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차(維歲次) 경인(庚寅)1246) 12월 경인삭(庚寅朔) 초9일 무술(戊戌)에 고자(孤子) 사왕(嗣王) 신 돈(焞)1247) 은 삼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어린 나이로 상(喪)을 당하고 나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빛나는 업적을 크게 드러내기 위해 시호 올리는 성대한 의례(儀禮)를 베풀었습니다. 대왕의 업적에 대해 저희 정성을 펴려는 것뿐이지 감히 거짓말로 찬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효도와 우애를 하늘에서 타고났고 정밀하고 전일한 것을 마음으로 전수받으셨습니다. 우뚝 뛰어난 자질로 성조(聖祖)1248) 의 사랑을 받으셨고, 착하고 지혜로운 성품으로 어진 스승에게서 지도를 받으셨습니다.
세자로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큰 근본을 세워 모든 혈구(絜矩)1249) 의 정치를 행하셨기 때문에 일용의 사이에서 시설(施設)하는 것이 모두 천리(天理)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일념(一念)으로 성의를 간직하시니 신화(神化)1250) 가 팔도에 미쳤고, 하루에 세 번 문안드리는 예(禮)를 다하니 화기가 양궁(兩宮)1251) 에 가득하였습니다. 사시(四時)의 제사를 경건히 지내니 종묘(宗廟)의 제사가 정결하였고, 학교와 서원을 중히 여기자 유교(儒敎)가 나타났습니다. 어진 보필을 불러들인 다음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진지하게 정사를 토론하였으며, 성인의 경서(經書)를 토론하여 심성을 간직하고 살피는 공부에 힘쓰셨습니다. 친족을 친애(親愛)하는 것은 몸을 닦은 효과이고 노인을 존경하는 것은 효도를 미루어 행한 것입니다. 신하들에게 솔선 수범하되 먼저 검소함을 숭상하셨고, 사사로운 길을 막아 끊어버리되 권세에 빌붙은 것을 가장 경계하셨습니다.
신명(神明)을 대하듯이 하여 혼자 있는 곳에서도 더욱 조심하셨으며, 밤낮으로 국사를 걱정하여 요양할 때에도 부지런히 하셨습니다. 옥사를 바르게 판결하고 외로운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니 급급해 하는 바는 왕도 정치였고, 농민을 위로하고 농사를 권장하니 백성이 농사의 시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비용이 걱정되면 경상의 부세로부터 어공(御供)까지 줄이셨으며, 기근(饑饉)을 구제할 적에는 내창(內倉)1252) 의 것을 모두 풀어 쓰고 외방의 창고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교훈은 모두 후손에게 전할 만하고, 계술(繼述)은 선왕을 받드는 데에 더욱 신중히 하셨습니다. 태묘(太廟)에 모시는 의례(儀禮)를 소급해 거행하니1253) 마침내 빠뜨린 전례(典禮)가 닦아졌고, 영릉(寧陵)을 이장(移葬)하는 일을 거행하니 영구한 계책을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예제(禮制)에 의문이 있을 적에는 참고하고 연구하기를 더욱 자세히 하였는데, 마음에 결단을 내리면 인정과 예문(禮文)에 결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옥궤(玉几)에 의지하여 내리는 유명(遺命)이 갑자기 감렴(感奩)1254) 의 때에 선포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병환이 겨우 나으셨으나 진실로 지나치게 상하신 것을 이미 근심하였습니다. 하늘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어인 일로 조금도 연장시켜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중제(中制)1255) 를 끝마치지 못하셨는데 차마 끝없는 슬픔을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린 나이에 부왕(父王)을 여의었으니 실로 불초(不肖)의 허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붙잡고 울부짖는 속에서 크나큰 서업(緖業)을 계승하니, 피눈물만 흐를 뿐이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던 빈 궁전을 바라보니 용안을 뵈올 길이 영원히 막혔습니다.
다행히도 새로 지은 유택(幽宅)이 마침 조종(祖宗)의 능침(陵寢)과 가까우니 신도(神道)로 볼 때 어찌 인정과 크게 다르겠습니까. 백성의 노역을 줄이게 된 것도 대왕의 평소 뜻을 몸받은 것입니다.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니 달리는 사마(駟馬)보다 빠른 세월을 슬퍼하고, 쓰시던 활과 칼만 부질없이 남아있으니 선어(仙馭)1256) 를 바라보아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에 아름다움을 왕에게 돌리는 정성을 가지고 시호 올리는 떳떳한 전장(典章)을 따라 행합니다. 모든 임금이 모범을 삼으니 행적이 이미 중외(中外)에 드러났고, 한 은혜로 시호를 올리니 아름다움이 고금(古今)에 더 빛났습니다. 아, 왕의 순수하신 덕이여 길이 제향을 받으실 것입니다.
삼가 신(臣) 의정부 영의정 허적(許積)을 보내어 옥책(玉冊)을 올리고, 존시(尊諡)를 ‘순문 숙무 경인 창효(純文肅武敬仁彰孝)’로, 묘호(廟號)를 현종(顯宗)으로 올립니다. 대왕께서 굽어 살피시어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큰 미덕(美德)을 끝없이 펴서 자손이 번창하게 하고 큰 명호(名號)를 영구히 드날려 해와 별처럼 아울러 빛나소서.
아, 슬프도다. 삼가 말씀올립니다.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예문관 제학(兼藝文館提學) 신(臣) 강백년(姜栢年)은 지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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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부분에서 드러 나듯이 현종의 아들이 부왕현종대왕에게 올리는 시책문인데..물론 신하가 대필, 마지막 부분에서 의정부 영의정 허적을 어디론가 보내서 올립니다.어디로 보냈을까요?
참고로 철종대왕 시책문과 몇몇 시책문은 사신을 보내서 옥책을 받들어 존시를 올립니다.
이 부분을 연구하면 조선왕과 중국 즉중앙조정의 관계가 조금이나마 밝혀질 것 같군요?
첫댓글 시책문은 사왕과 여러 제후 대신들이 각자 올린듯 보입니다.//그런데 사왕이 왕위를 계승했다면?이름을 생략하고 휘해야하는 것 아닌가요?//여기서 사왕은 대통을 잇지 않은 왕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