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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병훈 ・ 2018. 9. 15. 22:01
1) 행장
공公의 휘는 복기復起이고 자는 성서聖瑞이며 호는 기봉이다. 고려 때 대승공 휘 차달車達을 상조上祖로 하였는데, 그후에 휘 습에 이르러 완산백完山伯으로 수봉受封하여 그 후로는 전주류씨로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휘 빈演은 관官이 영흥도호부사이다. 휘 의손義孫은 세종때 집현전학사로서 남수문南秀文 권채공과 함께 세상에서 ‘삼선생 三先生’이라고 일컬어졌다. 세조가 찬위하니 관위를 버리고 전주로 돌아가서 소와정을 짓고 일생을 마쳤다. 아우 집의執義인 휘 말손末孫의 아들을 후사로 하였는데 휘는 계동季違이니 증도승지이다.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다. 증조曾祖의 휘는 식輯이니 홍문관전한弘文館典轉 인천부사仁川府使이다. 조祖의 휘는 윤선湖善이니 인의引懷이다.
고考의 휘는 성 城이니 조졸早쭈하였으며 증판사이다. 비 批는 의성김씨이니 증판서 진의 따님으로서 부夫 공의 상喪에 따라 순서狗遊하니 조정에서 정려族聞를 내렸다.
공은 명종 明宗을묘생生(1555)으로 8~9세 때 잇달아 부친상 모친상을 당하고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집상執喪을 할 때는 수저에 매운 나물이나 비린내 나는고기가 묻을까 걱정하여 수저를 차고 다녔다. 누가 음식을 먹어라 하면 고사하고,침소는 일정하게 하니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초행廳行을 가는데 도중에서 신부가 농아에 맹인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상객上客가던 어른이 그 말을 듣고 놀라서 그만 돌아가자 하니 공은 의리상 그럴 수가없다고 하였다. 행례行禮를 하고 보니 그 말을 전한 자가 잘못이었다.
외숙 학봉 선생에게 수학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존경을 받았다. 기개氣搬가 있어서 일에 민첩하고 의 義에 용기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여강서원盧江書院에서 동지를 모아 의거를 수창하니 여러 고을에서 향응響應하여 드디어 예안 한림輪林 김해金孩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동 부솔副率 배용길을 副長으로, 공은 전향참모典輪參짧와 정제조볕齊將이 되어 기민하게 대처하였다.
임진년(1 592년) 겨울에 예천의 송구松邱에서 적을 쳐서 많이 죽이고, 계사년(1593년)에는 밀양으로 진을 옮겨서 적봉을 막았다. 경주 전투에서 金孩공이 진중에서 전몰하니 군중에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공은 더욱 분려하였다. 병신년(1596년)에는 도내에 여러 의사와 더불어 팔공산에서 모여 결의를 하였다. 정유년 (1597년)에는 방어사 곽재우郭再祐를 따라서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켰다. 이렇게 전후 종군從軍한 기간이 6~7년이나 되었으나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병란으로 흉년이 져서 기민이 길에 가득하니 공은 길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끓여서 그들을 먹여 살린 자가 많았다. 류영경柳永慶 상국은 족친으로서 겨우 시복(總服 8촌)이 넘었는데 공의 명성을 듣고 여러 번 초치하려 해도 공은 권문權門이라고 해서 마침내 가지 않았다.
무실 집 북쪽 두던에 서실을 짓고 기양서재라 제액하고 날로 그 속에서 자신이 공부하고 후쟁을 교훈하여 일생을 마칠 때까지 은거하였다. 정사년(1617년)2월에 비로소 예빈시정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그해 3월 23 일에 서거하시니 향년 63세였다. 임하현 동쪽 임당산林塊山(숲당) 병향因向의 원向에 장사하였다. 그후에 좌승지左承듭로 증직體職이 내리고 기양사支陽社에 전향하였다.공은 천품이 수오하고 도량이 심후하여 어릴 때부터 의연하게 성인의 기국을 가지셨다. 조부 인의공이 영남으로 이사 오시고 선고先考 시정공이 무실에 정착한 뒤 곧 조졸하시니, 불행한 형제에, 계씨는 서울 큰집으로 입후해 가니, 공은 홀로 외로운 심정으로 분발하여 인현仁賢한 교방으로 뜻을 세우고 부지런히 쉼이 없으셨다. 학문이 깊어지고 조행이 견고해졌으니 공의 강습은 인륜을 위주로 하고
그 충신忠信함은 야만에서도 행할만하며 자신은 정으로써 가지고 타인은 서로써 대하여 순덕으로 독행하고 일용에 발현된 것이 모두가 원칙이 있었다. 일찍이 고아가 되었음을 늘 애통하게 여겨 형제가 서로 생각함이 한 몸 같았다.
연로하신 조모 박씨를 80이 넘도록 힘을 다해서 즐겁게 해드리고 곁을 멀리 떠나지 않았으며, 과부가 된 숙모를 집에 모셔서 생모처럼 섬겼다. 상대上代의 산소가 예안 호암虎嚴(안동 녹전면 범바위)에 있었는데 난리로 다년간 수호守護하지 못하다가 성심으로 탐문해서 봉분을 수축하였고, 영주에 있는 종릉鍾I埈(영주 문수면 종릉)도 퇴락한 것을 수축하는데 경 京 내외 종족들과 상의하고 계획해서 구원한 대책을 세웠으니, 이것이 모두 타인은 가급願及하지 못했던 것이다.
궁곤함에 처해도 소위所寫함이 없이, 적막함을 노래하고 그의 좋아하는 바를 하며, 여가에 노복을 가르치고 농사를 짓고, 조세를 삼가 내며 제사를 받들고 빈객을 맞으며, 가정을 꾸려서 문호를 세웠다. 근검하고 순박하며 독후하고 유원하였다.
