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소요유 (逍遙遊)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청화 선사의 사상과 수행법에 대한 소고 - 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법운(法雲) 추천 0 조회 82 16.02.14 21: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청화 선사의 사상과 수행법에 대한 소고


 


                                                            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동시대의 인물의 사상에 대해 학문적 연구를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 일이라서 학자들이 선뜻 나서기 어려운 일로 치는 것이지만, 최근 한국의 불교학계에서는 성철스님에 대해 많은 연구와 논문들이 발표되었으며, 청담스님의 사상을 정리해보는 학술 대회도 최근에 열리는 등 이러한 학계의 상황에 용기를 내어 본 저자는 감히 이런 어려운 일을 맡게 되었다.[1]


 


淸華 큰 스님 (1923-2003)이 현대 한국 불교사에 남기신 족적은 이미 여러 분들이 서술하셔서 더욱 보탤 것이 없지만, 스님께서 1985년에 오랜 은거 생활을 깨고 구도의 길을 찾던 많은 대중들에게 샛별과도 같이 홀연히 나타나셔서 교단에 자극을 주신 것은 그 중요성을 재삼 강조해도 부족하다. 당시 한국 불교계에서는 간화선이 대표 담론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다수의 의견이 정통으로서, 따라서 다른 목소리는 용인되지 않는 상당한 근본주의적 태도가 편만해 있었다. 종교의 가르침과 수행이란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고 자유로운 삶을 열어주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방법, 하나의 이론이 다수의 의견이 되면 그것이 곧 도그마가 되고 고식화되어 자기와 다른 의견를 핍박하는 부정적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을 우리는 일찍이 세계 종교사에서 익히 보아온 터이다. 스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낮설던 염불선이라는 수행법을 제창하셨는데, 그러한 수행법을 제창하신 이유는 대중 교화와 수행의 수단으로서의 유용성에 그 초점을 맞추신 것 같다. 즉, 어느 한 선법이 절대적이라는 태도를 불식하고, 수행법에 있어서도 수행자와 그 환경에 따라 방법의 다양성과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신 때문이었다. 스님께서는 이러한 자비의 정신에 입각하여 정통· 비정통의 양단 논법적 대결 구도를 한탄하시면서, 유연하고도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것을 권유하셨고 이것은 당시 교단에 많은 시비를 불러일으켜서 마음의 아픔을 겪으시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분의 가르침이 한국의 불교계에 어떤 새 바람을 불러 왔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는 여기 계시는 많은 문도 들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 분이 세상에 나오셔서 많은 일을 염두에 두셔서 그 중 이루신 것도 있고 미완으로 끝나신 일도 있으실 터이나, 많은 대중들을



[1] 청화 선사의 사상과 그 분의 수행법에 대해, 학문이 일천하고 수행의 길목에도 가보지 못한 본인이 감히 무슨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마음이 우선 앞선다. 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그 분을 옆에서 뵙고 따뜻한 배려를 받았던 그 인연에 약간이라도 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미숙한 연구를 발표하게 되었다. 여러 대중들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감화시키고 수행의 길로 이끄신 그 공덕에 대해서는 불교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2. 저술과 자료 목록


 


알다시피 청화 선사는 출가 전에 일제 시대 때 일본서 교육을 받았고, 고향에서 학교를 세우고 교사로서, 교장으로서 활동한 분이다. 그의 저작의 곳곳에서 그 분의 불교 교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언설, 불교의 제 문제에 대한 논리적이고도 과학적인 설명 등을 특징적으로 찾을 수 있다.[2]


 


특히 『원통불법의 요체』는 선원의 수자들에게 강연한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의 깊이, 체계적 논술법 등에서 본다면, 최근세사에서 전통적 불교 교단 내에서 나온 불교학 관련 저술 가운데 학문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의 문헌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현대 한국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고,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문헌이라고 본다.


 


청화 선사의 사상을 알아볼 수 있는 일차적인 문헌 자료는 그 분의 강의와 법문, 기고문등을 모은 법문집과 『淨土三部經』이나 『六祖壇經』등의 경전들에 대한 번역·주석류의 두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 카테고리에 들 수 있는 것으로는 『正統禪의 香薰- 淸華禪師法語集 I』(성륜불서간행회 편, 금륜출판사, 1992) 과 『圓通佛法의 要諦 - 淸華禪師法語集 II』(성륜불서간행회 편, 성륜각, 1993) 가 있다. 이 책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다. 우선 『정통선의 향훈』은 그 분의 법문과 인터뷰, 기사, 그리고 경전 해석서들에 붙이신 해제, 서문, 발원문 등을 한데 묶어 편집한 책이다. 따라서 각각이 간략한 에세이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불교의 여러 다른 주제들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어서 그 분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글들이다. 특히 법문의 경우는 구두로 일반 대중에게 강연하신 내용이라 이해하기에 쉬워 그 분의 사상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정통선의 향훈』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설해진 것이라 불교 입문적 내용을 가지는 반면에, 『원통불법의 요체』는 선방의 수자들에게 법문한 내용이라


 






[2] 그러나 논리적이고도 명쾌한 언설을 구사함에도 오랜 수행을 거쳐 얻어진 겸손함과 통찰력이 그대로 배어 있다. 청화 선사는 곳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강사도 아니고 강원문전도 안 가본 사람인데 이렇게 부처님 경론을 말할 때는 굉장히 주제넘기도 하지요. 제가 한문 원문을 풀이하는 데 더러는 오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를 볼 때는 그 뜻이 그 뜻이니까 그런대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통불법의 요체』, p. 50) 라고 겸허하게 표현한다.


 


 


전문적인 불교 교학과 수행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법문을 녹음한 것이므로,[3] 각 장과 절이 독립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전체를 하나로 꿰뚫어 보면, 불교의 역사와 교리적 발전을 망라하는 불교 범론으로서 청화 선사의 불교관과 그의 진리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불교교리서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의 전문성과 깊이, 그리고 다루고 있는 주제가 광범위하여 청화 선사의 사상과 수행법의 요체를 집대성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청화 선사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심적인 자료이다.


 


『원통불법의 요체』는 그 차례에서 보듯이 불교의 각종 주제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표명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불교 철학의 여러 중요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선사의 깊고 넓은 교학 지식과 넓은 독서량을 말해 준`다. 그 여러 주제들을 예를 들어 보면, 동아시아의 선종사에서 쟁점이 되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입장을 대조시키면서 각 주장점의 차이와 그 함축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불교계에서의 중요 쟁점이었던 조사선과 여래선의 차이, 그리고 진귀조사설 등에 대해서도 논술하고 있다. 이같이 선종사에 대한 선사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후, 제 2 장 “교상과 수행론의 변천”에서는 인도와 중국의 불교사를 통하여, 교상, 즉 교리적 특징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교리적 변천에 더불어 수행론은 또한 어떻게 달리 변천해 왔는지를 밝힌다. 이 장에서는 청화 선사의 불교사 이해가 드러나며, 불교 교리사를 점검해 봄으로써, 불교사를 통하여 각 시대에 따라 그에 맞는 교설과 수행법이 시설되어 왔음을 조직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3장 “수증과 공덕” 은 참선, 염불, 삼매의 세 절로 이루어져 있어서 선사의 수행관의 요체가 드러나고 있다. 선사는 수행을 이 세가지 측면에서 다루면서 각 수행법의 특장점 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 장에서 선사는 염불선의 이론적 기반과 그 수행 방법, 또한 염불선을 제창하는 불교의 여러 경전이나 문헌들을 들어 경전적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제 4장에서는, 수행의 조도, 즉 단계에 대한 설명이다. 또한 이 장에는 수행을 해 나가기 위해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윤리 조항인 계율론을 해석한다. 계의 정의와 계를 지킨다는 것의 의미와 범계의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계에 대해 중국에서 나타난 계의 체에 대한 논의는 특히 계행의 중요성에 대한 선사의 평소의 신념에 기반하여 당신 스스로 계율에 대한 이론에 통달하였음을 알려준다. 선사는 그의 저술 곳곳에서 선 수행자에게 있어서의 계율 수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곤 하였는데, 이러한 이론적 천착과 궁구함이 겸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심바라밀과 수릉엄삼매에 대해 도상으로써 설명함으로써 불교 형이상학의 고도의 경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제 4장의 마지막 절은 현상과 본체라는 제목으로 현대 물리학


