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그리고 난(蘭)문양
박정희와 그의 시대 2010/03/23 08:00 정운현지난 금요일(19일) (주)다모아의 사무실을 이전하였습니다.
새로 옮긴 곳은 압구정역 3번 출구 인근 안국빌딩 6층입니다.
(* 주소 : (우)135-893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95-1 안국빌딩 6층)
저와 같이 일하는 조 형이 예산 국화시험장 시공 건으로 출장 중이어서
저 혼자 사무실의 짐을 꾸리고 또 이사를 하였습니다.
처음엔 신설법인이어서 사무실 살림살이가 뭐 있을까 싶었습니다만,
이것저것 묶고 박스에 책을 담아 넣어보니 그게 아니더라구요.^^
10여년째 나를 따라다닌 이 '컵'에 새겨진 문양은 어떤 의미일까요?
책을 싸면서 책장 제일 윗칸에 있는 '컵' 하나에 제 시선이 꽂혔습니다.
그냥 보면 보통의 컵입니다만, 제 눈엔 결코 예사스럽지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어떤 분으로부터 이 컵을 선물받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군요.
그간 여러 번 직장을 옮기면서도 깨거나 분실하지 않고 예까지 잘 간직해왔습니다.
제게 이 컵을 기념으로 주신 분은 김광식(金光植) 선생님이십니다.
인터넷을 뒤져서 김 선생님의 생사를 확인해보았으나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김광식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지난 1997년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저는 <중앙일보>에서 ‘실록 박정희 시대’ 연재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박정희의 삶 가운데 전반부를 맡아 전국을 돌며 취재를 하였습니다.
즉, 고향(구미)에서의 어린 시절과 대구사범 및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그리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시절 등의 얘기를 제가 담당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박정희의 청년기이자 군인시절을 전부 훑어본 셈입니다.
흔히 박정희를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라고 하는데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정확하게 표현하면 ‘만주 신경군관학교 2기생’이라고 하는 게 정확합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은 승전 후 이듬해 이 지역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설하고는 장교양성을 위해 봉천에 2년제 군관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사관학교가 흔히 말하는 만주군관학교의 원조격인 ‘봉천군관학교’입니다.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은 이 학교의 마지막 기수인 9기생 출신입니다.
신경군관학교 생도들의 야외전투 훈련장면 (사진출처-<동덕대>)
박정희가 예과를 마친 신경군관학교는 봉천군관학교 후신으로,
1939년 수도인 신경(新京, 현 長春)에 세워진 정식 4년제 사관학교였습니다.
이 해 4월 만계(滿系) 1기생 90명이 입교한 것이 그 첫 출발이었는데요,
1945년 8월 패전 때까지 만계는 7기, 일본계는 6기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은 선계(鮮系)로 분류돼 입교하였는데요,
성적우수자들이 많아 졸업식 때 만주국 황제 부의가 하사한 금시계를 받기도 했었죠.
신경군관학교를 나온 조선인으로는 김동하, 윤태일, 방원철 등 1기생이 13명,
김묵, 이재기, 박정희, 이한림, 김재풍 등 2기생이 11명,
그리고 최주종 등 3기생이 2명, 예관수, 장은산 등 4기생이 2명이었으며,
강문봉, 황택림 등 5기생이 5명, 김동훈, 육굉수, 김윤근, 김학림 등 6기생이 9명,
그리고 마지막 기수인 7기생은 김광식 등 4명 등 전체 졸업생 수는 44명입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정희가 5.16을 모의, 주도했을 때 주체로 참여하였는데요,
나중에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걸림돌이 되면서 숙청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알래스카 토벌작전'이 그것인데요, 주로 함경도 출신들이 많이 희생되었죠.
제가 김광식 선생님을 만나 뵌 까닭은 순전히 박정희 취재 때문이엇습니다.
당시 김 선생님은 서울 능동의 서울어린이대공원 인근에 살고 계셨는데요,
모 전문대학의 학장을 역임한 후 은퇴해서 쉬고 계실 때였습니다.
