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변에 벚꽃이 만개하였다. 팝콘처럼 부풀어 오른 저 꽃들의 춘정을 지켜보면서 못내 봄밤을 뒤척이게 되는 것은 지나간 한때의 아득한 그리움 때문이다. 이십여 전, 대구에는 ‘백산과 그 일당들’이라는 노래 모임이 있었다. 그야말로 아마추어 동호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생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는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즐기던 모임이었다. 시내 레스토랑을 이곳저곳 전전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때는 가요방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모임의 리더가 백산 선생이었다. 호를 백산(白山)으로 불렀던 까닭은 일당들의 나이가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유독 그의 머리에 백설이 분분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평소에 지은 업으로 아내만 보면 혼비백산 놀란다고 ‘백산’이라 지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아내를 너무너무 두려워했다. 중간 중간 전화를 받거나 모임이 파하고 집에 들어갈 때쯤이면 그는 늘 미적거리며 표정이 어두웠다. 그 외의 멤버들도 호를 하나씩 가졌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판 출신의 S변호사는 법조인답게 ‘가할 가 자’에 ‘바를 정 자’를 더한 ‘가정(可正)’이라고 썼다. 물론 그의 호도 주변에서 인정하는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데서 따왔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었다. 또 다른 멤버인 L교장은 친구들이 함께 목욕탕에 가서는 경탄을 금치 못하고 ‘이송’ 선생이라고 지었다 한다. 이송을 거꾸로 하면 송이버섯이 된다. 달성공원 앞에 사는 임 씨 성을 가진 분은 배포가 커서 ‘임포(林抱)’라는 호를 가졌지만 어원은 프라이버시상 밝힐 수 없겠다. 리더인 백산 선생은 통기타의 달인이었다. 본인의 입으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모두들 가수 송창식이에게 기타를 가르친 분으로 알았다. 그는 정말 신의 손을 가졌다. 기타 하나로 오만 가지 악기들의 합주가 가능했다. 한번은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그를 초빙해서 연주회를 열었다. 그 뒤에. 곧바로 기타 동아리가 결성되었으니 그의 음률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던가를 짐작할 것이다. 백산 선생은 수성구의 어느 농협지점장으로 근무했다. 그의 꿈은 기타 하나 둘러메고 브라질의 리오 축제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명예퇴직을 하고 퇴직금으로 한 달간 브라질을 다녀왔다. 부인이 화를 낼 만했고, 그 역시도 혼비백산 겁을 내야 할 사람이었다. 어느 해 봄이었다. 마침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공연을 왔다. 귀한 인연이 있었는지 공연을 마친 두 사람을 모시고 법원 앞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가자 슬슬 흥이 일었다. 백산 선생이 기타를 들면서 두 분 가수가 라이브를 시작했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 주옥같은 노랫말은 합창이 되었다. 이어서 손에 손에 꽃물을 들이는 ‘봉숭아’와 짙은 안개 속으로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른다는 ‘북한강’에도 다녀왔다. 그날 밤 어깨동무를 하며 출렁거리던 봄밤의 향연을 이만큼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백산 선생도 그랬던 같다. 그날 유독 취한 백산 선생을 댁까지 모셨었다. 그의 집으로 가는 신천변은 만개한 벚꽃들이 꽃등을 켜고 있었다. 그는 굽은 등에 기타를 가로질러 매고는 느린 걸음에 맞추어 흥얼거렸다. “우리는 빛이 없는 어둠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 수 있는 우리는” 나는 그의 반복되는 흥얼거림에 그가 틀림없이 송창식에게 기타를 가르쳐 주었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노래 모임이 계속되지 못한 것은 백산 선생의 죽음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리오축제를 다녀온 뒤에 간경화인지 간암으로인지 슬금슬금 앓기 시작했다. 한동안 모임이 없어서 궁금증이 더해갈 무렵 먼 곳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는 여태 컴백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매년 봄이 오고, 벚꽃은 저렇게 아득하게 흩날리는데.
첫댓글 BGM과 어울려선지... 나의 옛 추억이 생각나선지
눈물이 고입니다.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