 






[3] 이 책의 연기에서 불기 2537년 [즉 1993년] 임술 2월, 해제 중에 동리산 태안사 금강선원에서 제방의 수자 스님들의 청법으로 이루어진 7일간의 특별 법회에서의 법어 내용을 녹음하여 문자화한 법어집이라고 밝히고 있다.


 


의 이론을 불교의 세계관과 접목시키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금타 스님이 주창하신 사상의 요체를 정리하여 첨부함으로써 선사의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불교에서 목적하는 궁극의 경지인 해탈의 세계를 보이기 위해 중국과 한국의 조사들의 게송을 소개하고 음미하고 있는데, 언어의 덫에 걸리지 않고 설명이 아닌 은유와 비유를 통해서 언어도단의 절대의 경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불교의 교리 해설에서 시작하여 해탈문으로 나가는 차제를 시설하면서, 선사의 법문의 대미는 자신의 스승인 금타 화상의 사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종결하고 있다.


 


『淨土三部經』(성륜각, 1980)은 1980년에 초판이 출판된 정토삼부경의 번역으로 청화 선사의 정토 사상을 알수 있는 책이다. 『정토삼부경』이란 전통적으로 정토 신앙을 표방하는 삼대 대표적 경전인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을 묶은 것으로, 청화 선사께서는 이에 대한 번역·주석서를 출판함으로써, 선종 일변도로 자력 신앙이 가장 높은 경지의 수행법라고 인식되던 당시 불교계에서 정토 사상을 전면으로 내세워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드러낸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청화 선사의 탄탄한 교학적 기반은 『정토삼부경』 속에 들어 있는 삼대 경전의 해제를 서술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각 경전의 번역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붙이고 있으며, 전체 내용의 요약, 즉 시놉시스를 각 경전의 모두에 붙임으로써 독자에게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전체에 대한 조망을 보이고, 또한 역자 자신이 보는 『정토삼부경』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아미타불, 본원, 정토. 염불 등의 정토 사상의 키워드를 다시한번 설명하고, 염불선의 원류, 그 역사 등에 대해 기술한다. 그는, 극락세계에 태어난다는 것, 즉 왕생함이 정토삼부경의 주제라고 밝힌다. 그리고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어 불퇴전의 성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정토사상의 의의를 밝힌다. 그러면, 극락세계에 왕생하기위한 큰 선근과 복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염불이라고 한다.[4] 이러한 간명하고도 핵심을 찌르는 논술법은 청화 선사의 글의 전체를 꿰뚫는 특성으로서 그의 지적인 성향과 광범하고도 깊은 교학 지식의 폭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六祖壇經』(성륜각, 2003) 은 선사가 열반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저술로서, 육조단경의 역주본이다. 이것을 통해, 선사는 “순선시대의 선 전통, 정통 선으로 돌아가자”는 선언을 하고 있다. 이 경전은 청화 선사가 이전에 여러 경우에서 순선시대의 선, 즉 초기 선종을 선 수행법과 이념에 대해 제창하던 것, 특히 돈·점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직접, 번역 주해하기로 택한 듯 하다.





[4] 『정토삼부경』, p. 51.


 


이상의 네가지 대표적 저술을 볼 때, 각 저술은 성격과 그 내용이 다르고 그 저술이 성립한 연기가 다르지만, 청화 선사가 평소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주창점들이 잘 방편 시설되어 있고, 각 권들이 서로의 내용을 보충하고 서로 심화하는 관계를 가짐으로써, 하나의 일관성 있는 저술 군을 이룬다고 하겠다.


 


 


3. 사승 관계


 


청화 선사는 자신의 저술 곳곳에서 金陀화상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법을 세움을 누누히 말하고 있다. 금타 화상에 대해서는 자세한 자료를 구하지 못하여 상술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우나, 당대의 뛰어난 선지식이었으며, 근세 한국 불교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분으로 보인다. 청화 선사의 저술과 그 분이 지은 비문 <碧山堂金陀大和尙塔碑>에 따르면,


 






[5] 금타 화상 (1898-1948)은 조선 시대 말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이르는 시대에 50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으며, 22세에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고 한다.


 


여러 점에서 청화 선사의 사상과 금타 화상의 사상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금타 화상의 유고를 편집해 출판한 『金剛心論』에 대해, 청화 선사는 현대 과학 만능 시대에 있어서 참고해야할 중요한 문헌이라고 말한다. 선사는 말하기를, 불교의 이른바 회통불교가 현대에 꼭 필요하며, 불교의 경직 분파적인 것을 지양해야 하고, 종교의 비교 종교학적 연구, 그리고 교섭과 화해를 통한 융합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한다.[6] 즉 청화 선사는 금타 화상이 표방하는 진리가 현대 사회의 종교간의 또는 이념 간의 대결, 물질과 정신, 이념과 사상들 간의 갈등을 화해시킬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청화 선사께서 말년에 미국에 종교대학을 설립할 꿈을 가지고 노력하셨던 것도 스승의 영향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금강심론』 속에는 현상과 본체에 대한 불교적 해석, 불교의 우주관, 우주와 존재를 꿰뚫는 언어인 관음문자, 심오한 불타관을 통하여 세계와 깨달음과 내가 일치되는 것을 조직적으로 표현하는 <보리방편문>, 그리고 도상으로 표현한 <수능엄삼매도> 등이 들어 있으며, 이러한 금타 화상의 사상은 세계와 우주를 하나로 아우르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수립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청화 선사도 평소의 설법에서, 불교와 과학의 접목을 시도하고, 불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의 접점이 가능함과 형이상학적 진리와 물리적 세계가 둘이 아님을 강조하곤 하였다. 그러나 금타 화상의


 






[6] 전남 곡성 소재 성륜사에 가면 큰 금타 화상 탑이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서 금타 화상의 족적과 사상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 비문을 읽으면서 청화 선사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당신이 평생 보여주셨던 무한한 겸손함과 고매한 인품을 떠올리게 된다.


[] 『원통불법의 요체』, p. 16.