아!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을 유촉하게 하였음이 모두가 가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때 공을 아는 자에 한강寒間 정선생鄭先生(鄭迷 1543~1620)같은 이는 “류柳모某는 가히 심성을 논할만하다"라고 하였다. 나의 선조 식암息養(黃遭의 호,1544 ~1616)공은 안동부사로 갔을 때 군내에 현사賢士를 추천하였는데 첫 번째로公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화살 같은 고사高士다"라고 말씀하였다. 석암 공께서는 일찍이 경연에서도 주상奏上하였고, 류문충공柳文忠公 김문정공金文貞公· 이송와李松萬등 제현들도 모두 다 공의 인품을 표제表앓하였으며, 당세인當世A이 하나같이 신망하였다. 자유子游가 상관上官인 자기 집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담대멸명 擔臺滅明을 인물로 칭찬한 그 일에다 바로 비比하였으니, 옛적에 유직 退直들이 어찌 엿본 바가 없이 그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배 配는 영덕정씨이니 참봉 진의 따님으로 증숙부인體淑夫A인데 계축년(1553년)에 태어났고 계해년(1623년)에 돌아가셨으며 공의 묘전 오향午向에 장사하였다.
6남3녀를 생 生하였으니 남男의 장長은 우잠友濟이고 차次는 득잠得濟· 지잠知i쩔 수잠守濟 의잠宜濟 희잠希慣 증참판이고, 서는 생원 정영방 생원 이명원李明遠· 김원金遠이다 ..... .. (중략)
용한龍漢은 어른들을 모시고 앉았을 때 가만히 들으니 “수곡에 대조大祖의 기운基運이 영덕 令德과 대업 大業을 쌓아서 당시에는 비록 펴지 못하였으나 가후家後에 끼쳤으니 자연의 원류源流가 장원長遠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우士友와 종유從遊히는데서 자못 공公이 행사한 의적을 경모하게 되었다. 근일에 진사 유약문柳約文이 그의 여러 부형의 명령으로 유사 한 통을 가지고 와서 행장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니 천루한 내가 할 바가 아니라고 아무리 사양해도 되지 않았다.
드디어 대체적인 일 만을 추려서 쓰노니, 국난에 한사寒士로서 적개심을 일으켜 위기에 항거한 보국의 충성으로 열군의 인사들의 맹수가 되었음은 용자勇者만이 가능한 일이다. 자아가 청백하면 검은 물을 들일 수가 없고 자아가 냉철하면 가열할수가 없는 것이다. 초야의 구학을 그의 소위素位로 하여 거기에서 낙을 삼고 만족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자가 밀한 강재剛者가 아니겠는가 성인도 또한 강者는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성인되어 덕이 커진 때의 일에 속하지만 약관에 초행 갈 때 잠간사이 전문해온 망언을 듣고서 흔례의 대절을 폐하는 일이 없이 인륜의 시원을 능히바루었으니, 그의 도량이 광대함과 정력定力이 성실하였음은 세간에 소년유자少年偶者로서 능히 이렇게 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정자程子가 말한 “나는 나이 30이 안 되었을 때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고 한 그 일과도 같다. 돌아보건대 평지平地와 창졸은 난이難易가 다르다. 가만히 공이 거가居家하던 일을 자세히 보면 운용運用하던 기미 氣味가 모두 자량慧良하고 신밀慣密하며 순순個個하였다. 그의소위所寫로써 그의 불위不寫를 생각해보면 실로 만우萬牛도 돌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중력 重力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천부天眼에서 얻은 것이 강의剛殺하고 방직 方直한 기력 氣力이었으니 이것은 또한 사문斯文의 심법心法에서 연원한 것이리랴. 아! 천하의대사는 무궁해도 세상에는 일찍이 가히 이루어 낼 사람이 없질 않아, 이에 또 일어나는 선비가 범싱하지 않는 감이 난다. 나의 이 졸문은 완성되지 못하였으니, 후세에 지덕자의 고정하는 바가 있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창원 昌原 황용한黃節漢이 삼가 행장을 쓰다.
2)연보
~ 1555년 명종 10년 10월 23 일.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서 태어나다. 부친은 증사복시정 류 성柳 城이며 모친은 의성김씨 증판서 김진의 따님이다.
~ 1560년 공6세 7월. 부친 사복시정 공이 별세하다.
~ 1563년 공9세 1 월. 모친 의성김씨가 별세하다.
~ 1574년 공19세. 참봉 정진의 따님 영덕정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다.
~ 1592년 공38세 6월 1 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안동에서는 가장 먼저 떨쳐일어나 김용金浦 배용길裵龍吉 공과 함께 창의하다.
~ 1592년 8월 5 일. 초유사招論使 김성일金誠-의 초유문招論文이 도착하자 배용길· 김윤명金允明· 김윤사金允思· 정조 등 동지들과 함께 여강서원處江書院에서 회합하다.
~ 1592년 8월 20 일. 안동을 비롯하여 예안 의성 · 군위 의병들과 회맹하다. 안동 열읍향병安東列물劉兵이라 하고 대장에 김해, 좌우부장左右副將에 이정백李底相과 배용길裵龍吉, 정제장에 류복기柳夏起, 이형남李亨男을 정하다.
~ 1592년 11 월 5 일. 순찰사가 간병장操兵將에 류복기柳題를 정하다. 정예 군사를 가려 뽑아서 예천 송구, 상주 반암에서 기습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리다.
~ 1593년 공39세 1 월 1 일. 야간에 복병전을 펼쳐서 많은 적을 사실하고 무기를빼앗다.
~ 1593년 1 월 2 일 . 적군 10여 명을 사살하다.
~ 1593년 2월 23 일. 상주 당교(함창읍 윤직리)에서 전투 동지 147인과 더불어회맹을 하다. 상주 의병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던 회암|每廠 박진남 朴震男의병장이 남긴 ‘회암박공실기 悔嚴朴公뤘記’, ‘당교회맹록康橋會盟錄’에 의하면 1593년 2월 21일부터 27일까지 7일간, 147 인의 의병이 당교의 왜병주둔지를 공격하여 왜적을 문경 대승산 쪽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당시 당교에는 4천여 명의 왜병이 서울로 가는 진격로이자 영남의 인후지처因嗤之處인 당교를 교두보로 삼아 군영을구축하고 있었다.
~ 1593년 4월. 8차례에 걸쳐서 당교 반암 등지에서 적군의 이동로에 매복하여 적 20여 급을 베고 적장 1 명을 사로잡았다
~ 1593년 5월 초. 밀양으로 진을 옮겼다. 다시 경주로 진을 옮겼다.
