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werkerck호
우베르케르크호(Ouwerkerek)는 네덜란드 상선으로 바타비아(Batavia, 오늘날 자카르타)를 출항하여 나가사끼로 항해하던 도중 1627년(인조 5년)에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당시 Jan Janse Weltevree, Theodorick Gijsbertz, Jan Perteree Verbaest 등 선원 3명이 음료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하였으나 제주 관헌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 이때 포로로 잡힌 네덜란드 선원 중 한 사람인 네델란드 De Rijp출신의 Jan Janse Weltevre는 조선으로 귀화한 박연(1595-?)이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하였는데, 1636년 병자호란때 세 사람 모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그는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 ·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조작법을 지도하였다. 1653년 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전라도 병영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간 조선의 풍속,말 등을 가르치며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1남1녀를 두고 여생을 마쳤다.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에 위치한 De Rijp 마을에는 현재 Jan Janse Weltevree를 기리는 교회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벨테브레에 대한 또 다른 보고서 내용 하지만 데시마(지금의 일본 나가사끼에 있는 섬)상관장의 일일 보고서에서 벨테브레가 Ouwerkerck 호에 타고 있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어느날 Ouwerkerck호의 선원들이 중국선박(Chinese junk)을 포획했는데, 벨테브레는 이 배를 Formosa(지금의 대만)로 가져가기 위해 다른 네덜란드인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폭풍으로 배는 조선해안에 다 달았다. 여기에서 세 명의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에게 압도당해 조선인에게 건네졌다. 이 사실은 1627년 7월 22일 Formosa의(지금의 대만) 장관이 Batavia(지금의 자카르타) 상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확인되었다. Formosa 장관은 7월 16일 Amoy로 가는 도중에 Ouwerkerck이 중국상선을 포획했다고 발표했다. 150명중 70명의 중국선원들이 Ouwerkerck으로 옮겨간 반면, 네덜란드인 16명은 나머지 중국선원들과 함께 대만으로 가기 위해 상선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상선은 폭풍으로 북동쪽에서 표류했고 그 후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좌초의 우려가 있다. Ouwerkerck호는 몇 달후에 포르투칼선에 의해 포획되어 마카오에서 불태워졌다. 위의 언급으로 봐서 배는 조선해협에 도달한 적이 없으며, 벨테브레는 Hollandse 사략선 무리에 인질로 붙잡혀서 조선인에게 건네진 것이 분명하다.
Sperwer호 De Sperwer호(galleon)는 네덜란드 상선으로 1653년 8월(효종 4년)에 나가사끼로 항해도중 제주도 해안에 표착하였다. 1653년 1월에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는 6월 자바섬의 바타비아(Badavia)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독 명령에 따라 스페르베르호로 갈아 타고 Fomosa(지금의 대만)로 출발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네덜란드의 대만 신임총독으로 부임하는 레세르를 임지로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난 뒤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이후 하멜표류기로 알려져 있는 "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e van't Jacht de Sperwer" (Sperwer호의 불운한 항해표류기) 라는 제목으로 책을 써서 조선을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Hendrick Hamel의 출생지인 Gorkum에는 1998년 9월 11일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효종4년 8월 6일 조선왕조실록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달단 : 달단은 Tatar로 13세기 이후로는 몽고민족, 남부러시아 일대의 터어키인,중국 북방 북아시아 등 전체를 가리킨다
