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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충숙왕(忠肅王)
휘(諱)는 도(燾)요, 어릴 때 이름은 의효(宜孝)이며, 몽고식 휘는 아라눌특실리(阿刺訥忒失里)이다.
충선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몽고 여자인 야속진(也速眞)으로 의비(懿妃)로 추증(追贈)하였다.
충렬왕 20년 갑오 7월 을묘일에 출생하였다.
성질이 엄격하며 굳세고, 침착하며 무게가 있고, 총명하고 고결하였다.
제술(製述)을 잘하였으며, 예서(隷書)를 잘 썼다.
재위가 전후 25년이고 수(壽)는 46세였다.
갑인 원년(1314), 원 연우(延祐) 원년
○ (윤3월) 원 나라 황제가 상왕(충선왕)에게 연경(燕京)에 머무를 것을 명하였다.
상왕이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글 잘하는 선비 염복(閻復)ㆍ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ㆍ우집(虞集) 등과 더불어 교유하며 고증하고 연구하면서 스스로 즐기며, 호종한 신하들로 하여금 윤번으로 교대하게 하였다.……
요수(姚燧)가 말한 과거(科擧)의 설행(設行)을 상왕이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이맹(李孟)이 평장사(平章事)가 되어 과거의 시행을 주청해서 실행하였으니, 그 근원은 상왕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승상 독로(禿老)가 파직되매 황제가 상왕을 승상(丞相)으로 임명하니, 상왕이 굳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은 소국의 정치를 맡은 것도 오히려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아들에게 넘겨주기를 빌었는데, 하물며 조정의 상상(上相)이겠습니까. 어찌 감히 영화를 탐내어 함부로 받아서 폐하의 밝은 지감(知鑑)에 누가 되게 하겠습니까. 감히 죽기를 맹세하고 청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이르기를, “정말로 경이 권세를 잘 피한다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상왕이 전 선부의랑(選部議郞) 윤신걸(尹莘傑)ㆍ사헌집의(司憲執義) 윤선좌(尹宣佐), 전 전교령(典校令) 백원항(白元恒)에게 명하여 왕을 모시고 통감(通鑑)을 강론하게 하고, 신천(辛蕆)을 선부직랑(選部直郞)으로 임명하고 안규(安珪)를 산랑(散郞)으로 임명하며 전주(銓注)를 맡겼다.
왕에게 유시하여, “국정을 전단(專斷)하고, 겸하여 불법을 숭상하라." 하였다. 모든 창고의 아전에게 경계하여, 어린 임금의 명을 받들고 재용(財用)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였다.
병진 3년(1316), 원 연우 3년
○ 3월에 상왕이 황제에게 주청하여 심왕(瀋王)의 위를 세자 고(暠)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태위왕(太尉王)이라고 일컬었다.
황제가 고를 개부의동삼사 심왕(開府儀同三司瀋王)으로 삼고 양왕(梁王)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 (6월) 왕이 역련진팔라공주(亦憐眞八刺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영왕(營王)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의 딸이다.
정사 4년, 원 연우 4년
○ 봄 정월에 영왕(營王)의 요청으로 동녀(童女)를 뽑았다.
무오 5년(1318), 원 연우 5년
○ (4월) 주(州)ㆍ군(郡)의 사심관(事審官)를 폐지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권력 있는 토호들이 다시 스스로 〈사심관이〉 되니, 폐해가 전보다 더 심하였다.
○ (5월) 사헌집의 김천일(金千鎰)을 경상ㆍ전라ㆍ충청도에 보내고, 지평 장원조(張元祖)를 서북면(西北面)에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게 하였다.
그때 상왕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모든 나라 일을 멀리서 교지를 전하여 시행하였으므로, 호종(扈從)한 재상 권한공ㆍ최성지ㆍ이광봉(李光逢) 등 4, 5명의 무리가 권력을 휘둘러, 친척과 친구들과 뇌물을 주는 자에게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지 않고 높은 벼슬을 마구 주자, 왕이 자못 불평(不平)스러운 마음을 품었었다.
상왕이 일찍이 채홍철(蔡洪哲)에게 명해서 5도(道)를 순방하고 공부(貢賦)를 재량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新)ㆍ구(舊)의 공부(貢賦)가 균등하지 못한 것이 많아 백성이 괴로워했으며, 또 홍철은 탐욕스러운 성품이어서 사리(私利)를 취하기를 즐겨 백성의 전지를 많이 탈취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왕이 비록 그의 하는 짓을 옳지 않게 여겼지만, 상왕에게 총애를 받으며 또 권한공ㆍ최성지와 사이가 좋으므로 감히 건드리지 못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바로잡고자 하여 천일과 원조를 각 도에 보내고 하교(下敎)하여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만 나라는 편안하다. 근래에 괴로운 일이 많아서 백성은 향토에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고을은 시들어 피폐한데도, 존무(存撫)와 제찰(提察)과 수령들이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사헌부의 신하들을 보내서 백성의 고통을 묻고 상벌(賞罰)을 엄중히 시행하려 한다. 만약 사신이 사욕을 좇고 공정한 마음을 버린다면 역시 감히 용서하지 못하겠다." 하였는데, 천일이 사정을 품고 속여서 규찰하여 적발하는 것이 없었다. 왕이 안뜰에서 곤장을 쳐서 파면시켰다.
원조 또한 재주가 졸렬하여 적발한 것이 없고, 재상 김정미(金廷美)만이 피폐(皮幣)를 불법으로 징수한 사실을 들춰 내었다.
상왕이 이런 사실을 들었지만, 그때 정미는 왕을 호종하였기 때문에 원조만 인월도(引月島)에 귀양보냈다.
○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하였다.
