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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뜻과 주님 뜻,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인간에게도 고통은 늘 따라다닌다.
고통만큼 인간에게 친숙한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고통은 기쁨과 달리 인간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고통을 싫어하는 것은 물론
두렵게 여겨 할 수만 있으면 언제나 피하려고 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때를 따라 찾아오는 시험과 고난, 질병, 불행 등이 그러하다.
그들은 때로 인간을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두렵게 한다.
막상 시험과 고난이 닥치면 그들을 마냥 기뻐할 수 없으며
그 위급한 상황에서 주님 뜻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고통에서 얼른 건져주시기를 주께 기도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또는 피조물로서 너무나 당연한 듯 여겨진다.
더욱이 목숨과도 같이 애지중지해온 것이 위협을 받게 될 때
누구라도 그것의 안전을 위해 주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본질에 있어서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가 한량없으신 주님도
인간이 불행이나 고통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모든 준비를 다하시는 주님이시다.
설령 그 애쓰심이 인간 편의 여러 사정으로 궁극에 실패할 것을
아심에도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함께 하며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또 비록 인간이 겪는 시험과 고난이
흔히 주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원치 않으심에
마지못해 그것을 허락하시는 것이 그분의 본심이다.
게다가 인간이 그런 고통을 겪는다고 하여 그 후 그의 죄악이
개선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것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더욱 혼돈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하물며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
자신에게 닥친 시험과 고난이 너무 견디기 어려워
그것을 통해 이루시려는 주님 뜻을 도외시한 채
오직 거기서 벗어나기만을 주께 부르짖는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으로서 실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생각들은
자연적 수준의 삶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으나
보다 높은 영적 삶으로의 변화를 원한다면 바뀌어야 한다.
그 이유는 주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시험과 고난에는
영혼 구원이라는 큰 목적이 있는데 이런 영적 측면을 무시하고
자연적이고 감각적 측면의 정당성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이 그 당시에는 합리적으로 보여
신앙의 탈이 없을 것 같으나 그들을 그대로 계속 놓아두면
영의 성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과 영적인 것을 사랑하는
속사람의 뜻에 반목하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사랑하는
겉 사람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가 이르면 반드시 그들을 자신에게서 떠나보내는
아픔을 통해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시험과 고난은
그러한 걸림돌의 제거가 필요한 사람에게 때를 맞춰 찾아와
그의 겉 사람이 속사람에 복종하도록 훈련시킨다.
사실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감정은 우리를 속일 때가 많다.
인간이 시험과 고난을 당할 때
악한 영들은 육에 속한 연민의 감정을 자극하여
소위 인간적이라 칭하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따스하고 정겨운
빛 안에서 느껴지도록 만든다.
그 연민의 감정으로 인해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은
그들의 정당성을 옹호 받아 거기 영적인 빛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질서를 영적인 것 아래 제 위치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여태껏 아무런 경계 없이 그들을 향해 활짝 열려진 마음을
냉정히 닫아 잠그는 자기부정의 힘든 싸움이 필요하다.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대한 동경은 영의 일보다는 육의 일을,
속사람보다는 겉 사람을 우선하며 살 때 피할 수 없는 결과다.
인간은 영과 육 두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며 살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영보다 보고 느낄 수 있는 육을 더 자신처럼 여기며 산다.
그렇게 겉 사람이 주인 되어 사는 상태에서는
자기만족과 세상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가 되어
속사람이 추구하는 영의 일이나 주님 뜻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처럼 늘 서로 부딪치며 반목하는 속사람과 겉 사람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 출생 시부터
그들에게 마련된 주님의 섭리인 만큼
일상에 종종 겉 사람의 횡포가 나타날지라도 그것을 보며
자신에 낙심치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인으로서 영에 속한 속사람과
종으로서 육에 속한 겉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하고
주도권 다툼을 통해 겉 사람을 속사람에 종속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는 영과 육, 속사람과 겉 사람
이 둘이 서로 한 몸을 이루며 살기에 어느 하나라도 결핍이 있거나
기능을 못하면 그 영향이 다른 편에 미친다.
따라서 그 둘 모두의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둘 사이
육이 영에, 또는 겉 사람이 속사람에 복종하는
신적 질서가 확립되어 있는 경우에만 순기능의 작용을 한다.
