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자작나무 숲과 눈보라 속에서 조선의 사내들이 독립운동만 한 것은 아니다. 군장 대신 지게를 메고 총 대신 도리깨를 든 우리의 아버지들이 차갑게 언 땅을 녹토로 바꿔놓았으니 그곳이 바로 흑룡강 연안이다.
‘니콜리스크’, 근자에는 ‘우스리스크’로 불리지만 백 년 전 조선의 이민자들이 그 곳에 살 때는 ‘소왕영’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닷새갈이(五日耕) 농장을 경영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안정근과 안공근. 두툼한 외투로 뜨거운 가슴을 감추고 하얼빈 역에서 총을 쏘았던 안중근 의사의 아우들이다.
며칠 전 성수대교를 지나다가 나는 다리를 막고 선 농민들 속에서 두 형제를 떠올렸다. 형제는 소왕영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추운 고장에 적응할 수 있는 경작법을 개발했다. 조선의 전통농법인 수도(벼)농사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들의 손과 발은 만주의 땅만큼이나 거칠어졌지만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은 하루하루 영역을 넓혀갔다. 북위 50도, 흑룡강 중류까지 논을 만들어낸 그 끈질긴 정신이야말로 인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을 위대한 정신이 아닐 수 없다.
너른 땅이 문서화되어 양반집 궤짝에서 곰팡이 냄새를 풍길 때 농민들은 산비탈을 개척했다. 세계의 모든 농부가 경탄해 마지않을 신기원을 이뤄냈는데, 봉화에서부터 하동까지 경상도 땅을 다니면서 흔히 만나는 계단식 논이 그것이다. 그렇게 근사하고 땀냄새 물씬 풍기는 수경농지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조선 말기 가렴주구가 계속되고 일제의 착취가 본격화될 때 농민들은 또다시 개척의 길을 떠났다. 누구는 식솔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 수십 일을 걸어서, 누구는 소 한 마리를 이끌고 오로지 땅을 찾아갔으며, 이들이 하나둘 모여 북방의 곳곳에 촌락을 형성했다. 그들이 가기 전까지 그 땅은 러시아 수렵인들이 가끔 동물들의 발자국을 좇는 황량한 땅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땅의 모습만큼 누추했지만 결국은 땅의 색깔을 바꿔놓았고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지금 그 후예들은 병충해를 극복했고, 우리 기후에서는 불가능하다던 이기작(이모작) 벼농사에 성공한 김해평야의 농부도 있다.
그런데 이 겨울,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농민들은 왜 눈물 섞인 강바람을 맞으며 길을 막고 섰는가. 주책없게도 나는 왜소해진 아버지의 어깨를 보았으며, 궤짝에 종잇장 하나로 갇힌 이 나라의 땅을 만나고 말았다. 땅이 작아서, 아파트 지을 곳도 모자라서, 골프장 터가 없어서 우리는 과연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농업국가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우리의 농업은 언제까지 외국 농산물과의 경쟁을 외면할 것인가.
겨울 들판에 쥐불을 놓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물을 들고 외양간에 가야 할 발걸음을 서울로 향하게 한 건 물론 믿을 수 없는 국가정책이다. 밀실에서, 자기들만의 숫자놀음으로 농부의 땅과 마음을 함부로 취급한 건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넥타이와 반짝이는 구두만으로 쌀 문제에 대응한다는 건 봄부터 가을까지 흘린 땀에 대한 모독이다. 어찌 흙냄새 없는 협상 테이블에만 맡겨두겠는가. 외국 쌀이 선적을 마치고 이제 곧 이 땅으로 밀려들어올 이 마당에 자유무역협정을 강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는 건 이런 까닭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 굳은살 박인 농부의 손을 잡아주어야 할 때다. 그들의 가슴속에 자부심을 깊이 전해주어야 할 때다. 세계화가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길이라면 그들에게도 새로운 개척의 희망을 주어야 하며, 세계화에 어울리는 농업정책도 있어야 한다.
중국의 길림성, 흑룡강성을 비롯해 몽골에도 드넓은 땅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다. 50년 이상의 장기임대가 가능하다고도 한다. 국내에서는 세계 최고의 농산물을 생산해 내고 국외의 땅에 우리 농민들의 땀방울이 떨어지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끊임없이 땅을 개척하고 끝내는 땅을 닮아버린 위대한 얼굴들이 바로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던가. 향리의 문풍지로 겨울바람이 새어들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