○ (6월) 제폐사목소를 고쳐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하고, 세력있는 자들이 강점한 전민를 모조리 찾아 내어 그 주인에게 돌려 주니, 중앙과 지방에서 매우 기뻐하였다.
다만 세력있는 자들이 근심하여 상왕에게 호소해서 찰리변위도감을 폐지하게 하였다.
기미 6년, 원 연우 6년
○ (봄 정월) 원 나라에서 단사관(斷事官) 중란합리합적(中欒哈里哈赤) 등을 보내어 순정군(順正君) 숙(璹)을 압송해 왔다. 숙이 일찍이 황제의 제서(制書)라고 속이고 역마를 많이 징발하였으며, 요양(遼陽)ㆍ망해령(望海嶺) 등지에서 민호 2백여 구를 속임수로 점유하였다. 왕이 원 나라의 사자와 더불어 행성(行省)에서 국문하고 장형(杖刑)을 가하였다.
○ 6월에 대호군 정윤흥(鄭允興)을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치게 하였다
○ 문성공 안향(安珦)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세간에서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향이 비록 국자감의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인재를 양성한 공적이 있으나 어찌 이것을 가지고 종사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향의 문생(門生) 총랑(摠郞) 신천(辛蕆)이 극력 주청했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다.
○ 9월에 주(州)ㆍ현(縣)의 사심관(事審官)이 관할하고 있는 노비ㆍ전토를 회수하였다
경신 7년(1320), 원 연우 7년
○ 3월에 상왕이 황태후의 전지를 받아 환자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 등 6명이 탈취한 토지와 노비를 모두 찾아 내어 그 본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백안독고사는 스스로 거세(去勢)하고 엄인(閹人)이 되어서 기회를 얻어 인종황제(仁宗皇帝) 잠저(潛邸)에서 섬기었다. 아첨하고 음험하여 불법이 많으므로, 상왕이 매우 미워하였다.
○ 8월에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백안독고사에게 전지와 노비를 다시 주라고 명하고, 또 동녀와 고자를 요구하였다.
○ 9월에 문선왕(文宣王 공자)의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왕이 은병(銀甁) 30개를 내주어 그 비용을 보조하였다. 재신ㆍ추신들도 모두 재물을 내어 보조하였다.
○ (11월) 대호군 정적(鄭績)을 원 나라에 보내어 동녀를 바치고, 윤석ㆍ곽유견(郭惟堅)을 시켜 상왕께 문안드리게 하였다.
○ (12월) 다시 정방(政房)을 두어 대언(代言) 안규(安珪)에게 전주(銓注)를 관장(管掌)시키게 하고, 우상시(右常侍) 임중연(林仲沇), 의랑(議郞) 조광한(曹光漢), 응교(應敎) 한종유(韓宗愈) 등을 참여하게 하였다.
신유 8년, 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 (봄 정월) 영양군(永陽君) 이호(李瑚)를 원 나라에 보내어 절일(節日)을 축하하고, 양성군(陽城君) 이천(李梴)에게 동녀를 바치게 하였다.
○ 3월에 다시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을 설치하였다.
○ (4월) 정묘일에 왕이 원 나라에 갔다.…… 유청신ㆍ오잠ㆍ원충ㆍ한악(韓渥)ㆍ윤석ㆍ유유기(柳有奇)ㆍ안규(安珪) 등이 따라갔다.
내수(內豎) 대호군 박인평(朴仁平)이 간사하고 교활한 행동으로 총애를 얻었고, 몰래 조적(曹頔)과 결탁하였다. (조)적의 양자인 환자 양안길(楊安吉)이, 그때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렸다. 그의 누이가 남에게 시집간 지 오래 되었는데, 왕이 안길(安吉)에게 후원을 얻고자 하여 그의 남편을 내쫓고 인평에게 시집보냈다.
이때에 인평이 먼저 심왕(瀋王)의 처소에 이르러, 조적ㆍ양안길과 입술[唇]과 이[齒]와 같은 관계가 되어 왕을 배반하고 도리어 국가의 비밀스러운 일을 가지고 심왕에게 호소하였다.
또 유청신ㆍ오잠을 유인하여 서로 입술과 이처럼 되었으며, 조련(趙璉)ㆍ조연수(趙延壽)ㆍ김원상(金元祥) 등이 은밀히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왕의 시종은 모두 이반(離叛)하여 호종하는 자가 없었다.
○ 삼사사 김순(金恂), 밀직사 백원항(白元恒), 밀직부사 윤석(尹碩)ㆍ전영보(全英甫)와 감찰 언부관(讞部官)에게 명해서, 권한공ㆍ채홍철에게 장형을 가하여 먼 섬에 귀양보냈다. 한공은 상왕이 소중히 여기는 신하였다.
그때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이 교외에서 전송하니, 한공이 말하기를, “천지가 비록 넓고 크나 한 몸을 감출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진이 말하기를, “뒷간이 좋다." 하니, 한공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한공ㆍ홍철ㆍ광봉(光逢)ㆍ정지(廷芝) 등이 섬에 들어가지 않고 홍주(洪州) 지경에 모여서 백성들에게 끼친 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보다 먼저, 상왕이 원 나라에 머물면서 나라의 정사와 창고의 출납을 모두 친근한 사람에게 맡겼으므로, 비록 잘못된 처사도 있었으나 창고는 가득 차고,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복종하더니, 상왕이 서쪽[ 토번吐蕃]으로 간 뒤부터는 환관과 좌우들이 상왕의 정책을 고치고, 옛 신하들을 내쫓느라 쉬는 날이 없었으며, 창고는 모두 비었다.
