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주님의 섭리 안에서 드러나는 악 2
- 자연적인 삶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섭리를 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사건을 겪으며,
책을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한다.
때로는 어떤 만남을 우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건을 단순히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로 이해한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안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만남이 주님의 섭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내가 자연스러운 계기로 어떤 책을 읽게 되었다고 해서,
그 책을 통해 주님께서 내게 필요한 진리를 깨닫게 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건이 인간의 선택과 자연적인 과정에 따라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의 섭리와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시간의 표면보다 더 깊은 곳에서 질서 있게 역사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험에서는 자연적 원인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통하여 어떤 생각이 생기며,
그 생각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질서에서는
그 자연적인 과정 자체가 섭리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직접 조종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각과 판단과 선택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인간의 자연적인 활동까지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두 극단으로 빠지기 쉽다.
하나는 모든 사건을 특별한 신적 개입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섭리와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성한 섭리론은 이 둘 중 어느 한쪽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실제로 자유와 합리성이 있고,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동시에 그 자유와 합리성 자체가 주님에게서 유지되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자유를 보존하는 가운데 사람을 인도하신다.
신성한 섭리(DP)에서는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 신성한 섭리의 법이라고 설명하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그 자유의 본질적인 조건임을 거듭 강조한다. DP 71–74, 97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말은
인간의 행동을 대신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실제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그 삶을 그대로 보존하시면서,
그 안에서 더 깊은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뜻이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매우 강하게 말한다.
인간이 신성한 섭리의 작용을 직접 느끼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롭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동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신성한 섭리는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알고 인정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DP 176
이렇게 보면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일하신다.
다만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의 순서가
섭리의 전체 질서를 모두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오늘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 때문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며칠 뒤 한 문장을 읽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자.
인간의 경험에서는 각각의 사건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 전체 과정을 조금 더 깊이 바라보면,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이미 내 안에 있던 진리와 기억과 경험이 서로 연결되고,
그것들이 어느 순간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모든 일을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 섭리가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성한 섭리론에서는
주님의 섭리가 자연적 질서를 통해 작용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책을 읽다가
자신에게 필요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 책을 읽게 된 것은 자연적인 과정이다.
누군가가 그 책을 추천했을 수도 있고,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수도 있고,
그냥 집에 있던 책을 꺼냈을 수도 있다.
책을 읽는 것도 자연적인 행동이고,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인간의 기억과 사고를 통한 자연적인 정신 활동이다.
그런데 주님의 섭리는 그 자연적인 과정 자체를 사용하실 수 있다.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라고 반문한 이유는
주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것은 주님께서 책을 하늘에서 떨어뜨리시거나,
갑자기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려주셔야만 섭리가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
주님은 그 자연적인 과정 자체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면서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자유롭게 책을 선택하고 읽었다고 느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미 기억 속에 들어 있던 진리가
현재의 상황과 연결되어 새로운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다면
이것도 섭리의 작용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 질서를 넘어서는 특별한 사건을 가리킬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자연적 질서를 포함하면서
그보다 더 깊은 목적과 질서를 이루어 가는 주님의 역사다.
그렇다면 ‘주님의 섭리가 그 과정 안에서 작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일을 특별한 초자연적 사건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러하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주님의 섭리는 자연적인 질서를 깨뜨려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선택, 자연적인 사건과 환경까지도
그대로 사용하면서 더 깊은 목적을 이루어 가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는 오히려 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 자연적인 과정까지도 주님의 섭리가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
더 깊은 신앙일 수 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한 섭리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서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유를 남겨 두신 채 그 자유 안에서
악에서 멀어지고 선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묻게 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직접 통제하지 않으시면서
어떻게 그 자연적인 삶을 섭리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이 아주 중요하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행동을 대신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각과 판단과 선택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인간의 자연적인 활동까지
섭리의 질서 안에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이 원리를 실제적인 사례를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 곧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직접 통제하지 않으시면서 어떻게 그 자연적인 삶을 섭리의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의 신성한 섭리론에서
인간의 자유와 섭리를 함께 이해하는 핵심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한 가지를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 다루는 이 주제는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행동을 대신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각과 판단과 선택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인간의 자연적인 활동까지
섭리의 질서 안에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조금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원리다.
왜냐하면 인간이 실제로 자유롭게 행동하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섭리가 그 안에서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DP 에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는 것이 섭리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특히 DP 72 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이 두 능력, 곧 합리성과 자유를 통해 주님에 의해 개혁되고 거듭난다.
그리고 이 능력들이 없다면 그는 개혁되거나 거듭날 수 없다.’