만일 그 질서가 깨어져 있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반목할 터,
질서의 회복을 위해 육에 속한 겉 사람의 정화가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주님에게서 비롯된 생명이 천국과 속사람을 거쳐
마지막 겉 사람으로 유입하는 것이 신성한 질서이기에
겉 사람은 속사람에 종속되는 것이 그의 숙명임에도 이를 거부하고
자신이 주인 노릇하려 든다는 것이다.
물질적, 감각적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 겉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받는 속사람의 통치를 거부할 때
그에게 있는 악과 거짓들은 씻어질 수 없고
결국 그가 얻을 영원한 생명에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겉 사람이 가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은 시험과 고난을 그에게 허용하실 수밖에 없고
거기 두어진 주님 뜻,
곧 영혼 구원에 관한 목적이 이루어지기까지
겉 사람에 속한 생명은
그 행복과 안전이 제한되는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험과 고난을 당할 때
육의 생명과 한통속이 되어 있는 내 뜻을 버리고
주님 뜻을 구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은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지켜주시는 주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나온다.
그 신뢰가 깨지면 주님에 대한 온갖 부정의 생각이나 의심들이
극성을 부려도 이를 막아낼 힘이 없다.
소위 인간적이라 불리는 정겹고 따스한 감정들은
자아와 세상 사랑의 질긴 사슬로 묶여 있어서 이를 끊고 그들을
영의 생명을 중시하는 주님 뜻에 복종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25)는 주님 말씀에 분명히 대치됨에도
이미 육의 생명에 동화된 마음은 이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신성이 그 안에 내재하지 않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시험과 고난을 통해 정결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리할 때 그 사람 안의 신성한 질서가 회복되어
이제 신성이 그 안에 유입하여 역사하는 참다운 자연적인 생명,
참다운 감각적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참고 / 천비 7442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그 사람 안으로 입류한 것들은
그의 내면적인 것들에 입류한 뒤
그의 가장 낮은 차원, 즉 가장 바깥 차원으로까지 퍼져가고
거기서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감각적인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어
악과 거짓이 있는 자연적인 것의 감각적인 부분을 거듭나게 한다.
.. 자연적인 마음의 가장 바깥쪽에는 악에 속한 거짓들이 존재한다.
이들에 의해 마음의 내면적인 것들이
어떻게 점령당하게 되는지 언급하고자 한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그 사람 안으로 입류한 것들은
그의 내면적인 것들에 입류한 뒤
그의 가장 낮은 차원, 즉 가장 바깥 차원으로까지 퍼져가고
거기서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인간의 감각적인 차원으로까지 입류하고
이를 통해 육체에 속한 것들에 입류한다.
만일 이 감각적인 것이
허위나 외현(겉모습)들에서 비롯된 망상들로 가득 채워지게 되면
그때 거기 입류하는 진리들은 유사한 망상들로 변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진리들은 자신들이 유도되는 형태에 따라
그곳에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7343, 아래 참조)
또한 진리들이 거짓들로 바뀌는 만큼 그 진리들이 전달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마음의 내면적인 것들도 닫쳐져
종국에는 추론이나 거짓에 의해 악을 확증하는 능력을 부여하는데
필요한 것 외에는 열리지 않는다.
이것이 사람의 상황이기 때문에 그가 거듭날 때
그의 자연적인 것은 감각적인 차원으로까지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거듭나지 않는다면
거기 진리나 선의 수용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거기 입류하는 진리가 왜곡되고
그때 내면적인 것들은 모두 닫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면적인 것들이 거듭나게 되었을 때
사람 전체가 거듭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였다.
요 13:9-10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만 씻지 말고
내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시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씻은 자는 발밖에 씻을 것이 없으니 온 몸이 깨끗하니라.”
속뜻으로 '발'은 자연적인 것을, 씻음‘은 정화를, '손'은 자연적인 것의
내면적인 것을, 그리고 '머리'는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이미 씻은 자는 발밖에 씻을 것이 없으니
온 몸이 깨끗하니라.'는 말,
즉 자연적인 것을 형성하는 외면적인 것들까지 거듭날 때
사람이 거듭난다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의 자연적인 것들이 거듭났을 때
그 안의 모든 것은 더 내면적인 것들에 복종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면적인 것들은 자연적인 것에 입류하고
그때 그들은 저급한 수용그릇에 흘러들기 때문에
자신을 감각적인 형태로 드러내게 된다.
