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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말씀
여섯 가지로 제시된 대당명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유다교에서 생활 지침으로 제시된 십계명과 율법 규정을 모두 총괄하면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데에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본으로 제시하다니요?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성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부족하고 흠 많은 사람뿐입니다.
여기서 ‘완전하다(텔레이오스)’는 수식어가 무슨 뜻인지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수식어는 윤리적으로 고결하다거나 덕을 많이 닦았다는 의미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의 병행 구절에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로 제시되어 있어, ‘자비’라는 시각으로 접근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레위기에는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로 이야기됩니다. 하느님을 본으로 삼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보는지에 대한 시각은 제각기 다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그중에서 ‘완전하다’는 시각으로 접근합니다. 당대에는 모세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을 완전하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마태오는 여섯 가지 대당명제로 십계명과 율법을 심화시키거나 폐지하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율법을 해석해서 실천할 때 완전해질 수 있다고 본 것이죠. 기존에 주어진 율법을 이 시대에 맞추어 해석해서 적용하는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가면 누구나 하느님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에서 실생활에 적용되는 메시지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 아주 독특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마태 5,43)는 말씀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니 예수님의 율법 해석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태 5,38)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는 그분의 시각이 돋보입니다.(성서와 함께)
묵상해봅시다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은 똑같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엄격한 율법적 관습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폭력적인 사랑의 법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우선하는 법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를 사랑할 때까지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예수님을 우리 안에 온전히 받아들일 때 이런 사랑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매일미사)
오늘의 성경말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알아봅시다: 교회가 갈라진 이유?
갈라진다는 것은 아픈 일입니다. 우리 민족도 이념과 전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 민족의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갈라져 있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이 또한 큰 아픔이지요. 교회도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속화되고 잘못을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때마다 교회 내부에서는 개혁의 외침이 있었고 쇄신의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교회의 틀을 벗어나 또 다른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런 움직임을 통해 늘 새로워지기를 바랐지만, 갈리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분열의 원인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에 중세 말기에 이르러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서부 유럽 국가들은 왕권이 강화되고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고자하는 국교회 사상을 초래하여 교권이 약화되게 됩니다. 또한 독일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지방 분권화라는 정치상황에 놓여 황제는 지방 제후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도시와 지방의 빈부 차이가 심해졌습니다. 부유한 도시 사람들은 구원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이는 대사부(면죄부) 판매라는 부작용을 일으키게 됩니다.
신학적인 면에서는 대사, 구원, 성사, 교황의 수위권 등 신학문제들이 확실하게 정의되지 못하여 신학의 불확실성 시대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루터의 신학적 공격과 논쟁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14세기의 유럽은 정치적 동요, 전염병, 농민 반란 등의 사회적 불안 속에서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신심을 강조하는 사상은 교회의 성사 신학을 비판하게 되고, 반(反)성직자의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합니다. 소위 면죄부라 일컬어지는 대사부 문제도 이 때 생기게 됩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전임 교황이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 반포한 전대사를 다시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금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대사 설교를 허가하며, 설교 지침서를 발표하고 설교가를 임명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대사의 본래 의미를 망각하고 남용함으로써 문제를 만들게 됩니다. 루터는 대사 남용에 대해 항의하고 교회는 그를 파문하게 됩니다. 사제이며 성서학자이던 그는 교회를 떠나게 되고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제시하게 됩니다. 이런 루터의 영향을 받은 츠빈글리, 칼빈 등이 새롭게 나서게 됩니다.
특이한 것은 영국인데, 헨리 8세는 루터에 반대하여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관면을 받고 과부가 된 형수인 카타리나와 결혼하였지만 혼인 무효를 주장하며 이혼을 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앤 볼랜과 새로운 사랑에 빠져 다시 결혼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반대에 부딪힌 왕은 자신이 영국의 모든 종교에 권한을 갖고 있다고 선포하게 됩니다. 이렇게 영국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분리되게 되고, 영국 성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교회 내에서도 쇄신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이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걷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교회는 트렌토 공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교회 쇄신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런 아픈 역사를 거쳐,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그 동안의 분열 역사를 청산하고 그리스도 교회들이 다시 일치할 수 있기를 바라는 새로운 전망을 열게 됩니다.
<알아둡시다>
갈라진 교회의 일치를 위해 세계 모든 그리스도 교인이 함께 기도하는 주간을 교회일치기도주간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1월 18일에서 25일 사이입니다.
1월 18일은 성 베드로가 로마에 교좌(敎座)를 정한 기념일이며, 1월 25일은 성 바울로의 개종 기념일입니다. 이 주간의 기원은 1908년 뉴욕에서 폴 와트슨(Paul wattson)신부가 창설한 '교회일치주간'(Chair of unity octave)과 프랑스 리용의 쿠튀리에(Couturier) 신부의 노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특히 쿠튀리에 신부는 '교회 일치를 위한 전 세계적 기도주간'을 제창하여 보급시켰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로마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선택한 종교를 통해 일치하기를 기도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이 발표 뒤 로마 가톨릭에서도 일치운동, 일치 기도주간이 활발한 양상으로 진전되었고, 한국 교회도 매년 일치주간의 주제를 설정하고 공동의 기도문을 작성 배부하며, 각 교파 대표들간의 광범한 대화, 교파간 교환 설교 등 일치를 위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평화방손. 신부님 궁금해요)
2.여러분이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적인 명칭이라 많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막상 교회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명하라 하면 쉽지 않은 테마이기도 하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개신교에서 집회를 하는 장소, 즉 예배당을 뜻하는 장소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고, 개신교가 이 단어를 사용하니까 상대적으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사용하기를 꺼리게 되는 것 같다.