 


 진리 표출 방법이 신비적이고 고답적인 반면에, 청화 선사는 『금강심론』에 나타나는 사상 체계를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 이론들에 대하여 불교 교학적 해석을 가하고, 또한 보리방편문을 대중적 수행법으로써 널리 소개함으로써 금타 화상의 사상을 이 시대에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금강심론』은 19세기 조선 시대 말기의 한국 불교계의 사상적 관심과 방향에 대해 이해하는 데도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흔히 조선 시대에 대한 불교사적 해석을 보면, 불교가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와 교학적으로 꽃을 피우나 고려시대에 들어와 국교로서 왕실의 전적인 후원을 받아 양적으로 물적으로 팽창하고 교단과 정권이 지나치게 밀착함으로써 고려 말기 불교는 타락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새로운 이념적 기반을 가진 새로운 왕조가 설립하는 데 길을 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고려 불교 해석은 조선 왕조를 건설한 신유학을 표방하는 사대부들이 만든 담론이며, 이것을 지금도 현대 불교학자들은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담론이 가지는 난점은 조선시대 초기는 물론이고 중기에 이르기까지 일반 국민들은 물론 왕실 내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불교 신행의 모습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 공공의 장에서는 불교는 유학의 이념에 반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비판되고 정책적인 억불책의 희생물이 되었지만, 문화적 종교적, 그리고 개인의 사적인 공간 속에서는 아직도 중요한 사상적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담론은 조선시대 불교사를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뭉뚱거려서 단정하는 것이 특징이며, 이에 따르면 특히 조선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불교 교단의 존재는 거의 미미하여 교학과 수행의 전통은 소실한 것처럼 서술하는 불교 해석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만일 조선 시대 말기에 불교가 완전히 소실하였다면, 금타 화상의 이같이 거대한 교학적 체계나 학술 세계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7]


 


이 분의 불교 교학과 수행관을 살펴보면, 불교사에 나타난 무수한 교학적 용어들을 구사하면서,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와 인간을 하나로 합치는 거대한


 






[7] 본인은 다른 기회에 18세기 학승이자 선승인 기성 쾌선 스님(1693~1764)이 쓴 “念佛還鄕曲”이라는 저술을 연구하면서, 당시 18세기 조선시대 불교계의 불교 교학의 이해 수준과 염불 내지는 정토 신앙의 전통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이 짧은 저술에는 갖가지 전생담과 인도의 용수, 마명 보살 등에 대한 설화, 중국 선사의 법맥, 문헌, 한국의 삼국유사, 구전설화 등 다양한 불교 이야기 뿐만 아니라 고도의 불교의 교리가 들어 있었다. 더구나 저자는 원효, 의상, 서산에 이르는 “한국” 불교의 전통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그 전통에 참가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교리적으로는 선종과 화엄 교학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수행법으로는 정토·염불 수행을 따름으로써 통합적인 불교 이해를 보이고 있다. (Eun-su Cho, “Reading 18th Century Korean Buddhism from a Chanting Text: A Study of Y?mbul hwanhyang-gok,” The 8th Pacific and Asian Conference on Korean Studies (PACKS) Proceedings, 2006). 금타 화상은 기성 스님 보다 2세기 후인 19세기 말의 인물로서, 당시 조선 시대 마지막 세기의 불교계 상황을 알려준다. 두 분의 교학이 가지는 공통점을 고려해 볼 때 조선시대 말기의 불교계의 역량과 이론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체계를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실상의 측면에서 유의 세계와 공의 세계, 현상과 본질을 통합하는 데 천태사상이 이론적 기반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심론』은 天台 智? 대사가 마하지관에서 설한 사종삼매이론을 소개하고 있고, 이것을 청화 선사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청화 선사는 천태의 오시팔교 교판을 중요하게 다루는 등, “천태철학은 불교를 총괄해서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교학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은 필수적으로 천태학을 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긴다.[8]


청화 선사는 실상 삼매를 천태 사상의 실상관을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실상을 천태 지의(538-597) 식으로 표현하면 ‘空·假·中의 三諦’가 된다. 수행법의 가장 높은 법이 마하지관인데 그것은 부처님의 실상, 우리 마음의 실상을 바로 관찰하는 뜻이다. 이때 ‘공’은 바로 보면 우주는 텅 비어있다는 말이나, 그러나 다만 비어있지 않고 빈 가운데는 묘유가 충만해 있다. 그것이 ‘假’가 가르키는 바이다. 그러나 공만도 아니고 또한 가만도 아니므로 ‘중도’라는 것다. 이것을 眞空妙有라고 한다. 우주의 실상은 진공인 동시에 바로 묘유이다. 공인 동시에 가요,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기 때문에 중도이다. 법신만도 아니고 보신만도 아니기 때문에 아미타불인 것이다. 이 같은 실상묘법을 내 주위에 적용하면, 이것은 진공묘유가 되고, 색즉시공이되고,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공·가·중이 되고,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면 법신·보신·화신인 아미타불이라고 납득하여야, 비로소 본질 실상을 납득하게 된다고 한다.[9] 이 외 금타 화상의 사상과 수행법 중, 특히 五智總觀圖 나 수릉엄삼매도 등에서 나타나는 밀교적 성격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4. 청화 선사의 불교 사상 - 그 이론적 틀과 특징


 


 (1) 정토 사상적 측면


 


청화 선사는 정토 사상의 삼대 경전을 번역·주석하고 그 사상과 교리를 해석하여 『정토삼부경』을 1980년에 출판함으로써, 1985년 오랜 은둔 수행을 깨고 공식적으로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 이미 자신의 사상적 입장과 수행관을 천명한 것으로 보인다. 선 수행에 평생을 보내신 청화 선사께서 정토 사상을 소개하고 제창함은 당시 선 수행을 가장 고도의 수행 형태로서 규정하고 타력적인 수행법을 폄하하던 한국 불교계의 풍토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화 선사의 정토 사상은 그가 본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염불선 수행법의 교리적 기반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타력, 의존적 신앙이 아니라, 자력, 수승한


 






[8] 『원통불법의 요체』, p. 166.


[9] 『정통선의 향훈』, pp. 122-123.


 


 


수행으로 선과 정토를 결합하는 염불선의 기본 이론의 전제로서 정토신앙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선사는 『정토삼부경』의 머리말에서, 불교에 많은 가르침이 있으나 그중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부처님의 서원과 불교의 이상향인 극락세계에 대해 잘 밝힌 경전은 바로『정토삼부경』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이념은 바로 중생을 고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라 한다. 또한 선사는 어느 기회에,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지·정·의의 세가지 측면이 다 소중하게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정토 신앙은 종교의 신앙적인 측면, 정적인 측면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여김을 알 수 있다.


