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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육영수여사를 한시도 잊지 못해 괴로워 했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난지 두달도 안된 12월 12일,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불법적으로 보안사로 강제연행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으며, 단숨에 국가 최고 실세로 뛰어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날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번 그 자취를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편의상 높임말은 생략)
최규하
▲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서명한 정승화 대장의 계엄사령관 인사발령안.
10∙26 사태 직후, 계엄사령관으로써 사실상의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군부내의 인사조치부터 단행하였다.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자, 정승화는 국방장관 노재현과 상의하여 육군 참모차장 이희성을 중정부장서리로 임명하였고, 비어있는 육군 참모차창 자리에는 당시 군단장 보직에 있던 육사 9기 출신의 윤성민 중장을 기용하였다. 당시 윤성민 중장의 서열상으로는 육군 참모차장자리가 과분한 자리였지만, 군 수뇌부에 호남출신이 너무 없다는 의견이 있어 그 덕을 본 것이었다.
한사람 건너 박정희, 경호실차장 문홍구 중장, 수경사령관 전성각 소장
또한 전성각 수경사령관이 계급정년에 부?H힌것을 생각하여 전성각 소장을 군단장으로 중장승진 발령하였다. 새로운 수경사령관에는 육본 교육참모부장인 장태완 소장을 임명하였고, 특전사령관에는 정병주 소장을 유임시켰다. 이에 대해 전두환은 장소장의 수경사령관 임명반대를 개진하였다. 또한 일각에서는 정승화가 군내에 자신의 파벌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태완은 수경사 참모장으로 근무한 적도 있고, 일선 사단장직도 맡은 적이 있어 적임이라는 것이 정승화의 의견이었으며, 정승화는 장태완과 아무런 친분관계도 없었다. 또한 당시 헌병감이었던 김진기 준장 역시 정승화는 군내 파벌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하였다.
▲ 합수부장 당시의 전두환 소장.
전두환이 합수본부장이 된 이후 정승화와 마찰이 여러번 있었다. 당시 합수부와 경찰 간에도 마찰이 있었는데, 경찰은 계엄사 치안처로의 직속적인 보고를 원했고, 합수부는 경찰이 자신들을 거쳐서 계엄사와 일을 처리할 것을 주장하여 정총장이 정리를 해준 적이 있었다. 또한 대통령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 중장의 처리문제로도 부딪혔다. 합수부 측에서는 10-26사건 당시 이재전 중장의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총장은 법무감의 의견에 따라 기소를 각하, 이재전 중장을 예편조치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합수부는 부정축재자 일소를 건의하였으나 정총장은 혁명계엄이 아니란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재전중장
한번은 전두환이 직접 총장을 찾아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가 90% 이상의 지지율로써 당선되도록 위원들을 지도하겠다’ 라고 했다가 정승화에게 군인이 왜 정치에 관여하냐면서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김치열 법무장관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정승화에게 영남출신의 정치군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린것이 전두환의 귀에 들어가면서, 둘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김재규
10∙16 사건을 수사하던 합수부 측에서는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접한다. 바로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할 당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김정섭 중정 국내담당 차장과 함께 궁정동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은,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기에는 결격사유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날 정승화 총장이 현장에 있었던 이유는 바로 김재규의 초대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김재규는 대통령을 시해한 직후 정승화와의 친분을 이용해서 정승화를 설득, 계엄령을 선포한 뒤 정권을 장악하려는 막막한 구상을 하고 있었으나 사건 당일 오히려 정승화의 체포 명령에 의해 헌병감 김진기에게 체포되어 보안사로 연행됐었다. 비록 정승화 총장이 대통령 암살에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12∙12라는 사건의 명분이 되고 말았다.
전두환은 12월 8일 노태우와의 협의 후, 12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11일이 바로 장군진급심사 발표일이므로 12일 저녁에는 곳곳에서 축하회식이 있으므로 적기라는 생각이었다. 계획은 이러하였다. 육군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이 정총장의 연행을 맡기로 했다. 일단 정총장의 연행이 끝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을 만나 재가를 받기로 하였다. 또한 정총장의 연행에 저항할 것으로 생각되는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등은 보안사 참모장인 우국일 준장과 수경사 헌병단장인 조홍 대령이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하기로 되어있었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특히 보안사 참모장인 우국일 준장은 전두환의 참모장임에도 불구하고 음모에 대해 아는바가 하나도 없었으며, 단지 전두환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 (후일 우국일은 재판정에서 전두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12월 12일 밤, 운명의 날이 왔다. 경복궁의 수경사 30단장실에는 합수부와 행동을 함께하기로 한 인사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제 1군단장 황영시 중장, 제 9사단장 노태우 소장, 제 20사단장 박준병 소장, 제 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 제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제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제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 수경사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 등이었다.