~ 1593년 5월 19 일. 경주 전투에서 안동열읍향병 김해金核 대장이 순국하자, 정제장整齊將 류복기柳復起 공이 군사를 수습하여 귀환하였다.
~ 1596년 공42세 9월 15 일. 팔공산 상맘上魔에서 류복기 공을 비롯하여 영남지역 여러 고을 의병장 32인이 회맹하다. 각자 이름의 자字로 연구聯句를 지어서 결의를 다짐하였다. 우잠友慣· 득참得濟 지잠知灣 세 아들이 배행하다.
~ 1597년 공43세 7월 21 일. 정유재란에 우잠 득잠 지잠 - 수잠守濟 의잠宜灣 다섯아들을 데리고 창녕 화왕산성에 입성하다. ‘화왕입성동고록火H王入城同苦錄’과 ‘용사응모록龍뾰應轉’에 기록되어 있다.
~ 1598년 공얘세. 전란 후 굶어죽는 이들을 구하기 위하여 무실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죽을 쑤어 먹이다. 여러 아들이 함께 어른을 도와 기아자를 구하다.
~ 1603년 공49세. 무실 언덕에 기양서재를 짓고 공부를 하며 후생을 가르치다.
~ 1617년 공63세 2월. 증 통훈대부 예빈시정증직을 받다.
~ 1617년 공63세 3월 22 일. 무실 집에서 별세하다.
~ 1693년 숙종 19년.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 증직을 받다.
~ 1892년 고종29년. 임진란에 창의昌義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공으로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증직을 받다.
~ 1998년. 대구시 망우당공원 영남호국충의단에 배향되다. 임진왜란 임정 6년간 전투지역에 수시로 배행한 다섯 아드님과, 진주성에서 순국한 아우 묵계 류복립공 등 일가족 7의사義士가 함께 모셔졌다.
이하 자세한 사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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岐峯公 柳復起 遺事
기봉공 류복기 유사
府君諱復起 字聖瑞 號岐峯 麗季有掌令諱濕 積慶于家 五子登文科
부군휘복기 자성서 호기봉 려계유장령휘습 적경우가 오자등문과
由是封完山伯 配全州崔氏 封三韓國大夫人 我柳之貫全州者 咸祖焉
유시봉완산백 배전주최씨 봉삼한국대부인 아류지관전주자 함조언
부군의 휘는 복기고 자는 성서며 호는 기봉 이시다. 고려말에 장령이신 휘에 습께서는 집에 덕을 쌓으사 다섯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완산백으로 수봉하시고 부인의 전주최씨는 삼한국 대부인으로 수봉 하셨으니 우리 류씨에 전주를 본관으로 한자는 모두 조로 하였는 것이다.
仲子諱克恕 寶文閣直提學 贈吏曹參議 是生諱濱 入本朝歷揚淸顯 官止永興府使
중자휘극서 보문각직제학 증이조참의 시생휘빈 입본조역양청현 관지영흥부사
贈吏曹參判 是生諱義孫 仕我世宗朝 選入集賢殿官至參判兼提學 及端廟遜位
증이조참판 시생휘의손 사아세종조 선입집현전관지참판겸제학 급단묘손위
謝病不仕 弟諱末孫薦仕執義 有三者季諱 季潼入爲提學公後 贈都承旨
사병불사 제휘말손천사집의 유삼자계휘 계동입위제학공후 증도승지
則府君之高祖也 曾祖諱軾 弘文館典翰 贈吏曹參判 祖潤善引儀 考諱城早卒
즉부군지고조야 증조휘식 홍문관전한 증이조참판 조윤선인의 고휘성조졸
贈判事 妣淑人聞韶金氏 贈吏曹判書 諱璡之女 哀毁繼歿 事聞旌閭
증판사 비숙인문소김씨 증이조판서 휘진지녀 애훼계몰 사문정려
중자에 휘극서는 보문각직제학으로서 증이조참의고 그의생휘는 빈이니 이조에 들어와서 청현한 관직을 역임하셨는데 영흥부사로 끝마치고 증이조참판이며 그의생휘는 의손이니 우리세종조에 벼슬해서 집현전으로 선입되사 관은 참판으로서 제학을 겸하셨으나 단종이 퇴위하니 병을 핑계로서 벼슬하지 않으셨는데 제의 휘에 말손은 추천으로된 집의로서 삼자중에서 계의 휘에 계동이 제학공의후로 들어오신뒤에 증도승지니 부군에게는 고조이시다 증조의 휘는 식이니 홍문관전한으로서 증이조참판이고 조의 휘는 윤선이니 인의며 고의휘는 성인데 일찍 돌아가셔서 증판사고 부인은 숙인의성김씨니 증이조판서에 휘진의 여로서 상부하시고 애단해서 순절하시니 그사실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려되었다.
府君以嘉靖三十四年 乙卯十月二十三日生 自幼有至性 八九歲失怙恃 執喪如成人
부군이가정삼십사년 을묘십월이십삼일생 자유유지성 팔구세실호시 집상여성인
外祖判書公 憐其幼孤 取養于家 三年佩食匙瓢子 以避葷腥 人有飮食之固辭
외조판서공 련기유고 취양우가 삼년패식시표자 이피훈성 인유음식지고사
寢食有常處 人皆異之 冠而醮齎 聞新婦聾瞽且啞 長者驚欲回轡 府君義不可
침식유상처 인개이지 관이초재도 문신부농고차아 장자경욕회비 부군의불가
遂前委禽 果傳者妄 一時稱其當有後福
수전위금 과전자망 일시칭기당유후복
부군은 명종 십년 을묘 10월 23일에 태어나시니 어려서부터 지성이었는데 8.9세때 부모를 다 여의고 초상을 집행하는데 어른과도 같았다.
