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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과 보와 고의 상관관계, 그리고 시사점
이름으로 나라를 키우고, 지키고, 기될 언덕이 되게 했던 사명감 불태우다
장(張)은 활궁(弓)과 긴장(長)이 결합한 한자이다. 활궁(弓)은 ‘재주와 능력(能力)’ 을 뜻한다. 긴장(長)은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능력(能力)을 펼친다’ 는 의미이다.
장(長)은 ‘어른, 우두머리’ 라는 뜻으로 쓰인다.
장(張)은 ‘활의 길이가 길다’ 라는 뜻으로 쓰이며, ‘활을 당기다. 펴다’ 는 의미로도 파생(派生)되었다. 장은 ‘활을 잡아당기다. 넓히다와 일을 벌리다. 베풀다’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베풀 장(張)은 활시위(弦)를 길게(長) 늘어뜨려 활(弓)에 거는 것을 말하며, 이로부터 확장(擴張)이라는 뜻이 생겼다. 활이 ‘길다’ 라는 장(張), 장은 보(保)와 결합하면, 그 의미는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보(保) 사람 인(人)과 어리석을 매(呆)와 결합한 한자이다. 보(保)는 ‘지키다. 보호하다. 보전하다’ 의 뜻으로 쓰인다. 보호(保護), 보위(保衛)와 보전(保全), 보존(保存)의 보로 옮겨지기도 한다.
보(保)는 사람 인(人)과 어리석을 매(呆))와 결합된 것으로, 아이를 업은 형상을 그려낸 한자인데, 뱃속에 아이를 가져서 우두머리의 체면(體面)이 온통 바로 유지(維持)되는 상태가 시작되다. 또는 뱃속에 아이를 가져서 사람의 무리 사이에서 우두머리의 체면이 온통 바로 유지되는 상태(常態)나 태도(態度) 따위를 그대로 ‘유지하다. 보전하다’ 의 뜻이다.
나아가 이 자형(字形)은 지키다와 다의어(多意語) 관계에 있는 지키다. 즉 ‘재산, 이익, 안정 따위를 잃거나 침해(侵害)당하지 아니하도록 보호(保護)하거나, 감시(監視)하여 막다’ 라는 의미로 쓰이며, 또 ‘보호하다’ 의 뜻 따위를 표현하는 문자로 활용한다.
지킬 보(保)는 ‘人+子’ 의 회의자다. ‘아이를 등에 얻은 사람’ 의 모습을 상형(象形)한 글자이다. 보(保)는 아이를 업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상형한 글자이다.
보(保)의 본 뜻은 ‘업다’ 이며, ‘보호하다. 지키다. 기르다’ 등의 의미가 파생되었다.
보(保)는 사람이 아이를 안고 보호하는 모습에서 유해하여, 책임감(責任感)을 가지고, 안전(安全)하게 지켜내는 행위(行爲)를 의미한다. 이는 유지(維持), 보존(保存), 보정(保障) 등의 광범위한 의미로 확장되었다.
사람 인(人)과 포대기 보(保)의 엣 모양이 합쳐져 어른이 아기를 등에 업고 지킨다는 뜻에서 ‘지키다. 보호하다. 보존하다’ 의 의미를 가진다.
잘 보호하여 유지한 보존(保存), 책임지고 지켜준 보장(保障), 위험에 대비하여 보호하는 제도의 보험(保險)이라는 뜻을 내포한 보(保)는 ‘국가근본(國家根本) 재어보민(在於保民)’ , 나라의 근본(根本)은 백성(百姓)을 보호(保護)하고, 편안하게 하는 데 있다는 뜻으로, 지키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키는 것(保)은 단순한 방어(防禦)를 넘어 가치를 유지(維持)하고 계승(繼承)하는 적극적(積極的)인 행위이다.
자신의 건강(健康), 명예(名譽), 신뢰(信賴)와 같은 무형(無形)의 가치를 소중히 지키는 것은 삶의 길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혜(智慧)이다.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해 환경(環境)과 문화(文化)를 보존(保存)하는 책임감(責任感)도 포함된다.
장(張)과 보(保)와 고(皐)의 세 글자를 통해 진정한 편안함과 튼튼함을 갖추고, 자신과 타인을 지혜롭게 지키고(護), 미리 막으며(防), 소중한 가치를 보존(保)하는 귀한 지혜를 담은 장보고(張保皐)이다.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을 지을 때, 장(張)자와 보(保)자가 자신의 철학과 신념에 어울리는 한자를 선택했다. 장은 자신의 성씨(姓氏)로 하였고, 보는 고(皐)와 함께 이름으로 하였다.
궁복(弓福)의 이름의 의미도 훌륭하다. 자신의 생각(想)과 행동(行動)을 담은 이름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리고 장보고라는 이름도 놀랍도록 뛰어나다. 장씨(張氏)로 한 것은 우리가 일고 있는 여러 설(說)과는 전혀 다른 개념(槪念)이요, 그 설들은 잘못 된 판단(判斷).인식(認識)과 해석(解釋)이다.
장보고의 장씨 성(姓)은 전혀 다른 연유(緣由)와 의미(意味)에서 쓰였다. 그는 장씨 가문(家門)의 자손(子孫)은 아니다. 다만 장보고 이름으로 한 후 그를 이은 후손(後孫)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당나라에 가장 많은 성씨 중에 장씨(張氏) 성(姓)을 땄다고 한 것도 잘못된 판단(判斷)이다. 장(張)=활궁(弓)과 긴장(長). 보(保)=사람 인(人)과 지킬 매(呆). 비빌 언덕 고(皐) 등이 결합한 이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게 하였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심오한 철학(哲學)과 사상(思想), 비전과 희망(希望)이 담긴 이름이다.
장보고 이름에 대해 이런저런 설(說)들이 꾸준히 나돌고 있고, 더욱 다른 의미로 해석(解釋)한다. 그럴듯한 엮음이다. 고찰(考察)에서 밝혔듯이 장보고라는 이름은 전혀 다른 개념의 의미에서 쓰이며, 장보고라는 이름은 ‘브랜드’ 이다. 신라를 대표하는 상징적(象徵的)인 ‘슬로건’ 이다. 그저 지은 이름이 아닌 자신의 철학(哲學)과 사상(思想)을 담은, 자신의 꿈(夢)과 희망(希望)이 담긴, 자신의 마음(心)과 생각(想)을 담아낸, 자신의 비전이 담겨진, 나라의 충성심(忠誠心)을 담아 놓은 이름을 넘어 그에게 특별히 부여된 명예(名譽)로운 칭호(稱號)이다.
그는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당나라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으로 임했다. 그리고 신라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로서 임무(任務)를 수행(遂行)했다. 넓히고, 지키고, 의지하게 해준 장한 이름이며, 신라가 낳은 훌륭한 인물(人物)이다. 세계적(世界的)인 칭호(稱號)이며 ‘글로벌 네이밍’ 이다.
궁복(弓福)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부모(父母)들은, 그가 7년 동안 기도 끝에 얻은 자식(子息)이라 귀중하게 생각했고, 그의 생김새나 하는 행동이 활(弓)을 좋아하고, 나라를 사랑해 그런 자식의 행동에 예사스럽지 않게 보고, 귀하게 얻은 이들을 〈복덩이〉 라고 불렀다. 활을 좋아해 이름을 ‘궁복(弓福)’ 이라고 지어줬다. 영암(靈岩) 덕진면(德津面) 선암(船岩)마을에는 활터가 남아있다. 마을 근처(近處)인 금정면(金井面)의 ‘활성산(活城山)과 궁성산(弓城山)’ 이 말해주고 있다. 궁복(弓福)은 ‘재주가 많고 능력을 갖춘 귀한 존재 복덩이’ 라는 뜻이다.
궁복이 태어난 선암마을에는 그의 흔적(痕迹)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궁복의 탄생설(誕生說)과 관련된 ‘건덕암(乾德岩)’ 과 궁복이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서 큰 우두머리가 됐다고 관련된 ‘국두암(國頭闇)’ 이 그를 말한다.
장보고가 궁복으로 태어난 곳마저도 왜곡(歪曲)되고 있다. 장보고가 태어난 곳이 영암(靈岩)이 아닌 ‘완도(莞島)’ 라고 일부에서는 말한다. 아니다. 전혀 다른 시각(視覺)에서 본 추론(追論)이며, 그릇된 판단(判斷)과 추측(推測)일 뿐이다.
장보고, 탄생(誕生): 영암군 선암-건덕암
장보고, 이주(移住): 당나라 서주-무령군
장보고, 대사(大使): 완도군 장도-청해진
이런 사실적(事實的)이고 역사적(歷史的)인 행적(行蹟)과 생얘(生涯)다.
●장보고의 육.해 물 흐름 인식, 그리고 활용
장보고는 ‘육지(陸地)에서 바다(海)로 물이 흐른다’ 가 아니라, ‘바다에서 육지로 물이 스며든다’ 라고 했다.
물은 보통 육지에서 바다로 흐른다는 개념(槪念)을 갖고 있다. 장보고는 그런 자연(自然)의 현상(現想)을 다르게 봤다. 그는 물이 육지에서 바다로 흐른 것이 아닌, 물이 바다에서 육지로 흘러들어간다고 여겼다.
다른 논리(論理)로 물의 흐름을 본 것이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간 것이 이치(理致)에 맞다. 그런데 그는 왜 반대로 보았을까? 장보고는 육지보다 바다를 좋아했고, 모든 것이 바다에서 탄생(誕生)되고, 발생(發生)되고, 완성(完成)되고,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바닷물이 육지로 흘러간다며, 그는 그런 물의 흐름을 이용(利用)해 바닷물 흐름에 따라 작업을 진행했다.
장보고는 “물이 육지로 흘러들어 가니, 그 물에 배를 띄워라” 하며 해외(海外)에서 싣고 온 물품(物品)들을 신라로 들어오게 했다. 그가 ‘물이 바다에서 육지로 흘러간다’ 라고 한 것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바다를 통해 육지나 곳곳으로 가게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지금은 하늘을 통해서 사람이나 물건들을 실어 나르는 시대가 됐지만, 그 때 당시에는 비행기(飛行機)의 항공기(航空機)는 없었고 배(船)만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았다.
바닷물이 육지로 들어온다는 말은 세계의 기운(氣運)이 신라로 들어온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장보고는 그런 생각으로 바다를 이용했다. ‘바닷물의 흐름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 라고 했다.
●심성에 빛나는 이름다운 밤하늘
장보고는 ‘발전성(發展性), 안정성(安定性), 평화성(平和性)’ 3성을 좋아했다. 이 세 성(性)은 ‘별 성(星)’ 으로 여겼다. 삼성이 빛나려 면은 나라가 발전(發展)되고, 그로 인하여 인정(安定)되고, 결국은 평화(平和)를 불러들이게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우주(宇宙)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가장 값지고 빛나는 별은 그리 많지 않고, 있는 것 중에는 ‘발전성(發展星), 안정성(安定星), 평화성(平和星)’ 이 가장 반짝거리고 멋있다고 봤다.
장보고는 국제자유무역을 추진하면서 세계 관계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더 나은 미래가 있다고 세계와 새로운 역사적 단계(段階)에 들어섰다며, 나라간의 대화(對話)는 더 평등(平等)하고, 소통(疏通)은 더 실용적(實用的)이며, 양측의 마지노선은 더 분명해졌다고 했다.
장보고는 무역과 사업을 고대하고 있다며, 신라 측에서도 전적으로 상호주의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는 각국이 신라 기업에 우호적(友好的)인 시장(市場) 환경을 조성해준다면, 신라 역시 이에 상응(相應)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상대의 행동에 따라 우호적(友好的)인 입장을 취했다.
장보고가 비춘 행성(行星)은 신라를 상징하는 ‘신성(新星)’ , 당나라를 상징하는 ‘당성(唐星)’ , 바다를 상징하는 ‘해성(海星)’ 으로 우주(宇宙)의 질서(秩序)를 만들어냈다. 우주질서는 세계관(世界觀)이며, 미래(未來)의 신비(神秘)를 드러낸 일이다.
이런 삼성은 북두칠성을 방위(方位)를 나타내는 별로 보듯이 삼성도 북두칠성(北斗七星)처럼 방위를 나타내면서 상성(祥星)으로서의 이 세별을 보고 미래를 점(占)췄다. 신성이 밝으면 앞날에 기쁜 일이 생기고, 당성이 밝으면 앞날에 즐거운 일이 생기고, 해성이 밝으면 행운(幸運)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다.
이 세 별들이 모두 반짝거리면 천운(天運)이 다가올 것이라는 예측(豫測)을 했다. 신라에게는 당성이 가까이서 빛났다. 당나라에도 신성(神星)이 가까이 빛났다. 해성이 빛나 온 누리를 찬란(燦爛)하게 할 때, 나라들은 큰 번영(繁榮)을 누렸다.
세 별들이 밝으니 온천하가 새롭다
온 천하가 새로우니 백성이 편하다
삼성이 빛나는 날, 세상은 평온(平溫)했다. 발전성(發展星), 안정성(安定星), 평화성(平和星)이 빛나 나라마다 국민들은 평온 상태로 유지(維持)됐다.
장보고는 이런 삼성이 빛나도록 그는 늘 밤하늘을 쳐다봤다. 행어 구름이 끼어 별을 보지 못할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삼성이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신성만 빛나서도, 당성만 빛나서도, 해성만 빛나서도 안 된다며, 세 별이 다 반짝이도록 노력(努力)했다.
신라의 신성(新星)은 샛별인 ‘금성(金星)’ 에 비유된다. 새벽에 관측되는 금성을 뜻하는 말로, 금성은 태양빛을 강하게 반사해 매우 밝게 보이는 행성(行星)으로, 밤하늘에서 달 다음으로 밝은 천체(天體)이다. 금성을 샛별이라고 부른 이유는 태양, 달 다음으로 지구에여 가장 밟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샛별이 황금별처럼 신성(新星)이 빛났다.
신라의 샛별 신성(新星), 밤하늘을 바라보면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별이 있는데, 바로 금성(金星)이라는 ‘샛별’ 이다. 샛별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자만, 그 뒤에 숨겨진 과학적(科學的) 사실과 매력적(魅力的)인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금성에 대해 다시 말하자면 샛별은 일반적으로 ‘금성(金星)’ 을 가리키는 용어다. 금성은 태양계에서 지구의 가장 가까운 행성 중 하나로, 사람들의 눈에 가장 밝게 빛나는 천체로 알려져 있다. 금성이 샛별로 불리는 이유는 저녁이나 새벽에 햇빛을 반사하여 유독 밝게 빛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금성이 하늘에서 가장 논에 띄어 샛별이라는 애칭(愛稱)이 붙여진 것이다.
샛별의 특징은 밝기, 위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이다. 금상은 보통 4.6등급의 밝기를 가지고 있어,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천체 중 하나이다. 이는 태양과 달을 제외한 별들 중에서는 가장 밝은 것이다.
금성은 태양(太陽)과 지구(地球)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항상 태양과 가까운 위치에서 관찰(觀察)된다. 이로 인해 금성은 해가 진 후 저녁에 나타나거나, 해가 떠오르기 전 새벽에 나타난다.
금성은 자전(自轉) 속도가 매우 느린 행성(行星)이다. 하루가 243일에 달하지만, 공전(公轉) 주기는 225일로, 결과적으로 금성의 하루는 금성의 해보다 길다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샛별은 고대부터 많은 문화에서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고대 로마에서는 금성을 사람과 미의 여신 비너스와 연관(連貫) 지었고, 다양한 신화(神話)와 전설(傳說) 속에서 그 의미가 각기 다르게 해석되었다. 오늘 날에도 샛별은 ‘사랑, 희망, 새로운 시작’ 을 상징하는 요소로 자주 사용되곤 한다.
샛별, 금성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존재이다. 밤라늘에서 이 특뵬한 별을 찾아보며 우주(宇宙)와 인간(人間)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게 하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샛별은 항상 우리 곁에서 빛나고 있다. 그 빛을 통해 희망과 영감(靈感)을 받게 한다.
신라의 별, New Star-신성(新星)이 매일 밤마다 가까이서 떠 빛난다.
신성을 신라 모든 지역과 백성들에게 비추게 하려했던 장보고는 이 신라의 별이 당.일본.동남아.아랍 등 전 세계적으로 비추도록 신성을 사랑과 희망. 반영(繁榮), 축복(祝福)이라는 태양빛에 반사(反射)되게 했다.
●귀촉도가 된 장보고
두견새(杜鵑鳥), 접동새, 소쩍새, 자규, 두우(杜宇)), 임금새 등 다양한 이름을 불리는 귀촉도는 몸길이가 26~28Cm로, 몸이 가늘고 작으며, 몸 색이 뻐꾸기류와 비슷하다. 부리는 검은색, 홍채는 붉은색, 다리는 노란색이다.
귀촉도인 두견이의 애달픈 울음소리는 선조들의 문학적(文學的) 상상력(想像力)을 자극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사(故事)와 시(詩)에서 망제혼(望帝魂), 촉혼(蜀魂), 귀촉도(歸蜀道), 자규(子規), 접동새, 촉조(蜀鳥), 촉백(蜀魄), 원조(怨鳥), 두백(杜魄), 두우(杜宇), 곽공(郭公), 시조(時鳥), 주각제금(住刻啼禽) 등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대체로 한(恨)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망제혼은 중국 촉나라의 왕 두우(杜宇)가 왕위를 빼앗기고, 망제(望帝)가 되어 억울하게 죽자 두견이가 되었다는 설에서 비롯되었다.
이 두견이는 목에서 피를 토하듯 애타게 울고, 그 피가 떨어져 두견화(杜鵑花), 즉 진달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선조 때 무신(武臣)이었던 정충신(鄭忠信)은 두견이에 비추어 조국의 위태로움을 시로 지었고, 단종(端宗)은 유배지(流配地)의 쓸쓸함을 두견이에 빗대어 자규시(子規詩)라는 시를 읊었다.