그리고 DP 97 에서는 인간이 악을 생각하고 선택할 자유까지도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그 자유를 통해
사람을 악에서 멀어지게 하고 선을 심으신다고 말한다.
이것을 아주 쉽게 말하면 이렇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선한 행동을 강제로 시키신다면,
그 행동은 인간 자신의 자유로운 삶에서 나온 것이 아니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내면도 변화시키기 어렵다.
반대로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어떤 행동을 선택한다면
그 행동은 그 사람의 실제 삶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실제 삶 안에서 사람을 이끄실 수 있다.
즉,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의 자유를 없애야 섭리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기 때문에 섭리가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핵심이다.
그러면 자연적인 사건은 어떻게 섭리의 통로가 되는가?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했다고 느꼈다고 하자.
자연적인 차원에서는 아주 평범한 사건이다.
상대방이 말을 조금 무뚝뚝하게 했고, 나는 그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였고,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모두 자연적인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이미 몇 년 전에 읽었던 진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자 한다.’
당시에는 그냥 좋은 신앙 지식으로 읽었다. 특별한 감동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직장에서 무시당했다고 느끼면서 갑자기 그 문장이 떠올랐다.
‘잠깐만..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 이유가
정말 저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만일까?’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니 이런 것이 보인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원하고 있었구나.’
조금 더 들어가니, ‘내가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구나.’
그리고 더 깊이 보니,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낮아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화를 내도록 조종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저 스스로 자유롭게 화를 냈다.
상대방도 자기 판단에 따라 말을 했다.
그 사건 자체에도 자연적인 원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
이미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던 진리가 작동하도록 하실 수 있다.
그러면 자연적인 사건은 그대로 자연적인 사건인데,
동시에 그 사람의 거듭남을 위해 사용되는 사건이 된다.
이것이 ‘자연적인 과정이 섭리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점이 있다
주님께서 그 사건을 이용하신다고 해서 그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주님께서 직접 조종하셨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실제로 무례하게 말했다고 하자.
그 사람의 무례함까지 주님께서 ‘너는 지금 이 사람에게 무례하게 말해라.’
라고 시키셨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긴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에게는 실제 자유가 있고,
그 자유에서 나온 생각과 행동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발생한 자연적, 인간적 사건의 결과까지도
사람의 영적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사건의 모든 원인을 주님이 직접 일으키셨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 사건을 섭리 안에서 사용하신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이것을 구별해야 인간의 자유도 보존되고 섭리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연히 만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조금 더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다고 하자.
자연적인 설명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 사람이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갔고 나도 그곳에 갔기 때문에 만났다.
그것을 굳이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년 전에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하자.
친구가 무심코 이런 말을 한다.
‘너 예전에도 사람들이 네 의견에 반대하면 굉장히 힘들어했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이상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생각하다가,
‘그런데 나는 지금도 똑같네.’ 라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서도 친구와의 만남 자체는 자연적인 사건이다.
그 친구가 특별히 주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그 친구 자신이 알 필요도 없다.
그 친구는 자기 생각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자유로운 인간의 행동과 자연적인 만남을 통해
그 사람에게 이미 주어진 진리가 자기 삶을 비추도록 하실 수 있다.
스베덴보리가 DP 201 에서 아주 강하게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신성한 섭리는 자연의 가장 개별적인 것들과 인간의 분별과 판단의
가장 개별적인 것들 안에 있으며, 그것들로부터 보편적인 것이 된다. DP 201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분별과 판단은 신중함,
즉 단순히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선택하며,
어떤 방법을 취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활동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이 문맥에서는 더 자연스럽다.)
이 문장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문제와 상당히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주님의 섭리가 자연적인 사건을 없애고
그 자리에 초자연적인 사건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인간의 구체적인 판단과 선택이 실제로 존재하는
바로 그 자리까지 섭리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각’도 섭리의 통로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 오히려 이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기도를 했다.
‘주님, 제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하늘에서 답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앉아서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떠올리고, 과거의 경험을 생각하고,
성경 말씀을 기억하고, 전에 읽었던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문득, ‘아, 내가 지금 너무 내 이익만 보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인간의 경험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자기 생각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자기가 생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의 섭리와 모순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DP 174–175의 논리는
인간이 자기 분별과 판단으로 살아가는 외적인 영역과
주님께서 그보다 깊은 곳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함께 설명한다.
특히 그곳에서 그는 주님의 역사 자체는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 결과와 그 결과에서 비롯되는 원인들은
외적인 것들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외적인 것 안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상당히 깊은 이야기이다.
