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조명____오민석
오민석 시인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으며 1990년 월간 『한길문학』(시),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문학평론)로 등단했다. 시집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론서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시 에세이 『아침 시 :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등이 있다.
∥시인이 뽑은 대표시____
하산의 평화 외 4편
세석평전 지나 빗점골 내려오니 붉은 총탄이 황혼처럼 쏟아진다 산에서 버림받은 한 사내가 흑백사진으로 푹, 쓰러진다 19번 국도연변 섹스공장에서 풍선 터지는 소리 들리고, 지리산 역사관엔 배불뚝이 토벌대장이 체포된 파르티잔들을 바라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하동 가는 길 섬진강가에 널브러진 벚나무들, 벌 떼처럼 쏟아지던 꽃의 계절을 잊었나 수족관에 갇힌 은어 떼, 배를 하얗게 드러낸 강가 모래톱을 향해 날아간다 마지막까지 산을 지키던 여자는 보급투쟁 나가고, 화개장터의 박쥐들 검은 봉지에 우엉, 더덕, 풀빵, 도토리묵 사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산에서 내려온 등산복들이 그 뒤를 따르니 토벌의 하루가 또 지난 게다
그대 눈물이 흐르면
그대 눈물이 흐르면
정선에서 기차를 타고
동해로 가라
그대의 죄는
지상 어디에도 없는
나라를 꿈꾼 것
그대 눈물이 흐르면
청진항의 눈발을 뚫고
시베리아로 갈 일이다
그대의 죄는
사랑을 잃고
다시 찾지 않은 것
거기 눈 내리는 벌판에서
카츄사에게 거절당한 네흘류도프처럼
반나절을 더 울 일이다
그대 눈물이 흐르면
사라진 피맛골의 해장국집을 찾지 말고
와사등 흔들리던 목포 항구로 가라
그대의 죄는
사람들의 양심을 아프게 찌른 것
목포에서 제주도까지
이제는 사라진 옛 페리호를 타고
열두 시간을 먼 바다에서 떠돌 일이다
그래도 눈물이 흐르면
돌아오라 탕자처럼 돌아오라
그대의 죄는
늘 불가능을 꿈꾼 것
돌아와 더 이상 나갈 곳 없는 유배의 삶을 살라
이곳은 눈물마저 유배시키는 겨울의 나라
그러나 이 겨울강의 어디쯤에서
눈발 그치고 그쳐
슬픈 그대
마침내 닻을 내리리
나의 로자
밤이 깊을 게다 밤이 깊고
나는 당신에게 전화를 걸 게다
당신은 통화중이고
나는 끝없이 다이얼을 돌릴 게다
밤의 잎새들을 세며
풀의 칼날에 베인 상처들을 생각할 것이다
저물녘에 시작된 물수제비가 밤 이슥하도록
호수 위를 퐁 퐁 퐁 달릴 때에도
당신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달의 여자도 아니므로
늑대처럼 울지도 않을 것이다
꽃들이 수증기 같은 향으로 늪을 적실 때에도
나는 오직 새벽을 두려워할 게다
당신이 부재한 새벽을 원치 않으므로
나는 계속 내 심장의 다이얼을 돌리며
꽃잎이 피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하여 붉은 음표는
가로등처럼 나의 밤을 지킬 것이다
꽃 속의 그대
나의 로자여
낙동강 가에서 울다
낙동강 가 두리원 웨딩홀에서 네가 혼례를 올리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유엔군 F6F 헬캣 전투기가 강의 북쪽을 때릴 뿐, 지옥의 고양이들은 자갈치 시장에서 썩은 생선을 뜯어 먹고 있을 뿐이었다 더러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이 예식장 5층 뷔페에서 초밥을 먹고 있는 동안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기관총이 강의 가슴을 갈길 때 우리들은 강변 축구장에서 초록의 공을 찼다 제천에서 내려오는 단풍이 영주의 사과를 붉게 물들이는 그 오후의 세시 반에 이쪽과 저쪽의 청춘 이백오십칠 명이 세상과 하직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안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선 버스들이 연착했다 우리는 네 시 십 분 차표를 여섯시 삼십 분 차로 바꾸고 터미널 식당에서 아무 일도 없는 오후에 낮술을 마셨다 안동 고등어들이 날개를 달고 바다로 달아나고 있었다 낙동강에 어느덧 노을이 질 때 폭죽의 총탄이 쏟아졌다 아, 대한민국 만세, 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일곱 개의 절망의 노래
*
그러니까 교동슈퍼를 돌아 나오면서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든 세상이 알 바 아니다. 당신이 두부 두 모와 막걸리 두 통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휘적휘적 현대홈타운 아파트로 올라올 때 아무도 당신의 비애를 눈치 채지 못했을 테니까,
**
...................................................................................................................