두견이는 흔하지 않은 여름철새로, 우리나라에 5월경 찾아와 9월 중순까지 머문다. 번식기(繁殖期)는 8월 초부터 8월말까지로, 뻐꾸기와 유사하게 직접 둥지를 만들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숙주(宿主) 새가 알을 품고, 가르게 한다.
두견새인 귀촉도는 전설에 의하면, ‘불여귀(不如歸)처럼 돌아가리라’ 하는 울음이 슬픔과 원한의 정서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이 울음이 귀촉도(歸蜀道)라는 이름의 기원(起源)으로 설명된다.
그런 귀촉도처럼 장보고는 귀촉도가 되어 당나라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다시 신라로 들어와 신라 국력(國力)과 안보(安保), 그리고 발전(發展)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귀촉도라는 새의 이름을 빗대어 ‘귀촉도(歸促跳)’ 라는 또 다른 의미로써 귀촉도로 부른다. 초나라의 왕, 양제(煬帝)가 왕위(王位)를 잃고 죽은 뒤 새가 되어 밤새 울었다고 전한 새는 불여귀(不如歸)처럼 ‘돌아가리라’ 는 뜻으로 울며, 이 울음이 귀촉도(歸蜀道)라는 이름의 기원이 됐다. 이 두견새(杜鵑鳥)인 귀촉도는 ‘귀환(歸還), 촉진(促進), 도약(跳躍)’ 을 말한다.
귀촉도는 중생(衆生)이요, 인연(因緣)이요, 고해(苦海)이며, 도(道)이다. 귀촉도는 바람에 스치는 별빛이다. 미풍(微風)에 흔들리는 주목(朱木)가지다. 처마에 걸린 풍경(風磬)이 가끔은 진단을 맞춘다.
여름이 달궈질수록 조금은 신선한 밤이 기다려진다. 밤이 기다려지는 건 그 선선한 기운 하나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귀촉도로 인해서도 여름밤이 기다려진다. 귀촉도가 저 심산(深山) 깊은 계곡(溪谷)에서 밤새워 부르는 세레나데-serenade(구애의 노래가 그렇게 애절(哀絶)할 수 없다.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자(修行者)들에게 귀촉도 노랫소리는 화두(話頭)가 될 게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장보고도 귀촉도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밤새, 그것도 오랫동안 세레나데를 울렸다. 서정주 시인의 귀촉도는 애달픈 사랑과 연관시켜 시를 읊었다면, 장보고는 귀촉도를 ‘귀환과 촉진과 도약’ 이라는 단어들로 귀환의 ‘귀’ 와, 촉진의 ‘촉’ 과 도약의 ‘도’ 의 세 글자를 따 〈귀촉도〉 로 울어 됐다. 장보고의 귀촉도는 애달픈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소리가 아닌 무언가 간절함이 담긴,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과 고향에 가서 어떠한 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힘차게 뛰어오르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 마음의 소리를 내는 새, 장보고를 상징하는 그만의 귀촉도로 울음을 내었다. 신라의 밤에 세레나데기 촉나라 양제의 두견새가 아닌 신라 장보고의 귀촉도((促觸跳)로 세레나데를 울려 퍼지게 했다.
장보고는 이런 의미로 귀촉도라는 새를 맞이했고, 이 새가 소리내기를 ‘돌아가리라, 나아가리라, 뛰어오르리라’ 했다.
그랬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24년간의 삶을 정리하고 다시 조국 신라로 돌아(歸)왔다. 그는 완도에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進)갔다. 그러면서 신라를 한단게 높이 뛰어오르(跳)게 만들었다.
●잠들지 않는 신라
신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가 천년이 넘었다. 신라는 지금으로부터(2026년) 1091년 전, 935년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 김부)이 고려(高麗) 태조 왕건(王建)에게 귀순(歸順)하면서 멸망(滅亡)했다.
멸망 직전에는 왕권(王權) 쟁탈(爭奪)과 국정(國政) 태만(怠慢), 민란(民亂) 등으로 국력(國力)이 약화되는 등 신라가 쇠약해져 정치(政治).민생(民生)이 무너졌다.
신라는 고려에 의해 멸망하여 사라지고 없지만, 신라의 혼은 아직 살아있다. 신라를 〈천년의 빛〉 이라고 여길 만큼, 신라는 아직도 금빛 찬란하다. 그래서 신라의 수도(首都)였던 경주(慶州)에서는 〈천년의 빛 신라〉 라고 말한다.
장보고가 제2의 인생을 설계(設計)하고, 그 플랜을 세계를 향해 펼쳤던, 그 무대(舞臺)가 된 완도 바다는 지금도 쉼 없이 파도(波濤)를 친다. 물결은 장보고의 ‘영혼(靈魂)’ 이며, 신라의 ‘정신(精神)’ 이다. 온 백성(百姓)들의 ‘사상(思想)’ 이요, ‘희망의 물결’ 이다.
완도 청해진(淸海鎭)은 18년간 운영(運營)하며, 신라를 국제무대(國際舞臺)로 화려하게 등장(登場)시켰다. 다른 시기에도 무대에 올라 신라의 진 모습을 보여줬지만, 장보고가 올린 무대만큼은 비교(比較)가 되지 않았다.
장보고가 올린 무대는 ‘군사(軍事)와 무역(貿易)’ 이다. 군사는 바다를 통한 해군력(海軍力)을 강화시켜 적(敵)으로부터 방어(防禦), 해적(海賊)으로부터 소탕(掃蕩)과 국가(國家)로부터 안보(安保), 왕권(王權)으로부터 안정(安定), 백성(百姓)으로부터 평안(平安), 세계(世界)로부터 평화(平和)의 질서(秩序)와 안녕(安寧)을 기했다.
신라는 이런 평온(平穩) 유지(維持)에 노력(努力)했고, 지금도 그 정신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이어가고 있다. 바다가 파도치듯이...
움직임이 있는 바다, 바다는 부동(不動)의 자세(姿勢)를 취하지를 않는다. 오직 동작(動作)에 에너지를 쏟는다. 생동감(生動感)이 넘치는 바다다. 그런 바다의 모습을 닮은 신라는 지금도 그 때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때 바다가 햇빛으로 금빛으로 물들었듯이 바다는 금빛 물결을 일으킨다.
장보고가 일으켰던 바다의 물결은 이어져 왔던 것이었고-과거형, 이었고-현재형, 이어지고-미래형 있다. 물결은 예술적(藝術的)인 미(美)를 띈다. 문화적(文化的) 감수성(感受性)도 나타낸다. 또한 정치적(政治的) 사상(思想)도 느껴진다. 사회적(社會的) 환경(環境)도 연출된다.
바다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이런 질문(質問)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고래나 상어, 갈매기 등을 말하지 않고, ‘생동(生動)의 에너지’ 를 느낀다고 말한다. 바다의 움직임이 더 강하게 다가온 것이다.
바다는 지구(地球)를 띄울 만큼 부력(浮力)을 갖고 있다. 또 띄운 자구를 떠가게 할 정도다. 그만큼 바다는 강하고, 위대하고, 대단하다. 그런 바다를 활용했던 장보고였다. 신라의 별인 장보고, 신라는 그런 인물에 의해 바다를 출렁거리게 했고, 〈바다는 춤춘다〉 라고 부각(浮刻)되게 했다.
신라는 천년동안 한반도(韓半島)를 생기(生氣)를 불어넣었고, 화려(華麗)하게 꽃을 치우게 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고구려.발해.백제.고려.조선보다도 가장 훌륭한 문화(文化)를 꽃피운 나라였다고 평가(評價)한다.
특히 ‘금(金)’ 의 나라라고 볼만큼, 신라는 황금(黃金)으로 문화(文化)를 만들었고, 사상(思想)을 드러냈다. ‘신라를 빛내자’ 라는 것과 ‘신라를 반짝이게 하자’ 라는 생각을 하며, 모든 길은 금으로 통하게 했다. 신라를 〈화려함〉 의 신라를 가꾸고자 했던 것이다.
그 화려함은 아직도 빛난다. 지금도 그 빛이 우리를 황홀케 한다. 신라의 정신이 천년 이후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다. 바다의 흐름처럼...
●스스로 지키는 힘, 미래를 준비한 국방
장보고는 왜 외국군(外國軍)이 없으면 자체 방위(防圍)가 어려운가? 라는 자주국방(自主國防)을 강조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있을 때부터 몸은 당(唐)에 있었지만, 마음은 조국 신라(新羅)에 가 있었다.
그는 신라가 갈수록 국력(國力)이 쇠약(衰弱)해진 것을 두고, 걱정하며 여러 생각을 했었다. 신라의 국력(國力)을 키워야한다. 방위안보(防圍安保)의 자주국방(自主國防)을 취해야한다 라며, 이러저런 이유로 군사(軍事) 안보(安保) 분야에 대한 불안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국가 스스로 지켜야지 왜 의존(依存)하는가” , ‘스스로 지키는 힘, 미래를 준비한 국방’ 이라는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힘을 기르고, 미래를 준비할 국방력(國防力)을 갖출 만한 능력(能力)이 있는, 당연히 신라는 할 수 있다고 봤다. 백성(百姓)들의 뛰어난 노력(努力)과 역량(力量)으로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자신감(自信感)을 갖고 당연히 스스로 책임(責任)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보고는 우리 스스로 방어하고, 전략(戰略).작전(作戰) 계획을 짜고 할 준비를 해놔야 한다. 전술(戰術).전략(戰略)도 충분히 스스로 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고 주문하며 자주국방(自主國防) 태세(態勢)를 취하게 했다.
장보고는 동맹국(同盟國)과의 협력관계(協力關係)에 대해 상호존중(相互尊重)을 바탕으로 상식(常識)과 원칙(原則)에 따라 당면한 현안(懸案)을 풀면서, 건강하고 미래(未來) 지향적(指向的)인 관계를 구축(構築)하는 지혜(智慧)가 필요하다며, 주권(主權) 국가로서 당당한 자세(姿勢)로 우방(友邦)들과 진정한 우정(友情)을 쌓는 외교(外交)에 주력(注力)했다.
완도 청해진(淸海鎭)은 무인화(無人化), 자율화(自律化), 지능화(知能化), 군집화(群集化) 등 미래도전국방기술(未來挑戰國防技術) 기반의 신라형 모자이크 전장(戰場) 구축(構築)을 통해 미래 전방위(全防圍) 위협(威脅)에 굳건히 대비(對備)하고, 전장의 패러다임을 전환(轉換)할 수 있는 게임 체인지를 개발(開發)한 기지(基地)이다. 청해진은 미래도전국방기술의 선택(選擇)과 집중(集中)이다.
나당연합(羅唐聯合), 신라와 당나라가 7세기 중후반에 맺은 군사동맹(軍事同盟)이다. 나당동맹(羅唐同盟), 나당연합(羅唐聯合)이라고 하는, 이 동맹은 신라가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를 정벌(征伐)하고자, 당과 연합(聯合)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결성(結成)한 나당연합이다.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동맹은 648년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에 이뤄진 일이다. 배경에 신라가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에 대항(對抗), 김춘추(金春秋)를 내세워 외교(外交)로 동맹(同盟)을 맺었다.
나당연합으로 백제(百濟)가 660년에 멸망(滅亡)했고, 고구려(高句麗)는 668년에 멸망했다. 그런 연맹(聯盟).연합(聯合)을 이룬 나당(羅唐)은 관계가 틀어져, 결국 나당 전쟁(戰爭)을 동맹이 파기(破棄)되었다.
나당연합은 고구려의 침략(侵略)과 백제의 신라 공격(攻擊) 등으로 신라가 위기(危機)에 처한 가운데, 김춘추가 당과의 동맹을 추진해 나당동맹(羅唐同盟)이 성립되었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은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고(사비성 함락 660) 이후, 고구려를 공격(攻擊)해 멸망(滅亡)시킨 것이다. 그런데 나당연합군이 멸망한 뒤 한반도(韓半島)에 대한 야심(野心)을 보이자, 신라가 당과 대결(對決)해 나당전쟁(羅唐戰爭)을 벌였고, 결국 동맹(同盟)이 사실상 파기(破棄)되고 말았다.
나당연합은 648년 김춘추(金春秋)와 이세민(李世民)의 협상(協商)으로 결성한 동맹(同盟)이다. 이후 650년 6월까지 삼국시대(三國時代) 신라의 마지막 연호(年號)인 태화(太和)를 사용하였으나, 이루 당 고종(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한 시점부터 당 조공질서(朝貢秩序)에 편입(編入)하여 나당동맹(羅唐同盟)이 성립(成立)됐다.
나당동맹.연합의 문제점(問題點)은 연합이 주체성(主體性)을 약화(弱化)시키고, 나당연합군 같은 용어(用語)가 비하적(卑下的)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는 비판(批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라가 당의 야욕(野慾)을 마다 통일(統一)을 이뤘지만, 당의 존재(存在)가 신라의 성과(成果)를 전적으로 좌우(左右)했다고 연합의 한계성(限界性) 드러내었다.
나당연합으로 통일을 이뤘지만, 결국은 대동강(大同江) 북(北)쪽 고구려(高句麗) 땅을 잃는 등 영토적(領土的) 손실(損失)이 컸다. 대동강 북쪽 고구려 땅 대부분을 잃었다.
나당연합군이 상대국(相對國)을 비하(卑下)하는 축의 표기의 중화식민(中華植民)이라는 용어로 당은 신라를 자신의 통치(統治)에 있는 소국(小國)으로 취급(取扱)했다.
신라가 당과 연합(聯合)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는 데 기여(寄與)했지만, 이후 영토(領土) 문제와 당의 야욕(野慾)이 충돌하며 신라의 불만이 커졌다.
당이 신라를 지배(支配)하려 설치한 통치기관(統治機關)의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는 등 신라를 편입하려했다.
신라가 당에 주권(主權).군권(軍權)을 일부를 바치며, 전쟁(戰爭)을 수행(遂行)했지만, 실익(實益)이 적고, 위협(威脅)만 커졌다.
나당연합군 그럴듯한 명칭(名稱)이지만, 나당연합군은 삼국시기(三國時期)에서 국명(國名)을 축약(縮約)해 타칭(打稱)하는 방식으로 쓰였고, 이는 적대적(敵對的).비하적(卑下的) 의미를 내포(內包)했다.
이런 용어가 고대사(古代史)에 한정(限定)되지 않고, 중세(中世).근세(近世).근대(近代).현대(現代)까지 확대(擴大) 재생산(再生産)되며, 중화식민용(中華植民) 용어(用語)로 쓰인다.
나당연합의 문제점은 첫 번째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과 연합(聯合)하고,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 땅 대부분을 잃었다는 점에서 한계(限界)가 있다.
나당연합의 결과는 고구려.백제가 멸망되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三國)이 통일되었다. 그리고 통일신라(統一新羅)가 창조(創造)되었다.
나당연합은 신라가 순간 잘못된 판단(判斷)으로 인한 잘못된 연합(聯合)이었다. 게다가 당은 신라의 요청(要請)을 기회(機會)로 생각하였다. 마음에 흑심(黑心)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삼국통일을 하였지만, 그것은 진정한 민족통일(民族統一)이 아니었다.
나당연합의 시사점(時事點), 나당연합은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동맹)을 통해 백제.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 통일을 이룬 과정에서 동맹이 유동성(流動性)과 강대국(强大國)의 지배(支配) 욕심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事例)다.
또한 663년 백제 부흥군(復興軍)이 왜(倭) 지원군(支援軍)과 함께 나당연힙군(羅唐聯合軍)과 백강(현재 금강하구 인근)에서 벌인 백강전투(白江戰鬪)에서 협공(挾攻)이 핵심 전술(戰術)로 작동했으며, 이후 신라가 당의 간섭(干涉)을 막기 위해 전쟁(戰爭)을 벌인 점이 시사(時事)된다.
강대국은 동맹을 도구(道具)로 삼을 수 있다. 신라는 당과 협력(協力)했지만, 당의 지배 의도(意圖)에 반발해 나당전쟁(羅唐戰爭)으로 전개(展開)되었다.
신라는 당의 도움을 받되, 최종적으로는 자주적(自主的) 통일(統一)을 추구(追求)했다.
나당연합은 신라가 당에 구원(救援)을 요청한 외교적(外交的) 출구였고, 당은 고구려를 협공하기 위한 전초전(前哨戰)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 멸망 이후에도 양국은 백제 지역을 어떻게 다룰지 합의(合議)가 부족했고, 당의 도독부(度督府) 설치가 신라의 반발을 키웠다.
결국 신라는 당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獨立)을 확보했으며, 이는 동맹이 영속적(永續的)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로 인용(引用)된다.
한반도 역사(歷史)에서 중요한 전환점(轉換點)을 만든 사건(事件) 중 하나가 바로 나당연합(羅唐聯合)이다.
신라와 당나라가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후 고구려까지 무너뜨린 이 동맹은 단순한 군사(軍事) 협력(協力)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당시의 국제(國際) 정세(政勢)와 신라의 정치적(政治的) 선택(選擇), 그리고 전쟁 이후 변화한 동아시아 질서(秩序)를 살펴보면 나당연합(羅唐聯合)이 단순한 일회성(一回性) 협력이 아닌 장기적(長期的)인 전략적(戰略的) 움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한반도는 삼국이 치열(熾熱)하게 대립(對立)하던 시기였다. 특히 백제와 고구려의 견제(牽制)가 심했던 신라는 지속적(持續的)으로 외교적(外交的)인 출구(出口)를 찾고 있었다. 여기에 당나라의 존재는 신라에게 하나의 기회로 다가왔다.
신라의 위기(危機),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挾攻)에 시달리며, 방어9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 진흥왕(眞興王) 때 강하게 확장(擴張)했던 국력(國力)이 점차 쇠퇴(衰退)하며 외부(外部)의 도움이 절실(切實)했다.