영보(英甫)의 아우인 중 산지(山枳)와 오불노(吳佛奴) 등이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에게 붙어서 벌떼처럼 일어나 난을 선동하였다. 그때 왕은 백안독고사의 집에 유숙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선왕이 쓰던 구인(舊人)을 〈그대로〉 쓰는 것도 또한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일의 한 가지다. 한공은 태위왕(太尉王)이 중히 여겼기 때문에 귀양가게 되었으니, 왕이 효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죽음과 삶, 영화와 욕은 명수(命數)에 달린 것이다. 한공이 뒷간으로 도망한 것은 대신의 체통을 잃은 것이다. 어찌 군자의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신 허응린(許應麟)이 말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했다. 환관 백안독고사가 그의 간악하고 음험한 성품 때문에 충선왕에게 미움을 받고, 영종황제(英宗皇帝)에게 무고(誣告)로 참소하여 충선왕을 토번으로 귀양가게 하였으니, 충숙왕(忠肅王)에게는 같은 하늘 아래서는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그런데 원 나라에 들어가서는 천자에게 아뢰어서 백안독고사의 배반한 죄를 다스리지도 못하고 도리어 그의 집에 거처하였으며, 그의 일족에게 노예의 신분을 면제하여 양민이 되게까지 하였으니, 도대체 무슨 마음인가." 하였다.
○ (5월) 밀직 임서(任瑞)를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상왕이 서번(西蕃)의 독지리(獨知里)에 이르러 최유엄(崔有渰)ㆍ권부(權溥)ㆍ허유전(許有全)ㆍ조간(趙簡) 등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운명이 기구하여 이 환난(患難)을 당하였다. 외로운 한 몸이 1만 5천 리의 노정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토번으로 왔으니, 우리의 사직(社稷)을 욕되게 함이 많다.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아니하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겠다.
생각하건대, 여러 국로(國老)들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리니 더욱 황송하고 부끄럽다. 국왕이, 나이가 어려서 철을 모르므로, 전일에 나를 꺼리던 여러 소인들이 반드시 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다행하게 여기어, 간교(姦巧)한 짓을 함부로 할 것이니, 우리 부자 사이를 이간하지 않는다고 어찌 알겠는가. 여러 국로들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서 황제에게 자주하여 내가 빨리 돌아가게 해 달라." 하였다
○ 8월에 전 정윤(正尹) 채하중(蔡河中)이 원 나라의 사신 김가노(金家奴)와 함께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가 권한공ㆍ채홍철을 은사(恩赦)하여 부른다." 하고, 또 "황제가 심왕(瀋王) 고(暠)를 국왕으로 삼았다"고 말하였다. 이튿날 백관들이 고의 어머니인 안비(安妃)에게 하례(賀禮)하였다.
이날 저녁에 호군 이련(李漣)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왕에게는 아무 탈도 없다." 하니, 재신(宰臣)ㆍ추신(樞臣)들이 비로소 하중(河中)이 속인 것을 알았다.
애초에 상왕이 심왕을 자기의 아들보다 더 사랑하였으므로, 심왕이 욕심을 낸 것이다.
○ 원 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서 선사(宣使)로 이상지(李常志)를 보내서, 정화공주(靖和公主)의 궁녀와 옹인(饔人 음식 만드는 사람) 한만복(韓萬福)을 가두고, 공주의 죽은 까닭을 물었다. 만복이 말하기를, “작년 8월에 왕이 비밀리에 덕비(德妃)와 연경궁에서 동침하였는데, 공주가 질투하다가 왕에게 구타를 당하여 코피가 났으며, 또 9월에 왕이 묘련사(妙蓮寺)에 가서 공주를 구타하는 것을 오신부개(於侁夫介) 등이 말렸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궁녀와 만복 등을 잡아서 돌아갔다.
○ 12월에 백원항ㆍ박효수 등이 회의하고, 중서성에 글을 올려 상왕을 소환하기를 빌고, 또 한만복이 공주의 죽은 까닭을 무고한 데 대하여 변박(辨駁)하였다.
임술 9년(1322), 원 지치 2년
○ (봄 정월) 심왕 고가 본국에서 왕의 처소에 돈과 재물을 많이 보내는 것을 미워하며, 그의 신하 양성주(楊成柱)를 보내어 황제의 명으로 재상 김이용(金利用)을 문책하고, 수송한 돈과 재물을 징수하였다.
○ 3월에, 일찍이 상왕이 원 나라에 있을 때, 종신(從臣) 사복정(司僕正) 백응구(白應丘)가 재물을 불리는 데 능하다고 하여 심왕부의 사무를 맡아보라고 명하였으나, 응구가 도망하여 본국에 돌아왔다.
심왕 고가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원외랑(員外郞) 아도라(阿都剌)를 보내어 왕에게 칙서(勅書)를 내려서 응구를 찾아내어 환도(還都)시키라고 하였으나, 왕이 즉시 봉행하지 아니하였다.
심왕이 참소하기를, “왕이 그 칙서를 손으로 찢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조회[朝]하니 황제가 성내어 왕을 힐책하고는 국왕의 인(印)을 빼앗아 들이고, 드디어 한림대제(翰林待制) 사적(沙的)을 보내서 신문(訊問)하였다.
그때, 심왕이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다. 조적(曹頔)ㆍ채하중(蔡河中) 등이 심왕을 도와서 왕위를 빼앗으려고 온갖 방법으로 왕을 참소하였으며, 조련ㆍ조연수ㆍ김원상도 역시 농간하여 왕의 죄상을 꾸며냈으므로 문사(問事 범죄 사실을 심문하는 것)하는 사신이 잇달아 왕래하였다.
심왕이 그의 신하인 전 호군 박귀(朴龜)를 보내어 재상에게 글로 말하기를,
“너희들의 왕이 왕위를 이어받은 이래 사냥을 함부로 하여 농사를 방해하며, 술을 좋아하고, 음악을 즐기며, 황제의 사신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모든 정무(政務)를 친히 보지 아니하며, 밤에는 여러 소인들과 같이 변복하고 미행하여서 총애하는 신하 윤석ㆍ이의풍(李宜風)ㆍ손기(孫琦) 등이 왕명을 가칭하고 그들의 사욕을 제멋대로 채우게 하였다.