**
***
어제 미스 조(23)와 광란의 밤을 보낸 김전무(57)는 아직도 얼얼한 생애가 얼얼하게 좋다. 오늘밤엔 가족들과 종로빈대떡집으로 외식이나 가야겠다, 고 생각한다.
****
길냥이들 때문에 온 세상이 쓸쓸하다니까. 집도 없는 짐승들이 배고
픈 지구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을 봐.
*****
대통령 취임 경축음악회에 가서 아리랑을 부른 OOO를 위해 묵념. 맥락을 뛰어넘는 그의 목소리를 경배하라.
******
너무 자주 우니까 마누라도 애들도 웃는다.
*******
홍매화 지는 강가에서 당신을 기다릴게. 날 그림자처럼 잊어줘. 당신을 쫓아다닐 거야.
∥시인의 최근 신작시___
유령 외 4편
새 떼들 불 탄 쓰레기처럼
서녘 하늘로 점점이 사라지는 저녁
그 적막한 지평선에서
마침내 종소리 울리면
너희는 가거라
돌아오지 말지어니
유령의 세월을 세월이라 하지 마라
삶은 온통 빛나고 아름다운 색깔들
검고 흰 것을 인생이라 하지 마라
붉은 해바라기와
노란 태양의 저 뜨거운 교신
(느끼지 못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지)
푸른 하늘이
초록 강물이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혈관이 있기 때문
푸르고 푸른 혈관이 내 혈관과 내통하기 때문
죽음 없는 삶을 삶이라 하지 마라
모든 살아있는 것은
연민과 번민의 섬들
그 심장 언제 멈출지라도
헛된 유령의 세월은 사라져다오
오, 우리 몸을 흔드는 고통의 환희여
허튼 사랑을 붙잡지 마라
길 떠나다오
유령이여
푸른 연기의 세월
*
잠 안 오는 밤
페이스북 들어가니 나처럼
잠 못 이루는 중생들 여럿 있다
내 서재에는 온통 죽은 시인들
네루다, 김종삼, 말라르메, 김관식, 베를레엔느
엘뤼아르, 로르까, 신동엽, 백석, 발레리, 김남주,
들과 떠들썩하게 한 잔하는 밤
파이프에 담배 가득 채우고 시 쓰는 밤
1885년 11월 16일 월요일
퐁텐느불로 숲길을 거닐던 연인들은 다 어디로 갔나
아폴리네르는 왜 그의 시에서
구두점을 모두 버렸을까
마리 로랑생 때문일까
그러나 그의 사랑은 미라보 다리를 건너
마들렌느에게로 이사갔다
**
석탄불 꺼질 무렵의
유목민 헤밍웨이의 지친 얼굴
킬리만자로의 흰 바람
***
절대 노인이 되지 않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지킨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
그는 예순 살이 되자 스스로 생을 마감했잖아, 견딜 수 없었던 거야
그러면 끝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만일 그게 끝이 아니라면?
