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푸11 - 남쪽 산 속에 오스트리아 황후가 머물렀던 아킬리온 궁전에 가다!
2024년 5월 6일 코르푸 Corfu 섬에 도착해 카발레리 호텔 Cavalieri Hotel 에 체크인후
베네치아가 건설한 올드 포트리스 요새 Old Venetian fortress 를 구경했습니다.
그러고는 오래된 옛날 항구인 올드포트 Old Port 에서 선탠하는 여인들을 보고는 모퉁이를 돌아
새 베네치아 요새 New Venetian fortress 를 보고 오래된 골목길을 걸어 구경했습니다.
다음날 5월 7일 식당으로 올라가 훌륭하게 진열된 뷔페식 아침을 먹고 내려와 리셉션에서
오늘 코르푸 외곽의 해변 도시로 가는 버스편을 묻고는 호텔을 나와 남쪽으로 걷습니다.
10분 동안 500 거리를 행인들에게 물으면서 걸어서 드디어 버스정류소에 도착을 했는데
표지판을 살펴 보니 우리가 가려는 메소기 Messoghi (Mesongi) 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할아버지에게 물으니 10번은 아킬리온 Achilleion 행이고 6번은
베니체스 Benitses 행인데, 여기서 좀 더 내려가서 타라고 합니다?
나중에 보니 먼저번 정류소는 코르푸타운을 도는 버스이고 외곽으로 가는 버스는 좀 떨어진
정류소에 서는 모양인데.... 들은대로 100미터를 걸어내려 가니 또 버스정류소가 보입니다.
티켓 자판기에서 5 유로 하는 1일권 버스표를 끊어서 기다리는데 베니체스 행 6번 버스가
오기로 망설이다가 놓치고는 조금 후에 10번 아킬리온 Achilleion 행 버스에 탑니다.
버스는 남쪽으로 달려 시가지를 벗어나는데 7~8분 후에 보니 오른쪽에 버스 터미널이
보이는 것이.... 그럼 Avramiou Street 에 있다는 시외버스 터미널 Bus
Terminal 로 메소기 Messoghi (Mesongi) 등 멀리 가는 버스는 여기서 타는기 봅니다?
버스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달려 Perama 라는 마을을 지나서는 산으로 들어가 언덕을 올라가니
마을이 나타나는데.... 도로는 좁은데 주차한 차들이 많아 빠져 나가는데 엄청 애를 먹는데
코르푸 타운을 출발한지 얼추 30분 가까이 되어 버스가 멈추는데 종점인 Achilleion 인가 봅니다.
그런데 예감이 이상한게.... 관광객들이 궁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 있다는 것
입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다가 가니 역시나 궁전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고 여자
경비원이 서 있어 물어보니 Strike(파업) 이라는 말에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나갑니다.
머나먼 나라에서도 외진 곳 코르푸섬 까지 와서 가장 볼만한 관광지가 월급 올려 달라면서
파업을 해서 이렇게 실망을 시킨단 말이요?하지만 별 수가 없는지라 정문의 창살 사이로
카메라를 넣어 사진을 몇장 찍고는 주변을 둘러보니 음식점이며 호텔과 가게들이 보입니다?
코르푸 타운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가스투리시 (Gastouri) 의 아킬리온 Achilleion
Palace 은 1891년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스에 의해 만들어진 피렌체풍의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인데, 마을 외곽에자리한 흰색 빌라는 신고전주의 풍으로도 보입니다.
궁전에는 아킬레우스의 동상이 서 있는데 그녀의 외아들로 오스트리아 황태자인 루돌프가 1889년
에 자살하자 엘리자베스는 마음을 잃고 여행에 탐닉했다는데, 코르푸섬에 여행을 와서 이 궁전
을 지었던 모양이니.... 궁전은 황후 엘리자베스 (1837-1898) 시지 (Sisi) 의 여름 탈출구였습니다.
시시 (Sisi) 는 그리스 신화와 청청한 자연에 자신을 몰입시켰다고 하는데, 궁전에 입장하면 웅장한 별장
내부를 볼수 있으며 야자수와 신고전주의 신상으로 가득한 정원을 둘러보고 시칠리아풍의 목가적인
세계를 구경할수 있다는데... 나는 텔레비전에서 시씨 Sissi 라는 영화를 본 지라 조금은 친숙한가 합니다.
