인 지식 너머에 있다.[5]
그리고 '하나'는 항상 '넉넉'하기 때문에, '하나'는 분수처럼 흘러넘쳐서 만물을 만들어낸다. 이를 유출이라고 한다. '하나'(the One)[6]에서 흘러나온 일부가 '정신'(the Spirit or Divine Mind or Nous)[7]이 되고, 정신에서 흘러나온 일부가 '영혼'(the Soul)이 된다.[8] 영혼은 질료(물질)와 합쳐지면서 각종 동식물들로 만들어지는데, 질료에 영혼이 얼마나 더 많이 합쳐지느냐에 따라서 고등생물이 되기도 하고 저등생물이 되기도 하여, 여기서 귀천이 정해진다. 영혼에 합쳐지지 않는 나머지 질료들은 그저 돌과 같은 무생물로 남는다.
따라서 영혼을 가진 인간들은 더 고귀해지기 위해서 '하나'를 목표로 삼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더 나아가 영혼은 '하나'와 하나되기를 원한다. 이를 회귀라고 한다. 이렇게 '유출'과 '회귀'는 순환하며 하나의 운동을 이룬다. 여기서 '유출'은 아래로 하강하는 운동이고, '회귀'는 위로 상승하는 운동이다. 유출은 넉넉함에 이르렀을 때 흘러넘치는 '내리사랑'의 미덕이다. 회귀는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합일의 열망(에로스)이다.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우리는 신과 하나되기 위한 목적으로 고귀한 영혼을 만들고자 하며, 이러한 사람이 점점 '하나'와 가까워져서 '넉넉해지면' 자신의 덕이 '흘러넘치기'(유출) 때문에 '자동적'으로 도덕적인 행동을 하고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플로티누스의 윤리관이 된다.
이후, 기독교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플라티누스의 '하나'를 '기독교의 신'으로 대치하여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독교의 개념을 근원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을 유한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한자로 보는 것, 신을 표현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신은 항상 부정문으로 말해야 한다는 부정신학, 상승운동을 '구원'으로 보고 하강운동을 '신의 은총'으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하나 - 정신(지성) - 영혼"을 "성부 - 성자 - 성령"의 삼위일체로 해석하는 관점,[9] 신과의 합일을 통한 신비주의적 관점 등, 기독교의 수많은 교리와 원칙들이 플로티누스가 만들어낸 개념에 의존하고 있음으로, 플로티누스의 사상은 중세부터 기독교를 공부하고자하는 철학자들이 반드시 거쳐가야하는 관문이었다.
플라톤 이데아와 비교
플로티누스의 미학
만물은 일자의 의해 만들어졌다
플로티누스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일자(신)의 넘침의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차고 넘치는 일자의 능력이 유출되어서 만들어진 것이 이 세상이라는 뜻이다. 이것들은 일자- 지성- 영혼 -육체-물질 순으로 하강하게 되고 일자에게서부터 멀어진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절대적인 선(善)은 일자이고 이 일자에게서 멀어질수록 악(惡)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선은 일자이고 그다음은 지성이다. 그리고 가장 추한 것은 바로 물질과 육체이다.
이 논리에 따라 선을 이해하려면, 물질을 바라볼 때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는 물질 그 자체로 판단해서는 안되고 단계를 점차 상승시켜 육체, 영혼,지성을 통해 일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모든 만물이 일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다.
그는 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미(美)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일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일자에 가까운 선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일자에게서 멀어지는 악은 가장 추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또한 물질 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되고 그 안에 숨은 육체적 영혼적 지성적 단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 아름다움은 선이고 선은 바로 일자이기에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것은 선과 관련이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플로티누스는 헬레니즘 (그리스)의 미학과는 다르게 모든 아름다운 사물의 궁극적인 선과 원인, 하나의 일자로부터 시작된 공통의 근원을 발견하는데 집중한다. 헬레니즘의 전통적인 미의 개념은 균제이다. 이 균제는 관계, 척도,수학적 비례와 부분들의 조화가 미를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몇 가지의 이유를 들어 균제설을 반박한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미는 사물들과의 관계없이 독립적인 존재에도 발견된다. 두 번째로 균제를 갖고 있는 얼굴이 감정이나 때에 따라 아름답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세 번째로 균제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실재들에게는 적용이 불가능하다. 네 번째로 악이나 추에도 균제가 있으므로 균제가 미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을 적용해보면 균제가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아름답지는 않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플라톤은 예술가는 단순히 모방을 모방하여 본질을 흐리는 이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인은 모두 추방해야한다 말한다. 하지만 플로티누스는 예술가가 단순히 모방을 모방하는 존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들은 영혼과 지성을 다한 작품들을 통해 일자로의 회귀와 예지적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는 예술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당신은 예술가들이 단순히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근원인 이성원리에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직분으로 자연에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을 때면, 완전성을 위하여 많은 것을 덧붙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미의 잠지자이기 때문이다. "(미
학의 역사 112p 中)
일명 '신플라톤주의'라 일컬어지는 플로티누스의 이러한 사상들은 기독교 철학의 생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성 어거스틴 또한 모든 것은 아니지만 신플라톤 주의를 기반으로 교리를 해석한 것들이 굉장히 많다. 이러한 점들은 기독교 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단순한 균제를 벗어나 의미와 일자에 대한 상승으로써의 미술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관조와 덕: 마음의 정화에 대해 - 플로티노스
『플로티누스 또는 시선의 단순성』 중 영혼의 상승 운동에 대해 포스팅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내적 관조와 덕행 사이의 관련성을 드러내주는 일부 구절들을 다뤄보려 합니다.
