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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완 작가와 삼국유사를 만나다
일시 : 10월 10일 12:00
장소 : 대구대학교 조형예술대학 5호관 명예교수 휴게실
대담 및 원고 작성자 : 곽구영(수필가, 호산대학교 명예교수)
참 석 자 : 김 산(소설가, 전 아세아대학총장)
정호완 교수는 국어학자로서 대구대학에서 정년한 뒤 명예교수로서 12년이 되었다. 아직도 그는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와 저서 발간을 위한 끈질긴 활동을 하고 있다. 본 영남문학과는 창간호부터 함께 해온 깊은 인연을 맺고 삼국유사 및 경산 지역의 삼성현 역사와 관련한 스토리를 재구성하여 기고를 한 분으로 경북문화상과 삼국유사 학술상을 받은 바 있다.
저서로는, 삼국유사의 상상력(2013)’, ‘삼성현의 꿈(2014)’, ‘스토리텔링 백제가요(2017)’, ‘삼국유사사전(2019)’, 일연평전(2019), ‘깁더 삼국유사(2019)’ 등 50여 권이 있다.
국학 분야에서 삼국유사의 연구자를 꼽으라면 정교수를 뺄 수 없다. 2008년 경북도에서 실시한 문화관광 아이디어 공모에서 정교수의 아이디어가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바, 삼국유사테마파크는 국비 지원 사업으로 경상북도 군위군 의흥면 이지리에 조성된 바 있다. 국비와 군비 350억 등 총 1,223억원을 들여 2020년에 공식적으로 개장할 예정이다.
삼국유사테마파크는 워터파크, 승마장, 돔하우스 숙박시설, 신화목(단군신화 상징 나무 조형물), 왕들의 공간, 단군신화와 삼국, 신라의 설화를 테마로 꾸민 전시관 등 다양한 역사교육문화 콘텐츠로써 국내외적인 역사 문화 탐방지로 선보일 예정이다.
요즈음 들어 한국이 대내외적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비롯하여 해방 전후와 남북전쟁으로 인하여 국토가 분단이 된 현실에서 경제적으로 민생이 팍팍하고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생산과 수출을 통한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느라고 민족의 전통문화를 가다듬을 충분한 겨를이 없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정교수의 단군의 홍익 정신을 되찾으려는 민족문화 연구와 관련된 삼국유사 자료 발굴과 재해석, 그리고 우리 민족의 연원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문화콘텐츠에 대한 연구는 매우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가늠된다. 따라서 이번 정호완 교수와의 만남과 대담은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발행인 장사현 교수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소설가 김산(전 아세아대학교 설립 총장, ‘몽골리안나이트’ 6부작 중 3권까지 출판)과 함께 정호완 교수를 만났다.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대구대학교 조형예술대학 505호실은 명예교수들을 위한 별단의 휴게 및 연구를 위한 10개 정도의 별실로 마련된 현대식의 멋진 연구 공간이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안내를 받은 좌석에서는 우선 야생 사과를 맛보라고 내놓으시는데 그 동안 베트남과 중국 길림대학을 오가며 한국어를 가르치고 삼국유사의 현장을 답사하느라 못 만난 몇 해 동안의 회포를 풀어주는 세심한 배려에 인정스런 정 교수의 인품을 다시 맛본다(이하 대담자는 ‘곽’으로, 정호완 교수는 ‘정’으로, 그리고 김 산 작가는 ‘김’으로 약칭하였다).
곽 : 교수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대구대학에서 라오스 문화 공연을 계기로 2007년도에 처음 뵙고 교분을 쌓은 지 10년 넘게 오래되었습니다만, 3년 전인가 중국과 베트남에 가신 이후로 못 뵈었습니다.
정 : 그렇습니다. 요즘 하양에 살고 있습니다. 12년째 명예교수로 연구실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전화상으로만 연락했고 중국과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느라고 한 3년 다녀왔습니다. 내친 김에 중국 내몽골과 요하 문명의 유적지를 돌아보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김 : 정교수님과는 5년 전 쯤 만리장성 식당에서 최승호 교수 등과 만주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고 고조선 이야기를 많이 하신 기억이 있습니다.
곽 : 최근에 작업하시거나 연구 과제를 택하신 것이 있습니까?