주님께서 인간의 생각을 대신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합리성과 자유 자체가
주님에게서 비롯되고, 이미 주어진 진리와 기억과 경험이 현재의 상황에서
연결되는 과정도 섭리 안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정말로
‘내가 생각해서 알았다.’ 라고 느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가 사라진다.
그러면서 신앙의 더 깊은 차원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생각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된
모든 과정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었구나.’
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섭리가 통로로 사용한다.’는 말을 아주 조심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 부분은 우리가 글을 쓸 때도 아주 주의해서 표현해야 한다.
‘주님께서 자연적인 사건을 조종해서 인간을 특정 결과로 몰아가신다.’
라고 말하면 너무 강하다.
그보다는,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자연적인 질서를 보존하시면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생각과 경험을
사람의 영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면서 섭리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섭리를 이루시기 때문이다.
DP 71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서로 구별되며,
사람이 생각한 것을 반드시 말하거나 의지한 것을
반드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생각과 의지가 자연적인 행동으로 넘어가는 데에는
인간의 결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삶을 직접 조종하신다면
이런 자유의 구조 자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구조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섭리의 통로’라는 것은 파이프 같은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을 잘못 이해하면,
인간은 파이프이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무엇인가를
흘러 보내신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인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살아 있는 주체다.
그러므로 섭리의 통로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유를 잃은 채
주님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각과 판단과 경험에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
그 과정 전체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책을 읽는 것도 내가 선택한 일이다.
그 책의 내용을 생각하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다.
어떤 문장이 마음에 남는 것도 내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중에 그 문장을 떠올리는 것도 내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삶에 적용해 보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이 주님의 섭리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런 인간적인 과정 안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앞서의 언급이 훨씬 정확해진다.
즉,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억지로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사건을 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자연적인 질서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더 깊은 섭리의 질서를 함께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유의지와 섭리를 어느 한쪽으로 희생시키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하되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문제와 정확히 연결된다.
사람은 실제로 자기 삶을 살아간다.
주님께서는 그 삶을 직접 조정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그 삶보다 더 깊은 곳에서, 사람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삶의 여러 요소를 서로 연결하시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내가 했다’와
‘주님께서 이끄셨다(인도하셨다)’는 두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는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섭리와 인간의 자유가 모두 보존된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아름다운 결론 하나가 나온다.
내가 오늘 우연히 만난 사람, 우연히 읽은 문장, 갑자기 떠오른 생각,
뜻밖의 사건을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연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섭리에서 제외할 필요도 없다.
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그대로 존재하면서,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주님의 섭리 안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질수록
‘이 일이 주님께서 직접 일으키신 특별한 사건인가?’ 라며
그것에 특수성을 부여하기보다, ‘이 평범하고 자연적인 일이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선과 진리를 일깨우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오히려 더 건강한 신앙의 태도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섭리를 시간의 표면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질서에서 바라본다는 말의 실제적인 의미다.
- 거듭남에서 질서상의 ‘먼저’와 경험상의 ‘먼저’를 구별하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설명을 읽다 보면 특히 혼란스러운 것이,
어떤 곳에서는 ‘먼저 이해가 개혁되고 그 다음 의지가 새로워진다.’고 말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면서
점차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는 것처럼 말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단순한 시간표로 읽으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정리한 ‘질서상의 먼저’와
‘경험상, 시간상의 먼저’의 구별을 적용하면 상당히 선명해진다.
거듭남에서 ‘먼저’는 무엇을 뜻하는가..
스베덴보리는 TCR 에서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첫째로 개혁은 이해력에 관계하고, 둘째로 거듭남은 의지와
그로부터 이해력에 관계한다고 구별한다.
또 속사람이 먼저 개혁되고 그것을 통해 겉 사람이 개혁된다고 설명한다.
TCR 587–595
이것을 시간표처럼 읽으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먼저 이해력이 완전히 바뀌고
그 다음 의지가 바뀌고 마지막에 행동이 바뀐다.’
하지만 실제 거듭남의 경험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사람은 진리를 알면서도 악을 행하고, 악을 행하면서 자기 악을 깨닫고,
그 악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전에 알던 진리를 새롭게 이해하기도 한다.
또 어떤 진리는 처음에는 단순한 지식으로 들어왔지만
훗날 실제 삶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해가 먼저’라는 말은 반드시
시간적으로 먼저 완성된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가 새롭게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그 과정의 근거가 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거듭남의 실제 경험에서는 순서가 겹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자기 사랑에 관한 진리를 처음 배웠다고 해보자.
그때는 ‘자기 사랑은 악이다.’ 라고 이해할 뿐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끼면서 화를 낸다.
그 순간 이전에 배웠던 진리가 떠오른다.