 


청화 선사의 정토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정토의 정의에 대하여, 여기서 말하는 극락이란 삼계를 넘어선 것이며, 시간 공간을 초월한 것이며, 중생이 반드시 돌아가야할 마음의 고향이다. 즉 극락이란 저 멀리 있는 어떤 세계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이며, 수행에 의해서 업장이 소멸되고 나서 얻는 법락의 세계이다.[10] 여기서 선사가 말하는 극락 정토란 외계의 어떤 세계가 아니라 고가 소멸한 마음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청화 선사의 정토관은 정토 사상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정토에 대한 여러 다른 해석과 정의 중에서 唯心淨土 사상을 표방함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정토란 이 마음 속의 정토인데도 불구하고, 중생이란 바로 그 본래의 성품 (즉 자성)이 아미타불이고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극락세계인데, 이것을 모르고 생사고해에 방황한다고 한다. 중생의 자성이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이러한 이론을 불교학 용어로 “자성미타”라고 부른다. 정토 (sukh?vat?)란 인도에서 나타난 개념으로 서방에 존재한다고 하는 극락세계를 가르키는 것이다. 인도에서 찬술된 정토 사상의 기본 경전인 『無量壽經』등에서는,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서방 정토에 태어난다고 한다. 『觀無量壽經』에서는 가장 지독한 업을 지은 자라 할지라도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정토에 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리 발달사에서 볼 때, 중국에서 편찬된 경전인 『범망경』이나 『능엄경』 등에서 나타나는 정토의 해석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원각경』에서는 정토를 이 곳에 나투어 보인다고 하는 등[11] 정토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교리 변천의 맥락 속에서 청화 선사의 정토해석은 아미타불이 바로 다름 아닌 중생의 자성 그것이라고 한다. 자성이 아미타불이라고 함으로써, 자력 수행의 근거를 제공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청화 선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진정한 자아로 돌아가는 성불의 계기가 되고,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결정적인 선근이 되는 것이며, 여기에 부처님으로부터 베풀어 지는 타력과


 






[10] 『정토삼부경』, p. 20.


[11] “現諸淨土” T. 17.842.913b.


 


 


 자기 수행의 자력이 아울러 감응하는 깊은 의의가 있다”고 한다.[12]


 


정토와 아미타불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정토 사상과 선 사상이 결합될 수 있는 근거로서 역할하게 된다. 즉 선이란 자신의 마음을 깨달음을 종지로 하는데, 초기 정토 사상에서 말하는 내세로서의 정토가 바로 자신의 마음이요, 그 곳으로 이끌고 그 곳을 관장하는 부처님으로서의 아미타불이 바로 자신의 마음이고 자신이 바로 아미타불임을 말함으로써, 타력신앙으로서 출발한 정토 신앙이 자력 신앙으로서의 선과 결부될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이러한 실상세계, 즉 모습 그대로의 경지인 극락세계를 흠모하여 우리의 본래면목인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생각하며 그 이름을 외우고 부르는 것은 “스스로가 부처를 자각하고 부처가 되어가는 성불의 첩경”이라고 말한다. 즉, 마음과 아미타불과 정토의 세가지의 실상을 떠나지 않고 하는 염불이며, 이것이 실상염불이라고 한다. 또한 이것이 바로 보왕삼매, 즉 가장 뛰어난 삼매이며, 바로 진여자성을 여의지 않는 염불선이라고 하면서 염불선의 이념과 수행법을 제창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염불선은 자력과 타력, 관과 염, 정과 혜를 쌍수하는 것이라고 한다. 염불선은 불성에 계합하는 자연스러운 수행법이고, 모든 수행법을 잘 종합한 것이므로 종파를 초월한 보편적 수행법이고, 분열 투쟁의 역사적 상황에 볼 때 현재의 세대들에게 맞는 “시기상응”한 법문이라고 한다. 유심정토, 자성미타, 그리고 선과 정토의 결합을 통해, 염불선의 초종파적 성격을 제창하고 이것이 현 시대에 맞는 수행법임을 밝히는 것이다.


 


선사는 어느 곳에서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자신이 육이오때 사람들이 죽는 것을 체험하여, 어떤 경우는 몽둥이로 산사람이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그리고 나이든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보았다고 하며, 단말마의 고통으로 손으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은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지옥맹화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13] 청화 선사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은, 불교의 수행의 목표가 높게는 견성하는 것이지만 삶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죽음에 대해서 흔히 선사들은 이런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최상승의 깨달음에 대해서만 언급하는데 반해, 청화 선사는 죽음을 직시하고 정토 신앙의 본질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후의 세계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고, 그런 관점에서 정토 수행을 권유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그 분의 고도의 통찰을 짐작케 한다. 또한 정토 신앙의 다른 기능으로서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연모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가 부처


 






[12] 『정토삼부경』, p. 21.


[13] 『원통불법의 요체』, pp. 241-242.


 


님을 그리워하고 우리 자성을 그리워하기 위해 경전에서 극락세계, 화장세계의 찬란한 장엄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14]


 


 


(2) 근대적 불교사 인식 - 불교사의 난제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자 함.


 


청화 선사는 불교사의 객관적 역사적 이해에 기반하여 현 세계 불교계의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분석을 내리고 있다. 수행방편은 여러가지로 많은데 어떤 방편을 어떻게 써야하는 것이 문제이다. 불법에 대한 해석도 가지각색이다. 근본 불교를 공부한 사람은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전개된 이른바 대승불교, 또는 조사선에 대해서 잘못 이해한다. 또는 반대로 그 분들은 스리랑카나 태국, 버마, 라오스 등의 불교는 소승법이므로 참된 부처님의 본래면목을 밝히지 못한다고 폄하한다. 또한 대승 내에서도 자신의 종파만을 세우거나, 참선하는 사람들은 교종을 가치없는 것이라고 하고, 살불살조라고 하면서, 조사법이 위이고 여래법은 아래다 라고 하는 빗나간 극언도 한다.[15] 따라서 불교의 교학과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선종의 수행법과 조사들의 지침을 둘다 겸수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불교에 대한 전체적이고도 원융적인 접근을 주창한다. 한국 불교는 보조 지눌 스님이 정혜 쌍수를 제창하면서 이후 교학과 선정을 모두 추구하였건만, 선사께서 보시기에 당시 한국의 불교계는 자신의 종지만을 선양하고 서로 다른 접근법을 허용하지 않는 편협한 태도를 노정하는 것을 경계하시는 뜻이 확연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근본불교와 대승불교를 다른 것으로 안 봅니다. 가령, 아함경도 그 당시 구사종이나 경량종이라고 하는 종파로 굳어 버릴 때는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아함경 자체에는 설사 말씀을 다 안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대승적인 근본진리가 들어 있습니다.”[16] 당시까지도 대승불교 전통을 표방하면서, 근본 불교나 소승불교에 대해 폄하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던 한국 불교의 현실을 생각하면 아함경에 대한 선사의 이러한 입장은 혁신적이며 정확한 것이다. 현대의 불교학 연구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대승과 소승 불교의 구분이라는 것도 시기적으로 애매하고, 하나의 불교 교리사의 변천의 연속으로 보아야지, 두가지로 확연하게 구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대승 불교를 소승불교에 대한 반기로서 새로이 등장한 운동으로 보는 전통적 해석에 대해서도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 오히려 대승과 소승의 구분은 인도 불교가 중국에 전해져서 그 이후의 중국 불교에서 더욱 이념적으로 강화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며, 초기 불교의 교설을 알 수 있는 아함경에 이후의 대승 불교에서 나타나는


 






[14] Ibid., p. 246.


[15] Ibid., p. 15.


[16] Ibid., p. 51.


 


 여러 새로운 교리들의 싹이 이미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또한 학계의 입장인 것이다.