정 : 최근에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김 : 저도 만주원류고를 읽은 적이 있는데 만주족들은 고구려를 자기들의 본국이라고 생각했는지 백제, 신라는 언급했지만, 고구려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정 : 그렇습니다. 1777년인가 건륭황제가 아계(阿桂)등 학자 33명을 선발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 8만권 가운데서 만주와 관련된 것만을 별도로 가려 뽑은 것이 만주원류고입니다. 거기에서는 신라와 백제, 발해도 만주국의 역사라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부여와 발해 등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는 부분이 기술되어 있는데 신라를 기술한 내용 가운데서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없는 사료도 탐구하고자 합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식민사관이라는 명분으로 쯔다쇼기치(津田左右)나 이마니시류(今西龍) 같은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삼국유사의 고조선 부분을 난도질하여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함으로써 일본의 역사가 우리보다 4백년 정도 앞섰음을 주장해 이를 고착시키려 했습니다. 아직도 한국의 주류 사학자들 가운데에는 고조선의 역사를 허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상존하는 실정입니다. 삼국유사를 30년 가까이 공부하다 보니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일연선사의 삼국유사 저술 80년 뒤인 공민왕 12년(1363) 행암 이암(李嵓) 선생이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단군의 47분 임금들이 올라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세종대왕도 왕11년(1429) 평양에 단군사당을 짓고 단군을 국조로 공인하였습니다. 세조 6년(1460) 임금이 10월에 몸소 평양에 가서 단군사당에 제향을 모셨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도 2015년 고고학연구소장 왕외(王巍)는 국무원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요(堯) 임금의 왕궁 터가 발굴되었음을 발표하였습니다. 산서성 임분시 도사(陶寺) 유적에서 문자(文-堯)가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요 임금은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 은, 주 역사를 400년 끌어올린 계기가 되었고, 이로부터 국사수정공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단군의 생존 시기가 요 임금이 출생한 50년 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고려할 때, 연구자는, 일연선사가 지은 삼국유사에 단군세기의 내용을 깁고 더하여 올해 10월 초순에 ‘깁더 삼국유사’라는 책을 상재했습니다. ‘깁더’라는 말은 1916년 ‘조선말본’을 저술한 김두봉 선생이 1922년 증보판을 내면서 ‘깁더조선말본’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썼으며 뒤에 김진우 선생의 ‘언어-이론과 그 응용’이라는 책에서도 깁더본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2018년에는 졸저 삼국유사사전(지문당)을 출간했지요. 단군왕검에 관련한 내용은 1928년 최남선 논문(檀君及其硏究)에서 말하기를 단군은 제사장이고 왕검은 행정수반이라고 했습니다. 고조선은 제정일치의 시대인데 정치와 종교를 따로 분리함은 문제가 있습니다. 왕검(王儉)은 이두로 읽어 님금인데 님(니마, 태양신)과 검(고마, 지모신)의 합성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단군왕검이란, 제사장 단군이 태양신(님)과 태음신(검)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전라도에서는 무당을 단골, 당골레라고 말하는데요. 한자의 소리를 따다 적은 것으로 봄이 온당합니다. 고맙다라는 인사말에 단군의 고조선 문화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김 : 위굴어에서도 탱구리라는 말을 하지요,
곽 : 언어의 유연성과 변화를 비교하면 참 재미가 있습니다. 라오스에서도 창조주를 단군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정 : 함경도에서는 무당을 ‘스숭, 스성’이라고 합니다. 스승을 형태분석하면, 슷(間) : 슷 + -응>스승 으로 나누어집니다. 신라 제2대 임금은 남해 차차웅-자충, 김대문은 자충을 무당이라 했으며,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자충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자충(慈充)의 옛날 소리가 약화되면 스승이 됩니다. 마침내 당시의 임금은 무당 곧 제사장이라는 말이지요. 신과 인간의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를 스승이라고 볼 수 있으니, 스승은 제정일치 시기의 문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뒤에 정교 분리가 되면서 의미가 축소되어 오늘날에는 선생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스승의 날 등).
김 : 철기 문화에서 신적인 존재는 불로 달굼을 의미하고 있는데, 단군의 용어도 흙토 변에 단군(壇君)을 쓴 흔적이 있습니다. 제사장을 신비스럽게 본 영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군은 청동기 문화였기 때문에 이러한 불과 곰의 영향이 시베리아 지역적인 특수성을 고찰해 보면, 곰은 경제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꿈속에서도 곰이 나타나 소위 가위 눌린다는 무서운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곰이 벌떡 일어서서 사람으로 변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 : 우리말 고맙다는 말의 형태를 생각해 보면, 고마(熊)에 –ㅂ다(如)가 어우러져 된 말입니다. 그 뜻은, ‘당신의 은혜가 어머니(조상신)의 은혜, 나아가서 하느님의 은혜와 같다’입니다. 1993년부터 KBS, MBC, SBS 등의 저녁 8시 9시 뉴스 끝에 ‘감사합니다’ 대신 ‘고맙습니다’라고 고쳐 썼습니다. 고마에서 소리가 줄어지면 곰(熊)이 됩니다. 충청도 공주는 고마나루(熊津, 용비어천가3-15)라고 하지요. 고맙다는 말하자면, 경천, 애인, 애족을 뜻합니다.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 웅신산(熊神山, 삼국유사)이었습니다. 백두산의 백(白, 힘쓸 맥貊)은 맥으로도 읽습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맥(貊)은 쇠를 먹고 곰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이르자면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맥족이 곰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백두산이 한반도에 7개 이상이 됩니다.