사람에게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신앙의 진리에 대한 애정이나 인애의 선에 속한 애정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 중 가장 낮은 감각적인 것 자체는
거듭나기가 어려운데 이는 그것이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지상적인 것들에게서 비롯된 물질적인 개념들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사람, 특히 오늘날 거듭남의 과정에 있는 사람은
감각적인 측면에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 바로 위에 있는 자연적인 측면에서만 거듭나게 된다.
사람이 신앙의 진리와 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를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자연적인 것으로 올려주신다.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올려지는 능력을 주께 부여받는다.)
(천비 5114
일반적으로 지성의 영역은
주님에게서 비롯된 천국의 빛으로 보는
속사람의 시각을 가리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영역은
겉 사람에 속한 것이다.
사람 안에는 천국의 빛 가운데 있는 지성의 영역에서부터
이 세상의 빛 가운데 있는 감각적인 것까지 내려온 것들이 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각적인 것은 인간적인 그 어떤 생명도 가질 수 없다.
사람의 감각적인 것은 천국의 빛으로 그것을 볼 때
그 안에 생명을 가진다.
‘지성의 영역은 일반적으로
주님에게서 비롯된 천국의 빛으로 보는 속사람의 시각을 가리킨다.
그 시각이 보는 모든 것들은 영적이고 천적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영역은
겉 사람에 속한 것이고
여기서는 ‘시각에 속한 감각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이것이 지성적인 것에 상응하고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 감각적인 시각은
태양에서 비롯된 세상의 빛으로 말미암아 보고
그것이 보는 모든 것들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이고 지상적이다.
사람 안에는 천국의 빛 가운데 있는 지성의 영역에서부터
이 세상의 빛 가운데 있는 감각적인 것까지 내려온 것들이 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각적인 것은 인간적인 그 어떤 생명도 가질 수 없다.
사람의 감각적인 것은
이 세상의 빛으로 보는 것에 의해서는 결코 생명을 가질 수 없고
천국의 빛으로 보는 것에 의해서는 생명을 그 안에 가진다.
이는 이 세상에 속한 빛은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천국의 빛은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천국의 빛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 빛에서 비롯된 것들 속으로 들어오면
그 빛은 그것들을 생기발랄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대상물들을 지성적으로 보게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서 생성된,
따라서 감각적인 것들을 통하여 들어온 것들에서 생성된
온갖 지식들에 의해 그는 지성과 지혜를 얻고 이로 말미암아
시민적인 삶이나 도덕적인 삶, 또는 영적인 삶을 영위한다..’ )
(참고 / 합리적 이해 창 22:1-19
거듭남을 위해 자연적 합리성에서
보다 높은 영적 합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린 시절에 발달된, 이른바
자연적인 합리성(natural rational)이라 불리는 첫 합리성은
결론을 내리기 위한 근거를 자연적인 지식 위에 두고 판단하거나
감각적인 경험 또는 사물의 외관을 근거로 판단한다.
유한한 세상에서 보다 실용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그것은 우리의 성장에 필요한 단계이고
지속되는 삶에 필요한 자질이다.
그러나 이런 능력은
거룩한 땅 안에서는 살 수 없다.
따라서 이 낮은 차원의 능력은
보다 높은 차원의 능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한편 이 보다 높은 차원의 능력이란
영적인 합리성(spiritual rational)으로 이는 주님과 영적인 것을
고려하는 합리성이며 그것이 나타날 때 외관상으로는
진리와 상반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높은 단계인 반면 그 발달은 아주 느리다는 것이 특징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는,
그의 어린 시절의 신앙을 해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인해
그가 영적인 것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판단 능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러한 시험을 느끼는 시점이 오기 마련이다.
양심이 무뎌지지 않았을 경우
이 시험에 대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만,
어떤 경우는 오히려 문제를 더 조장시키게도 되어
영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택함으로
모든 진실된 사고 작용을 해체시켜 버리는 경우도 빈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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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시험과 고난 앞에 한껏 나약해진 인간이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구원을 부르짖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시편 61: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시편 130: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77: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편 86: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때로는 들으심으로, 또 때로는 듣지 않으심으로
서로 상반되게 나타난다.
먼저 그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구절을 보면..
출 3: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민 11: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시 18: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시 107: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그러나 때로는 그의 부르짖음을 매몰차게 외면하기도 하신다.