 


예를 들어, 대승 불전이 불설인가 비불설인가 하는 논쟁에 대해서, 『정토삼부경』이 불설인가에 대한 문제를 예를 들면서, “그런 문제는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한다.[17] 순수한 신앙적 견지와 학구적 견지는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면서, 사료를 위주로 한 실증적, 학구적 자세를 가질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정토삼부경』을 불설로 여겨온 이전의 무수한 조사 스님들의 법력을 의심해서는 안될 것이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 분 조사들은 수명통을 통해 석존 당시를 꿰뚫어 보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석존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도 그 분의 가르침에 이미 계합하는 가르침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불자들은 부질없는 분별에 마음을 팔지말고 이것을 그대로 믿고 수행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한다.


 


또한 청화 선사는 동아시아 불교사에 나타나는 여래선과 조사선 간의 우열 심천의 시비와, 교종과 선종의 가르침의 우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조사선이라는 말은 부처님 당시에는 없던 말이고 중국 선종 문헌에서 10세기 경에 처음 등장한 것일 뿐이며, 이러한 싸움은 무익한 갈등일 뿐이다.[18] 중요한 것은 본체를 여의지 않고 화두를 두는 것이라는 입장이다.[19] 더욱이, 범일 스님의 진귀조사설을 들어서, 이것은 한국 불교에만 있는 해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선사들의 어록에 나와 있는 말들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마음을 보아야 한다. 즉, “문자에 착하지 말고, 경에도 착하지 말고, 오로지 마음공부에 정진하라는 의미의 방편 말씀이고 경책 말씀이다. 그 뜻을 잘 모르고 헛된 이름에 미혹하고 집착해서는 안된다. . . 설사 어록이라 하더라도 가려 읽어야 한다. . . . 어디까지나 부처님 경전과 우리 자성으로 조명하여 ‘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20] 이것은 한국 불교계에서 청화 선사만이 낼 수 있는 종교 해석학적으로 중요한 언명이다. 객관적이고도 과학적인 시각을 취하라고 권하는 선사의 고언은 이 시대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신에 따라, 선사께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해설하기 위해서는 『구사론』 등의 소위 소승불교 문헌들을 인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분은 “대승불교라 해도 근본불교가 꼭 필요하다”고 하면서, 근본불교의 교상에 대하여, 참다운 지혜는 유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이른바 중도실상의 참다운 지혜를 일컬어 정견이라 한다. 그러나 소승적 입장에서 볼 때는 사바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17] Ibid., p. 37.


[18] Ibid., p. 86


[19] Ibid., p. 89.


[20] Ibid., p. 84.


 


 


 


 


 고·공·무상·무아 이라, 고, 공, 무상, 무아를 관조하는 것이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존재의 특성이다. 아울러, 근본불교의 존재의 특성을 『구사론』에 나오는 존재의 분류법, 즉“오위 칠십오법”의 이론 체계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21] 『구사론』은 원시불교의 교학체계를 정리한 불교교리의 집성으로, 원시불교의 교설의 연장선상에서 『구사론』의 일체법 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 가지로 근본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을 밝히기 위해 『구사론』 분별현성품에 나오는 삼세양중인과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불교의 수증론을 설명하면서, 『구사론』에 등장하는 “見道”의 개념이 바로 조사들이 말하는 “見性”과 절대로 둘이 아니며, 화엄 등에서 말하는 보살지에 대비해서 말하면 초지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견도를 얻었다고 그것이 구경지까지 이른 것이 아니고, 마땅히 수도를 거쳐야 한다고 한다.[22] 이것을 “解悟”와 “證悟”에 배대시키면, 해오란 사선근위에서 如實知解를 돈오하는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知解라는 것은 범부의 지견으로 돈오함을 가르키는 것이니,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는 상사각이고 따라서 본래 본각 자리를 여실히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는 것이지만, 물리를 알아서 불변수연하는 것이라서 性·相, 體·用, 즉 절대나 상대 그런 것에 대해 막힘이 없는 것이다. 즉 이사무애도 알고 사사무애도 알고 법의 해석에 막힘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 해오도 그냥 경만 봐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고, 같은 경을 보더라도 참선을 한 사람이면 해오를 빨리 얻는다고 한다. 이에 비해 증오는 진여불성자리를 현관해서 깨닫는 자리이다.[23] 청화 선사는 이상에서 보듯이, 근본불교, 소승 불교, 대승 불교, 특히 기신론이나 화엄사상, 또는 선의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깨달음의 단계를 해설하고 그에 이르는 방법을 시설하고 있다. 불교 교학의 오랜 역사에서 나타난 여러가지 다른 개념들과 사상들을 한데 융통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의 완성된 교학 시스템으로서 제시하려고 한다.


 


그 분은 이어서, 해오를 얻고 난후의 초환희지의 상태에 대해 그 몸과 마음이 가쁜한 경안함과 열락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도인들은 환희심이 사무쳐 가누기가 어렵다하고, 부처님 같이 환희지에서 바로 불지를 뛰어 넘어 구경각을 얻은 분도 있으므로 우리 출가사문들은 마땅히 금생에 환희지를 꼭 성취하여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반대로, 해오로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오를 하고 다 되었다고 하여 대망어죄를 짓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고 있다.


 


선사는 인도 불교사의 중관, 유식 불교에 대해서도 교리적으로 크나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도 중관 불교의 중국적 해석인 삼론종과 유식불교의 중국적


 






[21] Ibid., pp. 90-105.


[22] Ibid., p. 53.


[23] Ibid., pp. 52-53.


 


 


 


해석인 법상종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그는 인도 불교의 교리가 중국 불교로 넘어오면서 교리상에 새로운 해석이 나타났다는 것을 인식하고, 중국불교의 특유한 교상, 즉 중국 불교 교리의 주제들과 그들의 해석, 또 수행법 등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 분은 또한 중국에 불교가 전해질 때 번역불교를 설명하면서, 구법승의 행각에 대해 감동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번 서역에 다녀오는 데 십년 이십년이 걸렸으며, 현장법사의 기록에도 보면 가다가 쓰러져 죽어 버려진 구법승의 해골이 수없이 많았다고 말한다. 지금은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 중앙아시아를 통해 전해진 불교에 대해 대중들도 익히 알고, 구법승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상당하지만, 선사께서 이 말씀을 하실때는 아무도 이런 불교의 전래의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였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은 이런 구법승들과 번역승들의 덕택에 금생에 이렇게 편하게 한번에 다 불경을 볼수 있고, 요첨을 추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불교를 공부할 때 불교사를 보지 않고서 바른 불교를 알 수 없다. 인도, 중국, 동남아, 일본, 한국 불교사를 꼭 읽어야 한다”고 권하면서 불교의 역사적 이해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24]


 


 


(3) 선종의 수행론에 대한 해석 -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둘러싸고


 


청화 선사는 『원통불법의 요체』의 수증의 제문제라는 장에서, 당시 한국 불교계의 중요 쟁점이었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아울러 선종사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25]


 


우선, 돈오돈수와 돈오 점수는,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깨달음이란 어떤것인가” 하는 불교의 중요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청화 선사는, 돈오점수는 보조가 돈오돈수는 성철이 말씀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그 연원을 밝혀보면, 돈오돈수도 역사적으로 권위있는 말씀이고 돈오점수도 마찬가지이며, 조사어록에 의해 살펴 보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입장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선오후수의 입장이 불교 경전이나 조사 어록속에 일관되게 설해지고 있는 불교 고유의 태도라는 것이다. 해오한 다음에는 증오를 위한 점수가 분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초지에서 견도를 얻고 견성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이 아니므로 성불을 위해 점수가 필요하고, 또한 증오한


 






[24] Ibid., p. 161.