외조부의 판서공이 집으로 대려다가 양육을 하였는데 삼년동안 차고를 가지고서 분성을 피하였다. 남들이 음식을 주면 사양하고 잠자리에는 상처가 있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었다. 초행을 가다가 도중에서 신부가 농아로 또는 맹인이라는 말을 듣고 상객가든 어른은 놀라서 그만 돌아가자고 하니 부군이 의리상 불가능 하다고 해서 가서 보니 그것은 말 한 사람이 속였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반드시 후복이 있으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少有氣幹 遇事敏給 已而從舅鶴峯先生學 以文學德量見稱 壬辰兵起
소유기간 우사민급 이이종구학봉선생학 이문학덕량견칭 임진병기
府君約同志會廬江 首先倡義 俄而數郡應響 推金內翰垓爲將 裴副率龍吉 爲副府君
부군약동지회려강 수선창의 아이수군응향 추금내한해위장 배부솔용길 위부부군
始而典餉 中而揀兵 復以參謀整齊將 協贊機宜
시이전향 중이간병 복이참모정제장 협찬기의
어렸을때는 기량과 근엄하기 있어서 일을 만나면 항상 신속했다. 그 후에외숙인 학봉선생에게 공부를 배워서 문장과 덕행으로 칭찬이 자자하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부군은 동지들과 약속하고 여강서원에서 만나서 먼저 의거하셔서 그의 수군이 향으하여 한림 김해를 추천해서 대장으로 하고 부솔 배용기를 부장으로 하고 부군은 처음 전한을 하셨다가 다음은 염병이되어 다시 참모로서 정제장이 되시와 협찬해서 처사를 적절히 하셨다.
是年冬遇賊於醴泉松邱村 設機抄捕多所斬獲 癸巳移陣于密陽 以遏賊鋒 及至慶州
시년동우적어예천송구촌 설기초포다소참획 계사이진우밀양 이알적봉 급지경주
金公歿于陣中 一軍喪氣 府君益自奮勵 與道內諸義士 會盟于八公山 旣于率諸子
김공몰우진중 일군상기 부군익자분려 여도내제의사 회맹우팔공산 기우솔제자
入火旺城 從郭公再祐 殫心並力 以成保障之功 首尾六年 未嘗不在軍中 兵荒之後
입화왕성 종곽공재우 탄심병력 이성보장지공 수미육년 미상부재군중 병황지후
餓殍載路 府君設釜路傍 日作糜粥 賑活甚衆
아표재로 부군설부로방 일작미죽 진활심중
그해겨울에는 예천 송구에서 적을만나 기구를 설치해서 잡아 포핵한바가 아주많았다. 개미년에는 밀량으로 전진을옮겨 적봉을 막아가면서 경주에 이르러 김공이 진중에서 전몰하니 일군의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부군은 더욱 분려하셨다.그리고 도내에 여러 의병들과 더불어서 팔공상으로 모여 또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화왕산으로 들어가서 곽재우 장군을 따라 마음과 힘을 다해 성을 보호하는 공을 세우셨다.그래서 육년동안이나 군중에 계셨는데 흉년이 들어 기민이 길에 가득하니부군이 길가에다 가마솥을 걸고 매일 죽을 끓여 먹여 구활한 자가 많았던것이다.
柳相永慶 爲袒免親 慕府君名 屢致願見之意 府君嫌其門熱 終不往 晩年築室
류상영경 위단면친 모부군명 루치원견지의 부군혐기문열 종불왕 만년축실
于所居之南岸 命曰岐陽書堂 日處其中 料理舊聞 訓誨後進 樂而忘倦 遇佳辰令節
우소거지남안 명왈기양서당 일처기중 료리구문 훈회후진 낙이망권 우가진영절
招呼名勝 詩酒相唱酬 坎坷歿齒 而無怨悔也 萬曆丁巳二月 除禮賓寺正
초호명승 시주상창수 감가몰치 이무원회야 만력정사이월 제예빈시정
三月二十三日 考終于正寢 享年六十三 葬于臨河縣東 林塘山丙向之原 後以孫榰貴
삼월이십삼일 고종우정침 향년육십삼 장우임하현동 임당산병향지원 후이손지귀
贈左承旨 享岐陽里社
증좌승지 향기양리사
유영경 상궁은 집안 친척인데 부군의 이름을 듣고서 여러번 만나보기를 원했서도 집안에 왕래하는 혐의 때문에 끝내 가지는 않으셨다. 만년에는 가택의 남쪽에다가 서재를 짓고 이름을 붙여 기양서당이라 하고 매일 그 속에서 자신을 수양하고 후생을 가르치심을 낙으로 게으름도 잇고 명절이 되면 유명한 친구분들을 불러서 시와 술로서 서로 즐기면서 은두생활을 하시며 일생을 마쳐도 후회함이 없으셨다. 광해군 정사년 2월에 예빈 사정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3월 22일에 서거하시니 향년이 63세 였다. 임하현동 임당산 병향의 원해 장사한뒤에 손에 지의 부윤으로 인해서 좌성지로 증직이 내려졌고 기향사에 향사하였다.
嗚呼今距府君之世 巳二百年矣 平日嘉言善行 湮沒而莫之徵 獨其散見於竁誌
오호금거부군지세 사이백년의 평일가언선행 인몰이막지징 독기산견어취지
輓誄之間者 猶可以倣像其萬一 盖其稟質淸明 操履純慤 慈良愷悌 得於天也
만뢰지간자 유가이방상기만일 개기품질청명 조리순각 자량개제 득어천야
雍容醇粹 資乎學也 處心以直 持巳以正 待人以恕 忠信加行蠻貊 講習不外彛倫
옹용순수 자호학야 처심이직 지사이정 대인이서 충신가행만맥 강습불외이륜
日用事行 自成一家典訓矣 自以早孤 爲終身痛 兄弟二人 動如手足
일용사행 자성일가전훈의 자이조고 위종신통 형제이인 동여수족
祖母朴氏年踰七耋 竭力奉養 未嘗廢離 叔母早寡無依 迎致于家 如事所生
조모박씨년유칠질 갈력봉양 미상폐리 숙모조과무의 영치우가 여사소생
아아! 지금에 부군의 세는 이미 이백년이나 지났으니 평일에 가언과 선행이 없어져서 증거할 수가 없으나 오직 묘지 만사등에서 보이는것만으로 가히 만에 일이라도 상사할 수가 있는것이다. 대개 그의 품성은 청명하시고 조행은 순진하시며 자상하고 온하하심은 천성에서 얻은것이고 용화하고 순수하심은 학문으로 되신 것이다. 용심은 직으로 하시고도 지기는정으로 하시며 대인은 서로서 하시니 충심은 야만국에가도 가행할 것이고 강습은 인륜적인것에 불외하였으니 일룡하는 사행이 스스로 일가의 교전을 이루시었다.