장보고는 나당연합이 신라에 끼치는 영향과 문제점.시사점이 무언지를 읽어냈다. 당나라와 손을 잡고 동맹국(同盟國).연합국(聯合國)으로서의 신라의 안정과 평화를 기했다. 나당연합으로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당의 야욕에 신라는 얻은 만큼 어려움이 많았다. 고구려를 차지했던 것마저도 당나라에 뺏기고 말았다. 당은 신라를 간섭(干涉)했고, 자기들의 손안에 넣으려고 했다. 당은 동맹.연합 한척하면서 신라를 속국(屬國)으로 만들려고 했다. 신라를 예속국(隸屬國).종속국(從屬國).속방(屬邦)으로 만들려고 한 당나라의 야욕(野慾)은 신라를 화(禍)나게 했으며, 자존심(自尊心)을 상(傷)하게 했다.
그런 나당연합에 장보고는 깨달은 점이 많았으며, 그는 당나라 무령군(武寧軍)에 있을 때, 나당연합군의 문제점과 시사점을 바로 읽고, 생각하는 것이 많았다. 장보고는 나당연합군으로 통일신라(統一新羅)를 이룬 것은 높이 평가(評價)를 내렸지만, 그 계기로 당나라가 신라를 속국으로 삼으려는 흑심(黑心)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분노(忿怒)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당나라에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으로 근무(勤務)를 했지만,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군사기술(軍事技術)을 베우기 위해, 무역기술(貿易技術)을 터득(攄得)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군인(軍人)으로서의 임무(任務) 띠는 등의 당나라에서 군인(軍人)이라는 일생(一生)을 보내게 됐다.
장보고는 나는 필시 신라에 가서 ‘스스로 지키는 힘, 미래를 준비한 국방’ 을 실천하겠다고 마음먹고 조국을 떠난(805년) 지 23년 만에 신라로 돌아와(828년), 그가 당나라에 있을 떼 꿈꾸고 희망하며 구상(構想)한 계획(計劃)을 실천(實踐)하고자 지금의 완도(莞島) 장도(長島)라는 작은 섬에 군사(軍事).무역(貿易) 기지(基地)인 ‘청해진(淸海鎭, 828년 흥덕왕 3년~846년 문성왕 8년, 18년간 운영)’ 을 설치했다.
신라 42대 임금인 흥덕왕(興德王, 김우징)이 장보고(張保皐)를 즉시 청해진(淸海鎭) 특명정권대사(特命政權大使)로 임명(任命)한 것은 신라가 세계(世界) 최초(最初) 일류국가(一流國家)로 도약(跳躍)해야 하는 결정적(決定的) 시기(時期)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일할 수 있는 노련(勞聯)한,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종사(從事)하여 기술(技術)이 뛰어난 베테랑의 능력(能力)을 갖춘 사람이 필요해, 당나라에서 군사가술(軍事技術).무역기술(貿易技術)을 배운 장보고가 가장 적합(適合)하다고 보고, 그를 주저(躊躇) 없이 청해진 첫 대사로 부임(赴任)하게 했다. 장보고는 창해진 설립자(設立者), 경영자(經營者), 관리자(管理者), 지휘자(指揮者)로서의 청해진을 이끌어갔다.
신라가 당(唐)의 힘을 빌려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멸망(滅亡)시키고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루었지만, 남는 건 신라를 더욱 나약(懦弱)한 존재로 비추거나, 의존(依存)한 길로 나아가게 했고, 정치(政治).경제(經濟).사회적(社會的) 혼란(混亂)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다른 나라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신라,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아 성장하게 한 신라로 낙인(烙印)되거나 취급(取扱)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發生)했다.
이런 신라의 부끄러움을 안 장보고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며, 그는 ‘스스로 지키는 힘, 미래를 준비한 국방’ 이라는 기치(旗幟)를 내걸고, “스스로 방어(防禦)하지 못하는 나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 국가(國家)가 스스로 방어하는, 즉 “자주국방(自主國防)이 확고(確固)한 나라가 진정한 국가의 완성(完成)돤 모습입니다” 라고 역설(逆說)했다.
장보고의 청해진 추진, 스스로 안보(安保)를 책임(責任)지겠다는 의지(意志)와 상징(象徵)이다.
장보고는 신라 미래국방전략회의(未來國防戰略會議)를 주재(主宰)하고, 전작권(戰作權) 회복 로드앱을 완성했다. 그는 청해진 설치와 전사적통제권(戰事的統制權) 조기(早期) 회복(回復)을 국방(國防) 대전환(大轉換)의 핵심(核心) 과제(課題)로 제사(提示)하며, ‘신라는 우리 힘으로 스스로 지킨다’ 는 의지를 바탕으로 신라 국방의 미래를 준비(準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는 나라가 진정한 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봤다. 국가가 스스로 방어하는, 즉 자주국방(自主國防)이 확고한 나라가 진정한 국가의 완성된 모습이라고 했다.
장보고는 ‘스스로 지키는 힘, 미래를 준비한 국방’ 이라는 주제로 청해진 설치에 관한 필요성(必要性)을 제시(提示)하며 섬지역인 완도에 청해진을 두어 해상질서(海上秩序)와 국방(國防).경제(經濟) 안보(安保)를 통해 신라의 안정(安定)과 평화(平和), 그리고 발전(發展)과 번영(繁榮)을 기했다.
청해진 설치, 굳건한 기반(基盤)으로 군사.무역기지의 청해진 추진은 한반도의 평화(平和)와 안보(安保)를 우리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의지(意志)의 상징이다. 나아가 신라의 방위산업(防衛産業) 역량(力量) 강화에도 크게 기여하게 하겠다는 간절한 소망(所望)이다.
청해진은 미래국방전략(未來國防戰略)의 역할을 담당, 미래국방전략의 청해진은 단순한 자문기구(諮問機構)를 넘어, 신라 국방(國防)의 내일을 직접 설계(設計)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했다. 민간의 전문성(專門性)과 창의성(創意性)이 정부의 실행력(實行力)과 결합(結合)해 더욱 큰 효과(效果)를 내게 했다.
청해진은 국방(國防)뿐만 아니라, 무역(貿易)에도 담당하게 하는 등의 경제(經濟) 안보로써의 역할을 띠며, 국제무역(國際貿易)에도 박차(拍車)를 가했다. ‘스스로 개척한 길, 신라를 키우는 무역’ 이라는 주제로 청해진을 국제자유무역기지(國際自由貿易基地)로 부상(浮上)하게 했다.
스스로 해상무역(海上貿易)을 개척(開拓)하는 길이야말로, 신라를 크게 키우는 일이 될 것이며, 키우는 일에는 해상(海上)을 통한 ‘무역(貿易)’ 이라고 했다.
장보고는 ‘스스로 키우는 힘, 미래를 준비한 국방’ 과 ‘스스로 개척한 길, 신라를 키우는 무역’ 을 자신의 이름 장+보+고로 의미를 두어 추진했다. 확장(張)을 위한 도움(保)이 되게 한 기댈 언덕(皐)이 되어주었다.
장보고, 이름 석 자에는 ‘강하다’ 라는 이미지가 풍긴다. 확장(擴張)을 의미한 장(張)은 확장성(擴張性)을 강조하는 맥락(脈絡)이나, 확장-Expansion이 강하게 진행됨을 말한다. 군사(軍事).안보(安保)에서는 점진적(漸進的)으로 확장되는 전략(戰略), 외교(外交).경제(經濟).무역(貿易)에서는 특정 현상이 강하게 확장된 것을 말한다.
신라 해상무역(海上貿易) 점차 더 강한 확장(擴張) 신호(信號), 청해진 이후 가장 강한 신라 해상무역 성장(成長)을 이뤘다. 신라 무역은 장보고가 운영하는 청해진(淸海鎭)을 통해 급성장했으며, 날이 갈수록 무역지도(貿易地圖)는 크게 그려져만 갔다. 이는 그동안 신라 역사에서 획기적(劃期的)인 일로 장보고에 의해 신라 해상무역은 날로 발전을 거듭하는 등, 이후 가장 강력한 제조업(製造業) 확장을 나타내며, 생산(生産)은 어느 때보다 가장 빠른 속도(速度)로 성장(成長)하고, 고용(雇用) 창출(創出)이나, 거래(去來)는 최고치(最高値)를 기록(記錄)했다.
일부 품목(品目)에서는 둔화(鈍化)되는 현상(現狀)을 보였지만, 역사상 강한 수준(水準)을 유지(維持)했으며, 이는 주변국의 갈등 속에서 고객(顧客)의 예방적(豫防的) 제고(提高), 축적(蓄積)에 의해 부분적(部分的)으로 촉진(促進)되었다.
강군사(强軍事), 강안보(强安保)를 바탕으로 ‘강외교(强外交), 강무역(强貿易), 강거래(强去來), 강신라(强新羅)’ 라는 강한 정책(政策)으로, 신라는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을 통해 신라의 제품의 현대화(現代化)와 과학화(科學化), 기술화(技術化), 문화화(文化化), 첨단화(尖端化)를 담은 〈강신라 브랜드〉 의 글로벌 파트너십을 확대하기 위해 장(張)이라는 확장성(擴張性)의 강인함을 보여주며, 청해진은 세계 시장에서 성공(成功)을 거둔 〈강신라〉 마케팅 전략(戰略)과 〈강무역〉 의 전문적(專門的)인 제품력(製品力)을 결합(結合)해 시너지를 극대화(極大化)했다. 장보고는 이런 강신라, 강무역으로 동남아시아를 넘어 페르시아 등 아랍 시장(市場)을 겨냥한 사업구조(事業構造) 고도화(高度化)에 속도를 내며, 제품(製品) 경쟁(競爭)의 강화와 현지 맞춤형 제품 기획(企劃)을 통해 글로벌 소비자(消費者)의 눈높이에 맞춘 프리미엄 제품 브랜드로 〈강신라 강무역〉 을 육성(育成)과 동시 교역(交易)을 추진했다.
장은 보(保)라는 ‘강한 보호-지키다. 강한 지원보조-돕다’ 라는 신라는 백성건강보험(百姓健康保險) 공지문(公知文)에서 ‘더 건강한 내일을 위한 건강보장’ 과 함께 ‘지킴이’ 라는 표현으로 백성을 보살폈다.
장보고는 ‘우리 마을 지킴이, 우리 동내 파수꾼’ 등 지역 치안(治安).안전(安全) 맥락의 지킴이로 자신의 이름 보(保)를 ‘돕다, 지키다’ 라는 의미로 쓰이게 했다.
신라가 ‘강한 지킴과 도움’ 이라는 문구(文句)로 범죄피해자(犯罪被害者) 보호(保護).안전(安全) 등 ‘지킴’ 과 ‘도움’ 에 해당되는 과제(課題)들이 추진(推進)되었다.
보(保)는 ‘지킴이’ 로써 피해자(被害者) 보호(保護), 안전확보(安全確保), 사회복귀(社會復歸) 지원(支援) 등 보호안전(保護安全) 기능(機能)으로 국가가 강한 ‘지킴과 도움’ 이 되게 해주었다.
또 고(皐)라는 ‘강한 언덕’ 이 되어주었다. 의지(依支)할 곳이나, 기회(機會)를 주는 강한 언덕으로서, 비전과 희망으로 ‘정신적(精神的), 물질적(物質的)’ 언덕이 되어 주었다. 의지(依支)할 곳이나, 시련(試鍊)을 견디는 힘, 그 의지의 근원(根源), 즉 정신(精神).물질(物質)의 언덕으로 고(皐)를 쓰였다.
이렇듯 장보고의 이름에서 ‘강한 기운(氣運)’ 이 느껴진다. 대학(大學) 경문(經文) 1장에서 제시한 삼강령(三綱領) 중 마지막인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 ‘물질적(物質的)이든 정신적(精神的)이든 모든 존재(存在)는 머물려야 할 최고(最高)의 자리가 있다’ 라는 뜻의 ‘머무름’ 을 강조한 말로써, 장보고도 신라 청해진에 ‘재지어지선’ 의 머물게 하였다. 그 머물음은 ‘백성(百姓)과 세상(世上)’ 이다. 백성과 세상에 지속적(持續的)으로 자리 잡게 한, ‘머물다’ 를 일상적(日常的) 체험(體驗), 지역(地域)과 문화(文化)와 연결해, 개인(個人)이 머무는 곳에서의 경험(經驗)이 국민적(國民的).사회적(社會的) 의미로 확장되게 했다.
‘백성이 부르면 언재든지 달려간다.’ ‘백성이 물으면 장보고가 답한다’ 는 장보고 철학(哲學)을 지향(指向)하고, 반영(反映)하여 백성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었다.
장보고는 “세상을 바꾸는 힘은 언제나 백성과 세상에게 있습니다” 라고 백성세상청원(百姓世上請援)에 귀를 기울이며 답했고 들어줬다.
장보고는 “백성.세상과 소통(疏通)하고 시작한 백성세상청원은 청해진이 더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 되었다” 며 “소홀히 해왔던 일들이 백성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價値)를 실감하는 계기(契機)였다” 고 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소통창구(疏通窓口)로 하여 청해진과 백성.세상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백성세상청원에 적극적(積極的)으로 참여(參與)함으로써, 크고 구체적(具體的)인 변화를 이끌어왔다. ‘나라의 주인(主人)은 백성(百姓), 세계의 주인은 세상사람’ 이라는 말답게 백성세상청원의 문제점(問題點)을 고쳐나가 참여민주주의(參與民主主義)의 좋은 사례(事例)로 만들어 내, 밝고 활기찬 미래(未來)를 기대케 했다.
이런 강한 성질(性質)의 기질(氣質)로 청해진을 운영한 장보고는 대사(大使)로서 외교(外交)와 무역(貿易), 장수(將帥)로서 방어(防禦)와 안보(安保)에 집중(集中)해, 강인성(强靭性)이 있는 〈장보고〉 라는 아름으로 강한 실천력(實踐力)을 보여줬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터보엔진을 단 스피드한 스포츠카, 강력한 힘의 기관차, 많은 화물(貨物)을 실은 컨테이너선이 아닌가 한다.
장보고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군사.무역의 중단 없는 정책(政策)으로 실행력(實行力) 보여줬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처럼 개인의 내적(內的) 동기(動機)로 강력한 추진력(推進力)을 발휘(發揮)했다.
강력한 추진력(推進力) 의미의 장보고는 중단 없는 실행(實行).결과(結果)의 지향적(指向的) 리더십 자기 극복(克服)과 목표(目標) 달성(達成)을 위한 내적(內的) 의지(意志) 공공투자(公共投資)로 촉발(促發)되는 성장(成長).일자리.인프라 확장(擴張) 등에 탁월(卓越)한 실력(實力)을 나타냈다.
장보고는 강력한 추진력(推進力)으로 신라 발전 향해 중단 없이 질주(疾走)했다. 그는 “쉬운 일 몇 개 지키고서, 생색(生色)내는 나약(懦弱)한 지도자(指導者)는 거부(拒否)한다” 며 “경제는 숫자로 말해야 한다. 숫자가 실력(實力)” 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청해진은 스스로 지키는 힘, 미래를 준비한 국방과 무역” 이라고 강조했다.
사회(社會)의 변화(變化)와 발전(發展)을 추구(追求)하는 진보적(進步的) 강성층(强性層)인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 앞에 굳셀 강(强)을 붙여 〈강장보고〉 라고 칭하며, ‘확실한 정책(政策), 강력한 추진력(推進力) 신라의 새로운 1000년 준비 장보고’ 로 내세웠다.
그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신라 경제.사회.문화 등 ‘희망노선 뒷받침’ 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상로(海上路) 확충(擴充) 같은 대규모 사업은 결국 내 자신이 얼마나 확고(確固)한 의지(意志)와 신념(信念)을 가지고 제대로 된 그림을 그려내느냐에 달려있다고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장보고임을 부각(浮刻)시켰다.
장보고는 청렴(淸廉)과 추진력(推進力), 중단 없는 도약(跳躍)과 대업(大業)을 위해 사업의 맥락(脈絡)을 잘 집고, 중단 없는 도약과 대업을 완수(完遂)해 냈다.
검증(檢證)된 능력(能力), 추진력(推進力)으로 신라 미래(未來) 완성(完成)을 해냈다.
장보고는 “지금 신라에는 과거(過去)에 안주(安住)하는 정치(政治)가 아니라, 미래를 끝까지 밀어붙일 강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며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과(結果)로 증명(證明)한 인물(人物)이 필요하다” 고 자신이 그런 인물이 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가능하다고 했던 완도 청해진(淸海鎭) 설치와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 추진을 현실로 만들었다고 했다.
장보고는 군사(軍事).무역기지(貿易基地)의 청해진을 설치하여, 강력한 추진력으로 제2의 신라 기적(奇蹟)을 이뤄냈다.
장보고는 “흔들리는 신라,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하다.” 라는 필요성(必要性)을 제기하며, 지금 신라는 산업구조(産業構造) 재편(再編), 기술경쟁(技術競爭) 치열(熾烈) 등 다양한 도전(挑戰)에 직면(直面)하면서 신라가 흔들리고 있다. 침체(沈滯)된 경제(經濟)와 지역(地域)에 산재(散在)해 있는 현안(懸案)을 해결(解決)할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이 필요하다며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로 있는 동안, 추진력(推進力)과 지도력(指導力)을 발휘(發揮)하겠다고 신라 장수(將帥), 신라 대사(大使) 장보고가 다시 한 번 더 천년신라號의 선장(船長)을 꿈꾸었다.