어린이대공원 인근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겸해 서너 시간 대화를 나눴는데요,
주로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얘기를 비롯해 해방 후 만군 출신들의 상황과 창군 과정에서의 역할,
그리고 5.16 후 만군 출신들이 박정희 친위대들에 의해 제거된 계기, 과정 등에 대해 들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비교적 솔직하고도 자세하게 그 시절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날 김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내용의 일부는 제가 쓴 <실록 군인 박정희>에 실렸습니다)
초면이자 또 그리 유쾌한 대화자리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날 두 사람의 대화는 길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김 선생님께서 보자기에서 무얼 하나 꺼내시더군요.
그리고는 그걸 제게 선뜻 건네시며 이렇게 말슴하셨습니다.
“정 기자에게 기념으로 하나 드리니 보관해두시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소!”
김 선생님께서 제게 ‘기념’으로 주신 것이 바로 글 첫머리에서 소개한 ‘컵’입니다.
당시 김 선생님은 만주군관학교 출신 가운데 ‘막내’로서 동창회 총무를 맡고 계셨는데요,
그 무렵 생존한 동창들과 모임을 갖고는 '기념'으로 이 컵을 만들었노라고 하셨습니다.
만주군관학교를 상징하는 문양. 가운데 5색 별은 '5족'을, 둘레의 노란색 곡식은 만주의 주곡인 '조'를 상징한다
컵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면에 큼직한 문양(紋樣)이 하나 새겨져 있는데요,
이게 바로 만주 신경군관학교를 상징하는 문양(혹은 휘장)입니다.
가운데 오색별은 만주국의 슬로건인 ‘5족협화(協和)’를 상징하는 것이며,
(여기서 ‘5족(族)’은 만주족, 한족, 몽고족, 조선족, 일본족 등을 말합니다)
외부의 곡식은 만주지역의 주식(主食)인 조(좁쌀)를 그린 것입니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자들로서야 청춘을 보낸 곳이니 기억해두고 싶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컵 바닥을 살펴보니 ‘증(贈) 김광식’이라고 글씨와 함께 문양이 하나 더 있군요.
대체 이 문양은 무엇일까요?
바로 만주국 정부의 문양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보면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문양’이 박혀 있듯이,
대부분의 국가에선 그 나라를 상징하는 문양을 갖고 있습니다.
당시 만주국의 국화(國花)는 난초였으며, 이 문양은 난초 꽃잎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만주국 장교출신 일본인들은 귀국 후 ‘난성회(蘭星會)’라는 친목단체를 조직했는데요,
이 명칭의 ‘난’ 역시 만주국 국화 난초에서 따온 것입니다.
만주국을 상징하는 난초꽃 문양이 컵 바닥에 새겨져 있다
다섯 개의 꽃잎으로 구성된 난초 문양
다섯 개의 꽃잎이 활짝 핀 난초꽃 모습
엊그제 사무실 이사를 하면서 문득 박정희를 다시 만난 셈입니다.
박정희와의 인연이 아니었으면 이 컵이 어떻게 제 손에 들어 왔을까요?
저는 아직도 싫든 좋든 박정희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와 한 시절을 보낸 만주군관학교 출신들도 이제 대부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만주군관학교의 '기억'은 어쩌면 이제 이 '컵' 얘기로 막을 내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일 막내기수(7기)인 김광식 선생님의 생사조차 알기가 쉽지 않더군요.
기꺼이 '역사의 증언'을 해주신 김광식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참고로 대한제국의 문양은 전주 이씨의 상징인 이화(李花, 오얏)문양이며,
일본황실의 문양은 국화(菊花), 일본정부의 문양의 오동나무꽃(桐花) 문양입니다
첫댓글 덕분에 나름 역사 공부 좀 했네, 옛 이야기 공부도 좋은데 천금같은 현실을 열심히 사는데 소홀할까 두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