[25] "저는 이번에 문제의식으로 삼은 것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어떤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 . .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닙니다. 돈오돈수도 옳고 돈오점수도 옳다고 다 말씀을 했습니다. 『육조단경』에도 두가지 사상이 다 들어 있습니다.” (Ibid., p 220).


 


 


 뒤에도 성불하기 위해서 점수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無念修”, “無染汚修行”이어야 하며, 참선수행자는 꼭 무염오수행을 해야 한다고 한다.


 


자신의 돈오점수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 하는 경전적 인용으로, 달마대사가 말했다고 여겨지는 “일행삼매”와 “일상삼매”의 교설, 道信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나 5조 홍인스님의 <수심요론>, 또는 6조 스님의 『육조단경』의 부촉품 등을 들고 있다. 청화 선사의 설명에 따르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간단히 말하면 정혜쌍수와 같은 뜻이다. 일상삼매는 “彗”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定”에 해당한다고 한다. 즉, 『육조단경』에서 일상삼매란, 우주가 조금도 차이가 없고 하나로 보는 진리의 입장으로 보는 것, 즉 사물이 천차만별로 달리 나타나지만 그 진여불성의 자리의 입장에서 보면 평등하게 보는 것임에 대해, 행주좌와간에 순일직심이 부동도량이면 진실로 정토를 이룬다고 하고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갖추는 것은 마치 땅에다 종자를 뿌리면 대지가 종자를 머금어서 오랫동안 잘 기르고 익혀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이 일상삼매나 일행삼매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청화 선사는 『육조단경』의 돈오돈수 주장에 대해서, “육조의 돈오돈수에 대한 말씀도 깨달음 뒤에 닦을 필요가 없다는 돈수가 아니라, 깨달았어도 . . . 아직 번뇌의 습기는 남아 있기 때문에 분별시비에 집착하지 않는 무념 수행, 무염오수행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돈오돈수라고 표한한 것이다”라고 해석을 내리고 있다. 무염오수행에 대해서는 『傳燈錄』 “남악장”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후에 닦음도 있고 증함도 있지만, 다만 오염을 시키지 않고 곧 고하, 시비, 계급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것이 제불이 좋아하는 바 라고 했다고 지적한다.[26] 비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습기까지 몽땅 떼어버리는 완벽한 깨달음이 아직은 못됐기 때문에, 닦음은 또다시 있어야 하고, 또한 수증에 깊고 옅은 심천이 있기 때문에에 마땅히 닦음이 있긴 하지마는 그것을 높다 낮다 하는 관념을 두어서는 참다운 무염오수행이 못 된다고 경계하고 있다.[27]


 


또한 『육조단경』은 돈오돈수를 설하는 경전으로 알려져 있지만, 거기에는 점수라는 사상도 들어있으며, 그 말로 나오지 않아도 분명 그 경전 속에 의미로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28] 법은 본래 하나의 성품이지만 보는 견해에 따라서 더딤과 빠름이 있다. 그러니 무엇이 돈이고 무엇이 점인가? 무엇이 문득 아는 것이고 또는 점차 아는 것인가? 원래 법에 있어서는 돈법과 점법이 없으나, 사람의 근기에는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다. 고로 돈과 점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고


 






[26] Ibid., p. 30.


[27] Ibid., p. 31.


[28] Ibid., p. 39.


 


 


 한다.[29] 그래서, 너무나 점수에 치우쳐서 자꾸만 계급을 따지고, 고하 심천을 가리는 사람들한테는 돈오돈수로써 마땅히 분별을 쳐부수어야 한다. 그러나 본래가 부처인데 닦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분들에게는 점차로 닦아 나가는 점수를 역설해야 한다는 것이다.[30]


 


이런 수행의 입장에 기반한 논증과, 선종 문헌의 증거 등을 들어 청화 선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경론에서 밝힌 바, 법에는 본래 돈점이 없고, 근기의 이둔으로 돈점이 생기는 것이며 또한 수증에도 심천이 있는 것이니, 돈오점수라 하여 오류일 수 없고, 무염오수행을 역설하는 의미에서의 돈수이니, 돈오돈수가 그릇됨이 아니며, 다만 선오후수의 수기설법일 뿐이다.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이 불조의 통설이라고 한다.


 


청화 선사의 마지막 저작인 『육조단경』주해는 이러한 돈오점수와 돈수의 수행이론의 차이에 대한 선사의 치열한 궁구의 결과로서, 『육조단경』을 철저히 분석하여 점수와 돈수의 개념 정의를 다시 내리고, 나아가 두 입장이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는 의도로 씌어졌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31] 청화 선사는 평소에 “순선시대”라는 말을 쓰면서, 초기 선종의 가르침에 들어있는 순수한 수행에의 정열과 그 수행 방법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것은 선종이 후기에 가서 특히 교학적으로 다른 개념들과 섞이게 되면서 복잡해지고 교조적으로 변하는 것에 비해, 초기 선종은 불교의 수행론의 근본 문제를 실천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돈오돈수와 점수 간의 논쟁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은, 당시의 불교계의 소위 돈수·점수 논쟁이란 사실은 “정통성”이라는 이름 하에, 결국 자신의 것은 정통이고 상대편은 그렇지 않다는 관점에서 서로를 비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그러한 점을 시정하고자 하는 시대적 사명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분의 말씀을 빌리면, “본래면목을 밝히는 것이 참선의 대요인데 이것의 중요한 병폐는 暗證禪이라서 불조의 가르침을 모르고 어두운 가운데서 암중모색하는 참선을 말하는 것이다”[32] 라고 했다. 정통선이라는 것은 선의 기본적 입장을 다시 확인하고 불설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되어야지, 근거 없는 비판이나 권위의식은 통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29] Ibid., pp. 39-40.


[30] Ibid., p. 41.


[31] 『육조단경』에 대한 청화 선사의 사상적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전에 나온 수많은 『육조단경』 번역서나 연구서들과의 비교 연구가 필수적이고 아마 청화 선사의 선관을 알수 있는 열쇠가 거기에 있을 것이나, 본 필자는 후일에 다른 기회를 기약하고자 한다.


[32] Ibid., p. 14.


