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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김
2007년 5월 20일 / 대예배 / 마 20:25-28
■ 어떤 목사님에게 초등학교 1학년짜리 막내아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엉엉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사연인즉 그 날 학교에서 반장 선거가 있었는데 출마했다 떨어져 다시 부반장 선거에 출마했는데 그것마저 떨어져 큰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형들이 와서 이렇게 달래주었습니다. “너 진짜 반장 하고 싶으면 지금부터라도 친구들을 열심히 도와주고 봉사해라.” 2년 후 3학년이 되었을 때에 무려 16명이 출마했는데도 당당히 반장에 뽑혔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시면 여러분을 위한 걸레가 되겠습니다.”라고 연설했더니 자기한테 표를 몰아주더라는 것입니다. 막내 아이의 말을 듣고 그 아버지 목사님 마음에 큰 깨달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밤에 아버지는 막내아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주님, 이 아이가 2학기 동안 친구들을 위해 참된 걸레가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 아이가 커서도 일평생 사회를 위한 걸레가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 자리에까지 낮아지심으로 더러워진 영혼을 닦아 주셨습니다.
빌 2:5-11 /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6)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7)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 종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8)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9)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많은 가르침이 그 당시 여론이나 대중의 생각과는 오히려 반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현재도 그러 합니다. 본래 인간의 생각, 마음은 하나님의 생각, 마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당시 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본문도 그러합니다.
마 20:25-28 /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이방인이 왕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백성을 내리누른다. 26)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만일 너희가 으뜸이 되기를 원하거든 반드시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라. 28)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목숨을 내주려고 온 것이다.’
예수님은 위대한 덕성은 ‘섬김’이며 ‘종’이 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은 많은 사람의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주는 것보다 ‘섬김의 의미’만 생각해 봅니다.
1. 섬김의 의미
성경전서를 통해서 ‘종(servant), 섬기다(serve), 봉사를 하는 것(ministering)’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이 ‘섬김’을 성구사전에 무려 641회나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속박(bondage), 노동(labor), 일(work), 경작(tillage), 봉사하는 것(ministering)’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섬김, 봉사, 종 등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5가지나 있다고 합니다. ① 가장 보편적인 단어는 ‘둘로스(dulos)’로 이 단어는 영원히 노예로 태어난 자로서 자신의 유익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 주인의 뜻대로 다스림을 받고 사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을 이와 같이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② ‘쎄라폰(therapon)’은 그가 노예든 아니든 간에 의무 또는 사랑 때문에 섬기는 것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③ ‘디아크노스(diakonos)’는 주인이나 다른 사람의 명령을 집행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는 종종 식탁에서 음식이나 마실 것을 제공하며 시중드는 자로 다른 사람의 삶의 필요들을 공급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교회의 집사들을 말할 때 이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④ ‘오이케데스(oiketes)’는 가족과 관계가 있는 ‘집안의 종(house-servant)’을 말합니다. ⑤ ‘후페레테스(huperetes)’는 상급자의 뜻을 따라서 받드는 ‘전령’처럼 열심히 일하는 하급자를 의미합니다. 이 말들을 종합하면 ‘섬김’은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하여 돌보며, 준비시켜 주며, 채워주는 자를 암시합니다. 이는 물질만이 아니라 영적인 복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다른 사람의 물질적 내지는 영적인 필요를 충당해주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행하는 덕성입니다.
2. 섬김의 위대함
구약은 메시아를 예언할 때, 사 52:13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라고 하면서 메시아를 ‘내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아는 신약에서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을 마가는 ‘종’으로 묘사했습니다(막 10:45 /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주려고 온 것이다.”). 이와 같이 메시아는 가장 높으신 분이면서도 그 분의 삶의 특징이 섬김이었다면, 그 섬김은 위대하고 큰 것입니다.
예수님은 짐짓 세상에서 주장하는 권세의 모든 사상을 부정하시고 새로운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그것은 종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종으로 오셔서 섬겼고 당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섬기는 것은 곧 큰 자가 되게 하는 것이며, 으뜸이 되게 하는 것이며,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세상의 집권자들은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3. 섬김의 본
가장 훌륭한 종의 본을 보이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두말할 나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구원하심으로 그들을 섬기셨고, 그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통해 죄에서 구원하사 의롭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주된 섬김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복음서와 서신서, 그리고 성경 전체에 꽉 차 있습니다.
4. 섬김의 개발
빌 2:5-8에서 말씀하신 것에서 섬기기 위한 몇 가지 단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있을 때 섬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지위를 기꺼이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는 당신의 명성과 평판은 조금도 생각지 아니하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여기에서 ‘형체’라는 말은 ‘내적인 실제의 외적인 표현’을 의미합니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과 동등된 지위를 가지고 계시지만, 그 권한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 되셨습니다. 섬김의 덕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낮은 자리를 기꺼이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낮은 자리를 기꺼이 취하지 않고는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것이 없으면 육의 사람임). 또한 예수님은 희생하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섬김입니다.