허삼수 대령은 총장을 연행하러 출발하기 전 총장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을 보안사 정보처장이라고 속인 뒤 총장에게 보고사항이 있어 찾아 가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은 권정달 대령이었는데, 허삼수가 권정달의 행세를 한 것은 인사처장보다 정보처장이 보고를 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 것이었다. (그 뒤로도 수경사 측에서는 권정달이 직접 총장을 연행해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곧이어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 범죄수사단장 및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과 총장공관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이종민 중령 등 헌병장교 3명이 승용차를 탔고 서빙고에서 차출된 보안사 최정예 수사관 7명은 지프를 타고, 헌병 1개 소대는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뒤따랐다.
당시 총장공관은 2중으로 경비를 섰는데, 외곽 경비는 해병대가, 내부는 헌병대가 맡고 있었다. 곧이어 허 대령 일행이 도착하자 경비병력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기 경비 순찰이다” “왜 이리 병력이 많습니까?” “계엄중이라 그렇다” “좋습니다” 경비대는 순간 안좋은 낌새를 느꼈으나 허삼수 일행 중 총장공관 경비 책임자이자 자신들의 상관인 이종민 중령의 얼굴을 보자 안도감을 느꼈다.
곧이어 허삼수와 우경윤은 안내를 받아 총장을 만나러 갔다. 그들이 데리고 온 병력은 즉시 내부경비를 맡은 헌병대의 무장을 해체하고 자신들이 포진하였다. 정승화는 2층에서 뉴스를 보다가 입고있던 외출복 차림 그대로 두 대령을 맞았다. 자리에 앉고 난 뒤 곧이어 우경윤이 말했다. “총장님 이번에 저도 진급시켜주실 줄 알았는데 섭섭합니다” 정승화가 웃으면서 답했다. “그래요? 진급 정원이 제한되어 있어서 자격있는 사람들을 다 진급시켜 주지 못해서 매번 발표때마다 나도 서운해요. 그런데 무슨일이야” 그러자 허삼수가 “총장님이 김재규로부터 돈을 좀 많이 받으셨군요” 라고 했다. 정승화는 불같이 화를 내며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하냐고 했다. 김재규가 죽을 때가 다 되니 헛소리를 지껄이는 모양이라고 하자 허 대령은 녹음기가 있는 곳까지 같이 가주셔야겠다고 으름을 놨다. 정 총장은 자신이 바로 계엄사령관인데 누가 자신을 연행조치 하냐면서, 하다못해 대통령 명령이라면 전화라도 있었을 것이라며 직접 대통령과 통화해 봐야겠다며 부관을 불렀다. 그 순간 총성이 서너발 났는데, 동시에 두 대령이 총장의 양팔을 끼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부관실에서는 총장 공관의 장교들과 보안사 수사관들이 함께 있었는데, 총소리가 나자 부관실에 있던 총장 공관 소속의 장교들이 뛰쳐나가려 했다. 순간 수사관들이 문을 막아섰고 격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총장 부관 이재천 소령이 수화기로 다가갔고, 겁을 먹은 보안사 수사관들이 권총을 뽑아 총격을 가해 장교들을 쓰러뜨렸다.
한편 총장공관 관리담당이던 반일부 준위는 당번병의 보고를 받고 홀로 뛰쳐나왔다. 총소리를 들은 그는 경비병력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바깥으로 뛰쳐나갔는데, 야전점퍼 차림에 M16을 들고 있는 사나이들이 자신에게 총격을 가하자 재빨리 몸을 숨겼다. 뒤이어 정문 쪽의 총장공관 보초병들의 내무반으로 뛰어갔다. 이상한 낌새가 들어 내무반 막사의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보초병들이 엎드려 있고 사복 차림의 보안사 수사관들이 M16을 들고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반 준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저놈 죽여버려” 라고 외치며 총격을 가했고, 반 준위는 담쪽으로 뛰어 달아났다. 반 준위는 담을 뛰어넘었는데, 축대 위에 쌓은 담이라 높이가 꽤 되었다.