장보고는 자식(子息)의 안전(安全)을 걱정하는 아빠처럼, 신라의 백성과 나라의 안전을 살피고, 지역 경제(經濟)를 고민(苦悶)하는 신라 행복(幸福) 수호자(守護者)다. 백성의 권익(權益)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단호(斷乎)하고, 신라의 발전(發展)을 가로 막는 장애물(障碍物) 앞에서는 그 어떤 풍파(風波)도 뚫고 나가는 강력한 추진력(推進力)을 갖춘 사람이었다. 부드러운 미소 뒤에는 감춰진 이 뜨거운 열정(熱情)이 신라 발전(發展), 더 나아가 세계의 발전을 앞장서 만들 사람이었다.
신라를 어떻게 다자인할 것이냐에 따라서 신라의 미래가 달라졌다. 이것을 꼼꼼히 챙기고, 이것을 계획(計劃)하고 진행(進行)했던 장보고였다.
朱.氣 칭찬 일색, 부드러움과 강력한 추진력을 검비(兼備)한 장보고의 군사.무역 정책은 이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징보고는 최고의 야전(野戰) 사령관(司令官)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신라 제국(帝國)의 대사(大使)로서는 뛰어난 지도자(指導者)였다. 장보고는 당나라 무령군(武寧軍) 소정(少將)으로 동남아시아 최강(最强)의 나라를 상대로 싸우면서 스스로 학습(學習)했고, 당나라 군대(軍隊)를 더욱 강하게 성장(成長)시킬 수 있었다.
그는 패배(敗北)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상대의 강함을 알았으며, 주어진 상황(狀況) 속에서 정열적(情熱的)으로 대처(對處)한 지도자였다. 청해진 장보고 대사, 강력한 추진력으로 신라를 일으켰다.
신라에게 힘을 실어주는 청해진, 신라를 지키는 청해진, 그리고 신라 정부가 안정적(安定的)으로 운영(運營)할 수 있도록 왕(王)과 함께하는 청해진으로서의 ‘신라가 없으면 한반도도 없다’ 라는 일념(一念)으로, 백성(百姓)과 국가(國家)가 대(大) 결집(結集)을 이루는 세력(勢力) 대 세력(勢力)의 청해진이라고 보고, 청해진은 작용(作用)과 반작용(反作用)이 아닌, 즉 쌍이 아닌 다른 힘의 협력으로 함께 나아가는 일을 모색(摸索)하고 도모(圖謀)하는 청해진이다.
그동안 신라 사회에서는 작용과 반작용이 동시에 일어났다. 혼돈(混沌)을 낳을 정도로 정치.경제.문화 등에서 많은 기복(起伏)이 일어났다. 특히 정치(政治)가 어느 때는 한 세력(勢力)으로 작용(作用)했다가, 어느 시기(時期)에서는 반작용(反作用) 세력(勢力)이 득세(得勢)를 했다. 혼란(混亂)의 시기는 여전했다. 이런 작용과 반작용에 대해 장보고는 어떻게 하면 두 작용의 세력이 한 세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고민(苦悶)했다.
장보고는 세력(勢力)과 세력(勢力), 보수(保守)와 진보(進步)의 양 갈래를 한 갈래로 만들고자, 그는 전혀 다른 길을 구상(構想)했다. 바로 ‘청해진(淸海鎭) 세력(勢力)이요, 중도(中道) 청해진’ 이다.
청해진은 어느 세력(勢力)에 치우치지 않았다. 다만 질서(秩序)를 바로 집을 필요성이 있을 시, 반작용(反作用)을 해보이거나, 변화(變化)를 두려하는 보수(保守)에 맞서는 진보정치(進步政治)에 나서줬다. 그렇다고 반작용을 하거나, 진보에 가담(加擔)했다고 해서 사상(思想)마저 물들인 것은 아니었다. 장보고는 현명(賢明)한 판단(判斷)으로 역할을 수행(修行)했다.
장보고는 절대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게 하거나, 부끄럽게 하질 않았으며, 그는 오로지 자신의 이름을 명예(名譽)스럽게 여기며,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브랜드, 사상(思想)의 철학(哲學), 문학(文學)의 정석(定石), 정치(政治)의 정도(正道), 문화(文化)의 척도(尺度), 사회(社會)의 덕목(德目)’ 으로 여기고, 종교(宗敎).사상(思想).철학(哲學).심리학(心理學)의 정신세계(精神世界)-Spiritual World를 갖춰 장보고 이름을 깨끗이 했고, 신선(神仙) 시 하였다.
장보고라는 이름에는 ‘도(道)와 예(禮), 지(智), 충(忠), 경(敬), 애(愛)’ 가 담겨져 있다. 또한 ‘덕(德)과 용(勇)’ 이 들어져 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나라에 충성(忠誠),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충성스럽고 참된 정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이었다. 백성과 나라에 덕(德)을 베풀겠다는 마음을 드러낸 일이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어느 성씨(姓氏)에서 파생(派生)되거나, 한 가문(家門)의 족보(族譜)의 혈통(血統)을 같이 한 것도 아니며, 장씨(張氏)라는 그 집안의 피(血)를 물려받거나 관련(關聯)된 것도 아니다. 그는 궁복(弓福)에서 장보고(張保皐)로 개명(改名)한 이유는 나라를 향한 정신(精神)에 입각(立脚)한, 충성심(忠誠心)에 불탄, 사명감(使命感)에 ‘획장하다. 지키다. 언덕이 되어주다’ 라는 의미가 담긴 〈장보고〉 라는 이름을 지었다.
장보고의 장(張)은 신라(新羅) 국토(國土) 확장(擴張)을 통한 나라 발전(發展)과 번영(繁榮), 보(保)는 국가(國家) 방어(防禦)와 안보(安保)를 통한 안정(安定)과 평화(平和), 고(皐)는 강한 국력(國力)과 신뢰(信賴)를 통한 의지(依支)와 활력(活力)의 상태로 유지(維持)해 가겠다는 다짐이요, 국가관(國家觀)이다. 이것이 바로 ‘안정(安定)돤 평행(平衡) 상태(狀態)-Stable Equilibrium State’ 라고 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당나라를 포함한 어떤 국가(國家)도 패권(覇權)을 행사(行事)해 당나라와 동맹국(同盟國)의 안보(安保)나 번영(繁榮)을 흔들 수 없는, 유리(有利)하지만 지속 가능한 세력(勢力) 균형(均衡)을 뜻한다.
장보고는 신라가 원하는 것, 동맹국(同盟國)들이 원하는 것, 해외(海外) 나라들이 제공(提供)하는 것은 절제(節制)된 힘, 확고(確固)한 결의(決意), 큰 힘을 지니면서도 부드럽게 말하고 행동(行動)할 수 있는 자신감(自信感) 있는 지도력(指導力)이라고 부연(敷衍)했다.
장보고는 “신라의 안보(安保)는 다른 세력(勢力)에 지나치게 의존(依存)해왔다” 면서 “모두가 책임감(責任感)을 가져야 강력한 신라와 동맹(同盟)이 구축(構築)될 수 있다” 며 무임승차(無賃乘車)는 없다고 자주국방(自主國防)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나라가 부유(富裕)한 국가(國家)들의 힘을 빌리는 시대(時代)는 끝났다” 며 “우리는 피보호국(被害保護國)이 아니라 동반자(同伴者)가 필요하다” 고 했다.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처럼 장보고(張保皐)가 무조건 확장(擴張)하고, 보호(保護)하고, 의지(依支)하는 마법(魔法)의 지팡이는 아니다” 라며 “백성(百姓)을 현혹(眩惑)하는 정책(政策) 철학(哲學)이 아니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확장.보호.의지는 우리 스스로 힘을 키울 때만 가능(可能)하다” 고 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값을 제대로 못한 분들이 많다.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자,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국가관(國家觀)’ 을 세웠으며, 사명감(使命感)을 갖고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확장시키고(張), 지키고(保), 언덕(皐)’ 이 되어주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참+오이의 〈진과〉 가 아닌가 한다. 진과는 참 진(眞), 오이 과(瓜)를 합친 말인데, 참외는 과거(過去) 식량(食糧)이 부족(不足)하던 시절(時節) 춘궁기(春窮期)의 허기(虛飢)를 달래주던 과일이기도 했고, 보릿고개를 지나던 시기(時期), 참외가 나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달고 시원한 과육(果肉)으로 더위를 견디고, 부족한 식량(食糧)을 대신(代身)했듯이, 장보고라는 이름도 그런 참외 같은 갈증(渴症, 張)과 허기(虛飢, 保)를 달래주었고, 의지(依支, 皐)가 되었다. 나라와 백성들(百姓)을 위한 참외 밭을 일구고-(경전, 耕田), 참외로 든든하게 해주고-(풍족, 豊足), 참외의 참맛으로 삶의 여유(餘裕)를 취하게-(안정, 安靜) 해주었던 셈이다.
성씨(姓氏, 본관)을 바꾸는 일은 어렵고 힘들다. 까다롭기도 하지만, 가문(家門)의 혈통(血統)을 말하는 성씨(姓氏)를 함부로 바꾸지 못한다. 성씨를 바꾸는 일은 집안의 피(血)를 끊은 일로 본다. 성씨 변경(變更)은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관(本管)을 바꾸는 것으로, 법원(法院) 심사(審査)에서 사유(事由)의 타당성(妥當性)과 가족관계(家族關係)의 일관성(一貫性) 등을 중점적(重點的)으로 파악(把握)하여 결정(決定)한다. 예전에는 오로지 아버지 성씨(姓氏)를 따라야만 됐지만, 요즘은 성씨개정(姓氏改名)에 따른 성본변경법(姓本變更法)이 바뀌어, 아버지의 성씨(姓氏)에서 어머니의 성씨로도 바꾸게 하였다. 부모(父母)의 성씨(姓氏) 이외는 다른 성씨를 쓸 수 없다. 장보고는 부모의 성씨를 따르지 않았다. 그때 당시는 예외적인 적용(適用)이라고 보다는, 사회적(社會的) 법(法) 기준(基準)이 명확(明確)하지가 않았다. 다른 성과 이름을 써도 가능(可能)했다. 천민(賤民) 집안 출신(出身)들이나, 신분(身分)이 낮은 분들은 자신의 이름을 쉽게 쓰질 못했거나. 불가능(不可能)했다. 신분이 낮다고 해서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못하게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 등 대한민국 역사서에서 태어난 해, 어느 지역, 어떤 이름 등이 미상(未詳)으로 남은 것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이름이 분명(分明)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장보고도 한때는 궁복(弓福)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쓰질 못했다. 이름은 알려지고 있지만, 그가 어느 곳에서 태어 난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장보고는 성씨를 가진 이름은 밝혀지고 있으나, 궁복(弓福, 삼국사기 기록), 궁파(弓巴, 삼국유사 기록)이라는 이름에는 성씨가 없는 상태(狀態)로 잔해진다. 장보고는 태어난 해(日)와 태어난 곳(出生地)은 알려지지 않음으로 나올 뿐이다. 이 글을 통해 장보고가 언제 어느 시기에 때어났고, 태어난 곳이 어디였는지 밝혀두면서 궁복(弓福).궁파(弓巴)라는 이름의 뜻과 장보고(張保皐)라는 이름으로 왜 개명(改名)을 했는지를, 어떤 뜻과 마음을 두고 장보고라고 했는지를 기술(記述)했는 데, 장보고에 대한 밝혀지지 않았던 점들을 합당한 근거(根據)를 제시(提示), 즉 배경(背景).환경(環境).물증(物證).성명(姓名).전설(傳說)을 고찰(考察)하여, 장보고 한 인물(人物)을 우상(偶像)으로서 존경심(尊敬心)을 표한다.
장보고도 궁복(弓福)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어느 가문(家門)의 계족(系族)이고, 성씨(姓氏)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지 궁복(弓福)과 궁파(弓巴)라고만 불러진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그가 당나라에 가서 얻은 이름이다.
장보고는 자신의 본명(本名)인 궁복(弓福)을 나두고, 장보고로 개명(改名)했을 때, 어떤 법적(法的)인 사유(事由)와 심사(審査)를 받지 않고, 별도로 지은 이름을 썼다. 요즘 같으면 이름을 바꿀 수는 있어도 성씨(姓氏)은 바꿀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예외적(例外的)인 선례(先例)가 있었던 모양(模樣)이다. 장보고는 궁복의 예명(藝名)이다. 별칭(別稱)으로서의 이름이며, 장보고 말고도 ‘궁파(弓巴)’ 라고 부른다.
궁복이라는 본 이름을 나두고, 그것도 성씨마저 바꾸며, 자신의 이름을 장보고(張保皐)라고 했을 때는, 그만한 사유(理由)의 근거(根據).이유(理由)와 사정(事情)의 상황(狀況).조건(條件)이 있었던 것,
장보고는 ‘국가관(國家觀)-충성과 미래관(未來觀)-개척’ 이라는 정신세계(精神世界)와 신념(信念)으로, 재주(才주)와 능력(能力)의 다재다능(多才多能)이 있다는 궁복이라는 이름을 나두고, ‘확장(擴張).보호(保護).의지(依支)’ 라는 정신을 담은, ‘나라사랑.국민사랑’ 이 깃든 〈장보고〉 로 자신을 부르게 하였다. 다재다능의 궁복보다 좀 더 차원(次元)이 높고, 의미(意味)가 있는 ‘장보고(張保皐)’ 로 쓰게 했다.
장보고의 출신지(出身地)는 확실(確實)하게 역사서(歷史書)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문헌(文獻)에는 기록(記錄)은 없으나, 전남 영암 선암(船岩)마을에는 그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보고(張保皐)와 정연(鄭年)’ 이다. 이 두 인물(人物)은 당나라 무령군(武寧軍) 장수(將帥)로서 명성(名聲)을 떨쳤다. 그들은 신라 청해진(淸海鎭)에 재직(在職) 하면서도 나라에 희생정신(犧牲精神)을 보여줬다. 이런 훌륭한 인물과 관련된 것이 마을에 있는 바위인데. 그 바위들은 궁복의 탄생(誕生)과 관련된 ‘건덕암(乾德岩, 거북바위.칠성바위)’ 과 장보고와 정연이 당나라로 배를 타고 떠났던 부두(埠頭)였던 ‘국두암(國頭岩. 너럭뱌위.배바위)’ 이다. 건덕암은 궁복이 큰 인물(乾, 제왕)이 될 만한 덕(德)을 받고 태어나게 해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국두암은 궁복이 장보고로서 나라의 우두머리(頭)가 됐는데, 이 바위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해서 연유(緣由)가 된 것으로, 장보고가 어릴 적 놀았던 놀이터, 꿈을 꾸게 한, 희망(希望)을 갖게 만든, 욕망(慾望)을 키운, 으지(意志)를 불태운 바위로서, 또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정표(里程標), 바다의 길목, 항구(港口) 등의 마을과 관련된 바위로서의 깊은 사연(事緣)이 전한다. 장보고는 영암 선암에서 궁복으로 태어나 17세까지 살다가 당나라 산둥반도로 건너가,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 해안(海岸).운하(運河) 인접(隣接) 지역에 모여 사는 잡단거주(集團居住)로, 교역(交易).학문(學文).승려(僧侶) 활동의 중심지(中心地) 역할을 한 ‘신라방(新羅坊)’ 에 머물며, 당(唐) 무령군(武寧軍)에 입대(入隊)하여 23년 간 군(軍) 생활(生活) 등으로 보냈다. 그는 다시 신라에 들어와 완도(莞島) 장도(長島)에 군사(軍事).무역기지(貿易基地)인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해 18년간 이곳에서 애국심(愛國心)을 발휘(發揮)했다.
그런 훌륭한 인물(人物)이 났다고 해서 선암(船岩)마을에서는, 마을에 있는 바위에 그를 기리는 ‘건덕암(乾德岩)과 국두암(國頭岩)’ 이라는 칭호(稱號)를 부여(附與)해 치성(致誠)을 드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두 바위를 신성시(神聖視)하며, 자연물(自然物)안 바위에 영혼(靈魂)을 부여(附與)해 의식(儀式).제의(祭儀)의 대상(對象)으로 삼는 산앙적(信仰的) 태도(態度)와 특정 바위 형태(形態)를 다산(多産).풍요(豊饒)의 상징(象徵)으로 여기는 민속신앙(民俗信仰)으로 모시고 있다.
건덕암과 국두암은 신앙적(信仰的) 사상(思想), 공동체(共同體) 정체성(正體性)을 연결(連結)하는 매개체(媒介體)로 적용(作用)한다. 이 두 바위가 자연물에 영혼(靈魂)이 깃들어 보호(保護).기원(祈願)의 대상(對象)이 된 것이다.
신석기인(新石器人)들은 자연환경(自然環境)의 위협(威脅)과 식생활(食生活)의 필요성(必要性) 속에서 바위 등 자연물에 영혼(靈魂)이 깃들어 멸(滅)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를 의시(儀式).제의(祭儀)의 대상으로 삼았듯이, 선암마을 사람들은 건덕암과 국두암을 자연물에 대한 신앙적(信仰的) 대상이면서 한 인물(人物)에 대한 우상적(偶像的) 대상으로 여겼다.
건덕암(乾德岩)이나 국두암(國頭岩)은 직접 바위에 그런 글씨를 새겨 두지는 안했지만, 마을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두 바위에 이름을 새겨 간직하고, 두고두고 생각하며 기리고 있다.
신석기인들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연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 따라서 산이나 바위 등 자연물에까지도 영혼(靈魂)이 있다는 이들의 믿음은 천재지변(天災地變)의 공포(恐怖)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意志)와 식생활(食生活)의 풍요(豊饒)를 부여(附與)하고, 숭배(崇拜)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석기인들은 산.바다.나무.바위와 같은 자연물을 포함한 우주(宇宙)의 만물(萬物)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Animism의 신앙(信仰)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혼(靈魂)은 멸(滅)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는 자연물을 신격화(神格化)하거나, 다신적(多神的)인 신앙(信仰)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비중(比重)이 컸던 것으로는 태양신(太陽神)으로서, 태양은 빛과 열을 발생(發生)하여 천지(天地)를 밝혀 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生物)을 보호(保護).소생(蘇生).번식(繁殖)시키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일상생활(日常生活)의 실제적(實際的) 필요성(必要性)에서 태양숭배사상(太陽崇拜思想)이 자연 발생적(發生的)으로 나타났다고 보고 있다. 그러듯이 선암마을 사람들도 마을에 있는 건덕암과 국두암, 이 두 바위를 신성시(神聖視)하며, 숭배(崇拜)를 한다.
