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니즘의 배경과 이해
시대적으로 볼 때, 근대(modern)이후의 사상적 변화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후근대(postmodern)과 신근대(antimodern)로 나눌 수가 있다. 근대주의사상(modernism)은 중세교회와 교권의 인간 이성에 대한 지배와 위압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세속적 인본주의 정신과 세력이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는 세대이다. 근대는 14-15세기 르네상스에서 시작되어 그 뒤 종교개혁 그리고 17세기 계몽주의에 의한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와 산업혁명과 불란서 대혁명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근대주의 정신은 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 진보적 낙관주의로 볼 수 있다.
이성주의란 인간이 가진 기능 가운데 이성에 의한 판단과 사고를 중시하였다. 생각하는 자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강조되었고, 이런 인간이 분명하고 명학하게 인지하는 것만이 참이며 확실하다고 본다. 그래서 보편적인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며 인간 이성이 지식체계의 확고한 기반이 될 수 있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합리주의란 중세의 신앙의 진리 주장을 신뢰할 만한 지식의 영역에서 제외시켰고, 인간 이성으로 인지할 수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신앙과 지식, 그리고 계시와 이성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두었다. 중세의 종교적 절대성이 근대에는 인간 이성의 절대성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과학주의란 과학적 방법에 의해 검증되어진 진리만이 가장 확고한 기초 위에 정립된다고 믿었다. 갈릴레오나 뉴턴과 같은 과학자 등에 의한 많은 과학적 발견들은 중세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던 우주관과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더욱이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계의 정설로 자리잡혀 가며 창조주의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여 인간의 이성과 과학만이 인류에게 지구상의 유토피아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과학 지상주의를 지향하게 만들었다.
낙관적 진보주의란 고대와 중세와 비교해서 근세에는 이성에 의한 신념, 합리성에 의존하였으며 과학과 기술에 의해 인간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헤겔의 주장과 같이 인간의 이성은 정, 반, 합의 과정을 통하여 끝없이 진보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의 진행을 발전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낙관적 진보론이 팽배하게 된 것이다. 특히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물질적 풍요와 보다 편리하고 질적으로 향상된 삶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낙관주의적 전망을 더욱 확산시켰던 것이다.
모던니즘의 종말과 포스트모던니즘의 출현
그러나 이성 위에다 합리적인 법과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를 세우고, 근대과학 기술로 보다 편하고 점점 더 많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 수 있으리라는 근대의 낙관주의적 전망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대로 성취되지 않았고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또한 이성의 영역안에서는 우주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계만이 남게 됨을 보았고, 이성 위의 어떤 가치를 찾기 위해 몸부림쳐 보았으나, 결국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임도 감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허무 속에서 탄생한 정신이 포스트모던니즘(postmodern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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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니즘이 성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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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니즘의 특성은 그동안 지니고 있던 모던니즘의 특성을 계속 지니면서 그것과 대립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즉 어떠한 면에서는 포스트모던니즘이 전 역사로서의 모던니즘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다음 몇가지 특성들을 살펴 보겠다.
1) 절대적 진리는 없다 상대주의 포스트모던니즘은 근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에 대한 신뢰의 붕괴로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며 진리의 상대성을 내세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사5:20).
그것은 근대의 이성중심주의와 보편주의,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반성이며 반작용이다. 포스트모던 정신은 진리를 합리적 영역으로 제한하거나 인간 지성을 진리의 전결자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객관적인 진리는 접근 불가능하고 실재나 본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해석자 안에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것에 한 가지 의미만 찾고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찾고 부여하며, 또 의미의 절대화를 거부하고 그것의 상대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2) 탈 인간중심주의이다 모던니즘이 중요시 여기던 자아의 주관성과 개인주의 보다는 오히려 자아의 분산이나 자아 상실 문제가 더욱 중요하게 다룬다. 이것은 모던니즘이 합리적 자아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 마저도 더 이상 우주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주체성과 생존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은 인간의 연구나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은 주체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념은 요즘의 뉴에이지 이념이나 힌두교 계통의 종파들의 사상과 같다. 결국 역사의 주체성이 상실되고 진보성을 부인 하므로 개혁 의지가 약해짐은 물론 삶의 합리적 변화를 포기하게 만든다.
3) 전통적 계급 질서의 붕괴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선적으로 소수 민족의 부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미국의 히피족으로부터 시작되는 청년문화로 더욱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문제와 동성연애가 성의 혁명을 통하여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초문화적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다양성과 상대성 만이 존중된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와 종교 속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해야 함으로 교육도 그러한 문화로 바뀌어야 한다는 다문화주의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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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니즘과 종교다원주의 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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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니즘은 모던주의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특징인 객관적 이성에 근거한 일원화된 체계와 합리성의 권위가 실추된 사조이다. 최근 포스트모던니즘은 연극, 무용, 음악, 예술, 문학, 철학, 자연과학, 심리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났는데 그 특징은 불확실성, 파편성, 표준의 해제, 자아 상실, 다양함 등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니즘의 흐름에서 종교도 예외일 수 없다. 문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느 종교의 유일성, 배타성을 거부하고 종교의 다원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중세의 기독교은 하나님은 계시다라고 외치고, 근세의 합리주의는 하나님은 안 계시다라고 외치며, 작금의 시대는 하나님이 계시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 종교다원주의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된 것은 급속한 세계의 변화와 세속화 경향으로부터 오는 영향이다. 크게 보면 지구촌화와 포스트모던니즘으로의 변화라고 하겠다. 급격한 기술의 발달로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화되고 있다. 이전에 지역을 가르던 시간과 공간의 간격이 없어지게 되었고 서로가 인터넷이라는 커다란 커뮤니케이션 체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기독교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은 현대신학으로부터 이다. 현대사회에서 신학자들은 타종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고민하게 되었고 선교신학의 한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오늘날 선교신학에서 타종교에 대한 신학적 태도는 크게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배타주의(근본주의)의 세 부류로 나눈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학자들 내부에서도 타종교에 대해서 구원을 인정해 주거나 아니면 기독론 자체를 넓게 포괄적으로 해석해서 구원이 가능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수 진영의 배타주의를 독선과 서구제국주의적 산물이라고 공격하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타종교로부터 오는 도전이다. 즉 현대세계에서 여러 종교인들은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배타적 주장이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현대의 종교 다원화 세계 속에서 서로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깨뜨리는 독선이라는 공격이다. 특히 동양권 전통 종교들의 특징이 포용성과 범신론이라는 성격을 가지도 있기에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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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존재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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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의 구원 진리 가능성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현대적 인본주의 및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는 하나의 실재가 존재하나 역사와 문화의 특수성 때문에 여러 종교가 생겼다"라고 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11:14).
포괄주의는 성서만을 유일한 규범의 근원으로 보지 않고 다양한 신앙의 전통을 용납하는 천주교나 정교회 등에서 볼 수 있다. 다시말하면 종교다원주의와 포괄주의는 신학적 주장에서 차이가 나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는 실제 본질이 거의 같은 주장이다. 교회 밖의 타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능력이 미치는데 이 말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배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건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고수하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성경 계시의 절대성과 무오성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8-9).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성경은 타종교와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 자신의 수련으로 득도함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에 의한 구원 사건으로 본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믿는 자의 회심과 영접에 의한 구원이다. 우리는 진리와 복음은 타협하지 말고 사수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진리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어야 하며, 관계에 있어서는 수용적이며 포용적이어야 할 것이다. 즉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의 인간적 사회적 관계에서는 사랑으로 포용을 해야 하지만, 성경적 진리에 대해서는 타협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신 절대적 계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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