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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고향 (내 사랑 목포) | |
번호 : 28587 글쓴이 : 베로니까 |
조회 : 138 스크랩 : 0 날짜 : 2005.12.11 0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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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고향 (故鄕) 박 혜경 (국제 펜클럽 회원) 04th.Mar. 2002 일자 Column (한인신문 UK) 은빛을 뿌린 듯한 진해 거리에 왔습니다. 사람들은 아침해가 몰고 온 향기로운 바람 속으로 철갑의 언어에 둘러싸인 채 길을 잃습니다. 한번쯤은 무덤의 양지에 앉아 영혼을 말릴 수 있었을까. ........................ 나뭇결을 파고드는 나사못처럼 껍질을 떠나 부활을 꿈꿉니다. (벚꽃 거리. 박 유미 (예술세계 2001.10.) ) 런던에서의 첫 생활이 시작될 때 사실 나는 이 곳이 외국이기는 하지만 낯설다는 느낌은 받질 못했었다. 그 당시 젊은 피로 가득한 남편이 주말이면 생기 넘치는 어린 아들과 ‘좀 자볼까’ 이러고 있는 나를 데리고 정말 열심히 시내외로 관광을 시켜 주었는데 남편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대부분 파아란 물가였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포츠머쓰, 본머쓰, 템즈 강 주변, 리즈 카슬.... 또한 섬나라이니 가는 곳마다 당연히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청소년기를 목포에서 자란 나는 항상 느끼던 바람 또한 낯익어서 일단 런던이 낯선 곳이란 생각이 들질 않았었다.
더군다나 영국에 와서 첫 생활을 브로클리 (동쪽) 라는 곳에서 했는데 영국에 도착한지 며칠 안되어 나갔던 영국교회에서 대절 버스를 타고 간 여름 캠프도 Broadstairs라는 은모래 사장이 있는 남쪽의 따뜻한 바닷가였다.
오늘은 조금 용기를 내어 소년기를 보내었던 나의 옛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며, 여러분 모두의 고향으로 함께 봄 마실을 떠나보았으면 한다.
아버지는 교직과 사업을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는데 어린 나의 눈에도 아버지의 사업은 잘되는 것 같질 않았다. 그래서 사업에 실패하실 때마다 교직으로 돌아가시는 것으로 어린 내 눈에 비쳐졌다. 어찌 생각하면 일본에서 공장장을 하신 아버지가 사업 풍토가 다른 한국에 잘 적응하지 못하신 것이 너무 이상주의자였었기 때문인지, 아버지의 말씀대로 일본은 정직한 사람을 밀어주는 사회인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내가 그 때 너무 어렸으니 지금 무어라 단언하여 무엇이 맞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다.
하지만 어머니와 자녀들은 아버지의 심경의 변화에 따라 이삿짐을 꾸려야 했을 것이다. 광산군 陽村(양촌)(지금은 광주)에서 태어난 나는 곧 光州로 이사하신 부모님을 따라, 그리고 내가 네 살 되던 해 다시 木浦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아버지는 용당교 (다리)근처에 집을 얻으셨다.
이사한 지 몇 달도 안되어 지나가는 떠돌이 스님이 집에 들어와서 내 관상을 보더니 ‘아이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있으니 막으려면 용당橋 아래 굴속에서 치성을 드리고 음식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오라’라는 경고를 하여 설마라고 생각하시면서도, 딸을 살리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신 어머니와 어두운 굴안에 들어갔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하지만 운명을 막을 수는 없었는지 어머니로부터 금족령을 받은 나는 이불 호청 꿰매는 어머니가 방심한 사이에 떡집에 가자고 찾아 온 친구를 따라 같은 골목 끝에 있는 떡집에 들어섰고, 들어서자마자 술취한 운전사에 의해 용당교에서부터 구른 트럭바퀴에 오른쪽 발등을 받히었다. (같이 간 친구는 가슴을 다쳤다.)
P 내과에서 오른발을 자르려고 메스를 가져오자 임신 구개월인 어머니가 실신을 하시며 한 곳만 더 들리자 하여 ㅊ피부과에 갔다가 힘줄 하나가 이을 수 있게 남아 있다고 하여 평범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우리 식구는 차가 다니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木浦商高 앞의 초가집들에 둘러싸인 동네의 유일한 하지만 아주 오래된 기와집이었다. 아버지는 학교에 나가시며 장공장을 하시었다. 여섯 살인 나는 루비라는 토종개를 앞세우고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직공이 태워 주는 자전거로 바로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설운동장을 휘휘 돌며 보리가 익어 가는 냄새를 맡으며 상쾌한 아침을 맡곤 했었다.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안된 여자아이들은 봄이 되면 모두 세발나물을 뜯으러 먼 산밭으로 바구니를 끼고 나가는데 어머니는 내가 사고를 당했기 때문인지 그저 집안에만 있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꼭 한 번 골목대장인 작은오빠를 따라가 (오빠 친구들은 여자를 끼우면 안된다고 역시 반대했다.) 오빠의 졸개들이 구운 개구리 뒷다리를 대장의 여동생으로 당당하게 나누어 먹던 기억 역시 생생하다.