또 참소하는 자의 말을 믿어 죄 없는 사람을 원통하게 죽이며, 아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고 능력있고 수고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주지 아니하며, 부왕(父王)의 훈구지신(勳舊之臣)은 다 산관(散官)의 자리에 두거나, 혹은 귀양보내고 내쫓았으며, 그의 가산을 적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그에게 영합하여 나라의 기강은 크게 무너지고, 사대하는 예절은 다른 나라에 뒤떨어지게 되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반성하여 살피라.
전번에 아도라(阿都剌)가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갔을 때는 너희 국왕이 기꺼이 받들어 실행하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칙서의 소재조차 모른다고 하니, 사적(沙的)이 도착하는 날에 명확히 대답하여라." 하였다. ……
사적이 드디어 아도라(阿都刺)와 윤함ㆍ윤공을 잡아가지고 갔다.
계해 10년, 원 지치 3년
○ 봄 정월에 유청신ㆍ오잠이 원 나라에 글을 올려, 우리나라에 성(省)을 설립하여 원 나라의 내지와 같게 하기를 청하였다.
원 나라의 전 통사사인(通事舍人) 왕관(王觀)이 승상에게 글을 올리기를,
“엎드려 들으니, 조정에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립하여 내지와 같게 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은 논의하는 자가 고려를 내지로 만든다는 헛된 명분을 숭상하고서 실지로는 폐해를 받는 것을 살피지 않은 것인가 합니다. ……
동쪽 울타리가 되어 대대로 현저한 공효(功效)를 나타냈었으며, 여러 대로 공주에게 장가들어서 전례가 되었으니, 이것은 고려의 충근(忠勤)함과 우리 조종(祖宗)의 유훈(遺訓) 때문입니다. 이제 하루아침에 근거 없는 말을 채납하여 옛 법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세조황제의 신성(神聖)하신 계책과는 같지 않은 듯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불가(不可)한 이유입니다.
본국은 경사(京師 연경(燕京))에서 거리가 수천 리나 떨어진 먼 곳입니다. 풍토가 이미 다르고 습속도 역시 다르오며, 형벌과 벼슬과 혼인과 옥송(獄訟)의 제도가 중국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중국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반드시 서로 맞지 않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불가한 이유입니다.
삼한(三韓)은 땅이 박하고 백성이 가난하며 모두 산에 의지하고, 바다에 막혀 새벽 하늘의 별처럼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풍족한 군(郡)ㆍ현(縣)ㆍ시정(市井)ㆍ도읍(都邑)이 없습니다. 이제 행성(行省)을 설립한다면 사세상 모름지기 호구를 초록(抄錄)하여 호적을 만들고 세금의 부과(賦課)를 법정(法定)하여야 하니, 변방의 섬 오랑캐인 그들이 이런 일을 드물게 보았기 때문에 반드시 놀라고 동요하여 도피하면서 서로 난을 선동할 것이니, 만일 뜻밖의 걱정이라도 불러 일으킨다면 이해에 깊이 관계가 됩니다. 이것이 세 번째로 불가한 이유입니다.
각 성(省)의 관리의 봉록은 통례(通例)대로 본성(本省)에서 배당하여 지출해 보내야 하는 것이니, 이제 정동성(征東省)의 대소관리의 매달 봉급과 일체의 공용 경비가 해마다 대략 만여 정(萬餘錠)이 될 것인데 본국에서 바치는 부세(賦稅)로서는 충당해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상기의 봉급은 반드시 조정에서 수송하기를 기다려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성을 설치하는 것이 한 사람의 백성과 한 자의 땅도 이익됨이 없으면서, 앉아서 국가의 경비를 소모하게 되니, 이것이 네 번째로 불가하다는 이유입니다.
고려에 행성을 설치하여 강남(江南)의 여러 성(省)과 일체로 한다면, 통례대로 반드시 군사를 주둔시켜 진수(鎭守)해야 할 것이나, 군사를 적게 주둔시키면 동방의 여러 나라를 탄압하는 데 부족할 것이고, 많은 군사를 주둔시키려면 군수물자 공급이 배나 번거로워져 백성들이 명령에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정동성(征東省)에 진수할 병력은 과연 어느 곳에서 뽑아 내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것이 다섯 번째로 불가하다는 이유입니다.
…… 가만히 들으니, 행성을 설립하자는 계책을 제일 먼저 헌의한 2명은 곧 그 나라의 전일 재상으로서, 참소와 이간질을 하다가 그의 왕에게 죄를 얻고는 독심(毒心)을 품고 스스로 두려워서, 제 본국을 뒤엎고 스스로 편안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의 본심을 추구한다면, 처음부터 성조(聖朝)에 충성을 바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올빼미ㆍ경(獍)ㆍ개ㆍ돼지만도 못한 자들입니다. 마땅히 형벌에 처단하여 남의 신하로서 충성하지 아니한 자를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옛날 당 나라의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쳐서 안시성(安市城)까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사가 돌아올 때에 비단[帛]을 그 성주(城主)에게 내려 주어 왕을 충성으로 섬긴 것을 권면(勸勉)하였습니다. 태종과 고구려는 적국(敵國)이었습니다. 온 천하의 힘으로도 한 개의 조그만 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였건만, 군사를 상실하고 싸움에 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충의(忠義)로써 권면(勸勉)한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어서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성조(聖朝)와 본국과는 의(義)로는 왕과 신하 사이며, 친척으로는 사위와 장인 사이입니다. 편안함도 위태로움도 슬픔도 같이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도리어 두 사람이 속이는 말을 들으십니까. …… 이것이 여섯 번째로 불가한 이유입니다.……" 하였다.