거북바위,칠성바위라고 불리는 건덕암과 너럭바위.배바위라고 불리는 국두암은 자연물(自然物)이면서 인물상(人物像)으로서의 신앙적(信仰的) 대상이다.
건독암과 국두암은 마을의 수호(守護), 마을의 액(厄)막이, 마을의 풍요(豊饒), 마을의 발전(發展), 마을의 번영(繁榮), 마을의 안녕(安寧), 마을의 평화(平和)와 마을 사람들의 행복(幸福)을 가져다주는 영험(靈驗)한 바위로 여긴다. 이 바위는 장고라는 한 특정 인물을 신으로 모신 ‘인물신(人物神)’ 또는 정치(政治).역사적(歷史的) 인물을 신앙(信仰)의 대상으로 모신 ‘사도신(使徒神)’ 으로 건덕암과 국두암을 신격화(神格化) 한다.
장보고는 자신이 태어난 영암(靈岩) 선암(船岩)마을의 옛 모습을 상상(想像)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랄 때 마을 앞은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지금 그런 바다 풍경(風景)을 볼 수는 없지만, 추억(追憶)만큼은 만선(滿船)이다. 그리고 그 추억의 만선은 당나라 산둥반도(山東半島)에서도 만선을 이루며 항해(航海)를 한다. 만선을 이룬 추억들은 다시 완도 청해진에서 추억의 만선으로 자신의 기쁨은 물론, 세상 사람들한테도 즐거움을 선사(善事)한다.
●장보고, 지덕인에 빛나다
장보고 이름은 〈지덕인〉 이 풍긴다. 지는 지혜(智慧), 덕은 덕행(德行), 인은 인정(認定)이다. 크게 한다는 장(張)은 ‘지(智)’ 이며, 지킨다는 보(保)는 ‘덕(德)’ 이며, 기대게 한다는 고(皐)는 ‘인(認)’ 이다. 그는 크게 넓힌다는 것에 슬기(智)를 찾을 수 있고, 널리 지킨다는 것에 도움(德)을 찾을 수 있고, 두루 기대게 하는 것에 언덕(認)을 찾을 수 있다. 슬기는 ‘정직(正直)의 충실(忠實)’ 이요, 도움은 ‘열의(熱意)의 성실(誠實))’ 이요, 언덕은 ‘선의(善意)의 성의(誠意)’ 이다. 정직과 충실한 장(張)에, 열의와 성실한 보(保)에, 선의와 성의한 고(皐)에 지덕인(智德認)이 빛난다.
지혜.덕행.인정은 지혜와 덕행을 인정(認定)하거나 실천(實踐)하는 것으로, 지혜는 덕행과 연결되고, 이를 옳거나 확실(確實)하다고 인정(認定)한 일이 ‘지덕인(智德認)의 정신세계(精神世界)’ 다.
장보고는 〈가경자(可敬者)-Venrable〉 다. 가경자는 ‘존엄한 자, 존경스러운 분’ 이라는 의미의 호칭(呼稱)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시복(諡福) 절차를 거치는 과정의 사복 후보자(候補者)에게 잠정적(暫定的)으로 이 호칭을 부여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신앙(信仰)의 모범(模範)이 되었다고 인정(認定)되는 사람에 대하여 시복 및 시성(諡聖) 절차를 거친다. 첫 단계인 사복 조사(調査)가 교황청(敎皇廳)의 시성시복성성(諡聖諡福聖性) 혹은 예부성성(禮部聖性)에 접수되면, 사복 후보자에게 이 존칭(尊稱)이 주어진다.
가경자는 엄격한 절차(節次)를 거쳐 복자(福者)가 되며, 복자는 시상(諡聖) 과정을 거쳐 성인(聖人)으로 불리게 된다. 시성시복성성으로의 접수(接受) 외에 교황(敎皇)이 그 후보자가 영웅적(英雄的)인 덕(德)을 가졌으나, 순교(殉敎)를 당했다고 주장(主張)하면서 특별 칙령(勅令)으로 천거(薦擧)하는 경우에도 이 호칭을 부여한다.
가경자는 ‘놀라운 정도의 덕행(德行)을 실천(實踐)’ 하거나. ‘순교(殉敎)한 사람’ 이라야 가경자(可敬者)의 칭호(稱號)를 받을 만하다. 장보고는 그런 놀라운 일을 해낸 인물로서의 시성시복성성으로 접수된, 합당(合當)한 후보자로서 영웅적인 덕을 지닌 〈가경자〉 같은 인물의 지혜(智慧)와 덕(德)이 뛰어나 길이길이 우러러 받들어 본받을 만한 성인(聖人).성자(聖子)로서 공경(恭敬)할만한 사람이다.
장보고의 자덕인, 이 정신사상(精神思想)은 행동철학(行動哲學)으로서의 이롭게 하며, 지햬(智慧)로 베풀고(張) 있다. 지혜로운 태도(態度)와 선행(善行)을 뜻하는 맥락(脈絡)에서 지혜를 베푸는 일이다.
‘지혜로 베풀고-張’ 는 단순히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 말과 행동이 지혜(智慧), 즉 현명(賢明)함, 온화(穩和)함, 선의(善意)를 반영(反映)하도록 하는 태도를 말한다. 베푸는 삶이 삶의 지혜로 보답(報答)을 기대(期待)하지 않는 선행(善行)의 가치(價値)를 강조한다. 또 ‘도움으로 나라를 지키다-保’ 라는, 도움으로 지킨 일의 누군가의 도움으로 어떤 권리(權利).재산(財産).안전(安全)이 유지(維持)된 경험(經驗)을 말한다. 또 누군가를 위해 ‘기댈 언덕이 되어 인정(認定)받고 싶다-皐’ 라는 기대게 되는 언덕이 되자는 메시지로써의 인정받은 언덕, 즉 존중(尊重)받는 존재(存在)로써 누군가에게 안정(安靜)과 위로(慰勞)를 주는 존재(언덕)가 되고 싶다는, 기댈 언덕이 위로.격려(激勵).신뢰(信賴)를 주는 관계의 상징(象徵)으로, 동시에 인정과 사랑을 갈망(渴望)하는 감정(感情)과 연결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장보고(張保皐)+지덕인(智德認)=가경자(可敬者)라는 등식(等式)이 성립(成立)된, 장보고라는 이름은 성인군자(聖人君子)다운 이름이요, 인물(人物)이다. 공자(孔子) 같은 이상적(理想的) 인간상(人間像)을 떠올리게 한다. 고로 장보고도 성인(聖人)으로 추앙(推仰)되거나, 군자적(君子的) 삶을 본받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술(戰術).기예(技藝).상술(商術)에 뛰어난 해상왕(海上王)인 장보고는 군자(君子)의 덕성(德性).학식(學識)과 사후(死後) 성인(聖人)으로 추앙(推仰)되며, 군자 개념(槪念)을 실천(實踐)의 목표(目標)로 제시(提示)한 인물로 설명된다. 성인군자(聖人君子)의 덕행(德行)이 높은 훌륭한 장보고로 우리 가슴에 남고 있다.
장보고라는 이름에 앞에 ‘지장(智張), 덕보(德保), 인고(認皐)’ 라고 부르고 싶다. 장(張)에는 지혜(슬기)가 있고, 보(保)에는 덕(지킴)이 있고, 고(皐)에는 의지(언덕)가 있다. 슬기로운 넓힘, 덕스러운 지킴, 인정스러운 언덕의 참된 ‘지덕인(智德認)’ 이라 볼만하다.
장보고는 의리(義理)에 밝았다. 덕(德)을 생각했다. 법(法)을 생각했다. 아우르되 파당(派黨) 짓지 않았다. 마음이 평화(平和)로워 느긋했다. 남의 장점(長點)은 북돋아주고, 단점(短點)은 돋우지 않았다. 화합(和合)을 추구(追求)하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았다. 태연(泰然)하면서 교만(驕慢)하지 않았다. 도덕(道德)을 통한 영달(榮達)을 추구(追求)했다. 좋은 방법(方法)으로 발전(發展)했다. 좋은 쪽으로 지원(支援)했다. 긍정적(肯定的) 방향(方向)으로 노력(勞力)했다. 항상 자신을 탓했다. 항상 자신의 문제점(問題點)을 찾았다. 항상 자신에게 요구(要求)하였다. 정치적(政治的) 윗사람을 경외(敬畏)하며, 성인(聖人)의 말을 경외했다. 이런 군자다운 일을 한 장보고였으며, 그는 정치적(政治的).사회적(社會的).계급적(階級的) 의미에서 귀인(貴人)의 통치자(統治者)였다. 그는 도덕적(道德的)인 의미에서 국가(國家).사회(社會)의 이익(利益)에 우선 관심(關心)을 갖는, 도덕적인 인물이었다.
장보고는 의리(義理)에 밝았다. 그는 군자(君子)다운 군자로서 의리를 추구하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장보고는 훌륭한 지도자(指導者), 모범적(模範的)인 지도층(指導層)으로 의리(義理) 밝았다.
장보고는 세상만사(世上萬事)에 대하여 무조건 된다(좋다)거나, 무조건 안 된다(그르다)는 태도(態度)를 버리고, 오직 의리에 비교(比較)하여 판단(判斷)했다. 자신의 무능(無能)을 탓하지,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함을 탓하지 않았다. 일생(一生)을 마칠 때 이름이 세상(世上)에 남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겼다. 항상 말(言)만 듣고 사람을 천거(薦擧, 평가절상)하지 않았고, 사람만 보고 그 말을 폐기(廢棄,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명(命)을 모르면 군자(君子)가 될 수 없다고 봤다. 예(禮)를 모르면 사회적(社會的) 역할(役割)을 할 수 없다고 봤다. 말(주장)을 변별(辨別)하지 못하면 남을 알 수 없다고 봤다.
장보고는 경(敬)을 바탕으로 수신(修身)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수신한 다음 남을 편안(便安)하게 해야 한다며, 자신의 이름을 ‘장보고(張保皐)’ 라 하였다.
대한민국에는 큰바위얼굴이 있다. 장보고가 태어난 곳인 전남(全南) 영암(靈岩) 월출산(月出山) 구정봉(九井峰)의 큰바위얼굴이다. 그리고 장보가 당나라, 지금의 중국에는 신사성에 사람을 닮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얼굴들은 장보고의 페이스이미지가 아닌가 한다.
월출산 큰바위얼굴은 해안(海岸)에 위치하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中國) 산시성(陜西省) 얼굴바위는 내륙(內陸)에 있는 바위로서, 이 바위가 있는 산시성은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발생지(發生地) 중의 하나다. 영암 월출산의 큰바위얼굴은 하나님이 영암(靈岩)에 안겨준 지상(地上) 최고(最高)의 고귀(高貴)한 선물(先物)로 여긴다. 중국 산시성의 큰바위얼굴은 중국의 창조신(創造神)으로 모신다. 이 두 바위에서 기(氣)를 받은 장보고는 큰 인물(人物)이 될 것이라는 예시(豫示)라도 한 듯하다. 장차 이 세상(世上)에 큰 인물이 탄생(誕生)할 것이라는 예언(豫言)을 한 것 같은 모습으로 의젓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장보고는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는 자신이 태어난 고장의 큰바위얼굴로 위대(偉大)함을 보여줬고, 중국(中國)에서는 자신이 군(軍) 생활을 한 타국(他國)의 큰바위얼굴로 투철(透徹)함을 보여줬다.
●장보고를 말하는 바위 건덕암과 국두암
장보고에 관한 이야기들은 주로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지방지(地方誌) 등 문헌(文獻), 지방문헌연구소(地方文獻硏究所) 등에 지역의 읍.군.면 단위 지리(地理).연혁(沿革),풍속(風俗),인물(人物) 등을 담은 지리지(地理誌)로, 지역사회(地域社會)와 문화(文化)를 한눈에 파악(把握)해 놓은 문헌들이 있다. 또 지방문헌연구소(地方文獻硏究所) 등의 그 지방지의 수집(蒐集).정리(整理).기초 DB구축(構築).인물(人物) 검색(檢索) 시스템 등을 통해 연구(硏究)와 활용(活用)을 지원(支援)하고 있다.
그리고 예부터 전하여 온 구전(口傳)으로 전하는 설화(說話)가 있다. 설화는 즐거리를 이야기 형태(形態)로 민간(民間) 서사(敍事)를 가리키는 말로, 통상(通常) 그 갈래를 신화(神話), 전설(傳說), 민담(民譚) 등으로 삼분(三分)하고 있다. 이 가운데 지역성(地域性)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전설(傳說)’ 이다.
전남(全南) 영암(靈岩) 선암(船岩)마을에서 전해 오는 전설들은 주로 지형(地形).지명(地名).유래담(由來談).풍수담(風水談).이인(異人) 고승(高僧)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암마을의 구전설화(口傳說話)를 살펴보면, 이 마을에 천 년 전에 장보고(張保皐)인 궁복(弓福)이 태어났고, 또 궁복의 친구(親舊)인 정연(鄭年)이 태어난 고장으로 알려지며, 지역(地域)에 전승(傳承)되는 이야기에 더 관심(關心)을 갖고 전승시켜 지역민(地域民)의 정체성(正體性)을 가지도록 하고 있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되는 구비문학(口碑文學)은 설화(說話)와 민요(民謠)로 구분(區分)되고, 설화는 다시 신화(神話).전설(傳說).민담(民譚)으로 분류(分類)된다. 신화는 신(神)들의영웅적(英雄的)인 이야기로 태초(太初) 산화(神話), 건국(建國) 신화, 마을 신화, 무조(巫祖) 신화 등이 있는데, 대부분 신기(神技)한 능력(能力)을 지닌 신(神)들의 이야기다.
전설은 지역 단위(單位)에 전승(傳承)되어 오는 이야기로 나무.바위.마을 이름 등의 구체적(具體的) 증거물(證據物)과 관련하여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이다.
민담은 흥미(興味) 위주의 이야기로 지혜담(知慧談), 교훈담(敎訓談) 등이 있다.
영암 선암마을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지역의 자연물(自然物)과 관련된 전설이 대부분이다.
유래담(由來談)으로 건덕암(乾德岩)으로 불리는 거북바위 혹은 칠성바위와 국두암(國頭岩)으로 불리는 너럭바위 혹은 배바위 등이 있다. 이 두 바위들은 지역 풍수담(風水談)으로 건덕암과 국두암 이야기로 전한다.
최근의 구비문학은 구비적(具備的) 성격(性格)보다 문헌적(文獻的) 성격이 강한. 입에서 입으로 전승(傳承)할 수 있는 제보자(提報者)를 구하기 힘들며, 1980냔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 현 한국학중앙연구원(韓國學中央硏究員)에서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를 편찬(編纂)하였던 당시 제보자들 가운데 거의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 1980년 당시 채록(採錄)된 구비문학 역시 지역 고유(固有)의 전설(傳說)보다 문헌(文獻)에 영향(影響)을 받은 이야기가 종종 드러나고 있어 원류(原流)가 되는 이야기를 구하기 힘든 실정(實情)이다.
영암 선암 지역의 경우에도 이 마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분들이 돌아가시고 없어, 선암마을의 이야기는 사라지려 한다. 다행히 일부분들이 우리 마을에는 장보고와 정연이 태어났다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주고 있다.
선암마을에는 장보고와 정연에 관련 흔적(痕迹)들이 숨어져 있다. 특히 장보고에 대한 관련된 바위가 있는데, ‘건덕암(乾德岩)과 국두암(國頭岩)’ 이다.
장보고에 관한 글을 쓰게 된 이유(理由)는 전남 영암 선암마을의 설화(說話)에 대한 자료(資料)가 좀 더 전문적(專門的)인 인력(人力)과 전문적인 기술(技術)의 도움을 받아 보다 체계화(體系化)하는 것이 필요하고 느껴 쓰게 된 것이다.
장보고에 대한 선암마을의 전설은 희미하게 전하고 있지만, 이 마저도 사라지려 한다. 하루빨리 장보고 관련 선암마을의 이야기를 수집(蒐集)해, 이 지역 설화(說話)에 대한 풍부(豊富)한 자료(資料)로 지역민(地域民)에게 대중화(大衆化)시킬 수 있는 방안(方案)을 모색(摸索)하여 지역민의 정체성(正體性) 형성(形成)에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
영암 선암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건덕암과 국두암은 선암마을에 훌륭한 인물(人物)이 나왔다는 것을 증명(證明)해주고 있다. 건덕암의 하늘 건(乾)은 제왕(帝王)될 만한 인물이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덕은 훌륭한 사람을 지칭(指稱)한다. 직역(直譯)하면 ‘제왕의 덕이 바위’ 라는 뜻이다. 있는 궁복(弓福)이리는 뜻은 직역하면 〈활을 다룬 복덩이〉 인데, 의미는 ‘재주(才)와 재능(才能)’ 이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국두암의 두(頭)는 ‘우두머리’ 를 말한다. 직역하면 ‘나라의 우두머리 바위’ 라는 뜻이다.
