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처갓집은 대가족이다. 장인 부부와 5남 4녀로 총 11명이다. 신혼 초에 처남, 처형, 처제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에만 한 참이 걸렸다. 그것도 우리 말 뿐만 아니라 성당 본명까지 외워야 하니 일감이 2배가 되었다. 여자들의 이름을 예로 들면 00(유리안나), 00(안나). 00(요안나), 00(세레나) 이런 식이다.
이들 중 나랑 가장 가까웠던 이가 바로 첫째 사위인 충엽 형이었다. 광주의 명문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S대 화공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배달, 과외공부(초등학생이 같은 초등학생을 가르침) 등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밤잠을 뿌리치고 공부를 하여 고교 3년 내내 전교 1등의 성적을 거두었다고 하니 과연 대단한 근기라 할만하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율산 실업과 현대 석유 등에 근무를 했다. 내가 광주에서 주로 근무했기 때문에 그동안은 거의 보지 못했지만 2004년 서울로 발령받은 뒤로는 자주 보게 되었는데, 그 형이 주로 우리를 초대하는 형식으로 만남이 이루어졌다.
첫 만남은 두 집의 중간지점에 있는 한 아귀찜 집에서 회식을 했는데, 이 날의 메뉴는 아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동서가 직접 선택했다. 동서는 대기업 임원답게 매너가 세련되고, 분위기를 잘 맞추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이야기이고 대외적으로는 말이 없고 근엄한 편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술을 즐기지 않지만 내가 술을 좋아하므로 기꺼이 반주 몇 잔은 함께 건배를 했다. 그러한 그의 마음 씀씀이가 하도 고마워서 나도 그이 앞에서는 가급적 술을 자제했다.
함께 뮤지컬도 보고, 선술집에도 가고, 당신의 회갑연에는 우리 내외만 초대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정식으로 발령을 받지 못하고 파견 근무 형식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위법이었다. 하루는 동서가 내게 왜 발령을 받지 못하느냐고 묻자 내가 주무부서의 횡포 때문이며, 아무도 챙겨주는 이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내 인적 사항을 적어달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서는 자식문제에도 개입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 억울한 사정을 듣고는 의분을 참지 못해서 그 다음날로 장관을 만났고, 내 억울함을 말끔히 풀어 주었다.
10개월 걸렸던 문제가 장관이 직접 한 마디 하니 1주일도 걸리지 않아 해결된 것이다. 나는 이 일을 통해 동서의 나에 대한 진한 애정과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서의 사회적 신망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일 동서가 나서지 않았고, 동서와 장관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동서로 인해 고충처리위원회에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상무로 퇴직한 후 그는 몇 달 간은 도서관에 다녔고, 나중에는 걷기모임에 가입해서 서울에서 제주까지 도보로 주파할 정도로 푹 빠져있었다. 내게도 권유했지만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걷기에 열중하고 있다가 2008년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한밤중에 무의도의 한 절벽에서의 실족사라고 했다. 나는 그의 평소 신중하고 조심성 많은 성격을 잘 알고 있으므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경찰의 조사결과를 뒤엎을 증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같이 섬으로 들어간 일행 2명도 별다른 혐의점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동서의 죽음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마치 의지하고 있던 기둥이 폭삭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았다.
장례식 준비를 할 때 나는 영정만큼은 내손으로 갖추어 드리려고 마음먹고 밤늦은 시간임에도 사진관 문을 두드려 기어이 영정사진을 만들어서 빈소에 놓아두었다. 그것이 내가 그 형에게 해줄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이번에는 처형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 아마도 혼자 생활을 10여년 넘게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동서의 자식들과 내 아내와 처제들이 돌아가며 돌보고는 있지만, 동서 같이 진한 사랑으로 돌볼 수는 없을 것이다. 처형은 요양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내게 내색은 안하지만 아내는 같은 동기로서 시설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지만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도저히 혼자 거동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만일 그때 동서가 죽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
(2025.05.29.)
(끝)
첫댓글 작가님. 그런일이 가족사에 있으셨군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위로 감사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요.
위로 감사합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생은 어느 날 갑자기죠.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언제 갈지 모르는 인생
보람있고 기쁘게 살아야죠.
가정의 평화가 하루 아침에 안타깝게 되었군요.
제 마음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위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