또 도첨의사사 이제현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글을 도당(都堂)에 올리기를,
“우리나라의 시조 왕씨가 나라를 개창한 이래로 무릇 4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성조(聖朝)에 신하로 복종하여 해마다 공물(貢物)을 바친 것도 백여 년이 되었으니, 백성에게 베푼 은덕이 깊지 않다고 할 수 없으며, 원 나라 조정에 대한 공로가 두텁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난 무인년(1218, 고종 5년)에는 요(遼)의 유얼(甹孽 남아 있는 천한 종자)로 금산왕자(金山王子)라고 불리는 자가 있어서, 중원(中原)의 백성을 노략하여 몰다가 동쪽으로 도서(島嶼)에 들어와 제멋대로 날뛰니,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께서 합진[哈眞]ㆍ찰라(扎剌) 두 원수(元帥)를 보내어 토벌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하늘에서 큰 눈이 와서 식물(食物)과 군량이 통운(通運)되지 못하자 우리나라의 충헌왕(忠憲王 원(元)이 추시한 고종(高宗)의 시호)은 조충(趙冲)ㆍ김취려(金就礪)에게 명하여 물자와 군량을 공급하고, 부기를 원조하여 미친 적당을 사로잡았는데 신속하기가 대나무가 쪼개지는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그리고 두 원수는 조충 등과 형제가 되어 만세(萬世)토록 길이 잊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또 기미년에는 세조황제가 강남(江南)에서 송 나라를 치고 회군(回軍)할 때, 우리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은 천명(天命)의 돌아감과 인심(人心)의 복종하는 바를 알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5천여 리를 가서 양(梁)ㆍ초(楚)의 들에서 맞아 뵈었으며, 충렬왕도 몸소 조현(朝見)의 예를 닦아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습니다.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우리의 병력을 모두 출동시켜 전봉(前鋒)이 되었으며, 합단(哈丹)을 쫓아 토벌할 때에는 관군을 도와서 적의 괴수를 무찔러 죽였습니다.
황실(皇室)을 위하여 바친 공로는 낱낱이 다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주를 하가(下嫁)시켜 대대로 구생(舅甥)의 정의를 두텁게 하도록 하고, 〈우리나라 고유의〉 옛 풍속을 고치지 않고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게 하였으니, 세조황제 조서[詔] 덕택입니다.
이제 듣건대, 조정에서는 우리나라에 행성(行省)을 설립하여 다른 성(省)들과 같이 하려고 의논한다 하니, 과연 그러하다면, 우리나라의 공로는 일단 논하지 않더라도 세조의 조서는 어찌하렵니까.
엎드려 연전 11월에 새로 내린 조서의 조목(條目)을 읽어 보니,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여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려서 중통(中統 세조의 연호)ㆍ지원(至元 세조의 연호)의 정치를 회복한다' 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 이 덕음(德音)을 발표한 것은 실로 천하사해(天下四海)의 복입니다. 유독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서만 세조의 조서를 본받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제 까닭 없이 조그마한 나라의 4백 년의 왕업을 하루아침에 끊게 하여, 사직에 주인이 없고 종묘에는 제사가 끊어지게 한다는 것은, 사리로써 판단하여 보면 마땅한 처사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천 리를 넘지 못합니다. 게다가 산림과 내와 큰 늪 같은 쓸모없는 땅이 10분의 7입니다. 그 땅에서 세를 받더라도 조운의 비용도 되지 않으며, 백성에게서 거둔다 하더라도 녹봉(祿俸)도 지출하지 못할 것이니 조정의 세계(歲計)에서 본다면 구우일모(九牛一毛)일 뿐입니다.
더욱이 땅은 멀고 백성은 어리석으며, 언어가 상국과 같지 않아서, 숭상하는 것이 중국과 아주 다릅니다. 아마 이 소문이 들리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니, 집집마다 찾아가 효유하여 안정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왜국(倭國)의 백성들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듣는다면, 바로 우리를 경계로 여기어, 스스로 전일에 원 나라에 반항한 것이 잘된 계책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집사(執事)께서는 세조께서 고려의 공(功)을 생각하던 뜻을 좇아서, 나라를 나라대로, 사람을 사람대로 두어 그 정치와 부세(賦稅)를 닦게 하고, 번리(藩籬)로 삼아서 우리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받들게 하소서." 하였다.
성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드디어 그치었다.
○ 여흥군(驪興君) 민지(閔漬), 가락군(駕洛君) 허유전(許有全), 흥녕군(興寧君) 김거(金䝻)가 원 나라에 가서 상왕을 소환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 민지 등이 원 나라에 이르러 반 년이나 머물렀으나, 심왕(瀋王)의 무리에게 방해받아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 최성지ㆍ이제현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원 나라의 낭중(郞中)에게 글을 올리기를,
“ …… 우리 노심왕(老瀋王 충선왕(忠宣王))은 바로 공주의 아들이요, 세조의 친외손입니다. 세조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5조(朝)에 벼슬하니, 친척이며 또 훈구(勳舊)입니다.
다만 공을 이룬 뒤에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다가 예기치 않은 변을 만나, 머리를 깎이고 옷을 바꿔 입고 멀리 토번(吐蕃)의 땅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니, 고국과 만 리도 넘는 거리입니다. ……
대체로 먼 속국을 회유하고 친척과 돈목(敦睦)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정치이며, 공(功)으로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은 춘추(春秋)의 법(法)입니다.