“차왜(差倭) 귤성진(橘成陳) 등이 은밀히 역관들에게 말하기를 ‘10여 년 전에 아란타(阿蘭陀) 군민(郡民) 36명이 30여 만 냥(兩)의 물건을 싣고 표류하여 탐라에 닿았는데, 탐라인이 그 물건을 전부 빼앗고 그 사람들을 전라도 내에 흩어 놓았다. 그 가운데 8명이 금년 여름에 배를 타고 몰래 도망와서 강호(江戶)에 정박했다. 그래서 강호에서 그 사건의 본말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서계(書契)를 예조에 보내려 한다. 아란타는 바로 일본의 속군(屬郡)으로 공물(貢物)을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황당선(荒唐船)이 표류해 오면 즉시 통지해 주기로 전에 굳게 약속하였는데, 지금 통지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억류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성실하고 미더운 도리인가. 차왜가 나오면 반드시 서울에 올라가 서계를 올릴 것인데, 본부(本府)와 접위관(接慰官)의 문답이 예조가 답한 서계와 다르지 않아야 일이 어긋나는 단서가 없게 될 것이다. 또 도주(島主)와 강호의 집정자 사이에 틈이 있는데, 이번 일은 매우 중대하여 만약 서로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도주가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회계하기를, “장계에 말한 아란타 사람은 몇 년 전에 표류해 온 만인(蠻人)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복색이 왜인과 같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무슨 근거로 일본으로 들여보내겠습니까. 당초에 파손된 배와 물건을 표류해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숨길 만한 일도 없습니다. 차왜가 오면 그대로 답하면 그만입니다. 역관을 시켜 복장과 말이 왜인과 같았는지를 한번 물어보고 그들의 답을 들은 다음에 만인의 실상을 갖추어 언급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해변에 왕래하는 야소종문(耶蘇宗門)의 잔당들을 일일이 기찰하여 통보해 주기로 일찍이 귀국과 약조를 했었다. 그런데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귀국에 도착했을 때 귀국이 통보하지 않았다. 표류해 돌아온 8명은 비록 아란타 사람이지마는 그 나머지 귀국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필시 야소의 잔당일 것이다.” 하면서 여러모로 공갈하였다. 대개 야소는 즉 서양에 있는 별도의 종자인데 요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을 미혹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일찍이 일본과 상통하였는데 뒤에 틈이 생겨 관백이 매우 미워하였으므로 매양 우리 나라에게 붙잡아 보내주라고 요청하였다. 이번에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일본에 도착했을 때 관백이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야소가 아닌 줄을 알고도 이를 트집잡아 권현당(權現堂)에 쓸 향화(香火)를 요구할 구실거리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차왜(差倭)가 나와 관(館)에 40일을 머물러 있었으나 조정에서 일부러 응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석주를 접위관으로 차출하여 보낸 것이다.
13년 후에 나가사끼에 있는 VOC 책임자는 Goto-archipelago섬들 중 한 곳에서 일본인에게 구조된 이국적인 복장을 하고 뗏목으로 표류중인 8명의 네델란드인에 대한 특별한 메세지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당국에 의해 당장 나가사끼로 이송 되었다. 1666년 9월 14일 그들은 나가사끼 부두에 도착했다. 그들은 실종된 Sperwer hawk호의 선원으로 밝혀졌으며, 10일전 그들은 조선의 남해안에서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허름한 어선을 타고 탈출한 것이다. 그들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13년전 그들이 타고간 배는 난파되어 조선의 섬(제주도 대정현) 해안에 이르렀는데, 배에 타고 있던 64명중 32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조선정부가 자기 나라의 존재를 다른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 생존자들의 운명은 불확실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으나 살아남기 위해 구걸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들중 12명은 몇 년이 지나 사망했고, 마지막 생존자는 16명 이었는데 그들중 8명이 몇차례의 실패 끝에 조선을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부솔(La Boussole 500톤)호와 아스트로라베(L' Astrolabe 500톤)호 1787년 정조 11년 5월에 프랑스의 해군 대령인 라 페루즈(Jean-Fran?ois de Galaup, comte de La Perouse , 1741-1788)가 이끌고 세계 일주 항해를 하던 도중 우리 나라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사, 1787년 5월 27일 서양인중 울릉도를 최초로 목격, 동승했던 천문학자 다줄레의 이름을 따 다줄레 섬(Isle Dagelet)이라 명명하였으며, 이 이름은1950년대까지 세계지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울릉도의 어민들은 폐루즈의 탐사대를 목격하고 봉화불을 밝히는 등 신속히 대응한 것으로 보이며, 라페루즈의 탐험대는 울릉도 상륙 일보전에 철수하여 독도는 보지 못하고 항로를 북쪽으로 하여 타타르 해협으로 향하고 만다. 