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3주일설교 시편66:1-20
본문: 시편66:1-20
제목: 물과 불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
오늘은 시편66:1-20의 말씀을 가지고
“물과 불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물과 불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
세상에는 많은 성현들이 있고 영웅 호걸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큰 덕과 업적을 이루어서
세상을 밝게 하였고 난세에 세상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은 그런 영웅들을 보기가 어렵고
그런 영웅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조롱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보면 갖은 고초와 몹시 힘들고
괴로운 일을 겪지 않은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역경과 어려움이 클수록
그 이룬 공적 업적이 또한 더욱 큽니다.
그렇습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는 더 어둑하고
깊은 신비함을 품고 있습니다.
반짝이는 은이 태어나려면
반복되는 제련의 수고를 거쳐야 가능합니다.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 주님을 믿은 이들에게는
한없이 깊은 은혜가 녹아 있습니다.
맹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늘이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서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한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렇게 하는 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서 담금질하기 위함이다.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감당할만 하도록
그 능력을 증대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난이 있었으며
그 고난을 통해서 어떻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습니까?
1) 찬양을 촉구함(1-4절)
오늘 시편은 찬양을 촉구함으로 시작합니다.
그렇게 찬양할 자는 온 땅
곧 모든 민족을 향해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 찬양하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모두 찬양의 대상입니다.
왜 찬양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놀라운 정도로 압도적이기 때문에
주의 원수들조차 그분의 권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4절은 온 땅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행적을 주목하라고 촉구합니다. (5-7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던 시인은 5-7절에서
하나님의 행적을 주목하라고 합니다.
어떤 행적으로 주목하라고 합니까?
우선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신 일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비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연약하고 슬프고
여러 세상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비천한 사람들은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을 6절에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거기서”라는 표현을 통해
현재 하나님의 백성이 과거 출애굽 사건의
수혜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즉 찬양을 통해 과거의 구원이 현재화되었습니다.
이는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십자가 위에 달릴 때”라는 찬송가(147장) 가사가
전달하는 것은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사건에 동참하고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7절에서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열방을 통치하고 계신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찬양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통치자로서
모든 나라를 주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시하고 계실 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민족도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것을 깨끗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는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끌어내사 자유롭게 하시며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통치자시며
모든 나라의 통치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3)열방을 향한 찬양 촉구(8-12절)
8-12절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 이후에도
놀라운 일을 계속 행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계속해서 우리를 위해 놀랍게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만민들에게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9-12절은 그렇게 찬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생명을 살려 주셨고
때로 시험을 통해 은을 정련하듯이 단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시는 분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그런 단련을 통해 내 뜻과
내 양심을 바른길로 가게 하십니다.
그런 과정에는 그물에 걸리는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이 포위하고 함정을 파고
그물로 잡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일은 어려운 짐을 허리에 매어두는
고통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다고 합니다.
머리가 짓밟히는 고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것은 적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굴종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 머리를 타고 넘어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때 그런 일을 당하는 이들은 허리가 땅에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게 됩니다.
또한 불과 물을 통과하였다고 말합니다.
불과 불은 서로 상극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모든 위험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은 우리가 물 가운데 지날 때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강을 건널 때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은 우리를 불 가운데로 지날 때
함께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이 우리를 사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일을 당하였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이 경험하였고
광야에서 불 뱀의 공격 속에서
놋 뱀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고통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불과 불의 엄청난 시련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통과할 수 있었고
그 후에 해방과 자유가 있는
풍성한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험을 극복하고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은 모든 열방에게
여호와의 권능이 어떠함을 보여주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기에 열방에게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4)서원 실행에 대한 보고(13-15절)
시인은 서원을 실행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 개인적인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원을 즉시 실행합니다.
이 서원은 단순한 약속이 아닙니다.
자신이 시련의 때에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하나님께 한 약속이라고 1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서원을 바칠 때의 환란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약속에 대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15절에 나오는
숫양의 향기에서 숫양은 복수형인 숫양들이고
수소도 복수형인 수소들입니다.
이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사용된 제물의 양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재물이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풍부하신 은혜로 그도 역시
자신의 나름대로 풍성하게 살진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은혜를 받고 어찌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서원하여 응답받은 사실에 대해
그 은혜가 화답하지 않겠습니까?
5)기도 응답에 대한 찬양(16-20절)
16-20절에서 시인은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동물을 드린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모아
하나님의 계속되는 구원 사역을 간증합니다.
시인은 곤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던 일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그는 고통 중에서도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17절)
그 과정에서 부르짖는 입은
자연스레 찬송의 혀로 변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무죄하지 않았다면
기도가 응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18절).
그의 마음속의 음모나 계략
또는 남을 해칠 의도가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지 않으셨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 신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물을 많이 내면 응답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행할 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9:31)
하나님은 시인이 자신을 경외하는 자임을 아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19절).
그렇기에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회개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떤 악의를 가지고
드리는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그래서 자신을 인자하심으로 받아 주셨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찬송하겠다고 합니다.
이 시인은 기도가 찬송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되고
그 응답을 받은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홍해가 있었지만
그것을 지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에 앞에 불과 물의 시험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기게 하셨고
이스라엘이 매임과 많은 고통속에서
자유롭고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고통속에서
이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면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 서원을 이행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해야 합니다.
오늘 시인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과 간증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믿는 자라면 환란 속에서 기도하는 자라면
이러한 간증이 분명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응답들이 있습니까?
시인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왜 그렇게 응답은 안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악한 생각을 가지고 기도한 것은 아닐까요?
기도를 했지만 응답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자녀가 원한다고 다 해주십니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주십니까?
어린 아기에게 칼이 달라고 한다고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십니다.
하지만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악한 마음을 품고 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악한 마음을 없앨 수 있습니까?
그 길은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어서
그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주님은 놀라운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원수를 복종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원수는 무섭고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쉽게 그들을 두려워하고 복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행하면
원수는 멸망 당하고
우리에게 복종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택하여 복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택하여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청종하기만 하면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삶은 보호되고 보장됩니다.
이스라엘은 40년의 광야 생활 속에서
평탄하거나 물과 음식이 풍성하지는 않았습니다.
풀무 불을 통과하는 시험과 단련의 시간이었습니다.
불뱀이 있고,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낮추고 시험하여
가나안 땅의 복을 주시려고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불과 물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고통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풍부한 곳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곳으로 인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경험하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이 우리는 사는 목적입니다.
교회는 선한 사람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저 선한 사람끼리 교제하는 공동체는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려고 모였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모인 곳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어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물과 불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을 만났기에 찬송하고 환란 때
서원한 것을 이루어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신만 감사하고 찬송하지 않습니다.
더 나가 열방에게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권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하여 행하는
성도님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