족하(足下)는 왜 조용히 승상(丞相)에게 말하며, 노 심왕이 지난날 다른 뜻이 없었고, 오늘날 회개(悔改)하고 있으며, 여러 대의 충근(忠勤)을 저버릴 수 없고, 본국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을 막을 수도 없으며, 세조(世祖)의 폐부친속(肺腑親屬)을 잊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밝혀서, 들어가 황제에게 아뢰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금계(金鷄)의 은택(恩澤)을 내려 환(環)을 주어서 동으로 돌아와 다시 하늘의 해를 보게 하고, 성스러운 천자의 세상에서 홀로 구석을 향하여 우는 이가 없도록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대승상(大丞相)의 아름다운 덕은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더욱 드러날 것이며,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족하(足下)를 칭송할 것입니다. 어찌 우리나라 군신들이 살에 새기고 뼈에 새겨 그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꾀하는 데 정도에서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또 승상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리기를,
“ …… 그 친속 관계를 말하면 세조의 친외손이며, 그 공을 말하면 선제(先帝)의 공신입니다. 또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국가가 처음 용흥(龍興)할 때부터 의(義)를 사모하여 남보다 먼저 복종하여, 대대로 충성을 바쳐 온 공이 있습니다. …… 쫓기어 귀양간 이래 4년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고 치고 허물을 많이 뉘우쳤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執事)께서는 처음에도 힘을 다하여 구출하였으니, 끝까지 은혜를 베풀 것을 잊지 말으시고, 천자에게 정상(情狀)을 거듭 자세히 아뢰어서 두터운 은혜를 내리도록 유도하여 주소서." 하였다.
○ 3월에 심왕 고가 그의 신하인 전 좨주(祭酒) 백문각(白文珏)과 낭장 이숙정(李淑貞)을 보내어 황제의 명령으로 모든 창고를 봉하였다.
○ (6월) 왜구(倭寇)가 군산도(群山島)에서 회원(會原)의 조운선(漕運船)을 약탈하였다. 또 추자도(楸子島) 등의 섬을 침략하여 노약자와 어린아이 남녀를 사로잡아 갔다.
○ 가을 7월에 내부부령(內府副令) 송기(宋頎)를 전라도에 보내니 그가 왜구와 싸워 머리 1백여 급을 베었다.
○ (12월) 상왕이 재신과 추신에게 글을 부쳐 이르기를, “과인은 11월 10일에 대도(大都)에 도착하여 지존(至尊 황제)을 뵈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국왕이 나이 어려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들과 가깝게 사귀면서 불의한 일을 많이 하고 있는데, 경 등은 벼슬을 보존하기만 생각하여 바로잡지 못하니, 그런 재상을 무엇에 쓴단 말인가. 지금부터는 숙의하여 나라 일을 보필하라." 하였다.
갑자 11년, 원 태정제(泰定帝) 원년
○ 봄 정월 갑인일에 원 나라에서 왕에게 환국하라는 조서를 내리고 다시 왕의 인장을 내주었다.
○ 여름 4월에 이광봉(李光逢)을 삼사사로, 박문충(朴文忠)을 밀직사로, 장원지(張元祉)를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심왕 고(暠)를 위하여 상서에 서명한 자는 모두 파면하였다.
○ 조적(趙頔)ㆍ채하중(蔡河中) 등이, 또 원 나라에 머무르고 있는 무뢰배 소년[無賴子弟] 2천여 명으로 하여금 연명하게 해서 성(省)에 글을 올려 왕을 계속하여 헐뜯었다.
○ 가을 7월에 원 나라에서 보낸 활활출(闊闊出)이 와서 동녀를 요구하였다.
○ 8월에 왕이 위왕(魏王) 아목가(阿木哥)의 딸 금동공주(金童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을축 12년, 원 태정 2년
○ 여름 5월 신유일에 왕과 공주가 원 나라에서 도착하였다. ○ 이날 상왕이 원 나라에서 훙하였다.
무진 15년, 원 문종(文宗) 천력(天曆) 원년
○ 봄 2월에 세자 정(禎)을 원 나라에 보내어 숙위하게 하고, 또 좌상시(左常侍) 윤신계(尹薪係)를 보내어 동녀를 바치게 하였다.
○ (7월) 원 나라에서 보낸 불가노(不家奴)가 와서 동녀를 요구하였다.
○ 매려역특미실불화(買驢亦忒迷失不花)가 돌아가니 왕이 최여도(崔汝道)를 평양에 보내어 금은(金銀)ㆍ능라(綾羅)ㆍ저포(苧布)를 선물로 주었으나, 매려가 받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매려가 올 때, 왕에게 총애받는 신하 안도(安道)ㆍ김지경(金之鏡) 등이 화가 제 몸에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근심하고 겁내었는데 그가 돌아가니 기뻐하여 더욱 교만해졌다.
사신(史臣) 백문보(白文寶)가 말하기를,
“왕이 연경에 머무른 지 5년 만에 근심하고 노고(勞苦)하여 놀라서 타고난 성품을 손상하였다. 본국에 돌아와서도 항상 궁전 깊숙이 거처하면서 낙이 없고, 조신(朝臣)을 접견하지 않으며 직접 정사를 보지 아니하였다.
이로 인하여 소인들이 함께 나와서, 조륜(祖倫)ㆍ최안도(崔安道)ㆍ김지경(金之鏡)ㆍ신시용(申時用) 같은 자들이 정권을 전단(專斷)하여 벼슬을 팔고 형옥을 팔아 못하는 짓이 없었으며, 대간의 소장은 중간에서 저지당하여 임금께 아뢰지 못하게 하였다. 매려에게 견책을 당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다." 하였다.
○ (12월) 왕이 원 나라에 조회하러 들어가려고 반전도감(盤纏都監 임금의 여비를 맡은 관아)을 설치하여, 백관과 5부 방리(坊里)로 하여금 저포(苧布)를 내게 하고, 또 경기(京畿) 8현(縣)의 민호에서 차등 있게 베를 거두었다. 이에 간악한 아전들이 이 기회에 함부로 거둬들이니, 중앙과 지방이 소란하였다.