장보고라는 인물에 대해 그가 해상왕(海上王)으로 군림(君臨)했다는 사실(事實)에 부정(否定)하는 사람은 없다. 장보고가 어린나이에 당나라로 가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으로 근무(勤務)했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구가 다시 신라로 들어와 완도(莞島) 장도(長島) 군사(軍事)와 무역기지(貿易基地)인 청해진(淸海鎭)을 두었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무령군 소장, 청해진 대사(大使) 등은 높은 지위(地位)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장보고가 궁복(弓福)으로 태어나게 만든 영험(靈驗)한 바위가 바로 거북바위.칠성바위라고 불렀던 건덕암이다. 제왕(帝王)을 탄생(誕生) 바위라고 헤서 그렇게 칭(稱)했다. 복덩이로 태어난 그였으니, 재주와 능력이 많은 아이였으니, 끼가 많은 궁복이었으니, 예사(銳士)스럽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그에게 거는 기대(企待)는 컸다.
그는 장차 군(軍) 소장(少將)으로 명성(名聲)을 떨쳤고, 그는 청해진(淸海鎭)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로서 명예(名譽)롭게 했다. 군 소장, 대사 등은 높은 지위(地位)를 누리고, 명성(名聲)을 떨친 일이다. 제왕(帝王)으로 우두머리가 된 궁복.장보고다. 그런 사람이기에 선암마을 사람들은 그와 관련된 바위에 거창(巨創)하고 거룩한 칭호(稱號)를 붙여줬다, 탄생(誕生) 관련 건덕암과 출세(出世) 관련 국두암이다.
명성(名聲)이 깃든 이 두 바위는 그저 설화(說話)로만 전할 뿐이다. 설화로 전하고 있지만, 신화(神話)나 전설(傳說)을 사실(事實)처럼 꾸민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인데 채록(採錄)이 안 됐을 뿐이다. 문서적(文書的)인 기록(記錄)으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그가 수영(水泳)을 잘했고, 활을 잘 다른 기예(技藝)가 뛰어났으며, 그가 어린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가 산둥반도(山東半島)에 있는 신라원(新羅院)을 세웠고, 무령군 소장으로 근무했다는 것과 청해진을 설치해 대사로 있으면서 군사(軍事)로서 해적(海賊)을 소탕(掃蕩)하고 해상(海上) 질서(秩序)를 회복(回復)시켰다는 것과 무역(貿易)에도 손을 대,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으로 외교(外交)와 경제(經濟) 지평(地平)을 넓혔다는 것과 나라의 정사(政事)에도 간여(干與)해 정치적(政治的) 논란(論難)을 좌초(坐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근데 장보고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름이 긍복(弓福)과 궁파(弓巴), 그리고 장보고(張保皐)로만 밝혀질 뿐, 궁복의 성씨(姓氏)는 정확히 밝혀지지가 않는, 어느 기록(記錄)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가 바닷가에서 태어났다고만 전한다.
하지만, 영암 선암마을에서는 삼국유사나 지방지에서 다루지 못한 장보고에 관한 이야기들을 서술(敍述)하듯이 구전(口傳)으로 전한다. 마을 뒤에 바위가 있는데, 이 칠성(七星)바위에서 7년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致誠)을 드렸는데, 그 정성(精誠)이 갸륵하여 두꺼비 같은 아들을 점지(點指)해 줬다고, 마을사람들은 입으로 전한다. 이 아이를 ‘금쪽같은 복덩이’ 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 아이를 그가 활을 좋아해 활 궁(弓)자를 써 복덩이의 복(福)자를 합쳐 궁복(弓福)이라고 했다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다.
장보고의 탄생설화(誕生說話)는 전남 영암 선암마을에서만 전해진다. 다른 지역에는 간혹 엮어본 설(說)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 엮음은 오로지 사실적(事實的)인 근거(根據)가 없는 것에서 비롯된다.
거북바위.칠성바위를 건덕암(乾德岩)이라고 칭호(稱號)를 붙여준 것은 ‘왕관(王冠)’ 을 씌어준 격(格)이다. 너럭바위.배바위를 국두암(國頭岩)이라고 칭호를 붙여준 것은 ‘훈장(勳章)’ 을 달아준 격이다. 장보고에 대한 훌륭한 인물 상징(象徵)은 영암 선암마을에 있는 바위들이다.
완도 청해진에는 장보고의 동상(銅像)을 세워, 그 업적(業績)을 기리면서 널리 알리고 있지만, 영암 선암에서는 장보고 관련 바위들이 그의 흔적(痕迹)을 알리며, 신격화(神格化)하고 있다. 그가 이 바위의 영험(靈驗)을 입어 부귀(富貴) 영달(榮達)의 누림을, 일신(一身) 영달의 꾀함을 알린다.
궁복(弓福)이 자라서 장보고(張保皐)로 성장(成長)해 나라에 이바지하는, 그 충성심(忠誠心)은 위대(偉大)했다. 그는 당나라 서주에서, 신라 완도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獻身)했지만, 그를 높이 받들어 올리는 거창(巨創)한 표상(表象)은 서주도, 완도도 아닌 ‘영암 선암(船岩)’ 이었다.
희망정신(犧牲精神)을 보여준 장보고에 대해 당나라 서주(徐州)에서는 무령군(武寧軍) 군사(軍事)로서 국방(國防)에 투철(透徹)하고 해안안보(海岸安保)에 철통방어(鐵桶防禦)를 한 지도자(指導者), 소장(少將)의 칭호다운 역사서(歷史書)로 그를 추앙(推仰)토록 하고 있고, 완도(莞島)에서는 청해진(淸海鎭) 특명전권대사(特命全權大使)로서 국토방어(國土防禦)와 해안안보(海岸安保), 무역(貿易)으로 나라의 안전(安全)과 부강(富强)하게 한 대사(大使).장수(將帥)의 칭호다운 역사서와 기념관(記念館).문학관(文學館) 등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서주나 완도는 지형(地形) 문화적(文化的)인 발자취이지만, 영암 선암은 ‘자연물(自然物) 문화적(文化的)’ 으로서의 그를 새기게 하며, 신앙(信仰)의 대상(對象)이 되게 한다. 그가 신(神)이나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절대자(絶對者)를 믿고 받드는 일로, 그만큼 그는 절대자로서의 유일신(唯一神)인양, 그를 받든다.
58세(문성왕 8년, 846)의 일기(一期)로 암살(暗殺)에 의해 사망(死亡)한 그는 정치(政治) 세력(勢力)에 의해 제거(除去)됐다. 장보고는 그를 견제(牽制)하는 세력에 의해 이슬처럼 사라졌지만, 그가 나라에 기여하는 그 열정(熱情)과 노력(勞力)은 귀감(歸勘)이 되고 있다. 그의 헌신적(獻身的)인 희생(犧牲)은 신라를 국제무대(國際舞臺)로 한층 끌어 올렸다. 세계적(世界的)으로 위상(位相)을 떨쳤다. 특히 바다를 지배(支配)한 인물로 평가(評價) 받고 있다.
무역(貿易)을 통한 해외개척(海外開拓)은 장보고만한 큰일을 한 사람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가 행(行)한 업적(業績)은 훌륭했다. 이런 큰 성과(成果) 낳고, 공(功)을 세운 인물이기에 우리는 그를 영웅(英雄)으로 추앙(推仰)한다. 장보고는 당나라 서주에서 23년간 기여(寄與), 신라 청해진에서 18년간 공헌(貢獻)을 했다. 그는 42대 흥덕왕(興德王, 3년, 828) 때부터 46대 문성왕(文聖王, 8년, 846) 때까지 재직(在職)했다. 장보고는 42대 흥덕왕(興德王), 43대 희강왕(僖康王), 44대 민애왕(閔哀王), 45대 신무왕(神武王), 46대 문성왕(文聖王) 등 5명의 임금을 모셨다.
장보고를 두고 말하기를 장은 ‘들어선다.’ 보는 ‘세운다.’ 고는 ‘부른다’ 라고 한다. 장이 들어서니 보를 세워 집을 짓게 되고, 지은 집에 사람들을 불러, 〈장보고〉 라는 브랜드로 지은 곳에서 머물게 하는, 건설적(建設的)인 착한 마음이다. 그는 나라와 백성(百姓)를 위해 지은 집이 사람들이 모여 사니 영광(榮光)이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크게 감동(感動)하게 된다고 했다.
●신라 성장세가 강하다
장보고(張保皐)는 자신의 이름에서 보여준 것처럼 신라의 앞날을 낙관적(樂觀的)으로 내다봤다. 성장(成長)과 물가(物價) 등 시장의 흐름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봤다.
장보고는 자신이 운영(運營)한 청해진(淸海鎭) 정책(政策) 및 사업(事業)으로 신라의 성장(成長)은 강력(强力)하다. 특히 무역(貿易)을 추진(推進)하는데 있어서 장애물(障碍物)이 적다며, 신라가 추진한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 정책은 국제적(國際的)으로 높이 평가(評價)를 받고 있고, 선호(選好)해 신라 경제(經濟)가 견조(堅調)한 성장세(成長勢)를 유지(維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장보고는 물품(物品)을 보나, 정책(政策)을 보나, 시장(市場)을 보나 신라가 갈 길이 명확(明確)하다고 했다.
‘파도는 쳐도 뱃길은 열렸다.’ 바다에 삶을 건 장보고는 아무리 바다가 폭풍우(暴風雨)에 높은 파도(波濤)를 쳐도, 뱃길은 열려있다고 했다. 그는 그런 낙관(樂觀)과 자신감(自信感)을 갖고, 목표지수(目標指數)를 상향(上向) 조정(調整)하고 박차(拍車)를 가했다.
장보고는 신라 대(大) 부흥(復興)을 향해, “쉬어가도 하늘은 열렸다. 하늘이 열려 세상(世上)이 환해지듯이, 멈추었다고 해서 완전히 닫은 것은 아니다” 라고 희망적(希望的)으로 생각했다. ‘해가 저물어도 내일이면 다시 떠오른다.’ 어둠은 잠시라면서 밝은 세상이 다가옴을 긍정적(肯定的) 사고(思考)로 희망(希望)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신라는 ‘성장세가 강하다’ 라고 볼 정도로 낙관(樂觀)한 것은 경제(經濟).시장(市場) 지표(指標)가 강한 성장세(成長勢)를 보이면서도 낙관적(樂觀的) 전망(展望)이 우세(優勢)하다는 의미다.
장보고는 ‘신라경제의 성장세 강함과 낙관 전망’에서 신라국제자유무역(新羅國際自由貿易) 성장세에 따른 성장세 강세 등 ‘성장세+낙관’ 이 희망적(希望的)으로 내다봤다.
신라경제, 수요(需要) 증가(增加)로 성장률(成長率)이 높게 예축(豫測)되며, 공급(供給) 문제는 시간이 지나며 호전(好轉)될 전망(展望)으로 신라 경제를 낙관했다.
신라 생산량(生産量) 성장세(成長勢)가 강해 경제 강세로 전환(轉換), 기업(企業) 실적 낙관론(樂觀論) 부각(浮刻)으로 신라 경제 긍정적(肯定的) 기대(期待)로 진단(診斷)했다.
신라경제는 수요(需要) 측면의 증가세(增加勢)가 강해 성장률(成長率)이 높게 예측(豫測)되며, 공급(供給) 측면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호전(好轉)될 것으로 전망(展望)했다.
신라가 강한 성장세를 지속할 것으로 확인되면서 신라경제가 강세를 이어갔다. 신라 낙관(樂觀論) 속 목표주가(目標株價) 상향(上向), 실적(實績) 좋아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에 박차를 가했다.
장보고의 청해진 국제자유무역으로 신라경제, 경기(景氣)가 낙관론에 강세가 지속(持續)됐다.
장보고는 ‘신라 경제 전망 낙관 올해 3% 성장’ 이라는 신라 경제에 대한 낙관적(樂觀的)인 전망(展望)을 제시(提示)했다.
그러면서 ‘신라 경제 강하다.’ 자신이 추진(推進)한 국제자유무역에(國際自由貿易)에 자신감(自信感)을 드러냈다. 신라 경제의 경기(景氣) 낙관론(樂觀論)과 기술주(技術株) 강세에 힘입어 주요지수(主要指數) 모두 사상 최고치(最高値)를 기록(記錄)했다.
장보고는 ‘세계 경제 성장세 힘 받는다.’ 〈세계경제 올해 강한 성장, 당.일본.신라 회복 두르러질 것〉 이라고, 세계경제(世界經濟)가 강하게 성장(成長)하거나, 안정(安定)될 것으로 전망(展望)했다.
장보고는 신라경제 성장은 거품이 아니다. 10년 이상 성장(成長) 지속될 것이라고 낙관(樂觀)하며, 자신이 추진한 무역정책(貿易政策)에 대해 자신감(自信感)을 드러냈다.
장보고는 신라는 강한 나라인가? 경제적(經濟的)으로 부유(富裕)하지만, 강한가?
강한 신라를 만들어야 한다며, 그는 강력한 경제정책(經濟政策)을 추진했다. 장보고는 “비올 때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을 빌려 쓸 수 없다” 며 “안보(安保).경제(經濟)에 강한 신라가 되어야 한다” 고 주장(主張)했다.
장보고는 “안보위기(安保危機) 속 경제(經濟) 챙기기, 강하고 따뜻한 신라를 만들겠다” 고 하면서 청해진(淸海鎭)을 설립(設立)하고, 〈강한 신라 안보.경제〉 로 전환(轉換)을 선언하며, 신라경제(新羅經濟) 중심의 국제자유무역(國際自由貿易)을 추진했다. ‘강한 신라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포부(抱負)다’ 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스스로 강력한 안보(安保), 활력(活力) 있는 경제(經濟), 새로운 미래(未來)를 내다보는 장래(將來)의 상황(狀況)을 갖고, 강한 신라가 되어야 백성(百姓)들도 당당하지 않겠냐” 고 했다.
●좌절이 아닌 다음 단계의 동기로
장보고는 좌절(挫折)이 아닌 동기(動機), 좌절이라는 감정(感情)이 아니라, 다음 의미로 해석(解釋)했다. 좌절은 전환(轉換), 성장(成長), 과정(過程) 등으로 재해석(再解釋)하며, 패배(敗北).실패(失敗)가 좌절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동기(動機)’ 로 봤다.
장보고는 좌절을 단순한 부정적(否定的) 정서(情緖)로만 보지 않고, 실패(失敗)를 학습(學習) 신호(信號)로 재구성(再構成)하는 관점(觀點)으로 봤다.
그는 좌절을 성공(成功)의 맛과 연결해, 고통(苦痛)과 실패(失敗)가 장기적(長期的)으로 성장(成長)의 원동력(原動力)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실패는 성공의 열쇠’ 로 봤다.
장보고는 사업(事業)에서 좌절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다음 사업 성공을 위한 각오(覺寤)와 조직(組織)의 단단함을 강조한 일이라고 했다.
좌절이 아닌 뒤에 전환(轉換), 성장(成長), 과정(過程)으로 보고, 신라 ‘결핍(缺乏)은 좌절이 아니라 희망이다’ 라고 했다.
멀리 뛰려고 움츠리는 신라, 실패가 좌절이 아닌 이유는 좌절감(挫折感)보다는 다시 성공(成功)을 만들어보겠다는 각오(覺寤)만 있었다.
장보고는 “그는 성공 못 하겠지” , 하는 말을 듣기 싫어 의지(意志)를 불태웠다. 좌절이 아닌 상대 나라를 넘기 위한 장보고의 성장법(成長法), 실패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독기(毒氣)였다. 그리고 재기(再起)를 꿈꾸는 의지에 더 강한 자신과 신라를 만들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강하면서도 부드럽다.’ 넓힌다. 지킨다. 기대게 하겠다 라는 강한 성향(性向)을 띤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면을 드러낸다. 넓혀 이롭게, 지켜 편안하게, 기대케 해 든든하게 하랴는 마음에서 부드러움을 느낀다.
강하면서 부드러운 남자,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남자 장보고, 그는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공존(共存)하는 성격(性格).태도(態度)를 갖췄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겉은 부드럽고 순한 듯하나, 속은 꿋꿋하고 곧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해 보이지만, 내면(內面)은 굳고 단단한 성품(性品)을 지녔다. 또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것처럼, 물처럼 유연(柔軟)하고, 겸손(謙遜)한 태도가 결국 오래가고 강력(强力)할 수 있다는 철학적(哲學的) 해석(解釋)을 담고 있다. 중독성(中毒性) 강한 부드러운 장보고다.
장보고의 이름은 ‘유능제강(柔能制剛)’ 이다. 유능제강은 ‘부드러운 것이 능히 굳센 것을 이긴다’ 라는 뜻이다.
장보고는 ‘강함이 진정한 강함이다’ 라고 했다. 부드러움이 진정한 강함이 된 것이다. 강한 성향의 남자 장보고지만, 내면에는 부드러움이 있다. 그는 우리 마음에 부드러움을 가지고 세상 모든 것을 대한다면, 생명력(生命力)이 넘치는 나 자신(自身)과 인간관계(人間關係) 속에서 행복(幸福)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공(成功)하는 장보고의 습관(習慣),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물을 닮았다.
장보고는 “능히 군자(君子)는 부드러워야 하나 약해져서는 안 되며, 아주 강해야 하나 너무 강해서 부러지면 안 된다.” 물과 같은 성격(性格)을 갖추려고 노력(勞力)했다.
장보고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모든 일을 준비(準備)하는 자세(姿勢)로 임했다. 사전(事前)에 예상(豫想)되는 시나리오를 그려보고, 여러 상황(狀況)에 맞는 대책(對策)을 마련해 놓았다. 임기응변(臨機應變)은 금물(禁物), 철저한 시산(時間) 계획(計劃)을 통해 생활(生活)을 컨트롤하며 일을 추진했기에 맡은 일의 주인공(主人公)이 될 수 있었다.
장보고는 자신만의 생활(生活) 신조(信條)로 ‘항상 준비하라. 자신을 낮추고 성실하라. 일은 빠르게 생활은 느리게, 나라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라기 전 내가 먼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도움을 받기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 니라와 백성을 항상 마음에 둬라. 사랑은 마음이 아닌 온몸으로 믿고 나가야 아름답다. 세상을 여는 신라를 만들자’ 라는 원칙(原則)을 두었다.