조년에 고아가 되었음을 종신토록 통한으로 하사 형제 이인이 수족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조모에 박씨는 나이 팔십이 넘도록 힘을 다해 봉량하사 멀리 떠나는 일이 없었고 숙모가 조년에 과부가돼서 의탁할곳이 없으니 집으로 모셔다가 친모처럼 섬기시었다.
直學公墓 在禮安虎巖山 世遠失所 府君至誠訪問 爲擧封植 仍修鍾陵永興公墓
직학공묘 재예안호암산 세원실소 부군지성방문 위거봉식 잉수종릉영흥공묘
與京外諸宗 商議區晝 以盡追慕之誠 其篤倫孝先 皆此類也 初判事公肇基水谷
여경외제종 상의구주 이진추모지성 기독륜효선 개차류야 초판사공조기수곡
遺兩孤卽世 季又出後 還京第矣 府君弱齡含恤 千里孤居 惟外氏是依
유양고즉세 계우출후 환경제의 부군약령함휼 천리고거 유외씨시의
惟鶴爺敎訓是承 奮起於傾覆之餘 感發於仁賢之化 問學爲家計 忠孝爲茶飯
유학야교훈시승 분기어경복지여 감발어인현지화 문학위가계 충효위다반
世亂則國耳忘身 周旋矢石 時平則從吾所好 歌詠寂寞 又以暇日課農訓僕
세난즉국이망신 주선시석 시평즉종오소호 가영적막 우이가일과농훈복
謹祖稅奉賓祭 綢繆牖戶 建立門庭 勤儉質樸 篤後悠遠 於以承先而裕後
근조세봉빈제 주무유호 건입문정 근검질박 독후유원 어이승선이유후
一時先輩 稱其至行懿範 可爲後人法
일시선배 칭기지행의범 가위후인법
직학공의 묘가 예안현 호암산에 계신데 오래되어 실전된 것을 부군이 지성으로 탐지하사 복령을 수축하시고 그로인해서 종릉에 영흥공의 묘소도 수축하는데 경외에 여러 종친과 상의해서 계획하여 추모하는 성의를 다하셨으니 그의 율리에 독실하고 선조에 효행하셨음이 다이러했던 것이다. 처음에 판사공이 수곡으로 터를 잡아서 두 고아만 남기고 일찍 돌아가시니 계시도 또한 출계해서 서울로 하니 부군은 양년에 근심으로 철리에 고거하사 오직 외가만을 의지하고 오직 학봉의 교훈만 받아서 경복할 지경에서 분기하시고 인현의 교화에서 감발되어 학문으로서 가게로하고 충요로서 상행으로하여 난시에는 오직 국가를 위해서 자신을 잊고 무기를 주시하시고 평시에는 나의 지호를 따라서 숙연히 가영하시며 또한 여가로는 노복을 가르쳐서 농사를 짓고 조세를 상가하시며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으며 가정을 차리고 문호를 세우셨다. 근검하고 순박하여 돈후하고 수원하게 선조를 게승하고 후손을 만족해하시니 당시에 선배들이 그의 지극하신 정성이 가희 후세사람들의 모범이 된다고 칭찬하였다.
金洗馬潗 曰水谷表從 實肖吾祖之德 息菴黃公暹薦曰 其直如矢 瓢隱金公是榲
금세마집 왈수곡표종 실초오조지덕 식암황공섬천왈 기직여시 표은김공시온
稱府君學行 不可泯沒無傳 寒岡鄭先生 亦深加敬服 嘗曰柳某可與論心 其見重如此
칭부군학행 불가민몰무전 한강정선생 역심가경복 상왈류모가여론심 기견중여차
配淑夫人 盈德鄭氏 參奉諱溍女 嘉靖癸丑生 天啓癸亥終 享年七十一 祔葬于府君
배숙부인 영덕정씨 참봉휘진녀 가정계축생 천계계해종 향년칠십일 부장우부군
墓前向午
묘전향오
새마을에 김집은 말하되 수곡에 표정은 실로 우리 조부의 덕과같다고 하셨고 식암황공은 추천해서 말하기를 그바르기는 화살같다 고했으며 표은김씨온공은 부군의 학행을 전하지 않해서는 했고 한강 정선생도 또한 깊이 감복해서 류모는 가희 더불어서 심성을 논할 수 가 있다고 하였으니 그의 중시되었음이 이러했던 것이다. 부인은 숙인 영덕 정신이 참봉 휘장의 여러서 명종 계축에 태어나서 광해 계해에 돌아가시니 향연이 72세여서 부군의 묘전 오향의 원에 장사하였다.
有六男三女 男長友潛號陶軒 次得潛 次知潛 次守潛 次宜潛 次希潛 贈參判
유육남삼녀 남장우잠호도헌 차득잠 차지잠 차수잠 차의잠 차희잠 증참판
女壻鄭榮邦生員 李明遠生員金遠 又餘男時潛 友潛五男 橚護軍 㮨進士號百拙菴木郁
녀서정영방생원 이명원생원김원 우여남시잠 우잠오남 숙호군 직진사호백졸암욱
木學 格生員 得潛二男 木栽 棶 知潛二男 檊 檼 守潛一男 槮 宜潛四男 木强 樟 樑 枋
학 격생원 득잠이남 재 래 지잠이남 간 은 수잠일남 삼 의잠사남 강 장 량 방
希潛二男木韋 搘文科 府尹
희잠이남위 지문과 부윤
육자삼녀가있으니 맏아들은 우잠이니 호가 도훈이고 둘째는 득잠이면 셋째는 지잠이고 넷째는 수잠이며 다섯째는 의잠이고 막내는 희잠이니 증참판이며 사위에 정룡방은 생원이고 이명원도 생원이고 다음은 김원이고 그 다음은 시잠이다. 다음 대로서 우잠의 오남의 숙은 호군이고 직은 진사로서 호는 백조라미며 다음은 욱 다음은 학 다음은 격은 생원이고 득잠의 이남은 재 래 며 지잠의 이남은 간 은 이고 수잠의 일남은 참 이며 의잠의 사남은 강 장 량 방 이고 희잠의 이남의 큰아들은 위고 둘째는 지니 문가로 부윤이다.