말하자면 그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사는 게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지
이제 곧 춥고 따뜻한 겨울이 올 것이다
푸른 연기의 세월이
또 지나간다
나 이렇게
잠 못 이루니
시간의 기차여
천천히 가자
남회귀선
남들에게 다 보이는 봄꽃들이 내게는 안 보인다 그 많던 애인들은 다 어디로 갔나 아직도 캄캄한 나의 푸른 정거장에서, 두 번째 부인과 헤어진 헨리 밀러가 자궁에 관한 소설을 구상중이고 멀리 고흥 바닷가에 홀로 사는 시인은 이 봄날에 우울의 돛배를 띄우고 있다 남회귀선에 홀로 떠가는 목련 등불이 환하게 질 무렵 지친 짐승처럼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저녁이 되면 강풍을 동반한 봄비가 또 내릴 것이다 수도원에도 그늘이 깊다
고양이와 롤랑 바르트
봄비 내리고 내리고
내리는 한밤중
고양이 한 마리 목놓아 운다
너도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구나
저자의 죽음을 선고하고 마침내 실물의 빨랫차에 깔려죽은 롤랑 바르트를 읽다보면 몸에서 무언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한글판 위키백과에는 그가 동성애자였으며 미셸 푸코의 연인이었다고 적혀 있다 가난한 꽃잎들과 갓태어난 잎새들이 봄비 속에 둥둥 떠간다 저 고양이는 마누라를 죽이고 정신병동에 갇혔던 알튀세의 후예인지도 모르지 그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책을 썼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하여 연구하지 말고 돈 벌 궁리나 하라는 어머니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봄이 가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의 딸을 때 묻지 않은 지도자라고 극구 칭찬한 뉴욕 타임즈는 현실이다 고양이는 이 밤중에 또 어떤 암흑을 찾아 헤매일까
남 몰래 흐르는 눈물
도니체티의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들으면 눈물이 0.00003밀리리터쯤 고이다 물러간다 엊그제 상갓집에 가서 나는 0.0002리터의 눈물을 흘린 후 화장실에 가서 무려 0.5리터의 소변을 보았다 나이 오십 중반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충식이(580914-1x2&672) 놈이 파삭 삭은 몰골로 0.00025리터의 눈물을 흘리는 꼴을 보기 싫어서였다 집에 돌아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를 보다가 나는 그만 흑백의 눈물을 0.0005리터나 흘리고 말았다 학교를 땡땡이 치고 어머니가 죽었다고 구라를 친 앙투안 때문이었다 내가 그동안 친 구라는 앙투안의 이천구백이십팔 배는 될 것이다 나는 결국 영화를 보다 말고 상록슈퍼에까지 기어올라가 기어코 막걸리 세 병을 사오고 말았는데 내가 피는 에세 0.1의 니코틴 함량은 0.01밀리그램이었다 같은 시각 바리톤 박걸창은 연극 “진숙아 사랑한다”를 본 후 혼자 0.7리터의 순댓국에 참이슬 340밀리리터를 시켜놓고 돈암시장에서 히벌쭉 웃고 있었던 것이다 개연꽃도 다 진 세상에 뭐 볼 것 있다고 시인 백석은 지금쯤 시래깃국을 끓이고 있을 것이다 순댓국에 깊이 박힌 숟가락도 지금쯤 의사 박성흠이 어디쯤 잠수를 타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내가 남 몰래 0. 00003밀리리터의 눈물을 흘린들 개똥지빠귀 한 마리 울지 않을 것이다 밤이 깊으니 내 비애도 잦아들어 나는 오늘밤 딱 0. 000005밀리리터의 눈물만 지상에 쏟을 것이다 푸른 정거장에 별똥별 진다
∥오민석 시인의 체험적 시론____
지뢰밭과 번개, 시가 오는 소리
가을비 내리고 찬바람에 나무이파리들이 추적추적 떨어진다. 푸른 도관이 말라 가벼워질 때, 나무는 이미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파리들아, 나의 손들아, 나의 발들아, 푸르렀던 음표들아, 잘 가. 나무들은 대지 위에 붉고 노란 이파리들을 즐겁게 뿌린다. 지는 이파리들이 저토록 명랑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다음 계절의 꽃을 예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결핍의 순간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온다. 그것은 다음 계절을 예기하지 않는다. 마지막인 현재는 얼마나 가난한가. 그리하여 위기가 영혼의 혈관에 스며들 때, 더 갈 곳이 없을 때, 정신이 지뢰밭 위에서 폭발 직전일 때, “시가 내게로 왔다”(파블로 네루다).