공관 내부에서는 정총장이 반항하자 갑자기 야전점퍼를 입은 한 40대 남자가 응접실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와 M16 소총 개머리판으로 정 총장을 후려치고 총부리를 총장의 목에 들이대며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현관 문을 나오는 도중 오인사격으로 인하여 우경윤 대령이 총상을 입고 쓰려졌다. 허삼수는 우대령을 그 자리에 버려둔 채 총장과 같은 승용차에 타고 재빨리 빠져나갔다.
총소리에 놀란 총장 부인 신유경 여사는 전화를 쓰려했으나 이미 집안의 전화선이 모두 절단된 뒤였고, 비상전화 한 대만이 남아있었다. 신 여사는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인 유병헌 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이 납치되었다고 했고, 유 대장은 놀라 즉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뒤이어 육군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에게도 알렸으며,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이미 총장공관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간첩이 넘어온줄 알고 겁을 집어먹고서 국방장관공관 담을 넘어 도망을 친 뒤였다.
담을 넘어 도망쳤던 반 준위는 외곽 경비를 맡은 해병대 내무반으로 뛰어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총장이 납치되었다는 보고를 했다. 지휘관인 황 소령은 자신도 마침 총소리가 나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며 비상을 걸고 해병대를 출동시켰다. (공관에 남아있던 합수부측 병력은 해병대에게 몰려 자신들이 타고 온 버스 안에 갇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추가적으로 포스팅을 할 예정.) 한편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헌병부대장인 신윤희 중령을 불러 APC를 포함한 기동타격대를 데리고 총장공관으로 출발하라고 했다. 신 중령이 도착함과 거의 동시에 국방부 헌병대, 육군의장대, 육군본부 헌병대, 서울시 경찰 기동타격대 등이 도착하여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서로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이들의 대치는 다음날 까지 계속 되었다. (당일 보안사 측이 감청한 통화기록에 의하면, 장태완 소장은 이건영 3군사령관과 통화하며 '내가 보낸 수경사 기동타격대가 해병대에게 포위당하여 총장공관에 갇혀있다' 라며 답답함을 피로하기도 하였다.)
정 총장 연행 보고를 접한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은 즉시 자신의 정통 지휘계통이 살아있으며, 자신의 재가 없이는 그 어떠한 병력 출동도 허가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정 총장을 연행한 것이 우경윤 대령과 권정달(실제로는 허삼수) 두 대령이라는 첩보를 입수했고 이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한편 정 총장 연행소식을 접한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이 세사람은 황급히 부대로 복귀했으며, 전두환이 박희도의 제 1공수여단에게 출동 명령을 내리자 육군본부에 모여있던 장성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 당시 육군본부 측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장태완의 수도경비사령부만 하더라도 5개의 단중 이미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제 30,33경비단과 헌병단이 모두 합수부 측에 섰고, 정병주의 특전사의 경우에도 수도권의 4개 여단 중 3개 여단이 전두환의 명령을 듣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단 경비 병력이 많은 수경사로 몸을 피신하기로 하고 육본측 장성들은 지휘소를 수경사로 옮기기로 하였다. 장태완 소장은 충정계획이 발동되어 충정부대가 자신의 지휘 하에 있음을 확인하고, 수도기계화사단과 26사단에 전화를 걸어 출동준비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장태완에게 유병헌 연합사부사령관, 김용휴 국방차관 둥으로부터 응원의 메시지가 쇄도했다.
