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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여우목 성지
지번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96
여우목 성지는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 한 명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인근의 교우촌인 건학(동로면 명전리)과 부럭이(덕산면 억수리)와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래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빈번한 접촉을 갖고 이웃집 드나들 듯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도와가며 신앙생활을 했다.
여우목 교우촌은 소백산맥의 높고 험준한 대미산(1,115m)을 경계로 하여 충청북도 단양과 경계를 이루는 경상북도 문경 지방의 최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여우목은 대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옛날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600년경으로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장원의 10대 조부인 장기풍이 단양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움막을 짓고 다래덤불을 걷으며 산지를 개간해 살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이다. 충청도 홍주가 고향인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년) 가정이 상주 갈골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그 무렵에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徐致輔, 1791-1840년) 가정도 충청도 청풍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 여우목 교우촌으로 피난 옴으로써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또한 1827년 정해박해 때 멍에목에서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朴~, 1757-1827년)와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12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朴士儀, 1792-1839년) 가정도 고향을 떠나 단양 가마기에서 살다가 여우목과 건학 교우촌과 인접한 멍에목으로 피신 와서 살았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서치보는 가족들과 함께 여우목 교우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40년 9월 19일(음력)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그 후 선산(현 여우목 마을 뒷산)에 묻혀있던 서치보의 유해는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묘소를 마련하여 병인박해 때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장남 서인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한편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인 서인순 시몬(徐隣淳, 1808-1868년)과 서익순 요한(徐翼淳, ?-1868년), 서태순 베드로(徐泰淳, 1823-1867년)는 병인박해 때 모두 순교하였다.
서치보가 선종한 후 장남인 서인순은 어머니와 4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풍기로 이사를 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모개골 교우촌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문초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 1868년 4월 29일(음력)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부친 서치보의 묘소가 있는 여우목으로 이장해 왔고, 1999년 9월 18일 새로 조성된 현재의 여우목 성지에 부친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4남인 서익순은 1867년 박해가 잠잠해지자 한티에서 대구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서울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절두산에서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5남인 서태순은 박해를 만나 대구에서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문초를 받고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은 후 상주 감옥에서 옥사했다. 한편 베로니카라는 노파는 이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가는 도중에 마을 앞 노상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공소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부친 대(代)부터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의 본분인 수계 생활에 충실하였다. 상주 갈골에서 살다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처갓집 식구들(순교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는 문경 여우목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이윤일의 아들인 이 시몬은 부친보다 앞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 건학 교우촌에 사는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야외제대 맞은편에 묘역과 대형 십자가, 성모상이 있고, 그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윤일은 마을의 대표자를 묻는 포졸들에게 선뜻 나서 신분을 밝히고 가족 8명을 포함해 모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문경에서 3일 후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았다. 여기서 이윤일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 모친과 누이는 풀려났지만 그는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윤일은 대구로 이송되기 전 자손들을 불러 놓고, “나는 이제 치명하러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고 훈계한 후 치명하는 장소까지 따라오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결국 대구로 끌려온 지 3일째 되는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함께 잡혀온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와 함께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관덕정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후 아들 이의서와 가족들에 의해 대구 비산동(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12년 경기도 용인군 묵리(먹뱅이)에 살고 있던 동생 이시영에 의해 이동면 묵리 산으로 옮겨 모셨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이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여우목 성지를 관리하는 문경 성당은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교우촌 터 부근에 1255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1999년 서치보와 서인순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 4월 대형 십자가, 11월 제대 · 성모상 ·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꾸준히 조경 작업을 실시하여 2002년 9월 29일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 주례로 성지 축복식을 가졌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6일)]
성 이윤일(李尹一) 요한(1816-1867년)
성 이윤일 요한(Joannes)은 충청도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친 대(代)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언제부터 경상도 문경군 새재 여우목으로 와서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는데, 키가 크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므로 위엄이 있었으며, 신심이 깊고 또 솔직담백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의 가정은 친가와 외가 모두 선대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가문이어서 선친들 중에 전교회장과 순교자들도 있었다. 이 요한도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온갖 방법과 노력으로 자기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에 신자들이 많이 산다는 것을 알고 포졸들을 보냈다. 이 요한은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올 때가 온 것이며 이미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 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을 대표하는 집 주인이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 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그들은 마을을 수색하여 이 요한의 가족 8명과 마을의 신자 30명을 체포하여 험준한 산길을 걸어 문경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문경에서 사흘을 지낸 후 상주로 압송되었다. 여기서 세 달을 지냈는데 그가 기거하던 곳은 집이 아니었고, 마구간도 돼지우리도 아닌 겨울에 무나 배추를 저장하기 위해 파 둔 구덩이가 요한의 침실이었다. 그의 목에는 죄수가 쓰는 칼이 두 개나 채워졌고, 발에는 차꼬를 끼워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였으며 신자들을 격려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후 상주 목사는 마지막 문초를 마치고 70여 명의 신자를 세 편으로 갈랐다. 첫째 편은 집으로 돌려보낼 자들이고, 둘째 편은 처형될 사람들 그리고 셋째 편은 이 요한과 같은 사교의 두목이었다. 상주 목사는 1867년 1월 4일 대원군의 윤허와 함께 군중에게 교훈이 되게 사형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집행을 위해 대구로 압송하였다. 이 요한은 사형선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출발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이 요한은 포졸들이 주는 마지막 음식을 다 받아먹고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갔다. 천주학장이를 참수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져 형장은 인파로 들끓었다. 집행관이 나와서 선고문을 낭독하자 요한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희광이에게 주며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에게 줄 터이니 받아서 요긴하게 쓰게나. 그 대신 부디 한 칼에 내 목을 베어 주게나.” 하고 말하였다. 요한은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조용히 꿇어앉았다. 돈을 준 효력이 있었는지 요한의 목은 한 칼에 떨어졌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와 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에 의해 대구 날뫼(비산동)에 매장되었다가, 1901년 경부선 철도가 착공되면서 당시 용인의 먹뱅이에 살고 있던 그의 동생 이시영에 의해 1912년 이동면 묵리 산으로 이장하였다. 1976년 6월 24일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성인의 유해임을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되었고, 그날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서인순(徐隣淳) 시몬(1808-1868년)
서인순(徐隣淳) 시몬은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徐光修)의 증손자로서 대대로 온 집안과 대소가가 모두 열심한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는 1808년 5월 17일(음력)에 충청도 청풍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그는 열심한 천주교 신자인 부친 서치보(徐致輔, 1791-1840년)와 모친 동래정씨(東萊 鄭氏)를 모시고 동생들(명순, 철순, 익순, 태순)과 함께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전전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문경 여우목 교우촌에서 살았다.