시는 주체와 세계의 결핍을 민감하게 지각한다. 모두가 괜찮다, 괜찮다, 고 이야기할 때, 시는 “괜찮다”의 거짓됨을 읽어내고, 주체와 세계의 거덜 난 민낯을 목도한다. 추한 나여, 기만과 나태와 모순의 덩어리여. 그리고 세계는 얼마나 가혹한가. 시스템의 로봇들이 저기, 즐비하구나. 그리하여 시의 자궁은 고통이다. 시는 결핍에 대한 자각과 그로 인한 고통의 연옥에서 잉태된다. 주체들은 바로 그 결핍 때문에 무의적으로 타자를 향해 있다. 무수한 결핍의 주체들이 타자를 찾을 때, 거기에 ‘사회적’ 세계가 생겨난다. 시인의 시선은 이렇게 하여 개체에서 타자로, 타자에서 세계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는 무수한 주체들, 그리고 그 주체의 다른 이름인 타자들의 환유적 겹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주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시는 복수인 나와 다른 나들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궁핍의 현재를 읽어낸다. 궁핍은 그 자체 악도 선도 아니지만 존재의 중요한 표식이어서, 시인은 궁핍을 통해 존재의 명암을 이해한다. 궁핍은 존재의 가장 약한 고리이면서 동시에 희망이다. 궁핍이 때로 악을 낳고, 궁핍이 때로 공감을 낳는다. 부족한 것이 부족한 타자를 바라볼 때 느끼는 연민은 그 자체 자신에 대한 사랑이면서 덜 떨어진 타자와의 연대를 낳는다. 저 고단한 것들, 저 힘없고 나약한 것들의 시선은 그리하여 바닥을 향해 있으면서 ‘저 높은 곳’을 향해 있기도 하다. 저 높은 곳은 저 낮은 곳을 비추는 거울이다. 도달하지 못할 세계가 낮은 곳의 가난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인은 (엉뚱하게도) 희한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물의 낡은 이름을 버리고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명명의 권력이다. 이 이름붙이기는 환유적 중첩의 세계를 은유의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 은유에 의해 그 자체 궁핍이었던 주체와 세계는 다시 태어난다. 그것들의 몸은 여전히 결핍이지만, 은유에 의해 세계는 (적어도 의미론적으로는) 풍요로워진다. 시는 말하자면 자신이 직면한 세계에 다른 이름을 붙여 다른 세계를 만드는 자이다.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는 현실의 복제, 반복, 국화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만들어낸 다른 세계는 그러나 이전의 세계와 작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화석화된 세계에 다른 이름을 붙여, 그것의 환희와 불안, 궁핍과 연대, 좌절과 희망의 목소리들을 살려내므로 (말하자면) 죽은 형제들의 살아있는 형제이다. 다른 이름으로 호명할 때, 죽은 것들이 살아난다. 시는 이리하여 세계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와의 인접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유이기도 하다. 세계여, 나여, 당신들 때문에 나는 애간장을 태운다.
그런 내가, 무려 이십여 년을 시의 바깥에서 떠돌았다. 나는 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시의 바깥에서 시들을 재단했다. 잘 잘라지고, 잘 오려진 시의 파편들이 논문의 이름으로 학술지에 실리곤 했다. 그리고도 무사했다. 그리고도 무사했던 이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시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내 몸과 영혼이 지뢰밭 위에서 뒹굴 때였다. 나는 임박한 종말의 순간에 번개처럼 시가 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현재가, 세계와 나의 종점이 아님을 알았다.