오늘날의 어머니는 고조선 시기에 고마(熊)라고도 했습니다. 고물고물-호물호물-오물오물, 곰취골-홈취골-옴취골(태백산)이라고 함을 보면, 고마-호마-오마(엄마-암마-움마-오메-오마니-어무이-어메, 한국 방언 연구(김형규, 1974) 참조)의 변천 과정을 가늠하게 됩니다. 백남운(1933)의 ‘조선사회경제사’를 보면 곰의 경제성은 절대적인 자산이었습니다. 큰 곰을 잡으면 겨울 내내 먹거리가 되고 그 뼈는 집의 기둥이나 무기로, 가죽은 이불이나 옷감으로 혹은 약으로 썼으니 곰을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라는 것입니다. 곰을 잡고 나서 곰신(熊神)에게 화해를 청하고 용서를 빌며 곰을 조상신으로 섬겼던 곰 토템 문화가 우리말에 아직도 살아 쓰이며 고조선 단군 설화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최근에 효행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10월 4일 청송심씨대종회 모임에서 ‘효행 문화의 형성과 전개’라는 강연을 했습니다. 전라도 곡성에 가면 관음사사적기(觀音寺事蹟記)에 적힌 심청의 전설을 바탕으로 심청이 실존했던 인물로 밝혀 낸 바 있습니다. 이로 하여 곡성에 심청 효 마을이 생겼습니다. 저는 효행 문화의 원류를 단군이 아버지 환웅과 어머니 웅녀(熊女, 고맙다)에게 신단에서 제사를 모신 것으로 상정하였습니다. 여건이 되면 전남 곡성에 가서 심청 마을에 한 번 들러보심도 좋을 것입니다.
김 : 심청이 빠져 죽은 임당수는 백령도 어름에 있지요. 효행 문화를 기반으로 한 오페라는 2011년 심봉사의 눈 뜨는 장면을 소재로 한 것인바, 우리 사회 전반의 효행 문화를 회복하는 좋은 소재가 될 것입니다.
곽 : 재야사학자의 입장에서 주장을 하지만, 단군의 곰 전설을 두고 현실적으로 회의를 가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정 : 좀 더 심하게는 유사사학이라는 말도 합니다. 사학을 한 것 같은데 아닌 사람, 즉 사이비 사학을 말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진실 앞에 진리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고 봅니다. 합리적인 의심을 가설로 이를 논증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이 주류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김 : 언어는 문화 아닙니까? 언어를 문화기호로 보자는 것이지요.
정 : 그렇습니다. 안개 속에서 이슬이 맺힌다고 합니다. 모든 나라에서 건국 신화는 허구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일본의 아마데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 신화는 당연하고 단군신화는 역사가 아니라는 내로남불 식의 논리지요. 일본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조선사(朝鮮史)가 문제의 발판이었지요. 어떤 학자는 가관설(假冠說)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곽 : 잠시 베트남 가셨던 이야기 해주실래요?