5. 섬김의 동기
성경에서는 반복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길 것을 권면하거나 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했습니다. 출 23:25에서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겨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에게 먹을 양식과 너희가 마실 물 걱정을 하지 않도록 복을 내리리라.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길 때 복이 따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수 24:14 / 자, 그러니 이제는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가시오. 여호와를 섬기며 살되 온전히 여호와만을, 진실되이 여호와만을 받들고 살아가시오. 그대 선조들이 유브라데강 건너편에서 살 때, 또 애굽에서 살 때 다른 신을 섬기고 살았다고 해서 그들을 본받지 마시오. 그들을 뒤따르지 말고 여호와를 섬기시오.
갈 5:13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는 이미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 자유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자유입니다.
골 3:24 / 여러분에게 보수를 주는 분은 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분깃을 나누어 주십니다. 사실 여러분은 이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에는 섬김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그 동기는 섬길 때에 성경에서는 풍성한 상을 약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섬김의 본을 본받는 그들에게 복이 있을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요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으니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며, 이것을 깨달아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재능, 뛰어난 재능, 재물 또는 지위를 가졌다하여도 그것들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참된 위대함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하여 이기적이 아닌 헌신적인 봉사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는데,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중의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섬기는 자가 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딛 2:14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ㄱ) 항상 죄에 빠져 들어가는 우리를 구해 내어 그분의 백성으로 삼고 깨끗한 마음과 남을 돕는 일에 열성을 다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ㄱ. 신 14:2, 시 130:8, 겔 37:23)
우리는 섬기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 정진구라는 CJ식품서비스 총괄사장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사업에 실패한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그 성공은 함께 하는 삶에서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카스텔라가 한창 유행했었습니다. 카스텔라를 만들려면 재료로 계란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소풍 때만 되면 계란 품귀현상이 일어나서 카스텔라를 만들기가 참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알아보니까 계란이 나환자촌에서 90% 이상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직거래를 상담하는데 한마디로 거절당했습니다. 외부인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나환자촌으로 직접 들어가 한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환자들을 목욕시켜주고 식사도 같이 하고 잠도 같이 잤습니다. 그러니까 서서히 마음을 열어 계란 직거래에 성공해 삼립식품이 카스텔라로 인해 대 회사로 성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함께 하는 삶입니다. 함께 할 때 거기서 감동이 주어지고 마음이 열리고 공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삶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함께 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 나환자를 전도를 한 다미엔 신부를 봅니다. 하와이 군도에 몰로카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몰로카이라는 말은 ‘하늘을 꿈꾸는 섬’이란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몰로카이 섬이 100년 전만 해도 악명 높은 나환자 수용소였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누구도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섬 주변에는 모두 암벽이고 주위에는 물살이 거세어서 죽어야만 나오는 곳입니다. 몰로카이 섬은 말 그대로 생지옥입니다. 그 섬에 다미엔이라는 신부가 33세의 나이로 전도하기 위해서 스스로 들어갑니다. 들어갔는데 아무도 그를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사랑을 설파했지만 돌아온 것은 빈정댐뿐이었습니다. “사랑, 그것은 당신들처럼 건강한 사람들의 잠꼬대야.” 다미엔은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미엔은 그때부터 기도를 고쳤습니다. “주여 나에게도 저들이 앓고 있는 나병을 허락하소서.” 그리고 그는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어 화상을 입힙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비로소 나병이 옮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49세 때입니다. 그는 기도대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나병이 발병한 후에 다미엔은 비로소 당당한 마음으로 강단에 서게 됩니다. 강단에 서서 그가 외친 첫마디가 ‘형제들이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 일생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설교를 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도 여러분들과 똑같은 나병에 걸렸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하나님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때 그 설교 한마디가 그곳에 있는 많은 나병환자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다미엔은 끝까지 치료를 거부하고 결국 나병으로 죽어서 그 섬을 떠납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은 그의 고향 벨기에로 갑니다. 그런데 섬에 남아 있던 나환자들이 이 다미엔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남아있던 나병환자들이 다시 그의 시신이라도 보내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그래서 고향에 묻혀있던 다미엔의 오른 팔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곳 나병환자들은 그 팔을 몰로카이 섬 땅에 묻고 그곳에 묘비를 세우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는 나환자들의 아버지였다.”라고 썼습니다.
■ 백인들이 흑인들을 법에 의하여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있던 때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생겨진 이야기입니다. 흑인 교회인 성 시온 교회에서 수난일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이 예배 때 특별한 행사를 계획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정신을 본받아 누구든지 자기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의 발을 씻는 예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예배에 당시 존경을 받는 백인으로 대법원장에 내정된 인물이었던 올리버 판사가 참여한 것입니다. 시온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세족 예식의 광고를 듣고 그는 그 교회에 다니는 자기 집의 흑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검은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배당 안은 숙연해졌습니다. 올리버 판사는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내 집 종으로서, 오랜 세월 내 아들 딸들을 돌보았으며, 내 자식들의 발을 씻어 준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 소식이 퍼지자 내정되었던 대법원장 자리가 취소된 것은 물론 판사직도 박탈되었습니다. 시온 교회 목사가 올리버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방문했을 때, 올리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혹 종이 되어 섬기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도 무엇인가 손해볼까봐 또는 번거롭게 여겨져서 주저하지는 않습니까? 주저하지 말고 이제부터 섬김에 앞장서서 이 시대에 주님께 쓰임받는 꼭 필요한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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