‘내가 지금 화내는 이유가 단순히 상대방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인정받고 싶어 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이미 알고 있던 진리가 현재의 악을 보는 빛이 된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악을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다시 그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나는 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러다 더 깊은 자기 사랑을 보게 된다.
이때는 무엇이 먼저였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진리가 악을 보게 했다고도 할 수 있고,
악이 드러났기 때문에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시간적인 경험에서는 서로 앞뒤로 움직이지만,
영적 질서에서는 선과 진리, 의지와 이해, 악의 인식과 거부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듭남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나 행동 교정으로
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듭남은 결국 선과 진리의 결합, 곧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DP 85 에서도 주님께서 사람을 개혁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인간의 합리성과 자유를 통해서이며,
인간은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처럼 경험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거듭남의 단계’를
너무 직선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설명할 때
잉태되고, 태중에 있고,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 비유하기도 한다.
TCR 583–586 에서도 거듭남은
자연적인 출생과 유사한 질서를 따른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적 생명이
1단계가 완전히 끝나야 2단계로 넘어가고,
2단계가 끝나야 3단계로 넘어간다는 식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이의 성장에서도 이미 생겨난 기관들이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체가 함께 성장한다. 거듭남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진리가 자라면서 악을 더 깊이 보게 되고,
악을 거부하면서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이해가 다시
의지의 방향을 바꾸며,
변화된 의지가 다시 삶 속의 새로운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질서의 방향은 분명하지만, 시간적 경험은 서로 얽혀 있다.
이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같은 악을 여러 번 보는 것’과도 연결된다.
처음 자기 사랑을 진리로 배웠을 때는 단순히 지식일 수 있다.
그 다음 실제 사건에서 그것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본다.
그 다음에는 그 자기 사랑의 동기를 본다.
더 나아가 그 자기 사랑이
자기 우월감이나 인정받고 싶은 사랑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본다.
그러면 같은 악을 여러 번 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동일한 악의
생명적 구조가 점점 더 깊은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인간이 자기 내면을 더 깊이 분석한 결과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기억하고 비교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인간의 이해 활동을 통해 이미 주어진 진리가 새로운 빛을
내도록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적 관점에 더 가깝다.
그래서 거듭남에서는 다음 두 문장이 동시에 참일 수 있다.
‘내가 더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께서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진리를 새로운 상황에서
사용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것을 깨달았다.’
이 둘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이해 활동이 주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결국 거듭남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순서의 도식화’다.
스베덴보리의 문장에서 ‘먼저’, ‘그 다음’, ‘원인’, ‘결과’,
‘내적인 것’, ‘외적인 것’이라는 표현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곧바로
시간적인 단계로 바꾸어 버리면 안 된다.
거듭남에서는 특히 그렇다.
질서 상으로는 진리가 이해를 밝히고, 이해는 의지의 방향을 분별하게 하며,
선한 의지는 삶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경험상으로는 행동을 통해 그 속의 자기 마음을 발견하고,
그 발견을 통해 진리를 새롭게 이해하며,
그 진리가 다시 의지를 변화시키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
그래서 거듭남은 직선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이해와 의지를 통해
점점 더 깊은 삶으로 내려가면서, 그 과정에서 이미 존재하던 악을
드러내고 제거하며 다시 더 깊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 관점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모든 주제를 하나로 연결해 준다.
‘왜 주님께서 모든 악을 한꺼번에 보여 주시지 않는가?’
그 이유는 사람에게 필요한 진리와 생명이
그 악을 다룰 수 있는 정도로 깊어지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왜 이미 알고 있던 진리가 어느 날 갑자기 살아나는가?
그 이유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진리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진리가
새로운 삶의 상황에서 새로운 기능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분석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인간의 합리성과 자유를 제거하고
대신 생각해 주시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왜 인간의 분석만으로 거듭남을 설명할 수 없는가?
그 이유는 인간의 생각과 이해를 살리고,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게 하시는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질서상의 우선성과 시간상의 우선성은
다를 수 있다.’는 원칙이 거듭남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독해 요령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서로 다른 차원의 질서 자체와 연결된다.
그는 DLW 185 에서 ‘이전의 것, 이후의 것, 최종적인 것’을
목적, 원인, 결과와 같은 관계로 설명하면서,
이것들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래서 앞으로 거듭남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읽을 때는
‘무엇이 먼저인가?’라고만 살피지 말고
‘무엇이 무엇의 근거로서 먼저인가?’라고 살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렇게 읽으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던 많은 문장들이 사실은
서로 다른 관점의 ‘먼저’를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바로 이 구별이,
지금 계속 붙잡고 있는 주제, 곧 ‘인간은 스스로 행동해야 하지만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라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