以下不盡 鋒其有科名者 曾孫振輝進士 挺輝文科牧使 啓輝進士 慶輝生員
이하부진 봉기유과명자 증손진휘진사 정휘문과목사 계휘진사 경휘생원
玄孫宗時生員 昌時進士 敬時文科掌令 憲時進士 顯時生員 五代孫元鉉生員
현손종시생원 창시진사 경시문과장령 헌시진사 현시생원 오대손원현생원
升鉉文科參議 贈吏曹參判 觀鉉文科參議 命鉉生員 晋鉉生員 台齊生員
승현문과참의 증이조참판 관현문과참의 명현생원 진현생원 태제생원
六代孫道源監役 長源生員 正源文科大司諫 元源生員 之源文科別檢
육대손도원감역 장원생원 정원문과대사간 원원생원 지원문과별검
七代孫範休前府使 星休生員 川休生員 龜休生員 韶休生員 八代孫廷燁生員
칠대손범휴전부사 성휴생원 천휴생원 구휴생원 소휴생원 팔대손정엽생원
晦文進士 約文生員 元文生員 九代孫致明文科 攴裔蕃昌 以千數計
회문진사 약문생원 원문생원 구대손치명문과 월예번창 이천수계
世謂府君德積之報云
세위부군덕덕지보운
이하는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그중에 등과자만 열거하면 증손의 진휘는 진사고 정휘는 문과로 목사며 계휘는 진사고 경휘는 생원이며 현손의 종시는 생원이고 창시는 진사며 경시는 문과로 장영이고 헌신은 생원이고 오대손에 원현은 생원이며 승현은 문과로 참희로서 증 2조 참판이고 관현은 문과로 참희며 명현은 생원이고 진현도 생원이며 태재도 생원이고 육대손에 도원은 감력이며 장원은 생원이고 정원은 문과로 대사관이며 원원은 생원이고 지원은 문과로 별검이며 칠대손에 범휴는 전무사고 성휴는 생원이며 천휴도 생원이고 귀휴도 생원이며 소휴도 생원이고 팔대손에 정엽은 생원이며 회무는 진사고 약문도 생원이며 원문도 생원이고 구대손에 치명은 문과다 손지가 번창해서 천수나되니 세상에서 부군의 적덕하신 보과라고 하셨다.
嗚呼府君 隱居求志 未嘗聞名於當世 家又失火遺集燒盡 無以傳信於來後
오호부군 은거구지 미상문명어당세 가우실화유집소진 무이전신어래후
惟是紀行乞言 責在後人 而因徇只今未有所屬 深恐世代愈下 聲響寢遠
유시기행걸언 책재후인 이인순지금미유소속 심공세대유하 성향침원
則並與其掇拾萬一者 而終歸於泯沒矣 玆敢以遺事一通 再拜扳控於秉筆之門
즉병여기철십만일자 이종귀어민몰의 자감이유사일통 재배반공어병필지문
倘惠一言之重 爲之撰次事行 使潛德幽光 不至終泯則 其爲感幸 當何如哉
당혜일언지중 위지찬차사행 사잠덕유광 부지종민즉 기위감행 당하여재
不肖等不勝懇祈之至
불초등불승간기지지
오호라! 부군은 은거해서 이상만갖고 일찍이 세상의 명성은 듣기지 않으셨고 또한집이 화재를 당해서 유집도 소실되었으니 내세에 전언될 것이 없는데 오직이 행적을 만드는데는 후손들에게 책임이 있으나 인해서 지금까지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새대가 내려갈 수록 유향이 더욱 멀어지면 거의 만의 일을 모집하는 것 조차 도 마침내 다 없어질까 깊이 겁을 내서 이에 감히 유사 한통을 지어서 제배하고 받들어 문필가에게 중한 일언을 받아서 행장을 만들어 잠재한 덕광이 없어지지 않게만 된다면 그 감행함이 어떠만할까. 이것이 불초등이 지극히 감언 하는 것이다.
八代孫 晦文謹錄
팔대손 회문근록
岐峰公 墓碣文
기봉공묘갈문
(류복기)
公諱復起字聖瑞岐峯其號也 柳氏出全州七代祖諱克恕麗寶文閣直提學子諱濱入
공휘복기자성서기봉기호야 류씨출전주칠대조휘극서여보문각직제학자휘빈입
我朝官應敎贈參判是生諱義孫號檜軒官參判光廟時謝病不仕
아조관응교증참판시생휘의손호회헌관참판광묘시사병불사
공의 이름은 복기, 자(字)는 성서이며, 기봉은 그의 호(號) 이다. 류씨는 전주에서 나왔으니 7대조 극서(克恕)는 고려 때 보문각 직제학이다. 그의 아들 빈(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관직은 응교로서 증 참판이며, 의손(義孫)을 낳았는데 호는 회헌이고 관직은 참판이다. 세조 때 병을 핑계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又二代諱軾典翰贈吏參卽公曾祖 祖諱潤善引儀 考諱城贈司僕正 妣淑人聞韶
우이대휘식전한증이참즉공증조 조휘윤선인의 고휘성증사복정 비숙인문소
金氏 贈判書諱璡女 有旌節閭
김씨 증판서휘진여 유정절려
그리고 손자 식(軾)은 전한으로서 증 이조참판이며, 공(公)의 증조부가 된다. 조부 윤선(潤善)은 인의이고 부친 성(城)은 증사복시정이며, 비는 숙인 의성 김씨인데 증판서 진(璡)의 따님으로 절개가 있어 정려가 내려졌다.
以嘉靖乙卯生 公幼有至性 喪怙恃如成人 佩匙瓢避葷腥 以終三年及醮道聞婦聾
이가정을묘생 공유유지성 상호시여성인 패시표피훈성 이종삼년급초도문부농
瞽且啞 長者驚欲回 公義不可遂往委禽焉 實傳者妄也
고차아 장자경욕회 공의불가수왕위금언 실전자망야
명종10(1555)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지성이 있어 부모 상(喪)을 당해서는 어른처럼 숟가락과 표주박을 차고 3년상을 마쳤으며, 또한 장가를 가는 초행(初行) 길에 신부가 벙어리니, 장님이니 하는 소문이 들려 신랑을 데리고 가던 어른들이 놀라서 그만 돌아가고자 하나 공은 의리상에 불가하다고 하며, 신혼을 치르니 실은 말을 전한 자의 거짓이었던 것이다.