출 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시 18:41 “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욥 27:9 “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렘 11: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때를 따라 만나게 되는 시험과 고난 중에
우리가 절대 잊지말아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내 뜻을 주께 구할지라도
그것을 들어주실 지의 결정권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기도하는 자는
고통스러운 시험과 고난을 피하고 싶은 자신의 뜻을 이겨내고
종국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주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상황이 절박한 실제 상황에서는
그리 쉽게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니다.
또 우리가 매일 드리는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구절도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이와 대등한 의미가 있다.
거기 시험에 끌린 자의 악을 수단으로 그를 지배하려는
지옥의 세력과의 치열한 싸움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 순응해서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상태에서나
마음의 진실을 실어 고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이 말씀의 의미는
아예 시험과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즉 시험에 노출되지 않거나
악한 영들에 공격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험과 고난을 만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거기 굴복하여 시험에 지게 되면 그 결과 지옥의 세력으로부터
악과 거짓들이 유입되어 선과 진리들을 몰아냄으로
마침내 우리는 시험하는 대리자,
곧 악한 영들과 한 통속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소서..’ 이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굴복당하지 않게 해주소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심으로 우리를 시험에서 구출해주소서..
라는 의미로
이는 악에 바탕을 둔 거짓 원리의 영향에서 구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브루스목사 주기도문 강해에서)
그것은 또 내면적으로는 주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마소서..
또는 신성한 능력을 거두지 마소서..
를 뜻하는 기도이기도 하다.(영계일기 2759)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마음속으로부터 여러 생각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 하나는, 절대적인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으로 종결될 기도라면
구태여 내 뜻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처음부터 내 뜻을 아뢰지 않고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다.
물론 우리 기도의 기준은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다.
그 기도에는 내 뜻을 구하는 것과 같은 내용은 아예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그 기도문의 내용에 맞춰 기도하기 위해
내 뜻이 아닌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 뜻을 구하지 말라는 식의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내 뜻을 주님께 구할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자아와 세상 사랑을 실현하고픈 욕망으로 인한 수많은 부딪침과
저항에 직면하며 거기서 오는 불안과 갈등 속에 살기에
마음은 늘 이들로부터의 안전과 평화를 갈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간적 본능이 담긴 내 뜻을
아예 강제로 제거해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 뜻은 인간이 '나' 라는 자아를 가지고 사는 한 항시 따라다닌다.
그것을 아무리 자신에게서 분리시키려 해도 그리 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때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의 뜻을 가지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자아는 천국의 천사들에게도 있고
따라서 천사들 역시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있다.
천사들은 애초에 자신의 뜻과 주님 뜻 사이 갈등이 없다.
그들은 항상 주님 뜻 안에서 살기에
내 뜻이 곧 주님 뜻 안에 있고
그로 인해 내 뜻을 구해도 그 기도는 항상 이루어진다.
반면 우리는 천사가 아닌, 천사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
당연히 상황이 위급할 때의 내 뜻은
주님 뜻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기 쉽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대체로 내 뜻과 주님 뜻이 서로 대치되어 있어
내 뜻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주님 뜻은 필히 약해지고 만다.
게다가 인간은 천사와 달리
내 뜻은 바로 눈앞에 선명한 반면 주님 뜻은 대체로 모호하기에
주님 뜻을 먼저 찾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물론 내 뜻이라고 하여 꼭 나쁜 것만 있지 않다.
주께 속한 선한 마음으로 구하는 경우도 많다는 말이다.
그럴 때의 내 뜻은 선한 것으로 주님 뜻과 일치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그것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내 뜻은 명확하지만 주님 뜻은 기도하는 자가
대개 추측할 수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한 것을 구한다고 해도 각 상황에 따라,
또 인간의 역량에 따라 역사하시는 주님 뜻은
내 뜻과 한참이나 다를 수 있다.
더욱이 주님은 인간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내 뜻을 부르짖을 때
당신이 원하지 않으심에도 자비의 차원에서
가끔은 그것을 들어주기도 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간구할 때 그 동기와 목적을 꿰뚫어 보시지만
사실 신성한 질서의 높은 잣대로만 우리를 다루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속에 무수히 악한 욕망을 지니고 사는
우리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인간의 형편을 잘 아시는 주님은
법대로만 판단하지 않으시고 거기 자비를 두시어
순수하지 못한 낮은 차원의 기도도 때로는 들어주기도 하신다.
그렇게 완급을 조절하시면서 점차 높은 차원의 질서에로 인도하신다.