그릇에 담긴 물이 그 모양에 맞게 변하는 유연(柔軟)함을 배워, 여유롭게 일을 추진했다.
●해양강국을 꿈꾼 장보고
“선조(先祖)께서 꿈꾸었던 해양강국(海洋强國) 신라로의 힘찬 도약(跳躍)을 앞당기겠다.”
장보고는 “신라의 미래는 바다에 있고, 미래를 열어갈 일에는 해상(海上)을 개척(開拓)하는 것이며, 신라를 해상강국(海上强國)으로 키우는 일이디” 라고 했다.
그는 선조들은 나라의 부강(富强)은 바다를 이용(利用)하는 데에 있고, 해상무역의(海上貿易)의 출범(出帆)은 해운(海運)과 항만(港灣), 조선(造船)과 해양산업(海洋産業), 수산업(水産業)의 경쟁력(競爭力)을 키워 우리 신라를 해양강국(海洋强國)으로 도약(跳躍)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表明)이 있었다고 했다.
장보고는 신라를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세계적(世界的)인 해양(海洋) 수도(首都)로, 신라 동남권(東南圈)을 남부 해양수도권(海洋首都圈)으로 육성(育成)해 국가 필생(筆生)의 과제(課題)라 할 수 있는 신라해양발전(新羅海洋發展)을 완성(完成)하겠다고 강한 의지(意志)를 드러내며, 청해진은 해운산업(海運産業0이 단순한 물류(物流) 산업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經濟)와 안보(安保)를 굳건히 지탱(支撐)하는 핵심 산업이라는 인식(認識) 아래 신라 해운.항만 사업을 국가전략산업(國家戰略産業)으로 육성(育成)시켰다.
그동안 주춤했던 국제적(國際的) 해운 공급망(供給網) 회복(回復)에 속도(速度)를 내어 우리 손으로 온전히 통제(統制)할 수 있는 해운 공급망을 구축(構築)하겠다며, ▲해운과 조선의 상생발전(相生發展) 생태계(生態系) 구축 ▲해상보험(海上保險)과 선박금융(船舶金融) ▲해운법률(海運法律) 서비스 산업도 폭넓게 육성하여 신라 해운산업의 기초세력(基礎勢力)을 구축하였다.
장보고는 완도 청해진을 위주로 한, 동남권(東南圈)과 서해권(西海圈)은 신라의 자랑스러운 동남서부(東南西部) 해양수도권(海洋首都圈)으로서 더 높이, 더 멀리, 더 힘차게 발전되게 하겠다며, 항만(港灣)과 정류장(停留場), 바닷길과 도로가 아이지는 물류 기본시설을 확충(擴充)하고, 신라 해안(海岸) 전체(全體)를 아우르는 해양관광(海洋觀光) 연계(連繫)를 구축해 세계와 당당히 경쟁(競爭)하는 해양 경제권(經濟圈)으로 키워나갔다.
장보고는 신라를 세계적(世界的)인 해양시대(海洋時代)를 열어가겠다며, 해운(海運) 기업(企業)과 관련 공공기관(公共機關)은 물론, 해사법원(海事法院)을 설립(設立)하고, 동남서해권(東南西海勸) 투자(投資) 공사(工事)까지 담당하는 청해진으로서 모두 집적(集積)된 해양연결망(海洋連結網) 구축을 신속하게 추진 해상강국(海上强國)에 박차(拍車)를 가했다.
역사상(歷史上) 세계(世界)를 지배했던 나라는 한 결 같이 ‘바다를 지배(支配)’ 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식량(食糧).자원(資源). 환경(環境)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할 수 있는 인류(人類) 최후(最後)의 보루(寶樓)가 〈바다〉 라는 점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 각국은 앞 다퉈 바다를 개발(開發)하고 있다. 해상왕국(海上王國)을 꿈꾸었던 장보고도 바다에 모든 생애(生涯)를 걸었다.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 통치체제(統治體制)가 무너지고, 지방 토호(土豪)들이 독자적(獨自的) 세력(勢力)을 형성, 지방분권(地方分權) 체제(體制)로 변해가던 8~9세기의 동북아시아, 당에 대한 조공무역(租貢貿易)은 점차 쇠퇴(衰退)하고, 대신 각지(各地)에서 일어, 상업집단(商業集團) 간의 사무역(社貿易)이 성행(盛行)하였다.
이런 틈을 타 해상(海上)에서는 해적(海賊) 행위가 번번하게 발생했고, 해적들이 신라인(新羅人)을 노예(奴隸)로 팔아넘기는 일이 기승(氣勝)을 부렸다. 바로 이런 시기(時期)에 해상왕(海上王) 장보고(張保皐)가 등장(登場)했다. 장보고에게는 그가 꿈꾼 해상강국(海上强國)을 세울 절호(絶好)의 기회(機會)가 온 것이다.
해적(海賊)과 노예상(奴隸商)을 소탕(掃蕩)한 그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나라와 일본에 있는 신라인과 힘을 모아 협력(協力)해 공동전선(共同戰線)으로 신라.당.일본의 국제적(國際的)인 삼각해상무역(三角海上貿易)을 구축했다. 당괴 일본과의 1대1 무역(貿易) 형태(形態)를 탈피(脫皮), 사상 처음으로 동남아시아나 아랍으로부터 수입품(輸入品)을 재수출(再輸出)하는 중계무역(中繼貿易)도 실현했다.
군사력(軍事力)까지 보유(保有)한 그는 동북아의 해상교통권(海上交通權)과 무역권(貿易勸)을 완전히 거머쥔 명실상부(名實相符) 해상왕국(海上王國)의 건설자(建設者)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勢力) 확대(擴大)를 우려한 중앙귀족(中央貴族)의 견제(牽制)로 846년 피살(被殺)되었고, 해상왕국(海上王國)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해상강국을 꿈꾼 장보고는 ▲해상 네트워크로 국가 부흥(復興) ▲신해양강국 재도약(再跳躍) ▲조선강국 실현(實現) ▲해양안보.국방 재건(再建) 등에 심혈(心血)을 기했다.
장보고는 〈신해양강국 재도약〉 이라는 기치(旗幟)를 내걸고, 물류(物流) 강국(强國), 어촌(漁村) 안보(安保) 등 정책(政策) 방향을 제시(提示)하며, 청해진을 국제무대(國際舞臺)로 서게 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당.일본은 우리 생태계 매우 중요한 부분
해외시장(海外市場) 공력(攻略), 해외진출(海外進出)은 단순한 외교무대(外交舞臺)를 넓히는 것이 아닌 외교(外交).무역(貿易).안보(安保).정보(情報).문화(文化),군사(軍事) 등에 파트너로서의 동맹(同盟)을 맺는 전반적(全般的)인 분야에서 지평(地平)을 넓히겠다는 목적(目的)으로 진행(진행)한다.
장보고는 신라는 반도(半島)라는 지형적(地形的)인 잇 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며, 작은 땅덩어리지만, 위축하지도, 굴하지 않았다. 이 작은 땅에서 당나라 같은 큰 나라를 상대하려면, 힘을 키워야한다고, ‘해외 진출은 국력’ 이라고 하면서, ‘신라 무역이 세계의 부흥(復興)’ 이라는 전제(前提)를 달고 국제무대에서 최고가 되도록 전진(前進)하는 신라의 저력(底力), 신라를 국제무대(國際舞臺)로 올려, 상대국들과 당당하게 어께를 나란히 하였다.
신라의 해외진출은 세계와의 결정적(決定的) 거래(去來), 여러 나라들과 새로운 위대한 투쟁(鬪爭)이었다. 견고(堅固)한 투쟁의 위대한 신라, 새로운 여정(旅程)의 시작 신라의 미래라는 구호(口號)로 신라가 새로운 국가기관제체계(國家機關體系)를 정립(正立)하고 공고(公告)히 발전(發展)시켜나가겠다는 의지(意志)다.
장보고는 불굴(不屈)의 개척투쟁(開拓鬪爭)으로 진취(進取)한 위대한 승리(勝利)와 영광(榮光)을 새로운 여정의 줄기찬 전성(全盛)과 도약(跳躍)으로 신라중심(新羅中心), 새 시대를 연 위대한 세상을 열자고 했다.
장보고는 중력(重力)이라는 정책(政策)을 구상(構想)했다. 중력은 질량(質量)을 가진 물체(物體)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말한다. 지구(地球)가 우리를 아래로 잡아 당가는 힘, 물건(物件)을 놓으면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이유가 〈중력〉 때문이다. 그런 현상(現象)들을 일어나게 만든 것은 '중력(重力)의 힘(力)-Gravitational Force' 이다. 항상 질량이 있는 물체 사이에서 작용(作用), 지구에서는 이래 방향의 지구 중심(中心)으로 작용한다.
중력의 무게인가? 무게=중력이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이다.
무게(W)=질량(m)X중력가속도(g)
무게는 중력이 작용하는 힘, 질량(質量)은 물체의 양, 중력가속도(重力加速度)는 중력 때문에 물체의 속도(速度)가 빨라지는 정도(正道)를 말한다.
질량을 가진 물채들이 서로 끌어당기는 현상(現象)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힘을 중력이라고 한다. 지구 표면(表面)에서는 만유인력(萬有引力)과 지구 자전(自轉)에 따른 원심력(遠心力)의 활력(活力)을 중력으로 부른다.
중력, 지구에 정지한 물체에 대해 ‘만유인력(萬有引力)+원심력(遠心力)’ 의 합력(合力)으로 작용된다. 따라서 중력은 만유인력을 뜻하거나, 지표에서의 합력, 즉 여기저기 흩어진 힘을 한데 모으는 일이다.
장보고는 중력(重力)의 원리(原理)를 군사(軍事).경제(經濟).정치(政治).사회(社會).문화(文化) 등에 적용(適用)했다.
장보고는 “중력원리(重力原理)를 이용(利用)해 세상 모든 일이, 전 세계의 힘이 제다 신라로 향해야 한다” 며, 상대국의 힘을 신라(新羅)로 끌어 모았다.
장보고가 추진한 해외무역(海外貿易)은 청해진(淸海鎭)이라는 국제자유무역항(國際自由貿易港)을 두어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듯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신라로 끌어들었다. 끌어 모은 힘들은 다시 세계 곳곳으로 퍼지게 했다. 집중된 힘, 〈신라의 힘〉 이 미치게 한 것이다.
신라의 힘의 영향이 막중(莫重)하고 강력(强力)하고 대단했는데, 일종의 ‘핵폭발(核爆發)’ 이다.
물체를 끌어당기는 중력의 힘은 〈장보고의 힘〉 이다. 장(張)이라는 한자는 끌어들이는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다. 장(張)이 ‘무게’ 라면 보(保)는 ‘질량(質量)’ 이다. 고(皐)는 ‘중력가속도(重力加速度)’ 다.
범위(範圍).규모(規模).세력(勢力)의 확장(擴張)이라는 무게를 크게 하여, 유용(有用)한 것들을 가지고 있거나 소중한 물건(物件) 등을 간직한 보유(保有)라는 질량을 높여, 어딘가에 기대거나 비비는 의지(依支)라는 증력가속도로 나아가게 만든 장보고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중력의 힘〉 이다. 중력의 힘은 ‘장+무게, 보+질량, 고+중력가속도’ 로써의 중력(重力)의 원리(原理)이며, 이 힘이 신라(新羅)를 넘어 세계(世界)로 영향(影響)을 끼친다.
세계로 뻗어가는 장보고의 영향, 그 힘의 기운(氣運)은 활력(活力)을 불러들인다. 그 살아 움직이는 힘에 의해 세상은 늘 밝고 힘차다.
장보고의 증력(重力)의 힘은 오늘날에도 느껴진다. 장보고 프로젝트로 대한민국의 국방력(國防力)을 키운다. 해상무역(海上貿易)에 있어서도 장보고의 힘을 빌려 쓴다.
장보고는 자신이 청해진 대사로 임명받은 것에 대해 신라 국가(國家) 정상화(正常化)와 우리 신라의 큰 변화(變化)를 바라는 백성(百姓)들의 염원(念願)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개인적(個人的)으로 무척 영광(榮光)이고, 또 신라 왕(王)이나 조정(朝廷)에게 결코 후회(後悔)하지 않는 그런 선택(選擇)이 될 수 있도록 무거운 책임(責任)을 동시(同視)에 느낀다고 했다.
장보고는 신라가 직면(直面)하고 있는 해상(海上) 문제, 해안(海岸) 문제, 무역(貿易) 문제와 군사(軍事) 문제, 정치(政治) 문제, 문화(文化) 문제, 지속(持續) 발전(發展) 문제 등 이런 것 하나 하나를 신라 왕(王)과 조정(朝廷) 대신(大臣), 그리고 호족(豪族).귀족(貴族)들과 또 여러 장수(將帥)들과 늘 소통(疏通)하면서 하나씩 차분하게 풀어나가도록 하겠다고 청해진(淸海鎭) 특명정권대사(特命政權大使) 역할에 의지(意志)를 보였다.
장보고는 신라를 더 위대하게 만드는 일이 꿈이었다. 안전(安全)한 신라, 평화(平和)로운 신라, 발전(發展)된 신라, 변영(繁榮)의 신라와 무역대국(貿易大國)의 신라, 선진(先進) 정치(政治)의 신라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당나라에 있을 때부터,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다.
마치 신라 조정(朝廷)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당나라 무령군(武寧軍)에 찾아와와 자신에게 조국(祖國) 신라(新羅)로 다시 들어가 나라를 위해 일을 해줄 것을 당부(當付)하자, 그는 흔쾌히 승낙(承諾)했다. 장보고는 귀국(歸國)해 먼저 조정에 계신 흥덕왕(興德王)을 찾아뵙고, 신라가 처한 일에 관한 보고(報告)를 받고, 생각해 두었던 것을 왕에게 알현(謁見)하며, 자신이 해상(海上) 질서(秩序) 회복(回復)과 나라 안정(安定)과 평화(平和), 그리고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추진(推進)해보겠다고 했다. 그는 이미 그런 생각을 가졌던 거라, 조정을 찾아 내가 한 번 신라가 직면(直面)한 현안(懸案)과 문제(問題)를 해결해보겠노라고 말할 참이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는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띠며, 당나라가 직면한 해안(海岸) 질서(秩序) 회복(回復)과 나라 안정(安定)을 기했다. 그런 그가 다시 신라에서도 역시 해상(海上) 질서 회복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해적(海賊)들을 소탕(掃蕩)했다. 그리고 해상무역(海上貿易)을 추진했으며, 이를 진행하기 위해 해로(海路) 개척(開拓)과 무역항(貿易港) 개설(開設), 무역시장(貿易市場) 개척에 적극 나섰다.
장보고는 ‘준비(準備)된 장수(將帥).상인(商人)’ 이라고 한다. 준비된 사람은 확실한 사고(思考)와 비전으로 법도(法道)를 행(行)할 사람, 정책적(政策的) 마인드를 갖춘 사람을 말한 다.
장보고는 준비된 사람으로서의 신라 42대 흥덕왕 3년(828년)에 설치한 청해진 대사로 부임(赴任)했다. 당나라에서 배우고 능력(能力)을 발휘한 군사기술(軍事技術)과 전술(戰術), 그리고 무역(貿易)을 신라에서도 그 지식(知識)과 운영(運營)을 유감(有感)없이 발휘(發揮)했다. 장보고는 828년부터 851년까지 23년간 해상(海上) 군사(軍事).무역기지(貿易基地)인 청해진에서 임무(任務)를 수행(遂行)했다.
특히 무역(貿易)은 신라국제자유무역(新羅國際自由貿易)으로 승격(昇格)시켜 세계적(世界的)인 무역국(貿易國)으로 부상(浮上)하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해상왕(海上王)이라는 칭호(稱號)까지 받았다.
만약, 장보고가 준비된 인물(人物)이 아니었다면, 조정(朝廷)에서는 그를 청해진 대사로 임무(任務)를 띠게 해주지 안했을 것이다. 장보고도 자신이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면, 청해진 설치(設置)에 건의(建議)하거나 임무를 수행(隨行)하려고 하질 안했을 것이다.
준비된 장보고라는 것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었다. 실천적(實踐的)인 확신(確信)가진 장보고, 불의(不義)와 타협(妥協)하지 않고, 나라를 고치기 위해 노력(勞力)한 정의(正義)를 보인 장보고, 지킬 수 있는 말만 하기 위해 노력한 장보고로서의 남들이 대신해주는 그런 허울뿐인 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청해진 대사로서 장보고가 내세운 슬로건은 ‘당당한 신라 특명정권대사 장보고’ , ‘미래를 여는 첫 번째 대사 장보고’ , ‘보수(保守)의 새 희망(希望), 백성(百姓)이 당당한 나라’ , 그리고 ‘나라다운 나라, 든든한 청해진 대사’ 로 준비된 장보고였다.
특히 안보(安保)에 준비성이 철저히 했다. 신라를 반석(盤石) 위에 올린, 국가(國家) 위기(危機) 상황(狀況)이 필요한 대응(對應)을 펼 수 있는 판단력(判斷力)과 지도력(指導力)을 가진, 그는 탁월(卓越)함, 소통력(疏通力), 판단력(判斷力)을 갖춘 지도자(指導者)였다.
장보고는 정직(正直)하면서도 능력(能力)을 갖추었다. 진솔(眞率)하면사도 경험(經驗)이 풍부(豊富)했다.
장보고는 〈준비된 지도자, 준비된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약속(約束)과 원칙(原則)을 내걸며, 강력한 정책(政策)을 추진해 왕(王)과 백성(百姓)들의 신뢰(信賴)를 받았다.
