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권 혁 웅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 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 할까 지병(持病)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날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용서받을 수 없던 때는 그 시절로 끝이 났다 이를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造花)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로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
마징가 계보학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 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해는 보문사에서 뜨고 한성여고로 진다
넓은 마당의 해는 보문사에서 떠오른다
스님들 머리처럼 반질반질하고
헐벗었다 탁발하러 해는
넓은 마당 위 능선을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과 속옷과 빨래를 얻고
경문 대신 햇빛을 조금씩 나눠준다
안방 구들장 위에 한 뼘,
손녀딸 방에 얹힌 할머니 천식에 두 뼘,
하지만 장롱으로 막아 꾸민
큰아들과 작은아들 방 책상에는
국물도 없다 서유석의 푸른 신호등을 지나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를 지나
오미희의 가요 응접실에 이르기까지
해는 먼길을 가야 한다
가장이 작업복처럼 쭈글쭈글해져서 귀가하기 전에
안주인이 영양크림과 스킨과 로션을 잔뜩 안고
외판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마침내 해는 달아오른 얼굴로
한성여고 품에 안긴다
딸아이들은 저마다 치마 안에 해를 감춰두고
고개를 넘어온다 깔깔거리며
넓은 마당으로 돌아온다 그녀들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할머니 기침소리를 들으며
삼십 촉짜리 알을 낳을 것이다
권혁웅 시인
작가 정보: 권혁웅(權赫雄)
1967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 박사 학위.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당선.
1997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시 당선.
2000년 '현대시동인상' 수상.
2001년 문학평론집 『시적 언어의 기호학』(새미) 발간.
2001년 문학연구서 『한국 현대시의 시작 방법 연구』(깊은샘) 발간.
2001년 첫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발간.
2005년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창비) 발간.
2005년 문학평론집 『미래파』(문학과지성사) 발간.
2006년 '젊은시인상', '유심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현재,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첫댓글 아주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마지막 시인의 사진엔 미소가 참 멋진 분이 들어계시네요~~~아.....내가 쩜만 젊었어요.....걍 작업하는건데........흐흐흐......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마징가 제트에서 그랜다이져까지........아주 잼나네여~ 감사합니다.
달관한 자! 진짜 시인의 언어는 저러할까요...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같기도 하고,울다가 다시 까르르 웃는 아이의 천진한 표정같기도 한...모든 것을 잊고 퍼즐을 맞추면서 숨은 그림까지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자!
아주 옛날에 올린 글이네요?
아직 여기 계시면 글 배열을 다시 해주십시오, ^^
시인이시군요. 약력도 대단하시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