이 경우 기도하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주께서 내 뜻을 이루어주셨기에
내가 구한 것을 주께서 합당하게 여겨주신 것으로 보이지만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허용하신 주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실패이기에
그 실패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주님의 뜻에 부응하지 않는 한
그때의 시험과 고난을 통한 그의 영적 진보는 없다.
훗날 그때 주께서 어찌
당신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 내 뜻을 들어주셨는지
인간은 그 이유를 혹 깨닫게 될지 모르지만
응답된 당시에는 다만 그렇게 하시는 것이 내 영적 상태를 위한
최선의 배려였다는 것만 추측할 수 있다.
평상시 우리가 주님께 어떤 것을 구할 때는
그것이 내 뜻이라는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구할 바를
주께 아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뜻이라는 인식이 일어나는 때는
대체로 상황이 심각한 가운데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할 때
과연 주께서는 그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해주실 지를 생각할 때다.
그때 내 뜻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
상대적으로 내 뜻 저 너머에
주님 뜻이라는 인식도 함께 연상하게 되어
이로부터 내 뜻과 주님 뜻 사이의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다.
말씀을 적용할 때 내 뜻과 주님 뜻 사이 갈등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로는
앞에 인용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외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라는 구절을 더할 수 있겠다.
이 말씀의 적용은 내 뜻을 단번에,
그리고 강압적으로 포기하는 것에 있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난 자발적인 동의를 거쳐 내 뜻을 점진적으로
주님 뜻에 일치시켜 가는 과정 중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에 두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결말에 이르기까지는
마음의 갈등과 힘겨운 투쟁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진리들의 가르침에 마음이 지나치게 압박을 받다보면
인간으로서 마땅히 주님께 구해도 되는 것조차
혹 아버지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로 인해
구하는 것을 꺼릴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유지를 위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조차
자유롭게 누리지 못하게 하는 금욕주의로까지 발전할 수 있어
신앙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영적인 것만을 고려하면
자연적인 것은 아예 구하지 못하게 묶일 수도 있고
이는 당연히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인간의 기본적인 삶에 필요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버지 뜻을 거스르는 이기적인 기도라 할 수 없으니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뜻을 구하는데
너무 예민하게 거부감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그 거부감이 양심의 발로로 여겨져
그것을 구하는데 망설여지기도 하나
그럼에도 주님과의 신뢰 속에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다보면
주께서 그의 상태에 맞춰진 어떤 깨우침을 주셔서
적절한 길로 인도하실 터이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육체를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도 필요상 주께 충분히 구할 수 있다.
주께 구하는 것이 그렇게 악한 것이 아니라면,
또 그것이 영적인 것을 거스르거나
자기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는 이기적인 것이 아닌 한
우리는 자신의 삶에 고통으로 찾아오는 문제꺼리의 해결이나
기본적인 삶에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주께 구할 수 있고
주님은 필요에 따라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구하는 중에
주님으로부터 여러 영적 깨우침도 받을 수 있어
그러한 기도가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때 주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가
영적인 것을 위한 수단으로 그들이 쓰임 받는데 있음을 기억하고
주께 그들을 구할 때 혹 자신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 자체만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적인 것들보다 그들을 더 우위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낮은 차원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거듭남을 위해서는 차원을 높여
영적인 것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보다 우위에 두어져야 한다.
그 결과 보다 높은 것으로 보다 낮은 것을 다스리게 하는 것,
이것이 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운용하시는
신성한 질서인 만큼 우리는 그것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
또 내 뜻과 아버지의 뜻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마음에 어떤 욕구가 일어날 때
그것이 주님 뜻에 적절한지를 살피며 자신을 겸손히
주님께 맞추어간다면
그럴 때의 내 뜻은 자아와 세상 것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해가 되기보다 오히려 영적 진보를 돕는
유익한 수단이 되어줄 것이다.
또 내 뜻을 구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주님의 지혜와 섭리를 신뢰하며 주님 뜻을 우선한다면
당장은 육적, 세상적 고통이 따를지라도
종국에는 이 세상에 비할 수 없는 천국의 기쁨과 평안이
주님 뜻 안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참고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 강해에서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그것들을 첫째 자리에 두는 것이다.
이는 주님의 진리를 모든 종류의 진리 위에,
주님의 선함을 모든 종류의 선함 위에 높이는 것이며
또 그것들이 우리의 이해성과 심정, 마음과 삶의 첫 장소에
놓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외 모든 것도 우리에게 더하여지게 된다.