또 내탕고의 은병을 방출하여 쌀을 사들이니, 내신(內臣)이 그것을 기화로 하여 토색질을 그치지 않았다. 양부(兩府)에서 걱정하여 5도에 찰방사를 보내어서 백성의 피해를 막고자 하니 나인(內人)이 대궐 안에서 저지시켰다.
왕이 깨끗함을 좋아하여 목욕에 쓰이는 여러 가지 향로(香料)가 한 달에 10여 항아리나 들며, 수건(手巾)이라는 명목으로 저포(苧布)가 60여 필이 들었는데, 환관들에게 많이 도둑맞았으나 왕은 알지 못하였다.
기사 16년, 원 천력 2년
○ 봄 정월에 왕이 평주(平州 평산(平山))에 있으면서 천신산(天神山) 아래로 행차하여 가옥(假屋)을 짓고 거처했다.
우인(虞人 사냥을 맡은 관직)에게 묻기를, “집을 덮는 데 어떤 재료가 가장 좋은가." 하니, 우인이 대답하기를, “떡갈나무 껍질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였다. 왕이 즉시 벗겨 오라고 명령하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왕이 사냥다니기를 너무 좋아하여 지출하는 경비가 한없이 많았으며, 우인은 모두 검교낭장(檢校郞將)이나 별장(別將)을 제수하고, 의복과 곡식을 하사하는 양이 걸핏하면 백(百)으로 계산하게 되었다.
○ (9월) …… 김지경과 대사성(大司成) 고용현(高用賢), 우부대언(右副代言) 봉천우(奉天祐)에게 명하여 전주(銓注)를 맡게 하였다.
왕이 고용현에게 이르기를, “전번에 너에게 지후(祗候)를 제수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4품으로 승진시키겠다." 하였다. 그것은 고용현이 이미 대사성에 임명된 것을 몰랐던 것이다. 총애받는 신하들이 제멋대로 제수하고 왕이 살피지 못함이 이 정도였다.
내신 신시용(申時用)이 정방(政房)에 와서 김지경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오늘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사신을 위한 것이다. 어찌 너희 무리들만 벼슬을 팔아먹으면서 나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지 않느냐." 하였다.……
벼슬을 구하는 자가 구름같이 모이니, 김지경 등이 밤에 촌가(村家)에 숨어서 주의(注擬)하였다. 상호군 신정(申丁)이 벼슬을 청탁하였다가 이루지 못하니, 김지경ㆍ봉천우를 꾸짖어 말하기를, “임금의 눈과 귀를 덮어 막고 벼슬의 제수를 함부로 전단(專斷)하는 것이 무슨 짓이냐." 하였다. 또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돈 없는 자는 벼슬을 구하지 말라." 하니, 김지경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비목(批目)이 이미 만들어졌지만,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인길(李仁吉)이 제멋대로 그 차례를 고쳤다. 비목이 내려오면, 권세를 부리는 자들이 다투어 지우면서 마음대로 정하니, 본래의 주(朱)와 먹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흑책정사(黑冊政事)라고 말하였다.
○ (10월) 김지경을 보내어 세자에게 전위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때 세자는 원 나라에 있었다.
○ 광흥창(廣興倉)에서 녹봉을 나누어 주었다. 그때 나라의 기강이 허물어져 여러 위(衛)의 별장(別將)ㆍ산원(散員) 등이 직접 광흥창의 문으로 와서 액수를 속여서 받기도 하고, 억지로 빼앗기도 하였으나, 규정(糾正)이 규찰하여 다스리지 못하였다. 규정이 손에는 채찍과 막대를 잡고 있었으나, 끝내 금지하지 못하였다.
경오 17년, 원 지순(至順) 원년
(충숙왕에 묶여 있으나 실제 충혜왕 즉위년의 기사입니다.)
○ 봄 2월에 전서원사(典瑞院使) 아로독두만태(阿魯禿頭曼台)와 객성대사(客省大史) 구주(九住)에게 명하여 세자 정(禎)을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承相上柱國高麗國王)에 책봉하였고, 마침내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이 와서 국왕인(國王印)을 가져 갔다.
○ 정미일에 원 나라에서 (충혜)왕에게 국인을 주었다.
○ 왕이 정무를 폐신 배전(裵佺), 주주(朱柱) 등에게 맡기고, 날마다 환관들과 더불어 씨름을 하여, 상하의 예절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군자는 배척을 당하고, 바른 말은 들어가지 못하였다.
기거주 이담이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의 행동은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동 일정을 좌우(左右)가 적고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 하였다. 이담이 아뢰기를, “사신의 직책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의 과실을 쓰는 자는 모두 서생(書生)이로구나." 하였다.
왕이 본래부터 선비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는데, 이 때문에 더욱 미워하였다.
○ 왕이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맏딸에게 장가들었다. 이 사람이 덕령공주(德寧公主)이다.
○ 윤달(윤7월)에 상왕(이 원 나라에 가려고 해주에 있으니, 정승 정방길, 찬성사 강융, 전 평리 김원상(金元祥)이 아뢰기를,
“지금의 왕위는 전하(殿下)가 물려 주신 것이니, 왕은 마땅히 성심으로 전하를 섬겨야 할 것인데, 도리어 원수와 같이 여기며 전하의 신하들은 모두 파직시켰습니다. 전하에게 의성창(義成倉)만을 붙여주고, 봉양할 물자를 제공하지 아니하니, 욕됨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또, 지금 왕이 용산 원자(龍山元子)와 우애하지 않은 마음이 있어 형세가 양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원자를 데리고 가소서." 하였다.