早從叔舅鶴峯先生學以文行德量稱竭力奉養祖母 迎致蚤寡叔母于家 事之如所生
조종숙구학봉선생학이문행덕량칭갈력봉양조모 영치조과숙모우가 사지여소생
壬辰難從翰林金公垓防禦使郭公再祐倡義旅遏賊鋒
임진난종한림김공해방어사곽공재우창의여알적봉
일찍이 외삼촌 학봉선생에게 학문을 배워 문학과 덕행으로 칭송되었다. 힘을 다해서 할머니를 섬겼고 일찍 과부가 된 숙모를 모셔와 친모(親母)처럼 섬겼다. 임진난 때는 한림 김해와 방어사 곽재우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적의 침 략을 막았다.
松邱八公火旺卽其地也 首尾六年勞勩如一兵荒之後 餓殍載路公賑活甚多 柳相
송구팔공화왕즉기지야 수미육년노예여일병황지후 아표재로공진활심다 류상
國永慶以袒免親 慕行誼欲邀見 公嫌其門熱終不往
국영경이단면친 모행의욕요견 공혐기문열종불왕
송구, 팔공, 화왕 등이 그 땅인데 전후(前後)에 6년간을 일관해서 고투 하였다. 그리고 병란 후에는 굶주린 백성이 길에 널려있으니 공은 그들에게 음식을 주어 살린 자가 많았다. 류영경 상국공은 면복(免服)한 지친(至親)인데 그의 행적를 듣고 불러 보려 해도 권문(權門)에 왕래(往來)한다는 혐의를 받을까 봐 끝내 가지 않았다.
晩築岐陽書堂繹舊聞訓後進樂而忘倦鄭寒岡先生嘗曰柳某可與論心云 萬曆丁巳
만축기양서당역구문훈후진낙이망권정한강선생상왈류모가여론심운 만력정사
除禮賓寺正未幾歿壽六十三世
제예빈시정미기몰수육십삼세
만년에는 기양서당을 지어서 공부를 더하고 후생(後生) 가르치는 일을 즐겨서 게으름을 잊었다. 한강 정선생은 일찍이 말하되 류모는 가히 더불어 심성을 논할만 하다고 하였다. 광해군9(1617)년에 예빈시 정(正)에 임명되였으나 얼마 안 있어 별세하니 향년 63세이다.
從先兆葬臨河縣東林塘山向丙原後以孫榰貴贈左承旨配贈淑夫人盈德鄭氏參奉溍
종선조장임하현동임당산향병원후이손지귀증좌승지배증숙부인영덕정씨참봉진
女祔公墓
여부공묘
선영(先塋)을 따라서 임하현 동쪽 임당산 남향의 산기슭에 장례를 지냈다. 후에 손자 지(榰)가 귀하게 되어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배필은 숙부인 영덕 정씨로서 참봉 진의 따님인데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子六人友潛號陶軒得潛知潛守潛宜潛希潛贈參判女三人鄭榮邦進士李明遠生員金
자육인우잠호도헌득잠지잠수잠의잠희잠증참판여삼인정영방진사이명원생원김
遠餘男一人時潛友潛五男橚護軍㮨進士號百拙菴郁學格生員
원여남일인시잠우잠오남숙호군직진사호백졸암욱학격생원
아들 여섯이 있으니 우잠은 호가 도헌이고 득잠 지잠 수잠 의잠 희잠은 증참판이며 사위는 셋이니 정영방은 진사고 이명원은 생원이며 또 김원이고 아들 한 사람이 더 있으니 시잠이다. 우잠의 5남 숙은 호군이고 직은 진사로서 호는 백졸암이며, 욱, 학, 격은 생원이다.
得潛二男栽棶知潛二男檊檼守潛一男槮宜潛四男强樟樑枋希潛二男褘榰文科府尹
득잠이남재래지잠이남간은수잠일남삼의잠사남강장량방희잠이남위지문과부윤
餘不錄錄
여불록록
득잠의 2남은 재, 래이며 지잠의 2남은 간, 은이고 수잠의 1남은 참이며, 우잠의 4남은 강, 장, 량, 방 이고 희잠의 2남은 휘, 지는 문과로 부윤이다. 그 외는 다 기록할 수가 없다.
顯者曾孫挺輝文科牧使玄孫敬時文科掌令五代孫升鉉文科參議贈吏參觀鉉文科參
현자증손정휘문과목사현손경시문과장령오대손승현문과참의증이참관현문과참
議六代孫正源文科大司諫道源監役之源文科別檢
의육대손정원문과대사간도원감역지원문과별검
현달한이만 열거한다면 증손에 정휘는 문과로 목사이고 현손에 경시는 장령이며 5대손에 승현은 문과로 참의에 이조참판이고 관현은 문과로 참의며 6대손의 정원은 문과로 대사간이고 도원은 감역이며, 지원은 문과로 별검이다.
七代孫範休府使九代孫致明文科日公之八代孫炳文以公遺事屬余銘其墓試按之公
칠대손범휴부사구대손치명문과일공지팔대손병문이공유사속여명기묘시안지공
稟質淸明操履純慤處心以直持已以正待人以恕其慤範皆可爲後人法
품질청명조리순각처심이직지이이정대인이서기각범개가위후인법
7대손 범휴는 부사이며, 9대손 치명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의 8대손 병문이 공의 유사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기에 생각건대 공은 품성(稟性)이 밝고, 품행(品行)이 올바르고, 마음을 씀이 곧으며 사람을 대접할 때는 관대하게 하였으니 그의 은덕이 모두 후인의 모범이 되었다.
