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구성
<뫼비우스의 띠>와 <에필로그>가 전후방에 배치되고, 교사와 꼽추와 앉은뱅이는 난장이 가족들을 이야기 한다. 난장이 가족들은 재개발 현장, 노동현장의 실태를 그려 나간다. 또한 은강 공장장과 율사 가족이 난장이 가족들과 엮여져 있다. 이들은 대립하며 비극적 죽음만이 삶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의견
Down by the salley gardens -W.B.Yeats
Down by the salley gardens my love and I did meet;
She passed the salley gardens with little snow-white feet.
She bid me take love easy, as the leaves grow on the tree;
But I, being young and foolish, with her would not agree.
In a field by the river my love and I did stand,
And on my leaning shoulder she laid her snow-white hand
She bid me take life easy, as the grass grows on the weirs;
But I was young and foolish, and now am full of tears.
예이츠(W.B.Yeates) 시인은 삶이 어렵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젊고 어리석기 때문에 눈물만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삶을 쉽게 살라”고 충고하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갑자기 예이츠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연명해 나가야 하는 누군가의 일생이 연민을 넘어서 차라리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는 노래가 되고(실제는 이 시는 누군가에 의해 불려졌다.) 노래는 건강을 해치고 아늑한 행복도 없는 삶의 주름을 무심하게도 낭만화한다. 아마 전쟁에 핀 꽃,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공장 폐수 속에 떨어진 팬지꽃이 우리의 정서를 두드리듯이. 그러나 이 낭만적 아우라(Aura)가 설명되기 시작할수록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발가벗겨진 삶(bare life)이 드러난다. 낭만은 정치를 부르고 우리의 삶 구석구석이 그 정치에서 휘청거리다, 휘청거리다, 투쟁을 요청하고 죽음을 예비한다.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Die Toten Schweigen.) 그리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L'avenir dure longtemps.)
우리의 아버지/어머니, 아버지/어머니의 할아버지/할머니, 할아버지/할머니의 아버지/어머니, 그 아버지/어머니의 할아버지/할머니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들의 아버지/어머니, 아버지/어머니의 할아버지/할머니, 할아버지/할머니의 아버지/어머니, 그 아버지/어머니의 할아버지/할머니는 어디에서 오는가? 독일의 법학자 Carl Schmitt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에서 정치를 간단하게 요약한다.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특수한 정치적 구별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모든 정치적인 개념, 관념과 용어들은 논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들은 구체적인 대립을 면전에 두고, 구체적인 상황에 결부되어 있다.” 전쟁은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언제나 국가 속의 국민 사이에서도 내전으로서 나타난다. 만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전쟁상태의 묘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법과 정치 그리고 경제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이 긴장은 누군가의 고통과 누군가의 비-고통으로 항상 나누어진다.)을 우리는 어디에서 배울 수 있다는 말인가! 난장이 가족과 은강공장장의 가족(율사의 가족)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상태에 놓인다. 그 대립은 한 세대를 떠나 수 세대에 걸쳐 진행된다. 그것의 대립은 체제의 형식을 이미 넘어서 있으며, 시간은 아무런 힘을 주지 못한다. 시간은 시간일뿐. 이것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보여주려는 삶의 한(恨)맺힌 진실이다.
삶을 근본적으로 전복하기. 적과 동지를 완전히 구별하여 정치적 통합의 환상에서 벗어나기. 난장이의 <모든 것=다섯 식구의 목숨>을 걸고 희구하는 세상은 이렇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기줄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어 버린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
난장이는 사랑우위의 정치를 원한다. 반면에 그들은 돈과 권력과 무관심으로 정치를 한다. 이것은 사랑이냐/돈이냐/권력이냐/무관심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다. 정치의 문제인 이상, 타협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새로운 가치의 평가에 따라서만 그것의 움직임이 진행될 뿐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독해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 우리는 1970년대의 대한민국의 양상을 보는 것이다. 또한 근대화 한국의 상황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이것은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의 현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 우리가 그것을 과거로 받아들일 때, 그것을 국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때 정치의 한 축은 이미 무너져 버린다. 시간은 다시 이전처럼 아무런 효력 없이 흘러가게 되고, 그들은 우리의 고통을 비웃어가며, 무관심한 채로 몇 세대를 연명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폭력이 하나의 가치이듯이, 난장이에게도 사랑은 하나의 가치이다. 폭력이 효력 있는 무기인 것처럼, 사랑도 효력 있는 무기가 되어야 한다. 법이 그것을 보증하고 보장할 것이다. 정치는 윤리학의 싸움(누가 더 옳으냐? 누가 더 정당하냐?)이 아니라 오직 가치(가치의 전략과 효력 그리고 그 영향력)의 싸움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난장이 가족의 싸움은 실패이며, 그 실패는 성공의 잠재가능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꿈꿀 수 있는 세상 중의 하나로서, 즉 (현실화할 수 있는)가능성으로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칼 슈미트가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말할 때, 적도 동지도 계속해서 재생산된다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다. 동지는 언제나 적의 우위성 아래에서 결집되며, 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적 통합이라는 미명하에 국가는 내전을 지우지 못한다. 국가는 또 하나의 적의 정립일 뿐이다. 국민은 내부적으로 적과 동지로 구성되며,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민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또 다른 국민을 외부적으로 적과 동지로서 나타난다.
정치적인 것은 부자들/가난한 자들, 정상인들/장애인들, 부르주아지/프롤레타리아트, 자본주의/공산주의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분류는 언제나 강자와 약자의 미메시스(mimesis)일 뿐이다.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나타나는 현실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개념일 수도 있다. 강자는 영속적으로 승리하고, 약자는 영속적으로 패배한다. 이러한 진리 앞에서 누가 미래(시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미래(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설령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로 남는다.(무의미만큼 더 공포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적과 동지의 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삶의 이야기가 소설로 씌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하듯이, 적과 동지의 관계는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해 준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역설적으로 노예의 승리로 등장하듯이 적과 동지의 구별로서의 정치는 매순간 혁명의 영구적 발생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난장이 아버지의 사랑-정치는 혁명의 시간에 버금가는 것으로 읽혀야 한다. 난장이 가족들이 “500년”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가야 하고, 영수와 영호 그리고 영희가 자본주의적 시공간 아래에서 기계부속처럼 일해야 하는 상황이 좌파적 선동이나 사회주의자들의 탄생으로 취급하는 것은 문제를 너무나 안이하게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호명은 언제나 부르주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맑스도 말했듯이 자본주의적 시공간은 기획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다. 그가 정치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결로 본 것은 어쩌면 정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적과 동지의 다른 이름일 것이기 때문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시간(세대의 연속으로 나타난다.)의 문제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괴롭힌다. 시간은 허무하고 변화를 모른다. 시간은 끝없이 혁명을 거부한 채 흐른다. 우리가 시간의 그러한 속성을 한 번만 전도시킬 수 있다면, 시간의 추동력을 다시 한 번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정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삶은 시간을 뒤집어놓고 새로운 대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약 760단어)
<참고문헌>
1.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과지성사, 1978(1987)
2. 예이츠, <첫사랑>, 정현종 역, 민음사, 1974(2001)
3. 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김효전 역, 법문사, 1995
4. 칼 맑스, <자본론 III>,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89(1999)
* 부기
<Die Toten Schweigen>은 Arthur Schnitzler의 소설 제목이다.
<L'avenir dure longtemps>은 Louis Althusser의 자서전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