초조해진 합수부측은 계속해서 육본측을 설득하려 했다. 평소에 장태완과 친분이 있던 유학성 중장이 장태완에게 전화를 하여 "야 장태완 장군이 알만한 사람이 왜 그래. 이리 와. 여기 다 와 있어." 라며 설득하려 했으나, 오히려 장태완 소장은 "아 유장군 왜 한밤중에 남의 부대에 와서 그래요? 내 이러면 다 쏴죽인다" 라고 대꾸하였다. 이에 유학성이 평소 장태완과 잘 알고 지내던 황영시 중장에게 전화를 바꿔주며 “야 장태완이 나하고 다 통할만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왜 그래. 차규헌이도 다 와있고 빨리 이리와." 라고 구슬리자 장태완은 다시 "이놈아! 나는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건 당일 보안사 측에서 도청한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이건영 3군 사령관 과의 전화통화 녹취록. 이처럼 1212사태 당시 보안사에서는 주요 지휘관들의 전화 통화를 도청하며 육본측에서 조치를 취하면 바로 공작을 벌여 이를 마비시켜 버리곤 했다. 육본측 지휘관들은 이를 의식했던 듯 비화기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도리어 자신들의 통화 감도가 떨어지거나 잡음만 늘어날 뿐, 보안사의 감청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육본측은 국방장관, 합참의장, 육군 참모차장, 각 군 사령관 등 정식 지휘계통을 통하여 모든 부대는 국방장관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는 절대 병력을 동원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고, 특히 김종환 합참의장의 경우 이건영 3군 사령관에게 전화통화를 하여 30사단, 33사단에 사단장이 정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하고,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이 출동 준비되어있는가를 확인하고, 만일 사단장이 부재중일 경우(이 말은 곧 그 사단이 합수부측에 넘어갔다는 이야기일수 있다) 참모장과 연대장과 직접 전화통화하여 통제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시는 이미 정식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전두환의 명령을 따르는 하나회 소속 지휘관들에게는 무용지물 이었다.
한편 전두환은 제 1공수여단에게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진압을 명함과 동시에 제 3공수여단에게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제거를 명령했다. 정병주는 제 9공수여단에게 제 3군 지원사령부로부터 차량을 지원받아 지금 당장 서울로 출동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3군지사에서 차량이 도착하지 않자 초조해진 윤흥기 제 9공수여단장은 자체 차량으로 1개 대대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제 전두환의 제 1공수여단과 정병주의 제 9공수여단 중 어느쪽이 먼저 서울에 도착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공수에게 출동명령을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정병주는 전두환이 보낸 제 3공수여단에게 피습을 받았고, 사령관과 연락이 끊겨버린 제 9공수여단장은 영문을 모른체 합수부측의 공작에 의해 중도 회군을 하고 만다. 제 1공수여단이 한강을 건너오기 위해서는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이미 한강의 모든 다리는 수도경비사령부가 제압을 하고 있었다. 한강 다리 중 행주대교는 박희모 소장의 제 30사단 관할이었는데, 박희모는 장태완으로부터 다리를 꼭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박희모 역시 합수부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 제 1공수여단의 행주대교 돌입을 방관했고, 이는 곧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함락으로 이어졌다.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이던 위컴 대장. 위컴은 전두환의 행위에 격노했다.
미군의 대처는 어쨌을까. 당시 미 8군 벙커에는 위컴 한미연합사령관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유병헌 한미연합사부사령관, 김종환 합참의장과 공관에서 도망쳐온 노재현 국방장관이 있었다. 전두환이 전방의 9사단의 병력을 빼돌려 서울로 출동시켰다는 보고를 받은 위컴 대장은 격노했다. (당시 전방부대의 이동권은 전적으로 미군의 휘하에 있었다.) 윤성민 중장으로부터 국방부로 나와서 상황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노재현 국방장관은 김종환 합참의장과 함께 국방부로 나갔다. 자정을 조금 넘겨 불안해진 유병헌 한미연합사부사령관 역시 국방부로 나갔는데, 위컴은 자신의 차를 타고 가라고 했다. 유병헌 대장이 국방부 장관실에 들어간 뒤 얼마 안되어 제 1공수여단이 국방부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국방부 옥상의 수경사 방포단 소속 발칸포가 불을 뿜었고,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총소리가 들리자 장관실을 뛰쳐나가 지하실로 가서 숨었고, 김종환 합참의장과 유병현 연합사부사령관만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곧이어 공수부대원들이 M16을 난사하며 장관실로 뛰쳐들어왔는데, 유병현 대장은 자리에 앉은 채로 공수부대원들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고 한다.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합수부측에 제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장태완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수도경비사령부 본부중대와 헌병대, 취사병, 행정병들까지 끌어모으니 200명이 채 안되는 병력이었고, 탱크는 5대가 있었다. 부대를 사령부 주변에 배치시키고 있는데 비서실장이 뛰쳐들어오며 장태완을 말렸다. 수경사 휘하의 전차부대 대대장이 합수부측에 포섭되어 장태완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장태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노재현 국방장관이었다. 노 장관은 이미 공수부대원들에게 발각된 모양이었는데, 장태완에게 싸우지 말고 평화적으로 하라며 다그쳤다.