그러나 이들이 단순히 탐사 활동만 하고 지나쳐서인지 조선 왕조 실록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울릉도 탐사 경위는「The voyage of La P?rouse around the world 라페루즈의 세계 탐험기」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1791년 4월22일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명에 의해 출판 작업에 착수, 1797년 프랑스 국립인쇄소에서 출판됐다. 항해 일지 형식의 이 탐험기에는 울릉도 탐사 경위가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남해안과 동해안의 해안선을 실측하여 작성한 해도, 제주도 남부 해안 및 울릉도의 실측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1668년「하멜 표류기」 이래 서양인이 한국을 직접 목격,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기록한 최초의 자료이다. 라페루즈 탐험대가 1785~87년 사이에 측정한 해안선, 해도, 섬들의 위치, 산의 높이, 수심 등은 대단히 정확한 것이어서, 프랑스 해군은 이 해도들을 수정 없이 반세기 이상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수치와 비교해도 오차가 미미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만큼 과학적이고 정밀한 것이었다. 1788년에 태평양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탐험대 2백여명의 노력과 이들의 목숨, 새로 건조한 두 척의 프리깃함정,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된 항해 장비, 측정 장비, 방대한 자료 등이 희생되고 그 대가로 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조사 작업에 필요한 당대 최신 과학 장비와 각종 자료 (중국, 한국, 일본 등에 관한 책과 지도 등), 백과사전, 학술 논문 등도 적재했다. 특히 항해 장비는 그때 처음으로 사용 한 복각계(경사 나침반) 등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이었고, 페어 플레이를 하는 영국인들은 쿡이 사용했던 장비들을 대여해 주기도 했다. 그외에도 2백여명의 인원이 수년간 먹을 식량과 보급품도 두 함정에 나눠 실었다. 탐험대장인 라페루즈는 모함인 부솔호의 함장이 되었고, 아스트로라베호는 드 랑글(de Langle) 대령이 함장이었다. 과학자 중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수학자·천문학자인 다줄레, 수학자 몽주(Monge)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둘 다 육군사관학교 교수였다. 그 밖에 광물학자, 생물·식물학자, 천문학자, 의사, 인류학자, 원예가, 화가도 여러 명 있었다. 탐험대는 1785년 8월1일 브레스트 군항을 출발했다. 대서양을 남극 방향으로 횡단하면서 마데르를 지나 카나리아 군도와 브라질 남단을 거쳐 1786년 케이프 혼을 통과했다. 칠레의 콘셉숀(Concepcion)에서 환대를 받고, 식량, 연료, 음료수를 보충한 후 1786년 3월15일에는 지구의 남반부 해역 탐사의 대장정에 나섰다. 4월9일 파크(Paques)섬에 도착, 그후 북쪽으로 장거리 도항을 시작했다. 라페루즈는 18세기 말엽인 그 시점에, 좋은 측정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옛날 스페인 항해가들로부터 물려 받은, 위도가 잘못 계산된 세계 지도의 신화를 깨 부수는 작업을 하 게 되었다. 샌드위치(하와이) 군도와 미국 서부 해안 사이의 적도 부근에 표시돼 있던 여러 개의 육지들은 라페루즈 일행에 의해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샌드위치(하와이) 군 도에서 물물 교환으로 식량 등을 확보한 다음 알래스카를 향해 북상했다.
우리는 5월21일 이 섬(Quelpaert, 제주도)을 알게 되었는데, 거리 측정에는 이상적인, 더 할 수 없이 맑은 일기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한 섬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섬의 남쪽 첨단부의 위치를 북위 33°15', 동경 124°15' (위도는 오늘날의 수치와 같고, 경도는 현재 126°15'이므로 약 2° 정도 차이가 남)로 확정했다. 나는 섬에서 11km 떨어져 항해하면서 67 km(제주도 동서의 길이는 73 km)에 걸쳐서 전개된 해안을 최대한 세심하게 측정했고, 이를 베르니제(Bernizet) 씨가 지도로 작성했다. 정상의 높이는 약 1천9백50m 였고, 1백~1백10km 거리에서 식별할 수 있었다.