又嘗奮于孤童以克樹門戶至今子孫之昌熾皆公積德之報往歲爲立岐陽社以享之誠
우상분우고동이극수문호지금자손지창치개공적덕지보왕세위입기양사이향지성
可銘也銘曰
가명야명왈
또한 일찍이 고아가 되었을 때 분발해서 그의 문호를 수립하여 지금에 자손이 번창하니 이것이 모두 공이 쌓은 덕의 결과이다. 지난해 기양사를 세워 향사를 하니 참으로 명(銘)할 만한 것이다 명해 말하노니
赫赫柳宗 遠自麗朝 혁혁류종 원자려조
혁혁하신 류씨문은 먼고려때 부터왔네
毓慶流祥 以布柯條 육경유상 이포가조
상서로운 경사내려 그가지를 펼치셨네
卓矣檜軒 有炳孤忠 탁의회헌 유병고충
특출하신 회헌께선 고충으로 빛나셨고
公承其緖 德修于躬 공승기서 덕수우궁
그마음을 공이받아 몸소덕을 쌓으셨네
寒老心期 鶴爺衣鉢 한노심기 학야의발
한강께선 심기했고 학봉학통 받으셨네
敵愾拯壑 義聲四達 적개증학 의성사달
왜적에게 항거하신 그의성이 사전했네
積善餘報 有蕃來雲 적선여보 유번내운
덕을쌓은 덕택으로 후손들이 번성하네
我銘不華 以表其墳 아명불화 이표기분
내가쓴명 안좋으나 이분묘를 표려하네.
通訓大夫 前司憲府 掌令 晋陽 鄭宗魯 撰
통훈대부 전사헌부 장령 진양 정종로 찬
통훈대부 전 사헌부 장령 진양인 정종로가 짓다. 만령공파 류병훈 제공
岐峰公墓碣文
기봉공묘갈문
(류복기)
사헌부 장령 진양 정종로 찬
공의 휘는 복기고 자는 성서이며 기봉은 그호다.
류씨는 전주에서 나왔으니 7대조에 휘극서는 고려때 보문각 직제학이고 그의 생휘 빈은 이조에 들어와서 관의 응교로서 증 참판이며 생휘는 의손이니 호가 회헌이고 관은 참판인데 세조대에 병을 핑계로 벼슬을 하지않으셨다
그리고 휘식은 전한으로서 증 이조참판이니 공에게는 증조이시다.
조의 휘는 윤선이시고 고의 휘는 성이니 증 사복시정이며 비는 숙인 의성 김씨이니 증 판서에 진의 녀로서 정려각이 있다.
명종 10년 을묘생으로 유시부터 지성이 있어서 양친을 상실할 때 성인처럼 시표匙瓢를 차고 3년상을 마치고 초행(장가가는 것)길에서 신부가 농아하고 또한 맹인이라는 소문이 듣기니 상객가던 어른은 놀라서 그만 동행하고자 하나 공은 의리상에 불가하다 고해서 신혼을 치르니 실은 말을 전한자가 요망했던 것이다.
일찍부터 외숙인 학봉선생에게가서 공부를 해서 문학과 덕행으로써 칭도되었다. 힘을 다해서 조모를 섬겼고 일찍 과부가 된 숙모를 모셔다 친모처럼 섬겼다.
임진난때는 한림 김해공과 방어사 곽재우 공을 따라서 의병을 창기해서 적의 침봉을 막았으니 송구 팔공 화왕 등이 그땅인데 전후에 6년간을 일관해서 고투 하였다. 그래서 병란뒤에는 기민이 길에 널려있으니 공은 그들을 급식해서 살린자가 많았다.
춘호공 류영경 상공은 면복한 지친인데 그의 행의함을 듣고서 불러다 보려고 해도 권문에 왕래한다는 혐의를 받을까해서 마침내 가지 않으셨다. 만년에는 기양서당을 지어서 공부를 더하고 후생을 가르치는데 즐겨서 게으름을 잊었다.
한강 정선생은 일찍이 말하되 류모는 가히 더불어서 심성을 논할만 하다 고 하였다.광해군 9년 정사에 예빈 사정으로 임명되엇으나 얼마안되어 서거하시니 향년이 63세로 서 선영에 따라서 임하현동 임당산 병향의 원에 부장 되었다.
아들 여섯이 있으니 우잠은 호가 도헌이고 득잠 지잠 수잠 의잠 희잠은 증참판이며 사위는 셋이니 정영방은 진사고 이명원은 생원이며 또 김원이고 여남에 일인이 더있으니 시잠이다. 다음대로 우잠의 오남에 숙은 호군이고 직은 진사로서 호는 백졸암이며 욱 학 격은 생원이고 득잠의 2남은 재 래 이며 지잠의 2남은 간 은이고 수잠의 일남은 참이며 우잠의 사남은 강 장 량 방 이고 희잠의 2남에 휘 지는 문과로 부윤이다.
그외에는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현달한이만 열거한다면 증손에 정휘는 문과로 목사이고 현손에 경시는 장령이며 5대손에 승현은 문과로 참의에 이조참판이고 관현은 문과로 참의며 6대손의 정원은 문과로 대사간이고 도원은 감역이며 지원은 문과로 별첨이고 7대손에 범휴는 부사며 9대손에 치명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의 8대손에 병문이 공의 유사를 가지고와 나에게 묘명을 부탁하기에 접接하건데 공은 품성이 청명하고 조행操行이 순정純正하며 용심은 직으로써하고 지기는 정으로써하며 대인待人에는 노怒로 하였으니 그의 은덕이 모두다 후인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일찍이 고아가 되엇을 때 분발해서 그의 문호를 수립하여 지금에 자손이 창성하니 이것이 모두 공의 적덕積德한 보과報果였다. 지난해에 기양사를 세워서 향사하니 참으로 명銘할 만한 것이다
명해 말하노니
혁혁하신 류씨문은 멀리역대 부터왔네
상서로운 경사내려 그가지를 펼치셨네
특출하신 회헌께선 고충으로 빛나신데
그유통을 공이받아 몸소덕을 쌓으셨네
한강께선 심기했고 학봉학통 받으셨네
왜적에게 항거하신 그의성이 사전했네
적선하신 보과인데 후손들이 번성하네
나의쓴명 화없으나 이봉영을 표려하네.
[출처] 기봉공 류복기 岐峰公 柳復起|작성자 류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