이는 진리와 선에 관한 모든 수준, 모든 종류의 것들이
최상의 선과 진리에 덧붙여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올바른 질서 체계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선은 선의 근원으로부터
또는 첫 번째 되는 곳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는 첫째 되는 것보다 더 열등한 것을
포기한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풍부해진다는 것,
더 그윽한 향기로 하급의 진리를 즐기게 된다는 것을
함축해놓고 있다.
영적 수준이 자연적 수준의 것을
폐지시키는 게 아니라 거룩해지게 한다.)
(참고 / 기도의 길라잡이 중에서.. by Mrs, Gwyne Dresser Mark
.. 복음서에서 주님은 ‘구하라’는 말씀을 반복하시는데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기본 원칙이며
자유 의지의 원칙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그분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
그러나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분은 종종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명확히 밝히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 편에서 알아차리거나 바라지도 않는데
주님 편에서 돌보아주시는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의지가 거듭나는 일만큼은
우리들 편에서 주도적으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할 때 그것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무한하신 힘이 유입된다.
의지의 긴장으로 인해
몸의 장애가 생기게 되거나 그것을 해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
이러한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첫 단계다.
긴장과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데
심리학자들은 여러 해 동안 골몰했지만
아무도 아직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는
이 단순한 단어들이 제공하는 명확함에 이르지는 못했다.
(To understand tensions and all they mean
has been absorbing psychologists for years,
and none has yet achieved the clarification offered
by those simple words: "Thy will be done.”)
여기에는 중생을 향해가는 모든 영혼이 평생을 산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치유를 위해서 하는 모든 진실한 노력은
그분의 뜻에 일치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노력의 동기부여가 무엇이냐에 달렸다.
자기중심적인 탄원으로 요구를 하거나
인간이 구하는 대로 하나님은 해주셔야 한다는 태도는
성공을 가져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구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많은 경우 ‘내 이름으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격요건은 종종 간과되지만
사실 그것은 그 상황의 가장 핵심이다.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일 뿐이기에
그 자체로서는 뜻을 갖지 않지만
그러나 이름은 그것에 따르는 모든 것을 표징한다.
당신의 이름은 한 인격으로서 알려진
당신의 모든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은 우리가 닮아야 할 본래의 인격으로서 알려진
주님의 모든 것을 확인시켜준다.
따라서 단순히 구하는 것과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구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일이다.
우리들은 건강, 돈, 성공 따위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면
우리들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목적에 맞는 것에만 제한된다.
구하는 것은 실제로 여전히 돈이나 건강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을 구하는 이유가
그분의 이름으로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육체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청교도 같이 비뚤어진 생각이다.
일어날 수 있는 잘못은
우리가 구하는 것에 있지 않고 구하는 이유에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물질과 영 모두를 창조하셨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우리들이 충분히 먹고 살기 좋은 집에서 사는데도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마련해놓으신
너무도 명백한 이 육체적 존재에 의하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들은 이 육체적인 존재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질서 안에서 성공적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적 도움이 무엇이든
그것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데 사용되는 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될 수 없다.
..
그러나 주님은 또 듣기도 하신다.
주님은 그분이 부어주시는 힘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드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because He wants us to indicate
what we wish of His inflowing power.)
주님은
우리들의 의향에 개의치 않고
뭔가를 부어주시려고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들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완전한 협력이 없이 우리들을 당신 마음대로
하시지 않는다는 보증으로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요한복음 14, 15, 16장에서 주님은
우리들이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곱 번씩이나 가르치고 계신다.(14:13,14, 15:7,16, 16:23,24,26)
주님은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심에도
우리들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들의 원하는 바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특권을
우리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필요하다고 모두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런고로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들에게 필요하고, 그것을 갖는 것이 좋은 것이라면
크고 작은데 상관없이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바램들을
간청이나 애원이 아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objective) 방법으로
주님의 섭리의 영역 안으로 가져가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가 계시는 한
우리들이 주님께 의지하여 흐트러진 질서의 상태에서
고쳐주시기를 구하는데 아무것도 망설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아주 친한 동무를 찾아볼 때의 열심과 기쁨으로,
또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품고 있는 완전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모든 좋은 것은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너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님께 필요한 모든 좋은 것을 구하는데
주저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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