정상은 섬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고, 이 산 자체가 섬인 것 같았다. 토지는 매우 완만한 경사로 바다까지 내려왔다. 이 경사면에 있는 집들은 마치 대강당의 층계처럼 층을 이루고 있었다. 땅은 아주 높은 지대까지 경작된 듯했다. 망원경을 통해 밭과 밭 사이의 구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밭이 아주 작게 나누어진 것으로 보아 인구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각종 경작물이 매우 다양하게 자라는 모습은 이 섬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불행히도 이 섬은 외국인과의 소통이 금지된 민족에 속하며, 이 민족은 이 나라 해안에 표류하는 불행을 겪는 모든 사람을 노예 상태에 억류해 둔다.
프로비던스(HMS Providence)호 40톤, 포 16문, 길이 33미터인 Sloop로, 영국 해군 브로이튼(William Robert Broughton)의 지휘하에 그당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북태평양을 탐사, 타타르 해협으로부터 조선의 영흥만 앞바다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관측한 후, 부산 동래포에 상륙하여 우리측 사료에 처음으로 이국선으로 불리웠던 배이다.
라페루즈의 부솔호보다 10년 뒤 조선에 찾아온 브로이튼의 프로비던스호는 현재의 강원도 고성 조금 북쪽 한반도 가까이에 울릉도로 보이는 아르고노트(Argonaute) 섬을 발견하였다 하여, 1820~50년경의 서양 지도에는 라페루즈가 붙인 다줄레섬(울릉도) 외에 아르고노트 섬도 나타나 있는데, 그 후에 아르고노트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지도상에서 사라졌으며, 서양인 최초로 조선의 식물이 채집된 계기가 된다.
브로이튼은 1793년 10월에 프로비던스호를 지휘하여 밴쿠버와 합류하라는 명령를 받았으나. 1795년 2월에 폴리머스항을 출항, 이미 귀환중인 밴쿠버와 대서양에서 너무 늦게 합류, 1796년 3월에 Nootka 에 도착하였다. 브로이튼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북위 35도에서 북위 52도까지의 아시아대륙의 해안과, 일본의 동,남해안을 탐사하였으며, Corea(조선) 해안을 조사하였다. 2년여의 긴 항해끝에 브로이튼 함장이 지휘하는 프로비던스호가 1797년 10월에 부산에 상륙하였다. 조선 탐험의 뚜렷한 목적을 띤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탐험되고 있는 조선에서 국가의 세력과 무역 패권을 놓고 해상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 프랑스는 1787년 조선 해역에 진입했던 라페루즈 함대의 항해로 주도권을 잡았으나. 항구에 입항해 볼려는 열렬한 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비협조적인 일기 조건과 선원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 때문에 되돌아 가야만 했다. 10년 뒤인 1797년, 영국의 함장 브로이튼과 그의 탐험대는, HMS Providence호로 항해, 조선의 동해안을 탐사, 성공적으로 조선 해안인 부산 동래포에 10일간 상륙하여 머물렀다. 또한, 브로이튼은 1795년에서 1798년까지 라페루즈가 지나쳐 버린 오끼나와의 많은 섬들과 일본 해안가를 면밀히 조사하였으며, 1804년에 "A Voyage of Discovery in the North Pacific Ocean" 이라는 책을 발간 하였다 브로이튼의 항해기에 의하면, "새로운 정보와 교역같은 것이 기대될 것으로 생각되었던 조선 해안을 조사하는 것이 본래의 항해 목적중 하나" 라고 하였다. 영국 선원들이 항구에서 10일간 머무르는 동안, 지방 행정관과 관리들은 정박중인 배를 방문하여 선원들에게 즉각적으로 항을 떠나가도록 설득하였고, 일반인들조차 무리지어 배에 올라 선원들의 환영을 받은 바 있다. 지방행정관은 영국 선원들이 떠나가는 10월 21일까지 외국 방문객에게 소금, 쌀, 고기와 해초들을 주도록 명령하였고, 계속적으로 무상으로 물과 나무를 제공하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랗습니다. 역학(譯學)을 시켜 그 국호(國號) 및 표류해 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한어(漢語)·청어(淸語)·왜어(倭語)·몽고어(蒙古語)를 모두 알지 못하였습니다. 붓을 주어 쓰게 하였더니 모양새가 구름과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 배의 길이는 18파(把)이고, 너비는 7파이며 좌우 아래에 삼목(杉木) 판대기를 대고 모두 동철(銅鐵) 조각을 깔아 튼튼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윤득규(尹得逵)가 치계하기를,
