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비늘구름처럼 시조로 되살아난 시인, 이상
이정환
jhwanl@hanmail.net
《대구문학》127호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작품을 한 편 발견했다. 그동안 우리 문단에서는 시인 이상을 시적 대상으로, 혹은 소설의 텍스트로 다룬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근간에는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인 변희수 시인의「의자가 있는 골목」이 있다. ‘이상에게’라는 부제가 있는 작품을 한번 보자.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 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변희수,「의자가 있는 골목」전문
흡사 시인 이상이 살아 돌아와서 직접 진술하고 있는 듯한 화법이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닌 시다. 시인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독보적인 정황 해석이 이채로운 어조와 맞물려서 개성적인 시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한때 시단에서는 미래파가 시적 담론을 주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들은 이상의 울타리를 넘지 못한 듯이 보였다. 애당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기 변희수 시인은「의자가 있는 골목」을 통해 미래파와는 다른 시적 성취를 얻고 있다.
다음 시조를 보자.
1.지도의 암실
몇 줄의 볕을 밟고 어둠이 지나간다
받지 않는 전화가 다시 올 것 같은 봄날
압정에 꽂힌 시간이
화석처럼 굳는다
2.날개
상상의 여정 속에 기억의 벽 허물어지고
유폐된 삶의 촉각 어디를 향해 달리나
날개야 다시 돋아라
무한한 외출이듯
3.동해
황막한 언어 속에 세월은 넘어가고
추억처럼 달라붙는 곡예의 거짓부렁
일타화
비누의 거품
누구의 구토인가
4.종생기
더위 먹은 봄바람에 여름은 따라 붙고
내 마음 꿀방구리 죽음도 그리워라
속아서 또 속는 사랑
한평생 속달이다
5.단발
세월이 슬펐나요, 노을 같은 모멸 속에
애정을 계산하다 그 마음 삭제했나요
이제는 돋보입니다
새로운 힘의 상징
-정화섭, 「이상」전문
정화섭 시인은「이상」을 통해 자기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고 본다. 한 마디로 괄목상대다. 나름대로 내용 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이상의 소설 5편을 읽고 각각 한 편의 시조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시조 독후감은 자칫 평이성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잘 극복하고 시적 성취를 북돋우고 있다. 한 편의 소설의 내용을 발췌 ․ 요약하여 자신만의 시각과 시어로 이상을 현재화하여 간결하게 불러내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지도의 암실』을 두고‘몇 줄의 볕을 밟고 어둠이 지나간다/ 받지 않는 전화가 다시 올 것 같은 봄날/ 압정에 꽂힌 시간이/ 화석처럼 굳는다’라고 묘파하여 독자로 하여금『지도의 암실』을 찾아 읽고 싶도록 만든다. ‘압정에 꽂힌 시간’과‘화석’이미지는 이상을 말하기에 적절한 이미지다.
『날개』에 대해서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무한한 외출이듯’에서 보듯 이상은 오래 전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여전히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동해』에서는 ‘일타화/ 비누의 거품/ 누구의 구토인’지를 되물으면서 이상의 현재화, 이상 문학 세계의 현재화를 꾀하고 있다.『종생기』는 종장‘속아서 또 속는 사랑/ 한평생 속달이다’를 통해 모든 사랑의 가없음을 떠올려 보여준다.
끝으로『단발』을 보자. ‘세월이 슬펐나요, 노을 같은 모멸 속에/ 애정을 계산하다 그 마음 삭제했나요’라고 반문하면서 ‘이제는 돋보입니다/ 새로운 힘의 상징’이라고 맺고 있다. 그렇다. 이상은 오늘에 와서도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힘의 상징’임이 분명하다. 일찍이 시공을 초월하는 시 세계를 축조하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스쳐가는 비늘구름처럼 시조로 되살아난 시인 이상, 그가 정화섭 시조시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한, 깊은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