엘리자베스 황후 (Elisabeth) 는 유럽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실 여성 중 한 명이니 뛰어난
미모로 유명한 그녀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통일을 관장한 외교관이기도
했으며..... 그녀는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오스트리아 황후의 칭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황후 Elisabeth Amalie Eugenie 는 1837년 12월 바이에른
뮌헨 에서 태어났으니 바이에른 공작 부인으로 훗날 오스트리아 황후
이자 헝가리 여왕이 되었는데....... 훗날 1898년 9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죽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황후였으니 종종 궁정과 갈등
을 겪었지만 헝가리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평등하고 이중적인 군주제로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가 남긴 명언이 있으니.... "O'er your own seabirds/ 나는 쉬지 않고 돌 것이다/
나에게 땅은 모퉁이가 없다/ 영원한 보금자리를 짓기 위해." – 엘리자베스가 쓴 시에서
엘리자베스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요제프 공작과 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 사이
에서 네번째로 태어났는데, 막시밀리안 공작은 엘리자베스의 신념과 양육
에 큰 영향을 주었으니, 동료 유럽 귀족 보다는 이상적이고 확실히 더 진보적이었습니다.
Elisabeth 의 어린 시절은 당시 왕족과 귀족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으니 그녀와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정규 수업 보다는 바이에른 시골에서 승마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결과적으로 Elisabeth(Sisi)는 좀 더 사적이고 덜 구격화된 생활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내내 Elisabeth 는 언니 Helene 와 특히 가까웠으니 1853년, 자매들은 어머니와 함께
헬레네에게 황실에서 특별한 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갔습니다.
루도비카의 언니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어머니인 소피는 유럽의 주요 왕족들 사이에서
아들과 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대신 여동생 가족에게 의지했으니...
Ludovika 는 또한 개인적으로 그 여행이 가족의 두번째 결혼을 보장할 수
있기를 바랐으니 Franz Joseph 의 남동생 Karl Ludwig 와 Elisabeth 간의 결혼이었습니다.
진지하고 경건한 언니 헬레네 Helene 는 23세의 황제에게 호소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그녀의 소원에 따라 사촌에게 청혼할 것이라고 기대
했습니다만.... 대신 프란츠 조셉은 동생 엘리자베스와 미치도록 사랑에 빠졌습니다.
황자인 프란츠 조셉은 어머니에게 헬레네에게 청혼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에게만 청혼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니.....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수 없다면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자 어머니 Sophie 는 매우 불쾌했지만 결국에는 수락했습니다.
Franz Joseph 과 Elisabeth 는 1854년 4월 24일에 결혼했습니다. 약혼 기간중에 Franz Joseph 은
기쁨에 가득 차 있었지만 오히려 Elisabeth 는 조용하고 긴장했으며 종종 울고
있었으니, 오스트리아 궁정의 압도적인 무게와 시어머니니(이모)의 위압적인 태도 때문일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법원은 규칙과 에티켓으로 매우 엄격하여 진보적인 시시를 좌절시켰습니다.
더 나쁜 것은 그녀가 황후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어리석은 소녀로
여겼던 엘리자베스에게 권력을 양도하기를 거부한 시어머니(이모) 와의 관계 였습니다.
Elisabeth 와 Franz Joseph 이 1855년에 첫 아이를 낳을 때, 대공비 Sophie 는 Elisabeth 가
자신의 아이를 돌보는 것을 허용하거나 그녀의 이름을 짓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시어머니(이모)는 1856년에 태어난 다음 딸인 Archduchess Gisela 에게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
기셀라가 태어난후, 엘리자베스는 남자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는 압력이 더욱 커졌습니다. 여왕이나 황후의
역할 은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아들을 낳는 것뿐이며, 남자 후계자를 낳지 않는 배우자는 국가에 음모를
꾸미는 위험이 될 것이라는 소책자가 그녀의 개인 방에 익명으로 남겨졌는데 소피가 출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1857년에 그녀와 대공비들과 함께 처음으로 황제와 함께 헝가리에 방문했을때 또 다른
타격을 입었습니다. Elisabeth 는 비공식적이고 솔직한 헝가리 사람들과 깊은 유대 관계를
발견했지만 큰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으니 그녀의 두 딸이 모두 병에 걸렸고, 큰딸 소피가 사망했습니다.