또 아직도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 몰래 뒷집에 놀러 간 추억이다. 친구의 권유로 친구 집에 들어섰는데 친구 아버지가 “우리집에는 먹을 것이 없구나. 이것이라도 먹어“ 하고 주신 것은 작은 그릇에 담긴 물김치였다. 그 때 그 친구 아버지가 내게 주신 물김치의 추억은 지금도 가끔 내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그리고 해질녘이 되자 어머니 눈을 피해 저녁을 먹고도 아직 환한 시각이어서 동네 아이들이 모이는 공설 운동장 한 켠의 보리밭으로 갔었다. 지금 생각해도 하얗고 긴 얼굴에 긴 머리, 열댓살로 보이던 그녀는 동네 조무래기들을 모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고, 처음 찾아 간 내가 그녀 앞에 다가가 앉자 잘 익은 보리를 부벼서 내 손에 얹어 주었다. 그녀의 두 손은 여덟 손가락 다 중간 부분부터가 없어져 오무라져 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도둑이 들어와서 자신의 손가락을 모두 뽑아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천사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어둑해져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어느새 아셨는지 그 여자아이는 절대 만나서는 안된다고만 하시고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다. 아직 보리들을 추수도 하지 않은 초여름의 어느 날, 그녀 가족은 아무도 모르게 밤이사를 가버렸고, 소문에 그 가족은 문둥병 환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보니 원폭환자라던 동네 난장이 정육점 아저씨는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전염병에 걸린 우리집 루비가 공설 운동장을 수 십 번 돌다 죽고 말아서 작은 오빠는 공설 운동장 후미진 곳에 ‘루비 이 곳에 잠들다.’라고 비석까지 만들어 주고 나와 동생도 루비 무덤 앞에서 기도를 하였었는데 동네의 난장이 정육점 주인이 무덤을 파고 우리 개를 구탕을 하여 팔았다고 하여 한 번도 남을 탓하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자식들 꿈을 망가뜨렸다고 개 값을 받으시던 것도 생각이 난다.
언제나 심심하던 나는 단맛나는 삐비를 뽑으러 친구들과 상고 뒷담쪽 가파른 언덕을 자주 올라갔었다. 그 때마다 한 쪽을 나무다리를 한 수위 아저씨가 담 안 쪽에서 올라오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그 스릴을 느끼고 싶어서였던지 그 언덕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곤 하였다.
새벽이면 우리 가족은 가끔 그 학교 운동장에서 연식 정구를 치곤 하였었다. 한 번은 그 학교 안에 들어가 벚꽃나무 아래 혼자 서 있었는데 공을 차다 모인 조무래기들 앞에서 연설을 하시던 젊은 국회의원(김대통령)이 어린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하던 것도 인상깊게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부터 나는 고향에 불만을 갖게 되었었다. 그것은 꽤 단순한 이유였다. 봄 비, 여름 장마, 겨울 눈 언제나 노랗게 화장을 해야 했던 나의 흰 운동화 때문이었다. 등교길이었던 목고 앞 도로는 십 년이 넘도록 포장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비만 오면 황토가 질척거리는 이 도시, 사람들이 자주 바뀌는 맛배기도시라고 他地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는 이 도시, 언제나 바람만 심하게 불지 도무지 움직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停滯(정체)된 이 도시를 꼭 떠나리라’ 그렇게 다짐하였다.
유달산 기슭에 어린 詩와 추억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해질녘 비틀비틀 물지게를 지고 가던 삼학도 어떤 여인의 뒷모습이 내 마음의 끝자락을 붙잡기는 하지만, 남농이 그려주신 소나무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라도, 살아 움직이는 어떤 미지의 세계로 그저 나는 떠나고만 싶었다.
그런데 런던의 바람에서 고향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 안쪽이 따스해지며, 초등학교 시절 일요일이면 혼자 들어서던 교실 창가로 솔솔 건네지던 그 짠 바다 내음새가, 혹시라도 느껴질까 런던 북쪽의 어느 창가에서 기대하였다가 실망하곤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몇 년 前 된장,풋고추 얹어 깻잎에 싸서 운저리 먹던, 어느 때건 싱싱한 생선, 그리고 산낙지를 먹을 수 있던 (나는 어쩔 수 없는 식도락가이다.) 풍성한 인심의 고향이 그리워 친구의 튼튼한 갤로퍼를 타고 고향에 갔었다. 이제는 그 황토 길도 찾을 수 없었고, 커다란 공단만 도시 주변에 들어 서 있었다. 안락한 갤로퍼 안에서 바람을 맞지 않아도 되었고, 도시가 반듯해졌으니 신발이 젖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단정한 횟집들 안에서 거나한 식사를 하였는데도, 남편과 친구들이 대작하는 한가운데에 앉아 나는 그저 마음이 휑하니 비어 와서 외롭기만 하였다.
등교 때마다 질척거리던 황토길이 눈에 아른거려, 잘 구운 개구리 뒷다리 한 쪽 눈치 보며 먹었던 그 산그늘이 너무 그리워, 갑자기 그 좋던 식성도 잊어버리고, 아나고회 대신 그리움만 질겅이다가 고향을 떠나왔다. 산행 잘 다녀 오세요.................. 박 혜경 드림. 2003년 3월 호 목포나그네 문집에도 실려 있습니다. 10.12.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