1840년 9월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4명의 동생들과 함께 풍기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경신박해 때인 1860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온 가족을 데리고 경산 모개골 교우촌으로 이사를 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관헌에게 잡혀 대구감영의 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868년 4월 29일(음력)에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경산 모개골에 안장되었고 후에 부친의 묘소가 있는 이곳 여우목 선산(현 여우목 마을 뒷산)으로 이장해 왔으며, 1999년 9월 18일 현 위치(여우목 성지)에 새로이 산소를 마련하여 부친 서치보 요셉과 함께 이장하여 모셨다. [출처 : 여우목 성지 서인순 시몬 순교자 비문, 내용 일부 추가]
서태순(徐泰淳) 베드로(1823-1867년)
서태순(徐泰淳) 베드로는 1823년 충청도 청풍에서 서치보(徐致輔)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기해박해 무렵 문경 여우목에 살다가 1840년 부친이 선종하자 충주 중원으로 이사했으며, 박해가 잠잠해지자 대구지역으로 이사를 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잡혀 대구 경상감영으로 끌려가 여섯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심한 고문을 받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지난날의 잘못을 통회하고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문경 한실 교우촌에 가서 살다가 1866년 가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을 거쳐 상주로 이송되어 3차례의 신문과 많은 곤장을 맞았으며, 1867년 1월 23-24일 사이 옥에서 목 졸려 순교하였다. 순교자의 시신은 부인 김 데레사와 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및 맏형 서인순의 도움으로 한티로 옮겨졌다. [출처 : 한티 성지 서태순 베드로 순교자 비문]
복자 박경화 바오로(1757-1827년)
‘도항’라는 관명(冠名)으로도 잘 알려진 박경화 바오로(朴甫祿)는, 1757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세 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본디 그는 제법 재산이 있는 데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받는 몸이었다고 한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가 그의 아들이다.
박 바오로는 입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더 철저하게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박 바오로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녀들이 열심히 덕행을 닦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었다.
60세가 지나서 박 바오로는 가족을 데리고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교우들을 안심시킨 뒤,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으며,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가는 동안 박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고, 다른 교우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 영혼은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쳤다. 게다가 옥중에서는 늙은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보다, 먼저 교우들을 격려하거나 보살펴 주었다.
상주 관장은 도저히 박 바오로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이때 그의 자식들도 굳게 신앙을 증언한 뒤에 모두 대구로 끌려갔는데, 장남인 박 안드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대구 감사는 연 3일 동안 박 바오로에게 혹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조금도 바뀌지 않자, 사형을 선고한 뒤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후 언젠가 그는 관장의 명령에 따라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박 바오로는 새로 감사가 부임한 뒤 다시 옥에서 끌려 나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령에다가 여러 차례의 형벌 때문에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에 그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는 아들과 교우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당부하였다.
“이 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그런 다음 박경화 바오로는 평온한 기색으로 자신의 영혼을 천주께 드렸으니, 그때가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5개월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자 발굴하였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경화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1792-1839년)
‘사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 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의’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박 안드레아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박 안드레아의 신앙심은 깊어져만 갔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주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이곳에서도 얼마 안 되어 그의 신심과 효성, 애긍 생활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의 가족은 고향의 재산을 버리고 온 터라 가난하였지만, 교우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모두가 이를 마다하지 않고 정성껏 대접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가 발생한 뒤, 박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상주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그믐경에 그의 가족은 교우들과 함께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다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간 박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내와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한 뒤 대구로 압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도 박 안드레아는 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내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는 차츰 쇠약해지게 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몹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관장에게 아버지를 보살펴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장은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가 옥중에서 보여준 효행은 모든 이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후로도 박 안드레아는 수많은 형벌과 옥중에서의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참아 냈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다시 한 번 배교 여부를 묻는 문초가 있었는데, 이때 임금에게 올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박사의는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익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이를 깊이 믿어 왔으므로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합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박사의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포졸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한 뒤에 예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신자들은 오랫동안 그를 특별히 공경하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사의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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