∥오민석 시인을 주목한다____
다시, 명명의 날들
- 오민석 시와 ‘세월’
전해수
오민석의 시는 ‘세월’의 ‘그루터기’에 놓여 있다. 그의 시를 두고 ‘그루터기’라 칭한 이유는 오민석 시인에게 있어 시의 의미는 일상의 바쁘고 고단한 편재 속에서 자숙의 시간을 만나는 (유일한) 휴식처일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세월’이란 수식어를 사용해 본 것은 1992년에 첫 시집(『기차는 오늘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을 상재한 후, 23년 만인 2015년에 비로소 그의 두 번째 시집(『그리운 명륜 여인숙』)이 바깥세상을 만난 사실과도 연관이 있다. 시인은 “시간의 버스”(시간)를 경과하여 “23년 만에 다시 고원에 이르렀다”(『그리운 명륜 여인숙』시인의 말)고 회고와 탄식을 되뇌고 있는 것인데, ‘세월’의 옹이가 깊은, 시인의 앞자리에 그의 이름을 명명해 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명명? 그러고 보니 오민석 시인은 그 스스로가 <체험적 시론>에서 “명명의 권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사물의 낡은 이름을 버리고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그는 “명명의 권력”이라 말하면서 ‘이름붙이기’를 통해 “자신이 직면한 세계에 다른 이름을 붙여 다른 세계를 만드는” 행위가 비로소 (시를 통해) 시작된다고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민석 시를 ‘세월의 그루터기’라 칭한 것은 이러한 명명의 날들 속에서 기꺼이 회복하고자 한, 시인의 지난 삶의 호명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문득 필자는, 이 ‘명명의 언어들’을 엮어 시인이 재발견하고자 한 ‘명명의 날들’을, ‘다시’, 좇아 가보고 싶은 것이다.
①
붉은 해바라기와
노란 태양의 저 뜨거운 교신
(느끼지 못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지)
-「유령」 부분
②
내 서재에는 온통 죽은 시인들
네루다, 김종삼, 말라르메, 김관식, 베를레엔느
엘뤼아르, 로르까, 신동엽, 백석, 발레리, 김남주,
들과 떠들썩하게 한 잔하는 밤
-「푸른 연기의 세월」 부분
③
아직도 캄캄한 나의 푸른 정거장에서, 두 번째 부인과 헤어진 헨리 밀러가 자궁에 관한 소설을 구상중이고 멀리 고흥 바닷가에 홀로 사는 시인은 이 봄날에 우울의 돛배를 띄우고 있다 남회귀선에 홀로 떠가는 목련 등불이 환하게 질 무렵 지친 짐승처럼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회귀선」 부분
④
저자의 죽음을 선고하고 마침내 실물의 빨랫차에 깔려죽은 롤랑 바르트를 읽다보면 몸에서 무언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한글판 위키백과에는 그가 동성애자였으며 미셸 푸코의 연인이었다고 적혀있다 가난한 꽃잎들과 갓태어난 잎새들이 봄비 속에 둥둥 떠간다 저 고양이는 마누라를 죽이고 정신병동에 갇혔던 알튀세의 후예인지도 모르지 그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책을 썼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하여 연구하지 말고 돈 벌 궁리나 하라는 어머니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봄이 가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와 롤랑 바르트」 부분
⑤
도니체티의 “남 몰래 흐르는 눈
물”을 들으면 눈물이 0.00003 밀리리터쯤 고이다 물러간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 부분
다시 1년이 더 흘러 2016년 겨울, 그의 최근 시 속에는 20여 년의 ‘세월’(‘시간’이라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긴 ‘세월’이 아닐 수 없다)이 “다 해진 신발”을 풀어놓고 ‘그루터기’에 몸을 누이고 있는데, 이것은 오민석 시가 세월을 푸는 방식이라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이 가운데 유독 눈에 드는 것은 “유령의 세월”(「유령」)로 언명하는 바, 사라진 혹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제 인식과 이를 표방하는 죽은 자들에 대한 명명의 방식이다. 이를테면, 그는 네루다, 김종삼, 말라르메, 김관식, 베를렌느, 엘뤼아르, 루르까, 신동엽, 백석, 발레리, 김남주, 로자 룩셈부르크, 헤밍웨이, 헨리 밀러, 롤랑 바르트, 알튀세르 등 무수한 동서양 시인들을 마치 무덤에서 꺼내어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듯한데, 이외에도 도니체티, 프랑수아 트뤼포 등 문학 외의 예술인들까지도 시의 한 자리에 불러들여 시상을 펼치는 제재로 (유감없이) 삼는다. 오민석의 시가 이처럼 여러 철학자와 예술인, 소설가 그리고 시인들을 자주 호명하는 것은 아마도 시인의 일상이 이들의 연대기와 자주 만나는 지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시인의 이력을 살펴보니 그는 대학의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시세계와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월’의 유수 속에 혹은 ‘생계’(직장생활)의 지난한 일과 속에서 비로소 다시 되찾은 시의 “뜨거운 가슴”은 인간 오민석 혹은 시인 오민석의 ‘현재’시간과 맞닥뜨리면서 과거의 “번민”과 기껍게 조우하고 있다. 이 경계의 시간들을 ‘푸른 연기의 세월’(「푸른 연기의 세월」)로 명명되는 과거 세계로 정의해볼 수 있겠다.
