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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전북대 김병기교수 주장
- ‘渡海破(도해파)’ 정상적 비문과 달라 원래 글자는 ‘入貢于(입공우)’ 추정
김병기(51)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가 광개토대왕 비문의 조작의혹을
서예학적으로 밝히고 원래의 글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최근 펴낸 저서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학고재)를 통해,
“일본에 의해 조작되어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인용되고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했던 광개토대왕 비문을
서예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조작임이 뚜렷하며 원래의 글자도 복원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신묘년 기사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그동안 일본쪽이 통설이라고 주장해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해 왔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돼 왔다.
이 가운데 ‘渡海破(도해파)’가 조작 의혹을 받는 글자. 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탁본에 찍힌 ‘渡’자의 윗부분 가로 세 획이 아래로 갈수록 오른쪽 끝부분이 짧고
오른쪽으로 약간씩 치켜 올라가 있으며, 이는 중첩 가로획은 각 횡이 수평을 이루며
각 획의 길이는 가지런하거나 아래쪽 획이 약간 긴 정상적인 비문체와 다르다.
또 ‘海’자의 어미 ‘母(모)’ 세로획이 모두 안쪽으로 기울어 있는데,
이는 모든 자형이 기본적으로 정사각형 또는 세로로 긴 직사각형이며
가로획은 수평, 세로획은 수직인 비문서체의 성격과 어긋난다.
‘破’자에서도 직선이어야 할 ‘石(석)’의 두 번째 획이 굽어있고,
‘皮(피)’와 ‘石’의 윗선이 가지런해야 하는데 ‘皮’가 ‘石’에 아래로 처져 있다.
김 교수는 조작 당시 서체를 모르는 자가 당시 유행하던 예서체 방식을 따라 변조하면서
드러난 현상으로 추정한다. 또 조작한 것으로 의심받는 탁본인 사코본에서 ‘渡海破’ 글씨가
눈에 띌 만큼 비뚤어져 있는 것도 유력한 조작의 증거로 꼽았다.
이는 세로 방향으로 계선을 넣어 세로줄이 정연하게 맞는 비문의 장법과 어긋난다.
결국 기존 글꼴을 토대로 글자를 변조하면서 드러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럼 원래의 글자는 무엇일까.
김 교수는 ‘渡海破’의 원래 글자가 ‘入貢于(입공우)’라고 추정한다.
각각의 글자를 겹쳐보면 기존의 획과 모양을 이용해 변조한 행태가 뚜렷이 보인다는 것.
그는 서예학적 접근 외에 문장구조를 분석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증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屬民(속민)’과 ‘臣民(신민)’.
속민은 ‘현재는 분리되어 있지만 동족 관계인 나라’를 지칭하고
신민은 ‘복종의사를 밝혀온 나라 또는 집단’을 가리키는 일반 용어임을 밝히고,
‘渡海破’를 ‘入貢于’로 대체한 문장이 ‘而(이)’를 중심축으로 완전한 대칭구조를 갖는
완벽한 문장이 된다고 말한다.
‘百殘新羅-屬民-由來-朝貢 <而> 倭-臣民-以辛卯年來-入貢’.
복원한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00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한다.
김 교수는 1982년 대만의 한 책방에서 광개토대왕 비문 탁본집인 <호태왕각석>이란 책을 발견하여
글자의 모양에 반해 여러 차례 임서하면서 ‘渡海破’ 부분에서 붓이 멈추는 기현상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후반 왜가 한반도 남부에 진출해 백제와 신라, 가야를 지배했으며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었다는 주장으로 일부 일본 역사교과서는 정설로 기술하고 있다.
고대 일본의 한반도 남부 경영을 둘러싼 한일 논쟁의 핵심에 있는 문제의 신묘년 기사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은 확인 불가능).
김 교수는 1970년대 초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씨가 처음 주장해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던
‘渡海破’가 서예학적인 안목으로 분석했을 때 틀림없이 조작된 글자라는 것이다.
그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이 다량으로 만든 석회본(비석 표면에 석회를 발라 면을
고르게 한 뒤 뜬 탁본) 중 하나로 추정되는 동아대학교 소장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비 글자체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획이 거의 직선으로 된 것인데,
이 탁본 신묘년 기사의 ‘渡’자 마지막 두획은 오늘날 흔히 쓰는 해서체에서처럼 중간 부분이
아래쪽으로 상당히 굽어 있는 파도 모양이다.
국내 학계에서도 변조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海’자의 경우도
광개토대왕비 서체는 모든 자형이 기본적으로 정사각형 혹은 세로가 약간 긴 직사각형인데
유독 신묘년 기사만 ‘母’ 부분의 세로 획이 모두 왼쪽 방향으로 기울었다.