성경은 한 번도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밝힌 적이 없지만 간접적으로 여러 가지 표상을 사용하였다.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하기도 하고, 목자와 양떼,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교회를 묘사하였다. 사도 바울로 역시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혹은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교회를 건축물에 비교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여러 가지 표상을 사용하는 것은 교회에 대하여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교회 자체가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한정된 개념으로 교회가 무엇인가를 정의하기에는 무리일 수밖에 없다.
1.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바울로 사도가 많이 사용하였고 베드로 전서에서도 나타난다. 이 표현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잘 드러내 준다. 구약은 신약을 준비하고 신약은 구약을 완성한다. 구약의 백성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응답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처럼, 교회도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에 대한 신앙의 답변으로 성립된다. 구약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과의 계약으로 맺어진 것처럼, 신약의 백성도 그리스도의 성혈과 성령의 힘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교회의 역사성을 잘 드러내 준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나라의 지상적 표현이다. 백성이라는 표현은 다음에 언급하는 몸(신비체)이라는 개념보다 교회의 지상상태를 더 잘 표현한다. 이 백성은 이 지상에 살면서 인간역사의 기복을 경험하면서 점진적인 성장을 하며 더 나은 하느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백성이다. 비록 이 지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백성이므로 세상가치에 연연하지 않는 초월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를 가늠하는 능력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2.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신비체)이다.
사도 바울로의 그리스도의 몸, 혹은 그리스도의 신비체 사상은 아마도 그의 개인적인 체험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처음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 사람이 아니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유다인이었다.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할 당시에도 사울은 그 자리에 있었고(사도 7,58 참조), 박해로 인해 초대교회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그는 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했던 인물이다. 여기서 그는 일생 최대의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사도 9,1-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초대교회 공동체를 동일시하신다. 사울로부터 박해받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추종자들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공동체를 통하여 현존하신다! 바울로라는 이름으로 개종한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교회를 설명하였고, 특히 그의 후기 편지에서 이 ‘신비체’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콜로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 코린토서간에서도 신자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1코린 12장 참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를 적절하게 드러내 준다. 우리는 세례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일치할 수가 있고, 성체성사로써 이 일치를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고 하셨듯이 그리스도의 몸에 일치해 있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이다.(대구교구 월간 빛)
알림
버마 이주난민 자원봉사활동- 태국 국경 메솟지역
광주인권평화재단(이사장 김희중 대주교)은 2월 16일부터 28일까지 태국과 버마 국경 메솟지역에 있는 버마 이주난민들을 위한 자원봉사활동을 실시한다. 총 23명으로 구성된 봉사단은 진료활동과 교육활동을 이주난민 약 600여명을 대상으로 벌이게 된다.
광주인권평화재단과 결연관계를 맺고 있는 전남대학교 보건진료소(소장 손석준 교수)는 의료진과 의약품을 지원하여 참가한다. 또한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모임에서는 답사단을 파견하여 현지의 사정을 보고 앞으로 진행될 봉사활동에 지속적인 참여 여부를 진단하게 된다.
이번 자원봉사단은 의사2명, 학생16명 등 23명으로 광주인권평화재단 상임이사인 김재학 신부가 인솔한다. 봉사단은 태국의 북부지역 치앙마이로 입국하여 전용 버스 편으로 6시간 떨어진 메솟으로 이동하여 활동을 벌인다. 16명의 학생들은 귀국 길에 치앙마이에서 문화유산을 돌아보는 체험의 시간을 갖게 된다.
버마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태국의 메솟지역은 난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지역으로 2010년 11월 버마의 총선이 있었던 시기에도 3만여 명의 난민이 일시적으로 발생하였다. 버마는 1962년 군부 쿠데타에 의해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1988년 버마 민주화를 총칼로 짓밟은 군부의 탄압으로 피신한 이들을 UN은 난민으로 규정하고 보호하고 있다. 최근에 발생하는 난민들은 법적으로 난민지위가 부여되지 않고 있어서 불법 체류하는 이주난민으로 신분보장이 되지 않아 의료, 교육 부분에 매우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다.
메솟지역 이주난민을 위해서 광주청소년서포터즈가 2004년부터 이주난민 학교를 지원해 왔으며 지난해까지 4동의 학교를 지어준 바 있다. 이번 봉사활동은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활동으로 미술, 음악, 영어, 체육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자원봉사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해당분야별로 모임을 갖고 효과적인 소통과 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광주인권평화재단은 금년 11월에도 자원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자원봉사활동을 기획한 상임이사 김재학 신부는 “광주의 젊은이들이 이번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지금 고통받고 있는 지구촌 이웃 형제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연대하며, 본인들 스스로는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지를 발견하고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손석준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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