영국 군함 알세스트호(Frigate Alceste, 함장 Murray Maxwell )와 리라호(Sloop Lyra, 함장 Basil Hall) 1816년 7월(순조 16년)에 서해안의 마량진 앞바다에 출현하였다. 이 두 선박은 영국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북경 조정에 특사로 파견한 암허스트경(Sir Jeffrey William Pitt Amherst)을 태운 선단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양선으로 불리게 된 선박이다, 알세스트호는 1817년에 지금의 보르네오 근처 이름없는 모래톱에 걸려 좌초 되었으나, 극적으로 선원과 승객들은 구조되었다.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臼)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날으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眞書)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 500톤급 영국 동인도회사(EIC) 상선으로 조선 해역에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나타난 최초의 서양선이었다. 1832년 동인도회사에서는 극동의 새로운 통상지를 개척 탐사하려는 목적으로 타이완을 거쳐, 조선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는 항해를 계획하고, 그 책임자인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는 중국어에 능통한 의사겸 선교사인 귀츨라프 목사(Karl Friedrich August G?tzlaff, 1803∼1851)를 통역관, 선장 Rees를 포함 67명의 승무원을 승선시켰다. 후에 귀츨라프는 "The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Loo Choo Island" 책을 1834년에 발간한 바 있다. 로드 암허스트호는 1832년 2월 27일 중국 광동을 출발하여 1832년 6월 21일(순조32년) 황해도 몽금포 해안에 나타났다가, 남하하여 충청도 홍주 고대도 뒷 바다에서 20 여 일간 정박하며, 조선 국왕에게 서한을 전달해 줄것과 통상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제까지의 서양선들과는 달리, 통상을 요구해 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이들에 대해 각별한 반응을 보였다. 한양에서 내려온 특사는 서한과 선물을 되돌려주며 중국 황제의 허락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순조 32년 7월 21일, 사건이 마무리된 후 공충감사 홍희근은 순조에 장계를 올렸다.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 흔도사단(都斯)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 애란국(愛蘭國), 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아사라(我斯羅)·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선재(船材)는 이목(木)을 썼고 배의 형체는 외[瓜]를 쪼개 놓은 것같이 생겼으며, 머리와 꼬리 부분은 뾰족한데 길이는 30파(把)이고 넓이는 6파이며 삼(杉)나무 폭을 붙인 대목은 쇠못으로 박았고, 상층(上層)과 중층(中層)은 큰 것이 10칸[間]이고 작은 것이 20칸이었으며,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는 각각 건영귀(乾靈龜)를 설치했고, 배 안에는 흑백의 염소[羔]를 키우며 오리와 닭의 홰를 설치하고 돼지 우리도 갖추고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에는 각색의 기(旗)를 꽂고 작위(爵位)가 있는 자의 문전에 있는 한 사람은 갑옷 모양의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종일토록 꼿꼿이 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제지하였으며, 급수선(汲水船) 4척을 항상 좌우에 매달아 놓고 필요할 때에는 물에 띄워 놓았습니다. 전(前)·중(中)·후(後)의 범죽(帆竹)은 각각 3층을 이루고 있고 흰 삼승범(三升帆)도 3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사용하는 그릇은 화기(畵器)이고 동이[樽]와 병(甁)은 유리였으며 숫가락은 은(銀)으로 만들었고, 배 안에 실은 병기(兵器)는 환도(環刀) 30자루,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大火砲) 8좌(座)이었습니다. 또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총 67인이었는데, 선주(船主)는 4품(品) 자작(子爵) 호하미(胡夏米)이고, 6품 거인(擧人)은 수생갑리(隨生甲利) 출해리사(出海李士)이며, 제1과장(第一長)은 파록(波菉)이고, 제2과장은 심손(心遜)이고, 제3과장은 약한(若翰)이고, 화사(畵士)는 제문(弟文)이며, 사자(寫字)는 노도고(老濤高)이고, 시종자(侍從者)는 미사필도로(米士必都盧)이며, 과계(計)는 벽다라마(多羅馬)·행림이(行林爾)·임홍파(林紅把)·가파지(加巴地)이고, 수수(水手)는 가타(嘉他)·랍니(拉尼)·야만(耶)·주한(周翰)·명하(明夏) 및 마흥(馬興) 6인이며, 진주(陳舟)에 10인, 손해(遜海)에 20인이고, 주자(廚子)는 모의(慕義)와 무리(無理)이며. 지범(止帆)은 오장만(吳長萬)이요, 근반(班) 시오(施五)·시만(施慢)·시난(施難)·시환(施環)·시섬(施)·시니(施尼)·시팔(施八)이었습니다.