장보고는 왕의 신뢰를 얻고, 청해진을 이끌어갈 수 있는 핵심(核心) 기반(基盤)이, 그런 기본(基本) 요건(要件)에 대해 충족(充足)했다. 청해진 대사로서 왕과 백성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면, 이는 조정(朝廷)에 대한 불신(不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어떤 효과(效果)를 기대(期待)할 수 없다. 그 믿음의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장보고는 그런 우려(憂慮)와는 달리, 왕의 신임(信任)을 받아 온전하게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아쉬움이 있었다면, 장보고를 견제(牽制)하는 세력(勢力)이 존재(存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견제세력(牽制勢力)에 그가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었다. 장보고가 왕위(王位) 계승(繼承) 쟁탈전(爭奪戰)의 일부 세력과 손잡고 함께 나섰던 게 큰 화근(禍根)이 되었고, 결국 그는 염장(閻長)이라는 자객(刺客)한테 암살(暗殺)되고 말았다.
준비된 지도자. 준비된 나라로 청해진(淸海鎭)에서 임무(任務)를 수행한 장보고의 헌신(獻身)은 천년(千年)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 국민(국민)들은 그를 해상왕(海上王)으로 그리워한다.
장보고는 “언제 인생(人生)이 바뀔지 모른다. 준비(準備)된 사람에게 기회(機會)가 온다. 미루지 말고 미리 준비하라” 고 하면서 자신은 일찍 어린 나이에 준비를 했었다.
그는 나의 인생이 당나라 신라방(新羅坊)과 무령군(武寧軍)에 접한, 한순간에 숨통이 트이고, 세상(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그 기회(機會)가 오기 전에 이미 스스로 무언가를 다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달 뒤 아니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不安)안한 세상(世上)이지만, 그 불안함을 잠재(潛在)우는 유일(唯一)한 방법(方法)은 뭐라도 해도는 것뿐이라고 했다. 거창(巨創)한 목표(目標)가 아니더라도 짧게 짧게 성취(成就)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내 안의 내공(內空)을 쌓아두어야, 어느 날 문득 기회가 찾아왔을 때 낚아챌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내공을 쌓아 기회를 노렸다.
장보고는 “무조건(無條件) 전력(全力)을 다해 최선(最善)을 다해라. 그래 놓고 안 되면 남 탓을 해라. 아무것도 안 하고 남 탓하는 것만큼 꼴 보기 싫은 게 없다” 라고 했다.
내가 기잔 모든 힘을 쏟아 부어 전력을 다했다면, 안 됐을 때 굳이 내 탓을 하며 무너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준비된 자만이 무대(舞臺)에 선다. 신라 장수(將帥)이자 청해진 대사(大使) 장보고가 말하는 축적(蓄積)의 시간(時間)에 관한 명언(名言)이다.
그는 “지속(持續)되는 방향(方向)이 결국 인생(人生)을 만든다. 잠깐의 선택(選擇)보다 계속(繼續) 반복(反復)되는 방향이 더 큰 영향(影響)을 준다. 어느 쪽으로 쌓이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했다.
또 “결과(結果)는 시간(時間)의 공간(空間), 순간(瞬間)보다 준비(準備)의 문제다. 좋은 기회는 누구에게나 오지만, 준비된 사람만 그것을 활용(活用)할 수 있다. 준비가 곧 결과를 좌우(左右)한다” 라고 했다.
결과는 시간의 공간, 순간보다 준비의 문제다. 멋진 말이다. 시간이 공간, 순간은 준비된 자의 것이다. 준비만 잘되어 있으면 언제나 시간의 공간과 순간이 맞을 수 있다. 준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렇듯 신중(愼重)한 방향 선택과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장보고는 깨달았다.
장보고는 지금 시간의 공간, 순간이 맞지 않는다고 한탄(恨歎)하지 안했다.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이든 준비하면 시간의 공간, 순간은 찾아온다” 고 항상 준비(準備) 태세(態勢)를 갖추도록 노력(勞力)했다.
〈준비된 자만이 무대에 선다〉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축적의 시간’ 에 관한 명언은 ‘준비된 사람이 기회를 잡는다’ 라는 진리(眞理)를 깨닫게 한 일이다.
준비(準備), 규정(規定)에 맞는 갖춤과 마련이다. 비(備)는 갑골문(甲骨文)에서 화살 통(桶)에 화살(弓)을 넣어 놓은 모습을 그렸다. 방여(防禦)를 위해 무기(武器)를 잘 준비(準備)해 놓은 모습이다.
준비란 규정에 맞도록 정확(正確)하게 준비(대비)한다는 뜻이다. 이후 준비의 주체(主體)인 인(人)이 더해져 지금처럼 되었다.
사람은 언제나 근신(勤愼)해야 한다고 했듯이, 말이나 행동(行動)을 삼가고 조심(操心)했다. 언제나 삼가고 조심하면서 미래(未來)를 대비(對備)하고 준비(準備)해야 함을 경계(經界)했던 장보고였다. 몸가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했던 장보고는 매일(每日)을 음력 1월을 달리 부르는 세수(歲首).원단(元旦).원일(元日).원정(元正)이라고 보듯이,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처럼 신일(愼日)로 여겼다.
‘항상 준비하라. 그러면 꿈은 이루어진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장보고는 자신감(自信感)을 갖고 자신이 이루고자 것들을, 준비한 것으로 꾸준하게 그 문(門)을 두드렸다.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무령군(武寧軍) 소장(少將)과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 그리고 해상무역(海上貿易)의 문도, 자신이 원(願)하는 대로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는 두드리는 문마다 열리기는 했으나. 한 가지의 소원(所願)은 이루지를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딸을 왕비(王妃)로 삼으려는 데는 한계성(限界性)을 드러냈다. 장보고는 벼슬이 없는 일반(일반)으로서 평민(平民) 출신(出身) 성분(性分) 때문에 평민 집안의 딸을 왕족계열(王族系列)로 둔다는 것은, 그 문턱이 태산(泰山)만큼이나 높아보였다.
9세기 전반(全般)에 활동(活動)을 한 신라의 군인(軍人)이자 상인(商人)인 장보고는 지방(地方) 세력가(勢力家)다.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라 신분제(身分制)의 벽(壁)에 막혀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그는 당(唐)으로 건너가 군인이 되었다가, 신라에 귀국(歸國)한 후 지금의 완도 장도(長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했다. 그리고 동아시아 해상(海上) 교통로(交通路)를 장악(掌握)하여 국제교역(國際交易)을 주도(主導)하면서 많은 부(富)와 힘을 축적(蓄積)하여 큰 해상(海上) 세력(勢力)을 형성(形成)했다. 신라 후기(後期) 왕위계승(王位繼承) 분쟁(紛爭)에도 참여(參與)하여 신무왕(神武王, 839~839)을 즉위(卽位)시키는데, 결정적(決定的)인 역할(役割)을 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특권층(特權層)인 진골귀족(眞骨貴族) 중심의 신라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결국 암살(暗殺)을 당해 최후(最後)를 맞이했다.
장보고는 신라 후기(後期) 인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복(弓福)’ 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궁파(弓巴)’ 로 기록(記錄)되었다.
기록에는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평민(平民) 출신(出身)으로 밝혀진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라는 혈연(血緣)에 바탕을 둔 신분제(身分制)가 있었기에, 귀족(貴族) 특히 소소(小數)의 진골귀족이 아니면 중요한 요직(要職)에 나갈 수 없는 사화(社會)였다. 장보고는 무예(武藝)에 뛰어난 재능(才能)이 있었지만, 이 골품제의 벽에 막혀 신라에서 자신의 능력(能力)을 발휘(發揮)할 수 없었다.
이게 그는 함께 정연(鄭年)과 함께 당 서주(徐州), 지금의 중국 장쑤성.쉬저우시로 건너가 서주절도사(徐州節度使) 휘하(麾下) 무령군(武寧軍)에 속한 군인(軍人)이 되었다. 장보고는 한 살 아래인 정연과 경쟁자(競爭者)로 함께 하며, 둘은 말을 터거나 창(槍)을 사용한 무술(武術)과 같은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탁월(卓越)하여 단연 두각(頭角)을 나타내었고, 소장(少將)이라는 하급(下級) 장교(將校)의 지위(地位)까지 올랐다. 넓은 세상(世上) 나가 자신들의 역량(力量)을 발휘한 것이다.
당은 절도사(節度使)들이 여러 지방(地方)에서 독자세력(獨自勢力)으로 분리(分離) 독립(獨立)해 나가던 분열기(分裂期)였다. 장보고는 당에 있으면서 지방 세력들이 군사(軍事)를 영성(養成)하고 각 지역을 장악(掌握), 관리(管理)하는 모습을 보고 익혔다. 그리고 바다에 관심(關心)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당은 세계 교역(交易)의 중심지(中心地)였다. 중동(中東)과 인도(印度), 동남(東南)아시아, 그리고 신라(新羅)와 일본(日本)에 이르기까지 당(唐)을 중심으로 국제교역(國際交易)이 이루어졌는데, 그 교통로로 중요했던 것이 바로 바닷길이었다.
중국의 산등반도(山東半島) 등 동쪽 해안(海岸) 지역에는 많은 신라인(新羅人)들이 신라방(新羅坊), 신라소(新羅所)와 같은 집단(集團) 자치(自治) 거주지(居住地)를 구성(構成)하며 살고 있었고, 연안(沿岸) 운송업(運送業)이나 국제무역(國際貿易)과 같은 상업(商業)에 종사(從事)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장보고는 군인 생활(生活)을 하면서 이러한 신라인들과 교류(交流)하고, 그들의 사정(事情)을 잘 알게 되었다.
당시 당이나 신라 모두 정치적(政治的) 혼란(混亂)으로 중앙(中央)의 집권력(集權力)이 약화(弱化)되고 있던 시기(時期)여서, 각지에서 도적(盜賊)들이 많아 일어나고 있었는데, 바닷길에도 해적(海賊)들이 출몰(出沒)하여 무역선(貿易船)을 강탈(强奪)하거나 해안(海岸)에 주민(住民)들을 잡아 노예(奴隸)로 파는 등 많은 피해(被害)를 주었다.
해안에 거주(居住)하던 신라인들도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장보고는 이러한 해적들의 언행(言行)에 분노(忿怒)하면서 동시(同時)에 해상교역(海上交易)으로 막대한 부(富)를 축적(蓄積)할 수 있음에 주목(注目)하였다. 구가 해적들을 소탕(掃蕩)하고, 해상교역로(海上交易路)를 장악하여 국제무역(國際貿易)을 주도(主導)하고자 하는 목표(目標)를 가지게 된 것이다.
신로 돌아와 바닷길을 장악(掌握)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했던 장보고, 그는 신라로 동아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828년(흥덕왕 3) 4월 귀국(歸國)하여 흥덕왕(興德王)을 만나 신라인들을 잡아 노예(奴隸)로 파는 해적(海賊)들을 제거(除去)하여 신라를 지키고 싶다는 뜻을 전달(傳達)했다. 이미 신라방을 통해 제안(提案)이 있었지만, 왕의 허가(許可)를 얻어 10,000명 정도 되는 군사(軍事)를 모아서 지금의 전남 완도 장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후, 그 사령관(司令官) 격인 대사직(大使職)을 맡고 본격적(本格的)으로 해상교역로(海上交易路) 확보(確保)에 나서, 청해진의 임무(任務)인 군사(軍事)와 무역(貿易)을 수행(遂行)했다. 청해진은 왕의 허가를 받아 설치(設置)된 것이기는 하지만, 설치 단계(段階)부터 장보고가 주도(主導)하고, 변경(邊境)의 백성(百姓)들을 자체적(自體的)으로 조직(組織)한 것이어서, 중앙(中央)의 통제(統制)를 받지 않는 독자적(獨自的)인 세력(勢力)이었다.
그런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가 타고난 신분(身分)은 지우지 못해 귀족사회(貴族社會)에는 끼지를 못했다.
약속(約束)을 했던 42대 흥덕왕(興德王)이 서거(逝去)하고, 이후 45대 신무왕(神武王, 800~839)인 김우징(金祐徵)이 장보고와의 약속(約束)이 있었는데, 자신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이하기로 했던 아들인 46대 문성왕(文聖王, 821~857)이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 무산(無産)되고 말았다. 아무리 왕(王)이 장보고(張保皐)와 좋은 관계(關係)로서 사돈(査頓)을 맺고자 부탁(付託)을 했어도, 조정(朝廷) 대신(大臣)과 왕족(王族).귀족(貴族)들의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이다.
청해진 대사의 신분이었어도, 왕족이나 귀족들은, 그를 평민 출신이라는 편견적(偏見的)으로 대했다.
장보고는 군(軍) 총사령관(總司令官)인 동시에 야전사령관(野戰司令官)이기도 했다. 장보고가 이룬 신라의 혁신(革新)들은, 그 근원(根源)이 장보고 자신일 때가 많았다. 그는 군시가(軍事家)이자 기업가(企業家) 정신(精神)의 정수(精髓)를 보여준 신라의 대표적(代表作)인 리더자.경영자(經營者)였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歸國)했을 때, 그는 오늘날 신라는 또다시 위기(危機)의 파도(波濤)를 넘고 있다며 왕위(王位) 쟁탈(爭奪)과 귀족(貴族)들의 득세(得勢), 그리고 해적(海賊)들의 약탈(掠奪), 내정간섭(內政干涉) 및 나라 침탈(侵奪) 등이 자행(恣行)으로 무너진 나라를 정상화(正常化)하자마자 주변국(周邊國)의 전쟁(戰爭), 신라(新羅) 내의 혼란(混亂)의 높은 파도가 우리의 경제(經濟)와 삶에까지 큰 영향(影響)을 미치고 있다면서 한 시라도 안심(安心)할 수 없는 항상 긴장감(緊張感)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신라는 언제나 국난(國難) 앞에 더 큰 우리로 한데 뭉치는 신라의 저역(底力)이 있기에, 그 어떤 위기(危機)도 능히 극복(克服)해낼 것이라고 확신(確信)했다.
신라 조정(朝廷)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선조(先祖)들께서 바라마지 않던 나라, 자랑스러운 신라를 만드는 길에 매진(邁進)하겠다고 했다.
●교역 만족 극대 장보고만의 거래 수학 공식
장보고는 해외무역(海外貿易)을 추진하는데, 고민(苦悶)에 빠졌다. 워낙 시장이 넓고 방대(尨大)해서다.
그는 늘 하던 시장(市場)을 상대(相對)할까? 아니면 새로운 시장에도 도전(挑戰)할까?
장보고는 종이를 꺼내 수식(數式)을 적기 시작했다. 그는 적어든 메모를 틈틈이 꺼내 줄곧 봤다. 하지만 그 고민은 쉽게 해결(解決).풀지를 못했다. 하나를 선택(選擇)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장보고가 처음 생각한 것은 한 나라의 시장(市場)을 고르는 문제였다. 그는 이를 한 나라에서 여러 시장을 고르는 문제로 재구성(再構成)했다. 수학적(數學的)으로 같은 문제다. 어떤 나라를 며칠 동안 방문(訪問)한다고 가정(假定)하고, 목표(目標)는 교역(交易) 기간(期間) 전체(全體)의 시장 만족도(滿足度)를 최대(最大)한 높이는 것이다.
매일 새 시장을 찾아다니면 최고(最高) 시장을 만날 가능성(可能性)은 커진다. 하지만 이미 찾은 시장을 다시 누릴 기회(期會)는 줄어든다. 반대로 너무 일찍 한 시장에 집착(執着)하면 더 좋은 시장을 놓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수학(數學)과 심리학(心理學)에서 최저(最低) 정지(停止) 문제로 불린다. 말 그대로 언제까지 탐색(探索)하고, 언제 멈출지 따지는 문제다.
장보고의 답(答)을 한마다로 요약(要約)하면, 처음엔 까다롭게, 나중엔 현실적(現實的)으로다. 거래(去來) 초반(初盤)에는 아주 좋은 시장을 찾을 때까지 새 시장에 도전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남은 날이 줄어들수록 시장에 거는 기대를 맞추고, 이미 찾은 시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리(有利)하다. 수학적으로 남은 기회가 줄어들수록 이 정도면 만족(滿足)하고 멈추자는 기준선(基準線)이 낮아진다는 뜻이다.
교역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복잡한 수식(數式)을 계산(計算)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 시장에 도전하는 기준(基準)을 일정(一定)하게 낮춰갔다. 초반엔ㄴ 더 좋은 곳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새 시장을 더 찾아다녔고, 후반에는 이미 찾은 좋은 시장으로 돌아가는 경향(傾向)을 보였다.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고도 인간(人間)의 직관(直觀)이 쾌 효율적(效率的)인 선택(選擇)을 한 셈이다.
장보고의 해법(解法)은 시장 선택에만 그치지 않는다. 군사기지(軍事基地)를 늘릴 때, 투자(投資) 대상을 고를 때도 같은 구조(構造)가 반복(反復)된다. 더 좋은 선택지(選擇地)를 계속 찾다 보면 지금의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고, 반대로 너무 빨리 만족하면 더 나은 가능성을 포기(抛棄)하는 셈이 된다. 인생의 많은 결정(決定)이 탐색(探索)과 정착(定着) 사의 줄타기인 셈이다.
물론 현실(現實)은 훨씬 복잡(複雜)하다. 시장 상인(商人)들은 장보고의 수학적 해법이 실제 인간의 취향(趣向)과 사회적(社會的) 요인(要因)을 모두 담지는 못한다고 봤다.
그럼에도 “기회가 많을 때는 모험(冒險)하라.” 그러나 “끝이 가까워질수록 이미 찾은 좋은 것을 붙잡아” 라는 메시지는 여러 선택 상황(狀況)에 적용(適用)해 볼만하다고 했다. 작은 시장의 고민에서 출발(出發)한 장보고의 메모는 인간이 불확실(不確實)한 선택 앞에서 이렇게 탐색하고,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수학적(數學的) 단서(端緖)로 천년 이후에도 되살아난다.
장보고 대서사시 7편
김대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