 


순선 시대를 역설하는 선사의 입장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선사께서는 『육조단경』과 이후의 중국 선종사의 흐름을 재인식하고 순선시대로 돌아갈 것을 제창하고 있다. 순선시대란, 보리달마에서 6조 혜능 까지의 선시대를 가르키는 것이며, 이것을 가장 중요한 권위로 의지해야 한다고 한다. 그 내용의 요체는 바로 안심법문으로, 혜가 스님이 달마스님에게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한 것이 이것이 안심법문의 기연이며, 선의 기본문제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33]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은, 무아이고 내 소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고 일체 만유가 평등 무차별의 진여법계임을 아는 것이다.[34]


 


또한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육조단경』의 돈황본이 발견됨으로써, 경전의 진위성, 판본간의 차이에 대한 새로운 학적 인식이 가일층 높아지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달마대사의 저작이라고 알려졌던 『觀心論』이 사실은 신수의 저작이고, 육조 혜능에 의해 점수론자로 비판받아서 남종중심으로 씌어진 중국 선종사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렸던 북종의 신수대사가 사실은 당대의 높은 선장이었음도 학계에서 밝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돈수와 점수의 각각의 주장의 근거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각각의 인용 문헌등을 들어 이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이러한 청화 선사의 주장은 대단히 정확한 해석이다. 보조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하면서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1994년 미국의 종교학회에서도 한국 불교에서 나타난 이러한 상반된 주장을 점검하는 패널이 만들어 졌는데, 그때 학자들이 제시한 논변들은 청화 선사께서 지금 증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원시 불교 이래로 통찰과 노력,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것은 불교의 양대 틀이며, 이것이 불교에서 역사를 통해 지켜온 기본 입장이라는 것이다. 또한 어떤 선종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는 돈수라는 것은, 수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완결성을 강조하는 선종 특유의 수식적 표현이며, 따라서 사실적 표현으로서 이해해서는 잘못이다. 또한, 돈수의 주장의 많은 부분은 불교의 역사와 문헌들과 개념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선 문헌이 등장하고 돈황에서 새로운 선 문헌들이 쏟아짐에 따라 선종사에 대한 연구도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문헌의 방대함과 또한 선 문헌에서 사용되는 독특한 언어를 마스터해야 하기 때문에 선종을 연구하는 것은 일생을 다 걸려도 못하는 일이라 선종의 전체의 모습은 아직도 연구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문헌 지상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35]


 






[33] Ibid., p. 19.


[34] Ibid., p. 24.


[35] John Jorgensen, Review Article on Heinrich Dumoulin's Zen Buddhism: A History, 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18-4, p. 378.


 


 


선사는 이런 입장에서, “대승, 조사선 이런 말에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 그때 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 하신 말씀이므로 어떤 경우에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러나 가장 버리지 못하는 곳이 지금 우리 한국 불교 상황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36]


 


또한 청화 선사는 이렇게도 질문한다. “돈오돈수가 성불일 것인가? 대소승의 여러 경전에서 묘각 성불이란 삼명육통과 일체종지를 갖춘 불가사의한 무량공덕을 원만히 성취하였다고 하는데, 단박에 몰록깨달았다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겠는가, 얼마나 많은 선지식이 이렇게 해서 원만성불을 이루었겠는가,” 라고 묻고는, 이 질문은 돈오 이후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환기하기 위한 것 뿐 이라고 밝힌다. 자신은 어떤 것도 그르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선오후수가 되어야 닦음도 올바른 닦음이 되고 성불에 이르는 첩경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이론적인 체계가 먼저 앞서야 거기에 따르는 합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듯이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경은 필요없고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하여 문자와 분별을 여의고 실참참구로 정진을 한다 하더라도, 공부방법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가 확립되어야 바른 신심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닦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는 것이고 나에게 어떤 것이 맞는가 하는 것에 대한 확신 (즉 이해)가 서야 용기있는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해오를 먼저 해놓고서 닦아야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갈 수가 있다. 이것은 삼세제불의 정설이다”라고 한다. 돈오돈수나 돈오점수 모두가 다 선오후수라는 자리에서, 그때 그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법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다짐하고 있다.[37]


 


 


(4) 염불선 수행법의 의미와 그 이론적 기반


 


염불선 수행법에 대해서는 지난 첫번째 학술회의에서 보리방편문의 분석과, 염불선의 역사와 수행법의 실제 등의 문제가 잘 다루어 졌으므로 본고에서는 염불선 수행법의 이론적인 기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청화 선사는 앞서 보인대로 정토 신앙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을 내리면서, 선으로서의 염불 수행법을 제창하고 있다. 그는, “염불이라는 본 뜻은 不二佛이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염불하는 것이다. 부처가 저 밖에 있다고 해서 염불하는 것이 아니다. 천지우주가 이대로, 사바세계가 바로 적광토고 극락세계이다. 중생이 어두워서 못보는 것이다. 또는 不離佛이라, 부처와 떠나지 않기


 






[36] Ibid., p. 22.



[37] Ibid., p. 66.


 


 


 


위해 염불하는 것이다. 마치 화두와 똑같다”고 한다.[38] 즉 나와 부처가 다르지 않고 [불이불], 부처가 나인 그자리를 떠나지 않고 [불리불] 염불함으로써 다름 아닌 나를 바로 보는 것이다.


청화 선사는 염불의 방법에 대해, 사종 염불을 설명하고 있다. 칭명, 관상, 관상, 실상 염불이 그것인데, 이 외에도 수식염불, 간화 염불등이 있다고 하고, 어느것을 하더라도 자신의 근기에 맞는 염불을 일사분란하게 하여 삼매에 드는 것이 중요하지 그 우열을 논할 필요는 없다고 단언한다.[39] 사실, 선사는, 『원통불법의 요체』에서 근본불교의 수증론을 소개하면서 수식관이나 사념처관에 대해서도 자세히 안내하고 있다.[40]


 


사종염불이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稱名염불,[41] 부처님의 32상 80종호를 갖춘 원만덕상을 관찰하는 觀像염불, 부처님의 자비공덕이라든가 훤히 빛나는 지혜광명등 부처님의 공덕을 상상하는 觀想염불, 그리고 현상적인 가유나 허무에 집착하는 무를 다 떠나서, 중도실상의 진여불성 자리, 이른바 법신 자리를 생각하는 實相염불이다. 이중 진여불성자리를 생각하는 실상염불이 참다운 본질적인 염불이라고 한다. 이른바, 법의 실상, 인간생명의 실상, 우주 생명의 실상을 관찰하는 것, 즉 부처의 법신, 그 있지도 않고 공하지도 않은 중도실상의 생명의 광명을 관조하는 염불이 실상염불이다.[42] 여기서 진여불성자리를 생각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맞다 그르다는 판단을 내는 경우를 본다면, 내가 있는 경우도,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다만 진여불성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한낱 가상이다. 또는 우리가 사업도 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나 너나 모두가 다 부처의 화신이고, 정치하는 것도 파는 물건을 받는 돈도 역시 진여불성의 화현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즉 순간 찰라도 본체를 여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43] 이렇게 본체를 여의지 않고, 또는 진여로서의 자신의 본성을 떠나지 않고 하는 염불이 바로 실상염불이요, 염불선의 요체라는


 






[38] Ibid., p. 145


[39] 『정토삼부경』, pp. 52-53.


[40] 『원통불법의 요체』, pp. 124-127.


[41] 칭명 염불을 할 때 어떤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좋은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부처님을 부르거나, 그것을 부처님의 화신으로, 공덕으로 생각하여 한다면 어떤 것을 해도 상관없다고 한다. 특히 한 부처님을 부르면서, 그 공덕이 다른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높다고 생각해서 부른다면 공덕을 크게 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사 아미타불이라서, 법신, 보신, 화신 삼신을 모두 통틀어 말할 때는 아미타불이므로 보통 염불을 할 때는 아미타불을 많이 하지만 어떤 명호를 부른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을 하는 것이나 다 똑 같은 공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Ibid., p. 235).