사마랑호(Samarang, bark, 582톤, 함장 Sir Edward Belcher) 중국의 남경조약 체결 후 개방된 중국 해안을 측량할 목적으로 항해하던 중 조선 해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845년(헌종11년) 6월 제주도 '우도' 앞바다에 정박한 후 30여명이 보트 3척에 나누어 타고 우도에 상륙하여, 섬 연안을 1개월 동안 돌아 다니면서 수심을 측정하고, 전라도 흥양(고흥) 초도, 강진 여서도, 장흥 평일도, 해남 지역등 서남해를 탐사하고 거문도에 들러 "해밀튼항(Port Hamilton)"이라 명명한 영국 군함 사마랑호였다.
함장 Edward .Belcher(1799-1877)는 1848년에 " Narrative of the voyage of H. M. S. Samarang, during the years 1843-46" 이라는 책을 발간하였으며, 사마랑호는 1847년6월에 프랑스 군함 글로아르호가 전라도 만경 신치도 부근에 도착했으나 암초에 좌초되자 1847년8월 다른 2척과 함께 상해로부터 출동하여 구조해준 바 있다. 조선 조정은 사마랑호에 대해 이들이 무역을 강요하기 위하여 온 것으로 판단하고, 사마랑호의 내조 사실을 청국과 일본에 통보함과 동시에 청국을 통하여 조선이 금단의 땅임을 영국측에 통고하여 다시는 그러한 사건이 없도록 조처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민은 마치 난리라도 난 것처럼 20여 일 동안 생업이 마비될 정도였고, 그 후 도민들을 동원하여 해안가에 환해장성을 수축하여 만일에 대비하였다.
**1885년 |
출처: 발할라의 궁전 원문보기 글쓴이: 하로우
첫댓글 조선은 전혀 상업의 불모지나 서양인들이 매력이 못느낀 곳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19세기 이전부터 통상을 요구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조선 정부가 서양인들에게 위험 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서양이라는 곳이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알지를 못했으니까요. 서양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차에 청나라가 서양 열강 중 하나인 영국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정부는 더욱 더 쇄국 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를 탄압합니다. 조선은 구체적으로 그들에 대해 알려고는 하지도 않은채 서양에 대해 무조건 적대적 의식만 품게 된 것이죠. 때문에 조선이 건국 초부터 진행하던 쇄국정책을 서양 제국주의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실에서부터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예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이라기 보다는 단지 서양국가들에 대한 무관심 했다라고 하는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조선의 전반적인 외교정책을 볼때 쇄국정책이라고 함이 맞습니다. 앞에서 제가 올린 글인 '그리운님에 대한 재반론'을 보시면 고려말, 조선초까지 아유타야 왕조는 우리와 교역을 심심치 않게 하고 있었습니다. 사절까지 왕래하던 둘의 관계가 서서히 끊기게 된것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부터였습니다. 이런 것을 볼때 조선이 쇄국정책을 한 이유가 서양열강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 입증됩니다. 고립과 무관심 이것은 건국초부터 이어져오던 조선의 외교정책이었죠.
이전에 사실 1609년에 잉글랜드 히라도 상관에서 발진시킨 정탐함대가 있었고, 1626년경(?)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드 혼드 호가 조선 서해안에 표착했다가 해안을 경비하던 조선군과 전투을 벌인 후 탈출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나중에 1629년 보물섬탐험대를 발진시킨 이유가 되며, 또한 1636년 4차 조선통신사 (사실 진정한 통신사가 이 때가 처음)에게 동인도회사측이 개국을 요구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추가 설명 감사드립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네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