이처럼 오민석 시인의 최근 시는 이른바 이름 붙이기, 즉 사물의 낡은 존재성을 버리고 새 이름으로 명명되기를 바라는 시인에게는 “결핍”을 만회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이전의 세계와 작별하지 않는” “환희와 불안, 궁핍과 연대, 좌절과 희망의 목소리들을” 인정하고 깨우치게 하는 “명명”의 세계가 바로 오민석 시세계의 주요한 지점으로 보인다. 이 호명의 세계를 통해 시인은 “세계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와의 인접성”을 내보이는 ‘명명’이야말로 과거를 새롭게 현재로 불러오는 태도임을 관철한다. 이 같은 명명의 시간을 통해 오민석 시인만의 시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새 떼들 불 탄 쓰레기처럼
서녘 하늘로 점점이 사라지는 저녁
그 적막한 지평선에서
마침내 종소리 울리면
너희는 가거라
돌아오지 말지어니
유령의 세월을 세월이라 하지 마라
삶은 온통 빛나고 아름다운 색깔들
검고 흰 것을 인생이라 하지 마라
붉은 해바라기와
노란 태양의 저 뜨거운 교신
(느끼지 못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지)
푸른 하늘이
초록 강물이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혈관이 있기 때문
푸르고 푸른 혈관이 내 혈관과 내통하기 때문
죽음 없는 삶을 삶이라 하지 마라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연민과 번민의 섬들
그 심장 언제 멈출지라도
헛된 유령의 세월은 사라져다오
오, 우리 몸을 흔드는 고통의 환희여
허튼 사랑을 붙잡지 마라
길 떠나다오
유령이여
-「유령」전문
위 시에 의하면,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 “뜨거운 교신”이 실상은 과거에는 미처 느끼지 못한 “세계”였던 것이다. 이제야 깨닫게 된 그 과거 세계에 대한 “연민과 번민”의 세월을 시인은 “유령의 세월”로 명명하고 있다. 하여 그는 “붙잡지 마라”, “길 떠나다오”와 같은 과거와의 단절을 천명하면서 ‘과거 세계와의 작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렇다. 시인은 “이십여 년을 시의 바깥에서 떠돌았다”(이하 「시인의 말」 참고)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한가. “몸과 영혼이 지뢰밭 위에서 뒹굴 때” 시는 오는가. “임박한 종말의 순간에 번개처럼 시가 오는 소리를 들었다”고 시인은 되뇐다. 사물의 명명이 바뀌고 다시 새 명명의 날들이 시의 이름으로 오는 소리.
“현재가, 세계와 나의 종점이 아님을 알았다”고 시인 스스로 깨닫고 있듯이 오민석의 시는 명명 이후 그러니까 그 명명의 시간을 건너온 그 이후의 시간 속에서 진가를 노정하고 있다.
전해수 / 2005년 『문학선』으로 등단했으며 평론집 『목어와 낙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