정 : 지난 해 베트남 타이응웬대학(太原大學)에서 6개월 한 학기 동안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받은 급여야 얼마 안 되지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을 보람으로 삼았습니다. 베트남 학생들의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풍은 물론 유교 정신은 대단한데, 군사부일체를 실감하겠더라고요. 삼강오륜이 깨져가는 한국이 배워야 할 앞으로의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효행 교육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
김 : 여진어를 밝혀보면 조선의 어원은 예르신인데 반모음으로 읽으면, 조선이 됩니다. 한 무제가 고조선을 친 이유는 한 무제가 흉노를 다스리기 위함인데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몽골 지역과 중앙아시아를 평정하고자 한반도 고조선 쪽을 먼저 평정한 것으로 봅니다. 예족(濊族)은 쇠를 다루는 제철 기술을 지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만주족들은 나중에 김씨로 성을 취하는데 곰이 많이 잡히는 회령 지역은 사철(沙鐵) 생산이 많았고 북한의 무산 철광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북방의 오르도스 문화는 가야로 내려와 기마 민족이 대륙 유목 대신 하천 유목 민족으로 변모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해양 유목 민족이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 : 단군왕검의 검은 검(儉)-곰-가미(神)와 관련한 표기이며 이는 바다를 건너가면서 거북으로 변용이 됩니다. 일본에서는 거북을 가메(龜, かめ)라고 하며 이는 가미, 곰과 같은 발음으로 바뀝니다. 문화의 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김해의 거북신이 나타납니다. 구지가에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하는 참요(讖謠)는 결국 구포의 옛 지명인 감동포(甘同浦, 대동지지)와의 대응에서도 감-거미-고마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양산 지방의 농요에서도 ‘거미야 거미야 왕거미야’로 시작되는 농요가 거북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곽 : 요하문명과 고조선과의 관련을 지을 때, 그 지역은 홍산문화와도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정 : 요하(遼河, Liaohe) 지역은, 고조선의 발상지로 요하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서요하 지류인 영금하(英金河)가 흐르는 곳이 적봉시 지역입니다. 시역이 거의 남한에 버금하는 넓은 곳입니다. 요하 문명의 핵심은 적봉시 우하량(牛河梁) 지역에서 신석기 문화 유적이 대량으로 나왔습니다. 주로 천단(天壇)과 여신묘(女神廟), 옥기(玉器)와 적석총(積石冢), 곧 단-묘-총-옥기로 대표되는 문명이 발생하였던 곳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화도 마니산에 천단이 있습니다. 요하의 요(遼≒燎)는 태양신 숭배로 천단이 그 제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태양숭배는 랴오-료-요로 소리가 이어집니다. 상서(尙書)에서는 탕왕이 7년 동안의 극심한 가뭄에 기우제를 올리려 요제(燎祭)를 지내는데 뽕나무 숲에서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쳐 불에 태우는 의식을 행했다고 합니다. 임금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음인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어 큰 비가 내려 죽음을 면했다고 하지요. 갑골문 자료에서도 요제(遼祭)의 사례들이 나옵니다. 동요하의 발원지인 요원(遼源)에 가면 요산(遼山)이 있고 동요하를 소요수(小遼水)라고도 합니다(수경주水經注 참조). 요산에서 발원하는 요수라는 것이 됩니다.
김 : 관련하여 요사(遼史)를 연구하려면, 앞으로 거란국지, 이슬람 자료, 러시아 자료를 더 연구하여야 합니다. 저의 대하소설 ‘몽골리안나이트’ 마지막 4,5,6권을 완성하는데 자료를 더 모을 예정입니다. 정 교수님이 말씀하신 요제(遼祭≒燎祭)에서 백인을 희생물로 인신공양을 하였다는 내용이 요사(遼史)에 나오는데, 이는 사마르칸트 강족(羌族)은 대륙 유목 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중국 역사에서는 중앙아시아 민족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정 : 제가 답사한 지역으로 요하문명과 관련되는 시라무렌 강 본류까지 가본 적이 있습니다. 시라무렌은 누렇다는 뜻이 있으며 실제 그 지역의 땅은 누렇습니다. 서요하를 거쳐 적봉까지 갔었습니다. 또한 동요하의 원류인 랴오위엔(遼源)에 이르고 동요하는 소요수라고도 하는바, 구려하(句麗河) 또는 거류하(巨流河)라고 하며 고구려와 관련이 있습니다. 소요수는 요산(遼山)에서 발원합니다. 요산은 장백산 지맥인 장령(長嶺)에 있습니다. 제가 장령을 답사할 때는 눈 쌓인 곳을 택시로 겨우 겨우 갔습니다. 약속보다 훨씬 많은 차비를 주고 가보았더니 샘물은 없으나 얼음장 아래서 요하 샘물은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로구나. 한국인의 맥은 고대로부터 아직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여기가 요산일 텐데 요제(遼祭)를 지낸 천단 터는 찾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영성(靈性)이 강한 나라입니다. 수 천 년이 흘러도 밝은 태양을 숭상하는 정신과 하늘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는 천단 문화는 고인돌 문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분포한 우리나라의 경우, 고인돌은 제단이었습니다(손진태(1933), 조선돌멘고 참조). 단군의 신단 또한 고인돌이었다고 봅니다. 언어를 문화기호로 볼 때, 고맙다에 바로 경천(敬天)과 애족(愛族)의 단군 문화가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홍익인간입니다.
곽 : 오늘 정교수님을 찾아뵙고 소중한 연구 자료를 함께 공유하였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군을 주제로 선생님과 역사 탐방, 아니 시간 여행을 하다 보니 점심도 잊고 벌써 오후 2시가 지났군요. 못 다한 이야기나 에피소드는 배도 고프고 식당에서 마저 했으면 합니다.
정 : 오랜만에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오늘 점심은 소찬이지만, 지짐이를 잘 굽는 집에서 제가 마련해야겠습니다.
곽 :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