신묘년 기사의 ‘破’자도 ‘石’의 두 번째 획이 직선 획을 사용하는 광개토대왕비 서체에 어긋나는
해서체이고, ‘石’자와 ‘皮’자의 높이가 비문의 다른 ‘破’자와 다르다.
김 교수는 서체 분석으로 볼 때 ‘이 작은 차이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渡海破’의 원형을 신묘년 기사 중 ‘속민’과 ‘신민’이라는 언뜻 보기에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로 쓴 용어에 착안해서 찾아나간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같은 민족이면서 예로부터 조공을 해온 나라이기 때문에
속민이라는 전용 명사로 나타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혈족 관계로 보나 조공 관계로 보나 복속의 정도가 강한 속민인
백제나 신라를 복속의 정도가 낮은 신민이라는 일반 명사로 나타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는 ‘백제나 신라를 이미 속민이라는 칭호로 불렀으니 다시 신민일 수는 없다’며 광개토대왕비에서
유일하게 신묘년 기사에만 등장하는 ‘신민은 왜를 가리키는 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맥락에 따라 그는 ‘渡海破’는 ‘入貢于’에서 변조됐을 가능성이 크고, 그 과정에서 변조탁본의
대표격인 사코 카게노부의 쌍구가묵본(종이를 대고 글자모양을 그린 뒤 여백에 검은 붓칠을 하는
탁본)에서처럼 ‘渡海破’의 줄이 심하게 틀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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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비문의 광개토대왕 정복사>
영락 5년(395) 을미년에 비려가 불복하여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 토벌하였다.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3부락과 600-700영을 파하였다.
노획한 소, 말, 양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어 양평도를 지나 동래(?)성과 역성, 북풍, 오비(?)를 거쳐 국경을 순찰하고 사냥한 후 돌아왔다.
한·일 논쟁이 된 6년기사
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써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 무술년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숙신(肅愼) 토곡(土谷)을 관찰 순시하였으며
그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막(?)나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후로 (숙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았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백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이 신라성, (?)성(新羅城(?)城)’을 (공격하니)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영락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영락 17년(407) 정미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합전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주성(?佳城), (?)성(?城), (?)성(?城)을 파하였다.
영락 20년(410) 경술년에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시마압로(卑斯麻鴨盧), 사루압로(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한 성(城)이 64, 촌(村)이 1,400이었다.
<부연 설명>
광개토대왕비문은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후에 1775자로 정정)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경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간혹 언급한 경우가 있으나 비문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청(淸)나라에서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봉금제도(封禁制度, 거주금지
조치)를 시행하자 인적이 뜸해져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된 뒤 1880년을 전후로 하여 재발견되었다.
당시 비가 재발견된 경위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비 발견의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회인현의 지현(知縣)이던 장월(章越)이 관월산(關月山)을 보내어 탁본을 만들게 했고,
그 후 중국의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에 의해 많은 탁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을 자료로 구체적인 역사 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고,
초기의 탁본은 대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질러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을 해독하고 연구를 독점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 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1888년에 그 내용이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 會餘錄〉5집에 실려 일반에게 알려졌다. 이후 속속 연구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대부분은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와〈니혼쇼키(日本書記)〉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다는 전설적 내용을 관련지어 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연구 속에서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었다. 그 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는 본격적인 현지 조사가 이루어져, 1913년에는 세키노(關野貞)와 이마니시(今西龍)가
자세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1935년에는 이케우치(池內宏)를 비롯한 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고분을 비롯한 유적을 자세히 조사했다.
일본인에 의해 연구가 독점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간 신채호가 1914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조선상고사>에서 비문의 "결자(缺字)에 석회를 발라 첨작(添作)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眞)을 실(失)함을 한(恨)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도구가 없어 비를 실측하지도 못했고 탁본을 자료로 연구에 이용하지도 못했다.
해방 전 한국인에 의한 비문연구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정인보의<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930년대 말 무렵에 집필된 것으로,
신묘년 기사에 대해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즉 기존의 일본인은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고구려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전혀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에서는 1959년 데이지로(水谷悌二郞)가 여러 탁본들을 대조하여
각각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석회를 바르기 전의 탁본과 바른 뒤의 탁본을 구별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그동안 일본에서 진행된 연구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하는 문제 제기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63년에 중국과 합동으로 능비가 있는 현지를 찾아가서 조사를 실시했고,
1966년에는 박시형의 <광개토왕릉비>가 간행되었다. 여기서는 능비에 관한 우리 쪽 문헌을
거의 망라하여 찾아내고, 또 비의 재발견 경로를 상세히 검토했다.
또 문제가 되는 '신묘년기사'에 대해서는 정인보의 해석법을 받아들여
기존에 일본인들이 주장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연구의 일환으로 1966년에 김석형이 <초기 조·일관계사 연구>를 간행하여
일본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정했다.