새벽 4시 쯤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수경사령부 응접실에서 합수부측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을 부렵, 육본측 장성들이 모여있는 수경사령관실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장태완이 뛰어가보니 육군본무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수경사 이종백 인사참모, 수경사 현병부대장 신윤희 중령이 노태우에게 설득되어 배신을 하고 헌병대를 동원한 것이었다.
총리공관에서는 이미 겁을 집어먹을대로 집어먹은 노재현 국방장관이 전두환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에게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재가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끝까지 버티던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도 결국 일반계엄하의 계엄사령관의 직속 상관인 노재현 장관의 요청에 따라 재가를 하였다. 그런데 재가 서류에 사인을 하면서 당시 시간을 기록하였는데,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신현확 부총리의 의견에 따르면 그것이 불법적인 사후재가라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최 대통령이 서류에 사인을 한 시간을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1212사태의 주역들
한 명의 속 깊은 이야기가 수십 명의 에피소드 퍼레이드를 능가했다.KBS 2TV 예능프로그램 '김승우의 승승장구'가 14일 방송에서 같은 시간대 방송된 SBS '강심장'을 2주 연속 제쳤다. '김승우의 승승장구'는 이날 전국시청률 11.0%(AGB닐슨미디어리서치 기준)를 기록했다. '강심장'은 10.1%로 나타났다.'김승우의 승승장구'는 이날 가수 심수봉을 초대손님으로 맞았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 10.26 사태인 '그때 그 사건' 등 심수봉을 둘러싼 항간의 루머를 털어놨다. 심수봉은 당시 현장에 동석, 시해순간을 목격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심수봉은 "그 사건 이후로 내가 아끼던 사람들이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어디론가 끌려가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바로 옆방에서 들었는데 충격으로 난 정신병원에 감금됐다"며 "한 달 가까이 병원에서 지냈고 아무리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말해도 나를 가두고 약물 주사를 놨다"고 덧붙였다.
심수봉은 이날 '그때 그 사건' 외에도 가수 나훈아와의 인연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에피소드, 50만 명 중 한 명이 걸리는 희귀병 때문에 신기(神氣)가 있다고 오해 받은 사연 등을 공개했다심수봉 감금 고백…“
심수봉은 “그 사건 이후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남편이 어디론가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고 밝혔다.심수봉은 “옆방에서 남편이 고문당하는 소리를 듣고 너무 고통스러웠다”며 “이후 나는 한 달정도 정신병원에 감금당했다. 네 명이 강제로 내게 약물주사를 놓기도 했다. 주사 후유증으로 잠을 못자는 척추 약물 중독까지 걸렸다”고 고백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심수봉은 이날 나훈아 덕분에 가수가 됐다고 털어놨다.
심수봉의 고백에 힘입어 ‘승승장구’는 시청률조사회사 AGB닐슨미디어 조사 결과 전국기준 11.0%의 시청률을 기록, 같은 시간대 경쟁예능프로그램 SBS ‘강심장’ 10.1%를 앞섰다.
가수 심수봉이 10.26 사태 이후 정신병원에 감금됐었던 사실을 고백했다.
한 명의 속 깊은 이야기가 수십 명의 에피소드 퍼레이드를 능가했다.KBS 2TV 예능프로그램 '김승우의 승승장구'가 14일 방송에서 같은 시간대 방송된 SBS '강심장'을 2주 연속 제쳤다. '김승우의 승승장구'는 이날 전국시청률 11.0%(AGB닐슨미디어리서치 기준)를 기록했다.
'강심장'은 10.1%로 나타났다.'김승우의 승승장구'는 이날 가수 심수봉을 초대손님으로 맞았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 10.26 사태인 '그때 그 사건' 등 심수봉을 둘러싼 항간의 루머를 털어놨다. 심수봉은 당시 현장에 동석, 시해순간을 목격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심수봉은 "그 사건 이후로 내가 아끼던 사람들이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어디론가 끌려가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바로 옆방에서 들었는데 충격으로 난 정신병원에 감금됐다"며 "한 달 가까이 병원에서 지냈고 아무리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말해도 나를 가두고 약물 주사를 놨다"고 덧붙였다.
심수봉은 이날 '그때 그 사건' 외에도 가수 나훈아와의 인연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에피소드, 50만 명 중 한 명이 걸리는 희귀병 때문에 신기(神氣)가 있다고 오해 받은 사연 등을 공개했다심수봉 감금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