관조와 덕: 영혼의 정화에 대해
지난 포스팅에서 본 것처럼 플로티노스는,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전체로부터 끊임없이 등을 돌리기 때문에 그 근원을 망각하게 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진정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부분들'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야 이미 현존하는 그 전체가 드러난다 말이겠지요.
이런 관점은 아래 구절에도 어느정도 드러나 있습니다.
"그대는 이미 그전에 전체였는데 정확히는 어떤 것이 그 전체 외에 그대에게 덧붙여졌기 때문에 그 덧붙음 자체에 의해 그대가 전체보다 작아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덧붙음은 전체의 질서에 속하는 덧붙음이 아니고 비존재의 덧붙음이었기 때문이다."
→ 비존재(부분들)가 덧붙여졌기 때문에, 또는 그 비존재를 계속해서 움켜쥐기 때문에 작아지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도 신화에도 '우주적 원시 인간'인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하여(잘게 해체하여) 현상 세계를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이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무튼 플로티노스는 이 덧붙음을 정화해야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데, 기본적인 지침을 간단히 요약하면 대략 이렇게 될 것입니다.
'몸, 감각의식, 쾌락, 고통, 욕망, 두려움, 체험, 괴로움 등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것들 뒤로하고 자신보다 더 그 자신인 것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라'
그렇지만 이런 내적 관조를 통해 내면의 전체['정신', 또는 그 너머의 '하나']를 일별하게 된다 해도 그 상태가 유지가 잘 안된다고 합니다. 일상적인 덕행이 부족해서 다시 끌려 내려오게 된다는 것이지요.
덕행을 통한 정화가 강조되는 건 바로 주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조와 덕행을 별개로 보아서도 안된다고 합니다. 이 둘 사이 관계는 다음 구절에 잘 들어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관조에서 떨어지면 이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덕에 새로이 눈떠, 우리는 덕으로 장식된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다시 가벼움을 되찾을 것이고, 덕에서 나아가 정신과 지혜에 이를 것이며, 그 지혜를 매개로 그것에까지 도달할 것이다. 이것이 신들 및 신적이면서 행복한 인간들의 삶이니...
덕은 오히려 영혼의 (정신['하나' 다음에 오는 내면의 근원] 쪽으로의) 전향을 통해 산출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 '관조가 덕을 낳고, 덕이 우리를 관조로 이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덕행과 관조가 서로 뒷받침해준다는 말이겠지요. 책의 저자인 피에르 아도는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덕은 관조의 연장이다. 관조에서 태어나 관조로 돌아가므로, 플로티누스적 덕은 관조일 뿐이다. 그것은 신이 들어 올려준 수준에서 영혼이 그것으로 자신을 유지하려고 하는 주의의 노력이다. 그것이 지혜라고 하는 상태가 되면 지속적인 관조가 될 것이다.
→ '관조의 정점에서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주의의 노력이 행위의 영역에서 덕행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관조하는 힘이 약해질 때, 관조와 이성의 한 그림자인 행위를 산출하게 된다.')
덕행이 밑에서 관조를 지탱하다시피 하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덕을 관조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내기도 합니다.
이런 식입니다.
"드높은 정의는 영혼의 활동을 정신[내면의 근원] 쪽으로 이끄는 데 있고, 절제는 정신 쪽으로 향해 내면적으로 돌아서는 데 있으며, 용기는 그 영혼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것(정신)과 비슷해지는 데서 나오는 평정심에 있는데, 이 평정심은 그 자체가 그것의 본성 자체에 의해 평정하다."
→ 내적인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는 태도 속에 모든 덕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플로티노스는 외부 세상을 무시하고 내면으로만 도피하는 그런 은둔자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이점은 다음 구절에 어느정도 드러나 있습니다.
플로티누스는 자신의 관조를 그만두려고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마치 그가 그 안에서 신에 대한 바라봄을 확립하고 있는 전체적인 개방성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바라봄에서도 전체적인 개방성의 상태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심지어는 명령하는 것처럼, 모든 일이 일어난다. (...) 플로티누스는 이 친절함, 이 부드러움, 타인들에 대한 이 존중을 견지한다.
→ 제자인 포르피리오스에 의하면 플로티노스는 아주 온화하고 자상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저자의 말대로 '안으로 열리게 되면 밖으로도 열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상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간단히 훑어봤습니다.
"그대 또한 군더더기인 것을 모두 떼어내고, 비뚤어진 것을 모두 바로잡고, 우중충한 것을 모두 깨끗이 하여 그것을 빛나게 하면서 그대 자신의 상을 조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플로티노스)
첫댓글 태양미사/김승희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태양은 어둠을 살해한다.
현실이 꿈을 선행하니까
그리고 꿈은 현실을 살해한다.
구름의 벽 뒤에서
이제는 태양을 산책하는 독수리여,
나는 감히
신비스런 미립자의 햇빛 파장이
나의 생(生)을 태양에 연결시킬 것을
꿈꾸도다.
나의 생(生)이 재떨이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생(生)이 가면의 얼음집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영원한 궤도 위에서 나의 불이
태양으로 회귀하는 것을.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나의 생명(生命)과 저 방대한 생명(生命)을
연결해 달라,
어떤 방적기계
어떤 안개의 무(無) 속에서
우리의 실은 풀려지는 것인가?
어떤 증발
어떤 채무자인가, 우리들은?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그리하여 태양이 어둠을 살해하듯,
현실이 꿈을 선행하니까
그리하여 꿈이 현실을 살해하기를.
나는 감히
꿈꾸도다,
나의 생(生)이 안개의 먹이로 환원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기에
살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할 것을
오직 나는 바라기에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영원의 궤도 위에서 나의 불이
태양으로 회귀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