그리고 정반대로 삼한 삼국의 이주민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해 분국(分國)을 수립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해, 이후 북한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는 신묘년기사에 대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와 백제를 격파하고
왜,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박시형과는 약간 해석을 달리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가 국내에 전면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남한의 연구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70년대 초에 재일 연구자 이진희(李進熙)는 1900년을 전후해 참모본부에 의해
비문의 문자가 석회로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일본 학계의 일부는 근대 일본 역사학의 체질문제를 거론하여 자기반성을 행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반론을 펴기도 했으나 자체적으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국내에서 비로소 정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80년대 들어 다수의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신묘년기사가 왜를 주체로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주체가 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비문 속의 왜는 백제나 가야의 활동에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1984년에는 왕젠췬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를 발표해
다시 한 번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다. 왕젠췬은 현지조사의 이점을 살려 기왕의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으며, 문자의 총수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의 왜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한편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한 점에서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다시금 논의가 활기를
띠었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한편, 비문은 그 내용에 의해 대체로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유류왕(儒留王)·대주류왕(大朱留王)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쓴 부분이다.
둘째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 활동을 연도에 따라 적고 그 성과를 적은 부분이다.
그리고 셋째는 광개토왕 생시의 명령에 근거하여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 연호의 수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 금지에 대한 규정을 적은 부분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둘째 부분으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특히 신묘년 기사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정복기사가 적혀 있는데, 연대에 따라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락(永樂) 5년(395)조는 비려(稗麗) 정벌에 관한 것이다. 그해에 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염수(鹽水)까지 가서 그 부락 600~700영(營)을 깨뜨리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우마군양(牛馬群羊)을
노획하여 북풍(北豊) 등지를 거쳐 돌아왔다.
이 비려는 시라무렌강 방면의 유목민인 거란[契丹]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락 6년(396)조는 백제정벌에 관한 것이다. 왕은 직접 수군을 끌고 백제를 쳐서
58성(城)과 700촌을 공파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낸 뒤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인을 비롯한 포로 1,000명을 얻어 돌아왔다.
이 작전의 대상지역은 대개 임진강 하류, 한강 하류 일대로 비정된다.
비문은 여기서 영락 6년조를 적기 전에 그간의 경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묘년 기사로서 영락 6년에 이루어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영락 8년(398)에 왕은 소규모 군사를 보내 식신토곡(息愼土谷)을 관(觀)하고
부근의 가태라곡(加太羅谷) 등에서 남녀 300명을 얻었고, 이후 이 지역으로 하여금 조공하게 했다.
이 식신은 숙신(肅愼, 구 조선선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지역은 만주의 영안(寧安)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이를 2개의 작전으로 나누어 보고 강원도 일대의 예(濊) 및 신라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락 10년(400)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하여 이설이 많으나, 신라 구원을 위해
보기(步騎) 5만을 파견해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가서 왜를 토멸한 것이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도 영락 10년 작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즉 영락 9년에 백제가 이전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여 왕이 평양에 내려왔을 때
신라 사신이 구원을 요청하여 밀계(密計)를 약속했다.
따라서 영락 10년의 작전은 그 밀계에 따른 것이었고,
신라왕은 이를 계기로 직접 고구려에 조공했다.
영락 14년(404)조는 백제군을 따라 대방계(帶方界:요녕성)에 침입한 왜를 궤멸시킨 기사다.
고구려의 왕당(王幢, 친위군)이 길을 끊고 사방에서 추격하여 무수한 적을 참살하여 궤멸시켰다.
영락 17년(407)조는 문자의 탈락이 심해 구체적인 실상을 알기 힘들다.
고구려군은 적군을 섬멸하여 개갑(鎧甲) 1만여 개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군수품을 얻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성을 격파했다.
이 작전을 보기(步騎) 5만을 보내 후연(後燕)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를 공격한 내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락 20년(401)조는 동부여(東夫餘) 정벌 기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동부여는 이전에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조공을 끊어버리고 반항한 것에 대해 왕이 직접 토벌하자 곧 투항하고 말았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은택(恩澤)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동부여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부여족의
일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훈적을 적은 끝부분에서 왕이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개였다고 적고 있다.
수묘인 관계기사는 비문의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수묘인들의 출신지, 각 지역별 호수 배당,
수묘인의 매매금지조항 등의 내용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구민(舊民)이 약해질까 우려해
직접 약탈해온 신래한예(新來韓濊)로 하여금 수묘토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장수왕은 구민 110가(家), 한예 220가를 차출하여 국연(國烟) 30, 간연(看烟) 300으로
모두 330가의 수묘가를 책정해 능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왕(先王) 이래 묘 위에 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의 관리에 차질을 빚었는데, 이제 묘비를 세우고 수묘연호를 새겨 착오가 없게
함과 아울러 수묘인의 매매를 금지시키고 위반자를 처벌하게 했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적 성격 등 사회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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