[42] Ibid., pp. 231-232.


[43] Ibid., p. 166.


 


 것이다.
따라서, 극락세계를 염원하고 아미타불을 생각하며 그 이름을 부르는 염불 수행은 진여자성을 여의지 않는 참선 공부와 서로 우열이 없으며, 염불과 선은 일치한다고 한다.[44] 그는 염불과 선이 일치한다는 선·정 일치의 사상이 『관무량수경』에 이미 나타남을 경전적 증거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의 보조 지눌, 태고 보우, 청허 휴정, 또는 중국의 육조 혜능, 영명 연수, 천여 유칙 스님들의 어록을 들어, 과거의 조사들과 대덕들이 염불과 선정의 일치를 제창하였음을 보이고 있다.[45]


 


나아가 시중에서 흔히 제기하는, 염불이 옳은가 참선이 옳은가, 하는 데에 대해서, “(간화선을 제창한 중국의) 대혜스님도 위대한 도인인데, 그냥 묵묵하니 고목처럼 앉아서 꾸벅꾸벅 혼침에 떨어지까 마땅히 무엇인가 참구를 해야 하겠기에 그래서 화두선을 역설한 것이고, 그리고 선사들이 어구에 치우쳐서 따지고 부질없는 의심을 하니까 천동 정각 스님이 묵조선을 창도한 것이다”[46]고 하면서, 각각의 방편과 경우에 따라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지 어느 것이 더 우열하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또 부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염불은 따지고 보면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선이 된다”는 것이다.[47]


 


이와 같이 지극히 염불 수행을 하여 이르는 경지를 염불삼매라고 한다. 좀더 자세히는, 一心으로 관상, 실상, 칭명 염불을 수행하는 것을 인행의 염불삼매라고 하고, 이것이 성숙하여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서 시방불이 현전하고 법신의 실상, 진여불성에 계학하는 것을 과성의 염불삼매라고 한다.[48] 수행의 점진적으로 나아감에 따라, 두가지 단계로 나누는 것으로, 인행 공부는 우선 닦아나가는 수행법으로 빨리 결과를 얻고싶은 사람은 그 긴 과정을 참지 못하고 오래하지 못한다고 경계한다. 오랫동 참아야 하는 것이며, 지옥과도 같은 고독을 이겨내야 한다고 한다.[49]


 


여러 경전에 나타나는 염불에 대한 언급들로, 『대지도론』, 『능엄경』, 『기신론』, 『관무량수경』 등의 예를 들고 있다. 또한 그는 불교사에 나타난 여러


 






[44] 『정토삼부경』, p. 55


[45] 『정토삼부경』, pp. 55-60.


[46] 『원통불법의 요체』, p. 224.


[47] Ibid., p. 224


[48] Ibid., p. 236.


[49] Ibid., p. 238.


 


실례들을 들어 보이면서 수행법으로서의 염불의 공덕과 그 효과에 대해 서술한 경전들을 제시하고 있다. 용수나 세친의 저술에서도 염불이란 “마치 순풍에 돛단 배와 같이” 수행하기 쉽고 성불하기 쉬훈 수행법이라고 찬탄하였다.[50] 중국불교의 역사 속에서는, 혜원, 천태 지의, 선도, 연수. 중봉, 연지 대사등을 거명하고 있고, 한국의 조사들로는 신라 원효가 염불을 추종했으며, 자장, 의상, 그리고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 보조 지눌, 태고 보우, 나옹 혜근, 조선시대의 함허 득통, 서산 휴정, 사명 유정 대사등이 선과 염불을 융합한 “禪淨일치”를 주창했다.[51] 특히 서산대사는 염불선 전통에서 중요한 인물로 그의 『선가귀감』에서 염불을 권면하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상의 법문을 통하여, 청화 선사는 이론적으로 또한 문헌적 증거를 통하여, 염불선의 수행법으로서의 타당성을 차분히 말씀하고 있지만, 사실 당시 청화 선사는 간화선 지상주의의 현실 속에서 대중들에게 시대와 근기에 맞는 수행법으로서 염불선을 제시함으로써 엄청난 비판과 핍박에 시달리셨다. 하지만 학술적으로 볼 때, 선사께서 인용하시는 문헌적 증거를 포함해 과거의 많은 경전과 문헌에서는 실제로 염불과 선을 겸수할 것을 제창하고 있다. 또한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의 과거와 현재를 망라해서 많은 조사들과 선지식들이 염불선을 수행해 왔고, 지금도 염불선이 간화선, 묵조선과 함께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선 수행법의 하나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인 것이다. 특히 명대 이후 중국불교에서는 간화선이 아닌, 염불선 수행이 대표적 주된 수행법으로 자리잡았음이 불교사에 밝혀져 있는 사실이다. 또한 해외의 수많은 저술과 논문들이, 선 수행법은 한 가지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선종사를 통해 무수한 조사들이 자신들의 어록에서 갖가지 다른 수행법과 이론들을 주장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건만, 염불선 수행법은 외도이고 간화선 만이 정통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한국 현대 불교계의 좁은 안목을 증명하는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5. 결어


 


앞서 설명했듯이 청화 선사는 저술을 통하여, 인도나 중국, 대승이나 소승, 교종과 선종을 구분하지 않고, 불교사에서 나타난 여러 이론들을 敎相론과 수증론 (soteriology)의 두 측면에서 소개하고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종합적이고도 통섭적인 이해를 통해, 서로 다른 시기에 나타난 불교 교리들을 상호 대차하여 해석하고 서로 간의 상위를 해소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불교 사상에 대한 종합적 접근법은 청화 선사가 평생 스승으로서 그 분의 사상을 소개하고 선양했던 금타 화상에게 있어서도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50] 『정토삼부경』, p. 23.

[51] 『원통불법의 요체』, p. 23.


 


 


이러한 교학의 변천사와 수행방법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이해에서 나아가, 불교 수행에 있어서도 역사적이고도 객관적인 불교이해가 선행되어야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근본불교, 소승불교의 문헌에 대해서도 자유자재로 언급하시고, 교와 선을 차별하지 않고, 교학적 이해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선종사의 이해에 있어서 돈오점수와 돈수, 여래선과 조사선 등을 놓고 갈등하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고민한 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안목과 교학적 지식은 청화 선사를 그 시대에 우뚝서는, 다른 불교인들과 구별하게 만든다고 하겠다.


 


이상 청화 선사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 분의 정토와 선 사상을 살펴보고 그 이론적 특징과 수행법의 대강에 대해 살펴보았다. 염불선 수행법은 정토와 선 사상이 이론적으로 결합되어, 자성불로서의 아미타불을 염하고 진여 실상에 계합하고자 하는 것으로, 당시 불교계에 다른 형태의 선 수행법으로 소개되면서 큰 자극을 주었다. 청화 선사는 그 분의 생애와 수행의 족적을 통해 한국 불교사에 큰 이정표를 세웠으며, 그의 교학적 특징과 수행법은 앞으로도 많은 불교인들에게 지침이 되어 한국 불교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정통불법의 재천명 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 논문임/원통불법연구회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