소피가 죽자 엘리자베스는 금식, 혹독한 운동, 발목 길이의 머리카락을 위한 정교한 루틴, 뻣뻣하고
꽉 조이는 코르셋과 같이 전설의 재료가 될 강박적인 아름다움과 신체 요법을 시작해 긴
시간을 보냈는데 그녀는 이 시간을 여러 언어를 배우고 문학과 시를 공부하는 등의 일도 했습니다.
1858년, 엘리자베스는 마침내 상속인인 루돌프 황태자의 어머니가 되어 그녀의 기대했던
역할을 완수했습니다. 아들의 출생은 그녀가 그녀가 사랑하는
헝가리인을 대신해 말하곤 했던 궁정에서 권력의 더 큰 발판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는 헝가리 외교관 율라 안드라시 백작과 가까워졌으니 그들의 관계는 긴밀한
동맹과 우정이었고 사랑의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엘리자베스가 1868년에 넷째 아이를 가졌을 때 Andrassy 가 아버지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1860년 여러차례 건강 악화와 남편이 여배우와 불륜 관계에 있다는 소문으로 인해 스트레스
를 받았을 때 정치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한동안 법정 생활을 철회하는 핑계로 사용했습니다.
그녀의 증상은 비엔나 궁정으로 돌아왔을 때 자주 재발했습니다. 이 즈음에 그녀는 남편과 시어머니
와 함께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원하지
않는 또 다른 임신을 원할 때 말입니다. 이미 멀어진 프란츠 조셉과의 결혼 생활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867년 전략적인 움직임으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결혼 생활로 돌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향력을 확대하여 헝가리와 오스트리아가 동등한
파트너가 되는 이중 군주제를 만든 1867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을 추진했습니다.
Elisabeth 와 Franz Joseph 은 헝가리의 왕과 왕비가 되었고 Elisabeth 의 친구
Andrassy 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딸 발레리 (Valerie) 는 1868년에
태어났고 때로는 극단적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억눌린 모성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헝가리 여왕으로 공식 역할을 맡은 엘리자베스는 그 어느 때보다 헝가리에서 시간을 보낼 핑계가 많았고
기꺼이 받아들였고 시어머니이자 라이벌 소피가 1872년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궁정을
떠나 여행하고 헝가리에서 발레리를 키우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마자르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한 것 처럼 사랑했으며 예의 바른 귀족과 신하 보다 "일반" 사람들을 선호한다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1889년 그녀의 아들 루돌프가 그의 정부 메리 베체라와 자살 협정으로 사망하면서
또 다른 비극으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로써 프란츠 요제프의 형제인
칼 루트비히(Karl Ludwig , 또는 그의 아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가 후계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루돌프는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군대 교육을 받아야 하는 어머니 처럼 감정적인 소년이었습니다.
Elisabeth 에게 죽음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1888년에, 여동생 Helene 은 1890
년에, 어머니는 1892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가까운 친구 Andrassy 도 189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명성은 사생활에 대한 열망과 마찬가지로 증가했으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Franz Joseph
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되었으니 거리가 관계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았으며, Elisabeth 는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있었지만 그녀와 남편은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1898년 스위스 제네바에 비밀리에 여행 중이었는데 그녀의 정체가 알려졌고
9월 10일, 그녀와 대기 중인 여성이 기선을 타기 위해 걸어가던 중에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인 Luigi Lucheni 가 군주를 죽이려는 의도로 공격을 해 왔습니다.
상처가 뚜렷하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는 탑승후 쓰러졌고, 루체니가 칼날로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사망하자 시신은 국가 장례식을 위해 비엔나로 반환되었고 카푸친 교회에
묻혔습니다. 살인자 루체니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후 1910년 감옥에서 자살했습니다.
Elisabeth 의 유산 또는 전설은 누구에게 물어보느냐에 따라 다른데, 남편 조세프황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엘리자베스 기사단을 설립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많은 기념물
과 건물에는 그녀의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이전의 이야기에서 Elisabeth는 그녀의
회오리 바람 같은 구애와 그녀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 때문에 동화 속 공주로 묘사되었습니다.
전기들은 엘리자베스의 삶과 내적 갈등의 깊이를 밝히려 시도했으니, 그녀의 이야기는 성공한 삶을 바탕
으로 한 수십편의 작품으로 작가, 음악가, 영화 제작자 등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만질 수 없는
천상의 공주 대신에 그녀는 종종 복잡하고 불행한 여성으로 묘사되었으니 이게 현실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