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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 영조(英祖) 16년(1740) 2월 28일
남계서원(藍溪書院)의 위판(位版)을 분실한 건
1.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정익하(鄭益河)가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함양부(咸陽府) 남계서원(藍溪書院)의 봄 제사 때 재계(齋戒)에 들어가는 날 서원 내부를 봉심(奉審)하였더니, 문헌공(文獻公)의 위패(位牌)를 안치한 궤〔櫝〕가 비어 있었습니다. 본 남계서원은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 및 강익(姜翼) 공(公)의 위패를 봉안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인데, 뜻밖에 문헌공의 위패를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위패를 비록 찾았다고 하더라도 옛날 그대로 봉안하기에는 일의 대체로 보아 온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벽(主壁)의 정위(正位)가 비어 있으므로 배위(配位)의 제사만 거행할 수도 없으니, 문헌공의 위패를 다시 만들어 봉안한 뒤에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사리에 당연할 것입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정탈(定奪)하게 하여 분부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편액(扁額)을 하사한 서원의 위패에 이러한 변고가 발생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문묘(文廟)와는 같지 않으므로 다른 사례에 따라 본 남계서원에서 위패를 다시 만들어 날을 택해서 봉안하고 이어 위안제(慰安祭)를 지낸 뒤에 정규의 제사는 3월 정일(丁日)로 연기하여 지내도 무방하니, 이렇게 지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변고를 일으킨 사람을 기어이 체포하여 본도(本道)로 하여금 법을 상고하여 처벌하라는 뜻으로 아울러 회답의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건륭(乾隆) 5년(1740) 2월 29일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신(臣) 신만(申晩)이 담당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주-D001] 사액서원(賜額書院) : 조선 시대 임금으로부터 편액(扁額)ㆍ서적ㆍ토지ㆍ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말한다. 최초의 사액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받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백운동서원은 조선 중종(中宗) 38년(1543)에 풍기 군수(豐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국내 주자학(朱子學)의 효시인 고려(高麗) 때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그 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 군수로 와서 이를 보고 중국의 백록동 고사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하니, 명종(明宗)이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고 친필로 쓴 편액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과 노비를 주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와 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렸는데, 이것이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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