상왕이 드디어 덕비(德妃)에게 명하여 시골로 돌아가게 하여, 왕과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 낭장 김천우(金天祐)가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원 나라의 조정에서 전 좌우사(左右司) 낭중 장백상(蔣伯祥)이 바친 서장에 의하여, 장차 우리나라에 행성을 설치하기로 논의하고 있다." 하였다. 장백상은 만인(蠻人)이다.
○ 왕이 원 나라의 우승상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듣건대, '전 행성좌우낭중 장백상이 도당에 고하여 우리나라에 성(省)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국속(國俗)을 변경시키고자 한다' 하니, 상하에 놀라고 당황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더욱이 내가 우리나라에 와서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 일을 들으니, 어찌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조정에 신복(臣服)하여 해마다 직공(職貢)을 닦아 온 지 백 년이 넘도록, 아직껏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습니다.……
세조가 크게 포상(褒賞)을 베푸시고 즉시 훈유(訓諭)를 내려 국속을 고치지 말고 예전대로 관리하라고 하였습니다.
중통(中統) 원년에 안남국(安南國)에 내린 조유(詔諭)에, '본국의 풍속은 일체로 옛 제도에 의하고 고치지 말라. 더욱이 고려가 근래에 사자를 보내 와서 그렇게 해 달라고 청하여 이미 조서를 내렸으니, 모두 이러한 예에 의하라' 하였으며,
지원(至元) 3년에 일본에 내린 국서에, '짐이 즉위한 초기에, 고려의 죄 없는 백성들이 오래도록 전쟁에 시달렸으므로, 즉시 군사를 거두게 하고 그들의 영토를 돌려 주며, 그들의 늙은이와 어린이를 돌려 보냈더니, 고려가 감복하여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의(義)로는 비록 군신(君臣)이나, 좋아하는 정리는 부자와 같다' 한 것이 있습니다.
그 뒤에 우리 충렬왕이 연하(輦下)에 입시(入侍)하니, 제녀(帝女)를 하가(下嫁)시켜 대대로 구생(舅甥)간의 친속이 되었습니다. 여러 곳에 행성(行省)을 세울 때도, 우리나라만은 설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
대덕(大德) 말기에는 우리 태위왕(太尉王)이 인종 황제를 도와서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 황제(武宗皇帝)를 영립(迎立)하여 정책일등공신(定策一等功臣)이 되었습니다. 그때 요양(遼陽) 사람 중희(重喜)라는 자가 있어 우리나라에 성을 설치하자고 청하니 황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중희에게 장(杖)을 쳐서 먼 곳에 귀양보냈습니다.
지금 장백상이 사감(私憾)을 품고 말을 꾸며서 우리의 종국(宗國)을 전복시키고자 꾀하며, 여러 황제의 훈유(訓諭)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조정이 그의 말을 좇는다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먼저 복종하여 섬기고 해마다 직공(職貢)을 닦은 것은 감히 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여러 황제의 돌보시던 뜻은 어찌할 것이며, 일본ㆍ안남에 내린 조서는 어찌하겠습니까.
또 검저사마귀[黑痣]만한 소방의 지세는 산천과 숲만 있으며 토질이 척박하여, 땅 전부에서 세를 받고 백성을 있는 대로 부역시켜도 그 비용에 넉넉하지 못하며, 땅은 멀고 백성은 어리석고 언어와 숭상하는 것과 혼인 풍속이 중국과 같지 아니합니다. 만약 이 소문을 듣는다면 반드시 모두 놀라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합하(閤下)께서는 간교한 말을 채납(採納)하시지 말고, 천자의 뜻을 넓혀서 토풍(土風)을 고치지 말게 하시어, 조상 전래의 업에서 편안하게 한다면, 어찌 오직 산과 못가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만이 성스러운 덕화를 사모하는 데 그치겠습니까. 우리 종묘의 신들도 지극한 인덕(仁德)을 더욱 감사할 것입니다." 하였다.
○ 상왕이 황주(黃州)에 이르니, 왕이 몽고식으로 길 위에 꿇어앉아서 맞아 뵈었다.
상왕이 이르기를, “너의 부모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찌 나를 보고 호례(胡禮)를 행하느냐. 또 의관이 매우 사치하다. 어찌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겠느냐. 속히 옷을 갈아 입으라." 하고, 훈계가 준엄하니, 왕이 울며 나갔다.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인길(李仁吉)은 간사한 것으로 왕에게 총애를 받으니 상왕이 이르기를, “너는 정말 개돼지이다." 하고, 장형을 가하여 섬에 귀양보내려 하였으나, 왕이 중지시켰다.
○ 병오일에 왕과 공주가 원 나라에서 도착하였다. 황제가 한림학사 아탑대(阿塔歹)와 호부낭중(戶部郞中) 독련(禿憐)과 선사(宣使) 맹사태(孟士泰)를 보내어 그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다.
○ 8월 병진일에 왕이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사면령을 내렸다
-- (충숙왕이 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원나라에 의해 다시 왕위에 올랐음)--
임신 후(後) 원년(1332), 원 지순 3년
○ (2월) 원 나라에서 유수(留守) 보수(寶守)와 전 이문낭중(理問郞中) 장백상(蔣伯祥) 등을 보내어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이미 1월 3일에 상왕(上王)의 복위를 명하였다." 하니, 왕[충혜왕]과 좌우 신하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백상(伯祥)이 국새(國璽)를 회수하고 모든 창고를 봉하고, 왕은 원 나라로 갔다.
상왕[충숙왕]이 복위하고 나서 채홍철(蔡洪哲)ㆍ임중연(林仲沇)을 찬성사(贊成事)로, 윤신걸(尹莘傑)을 평리(評理)로, 김자(金資)ㆍ김인연(金仁沇)을 밀직사(密直使)로, 조적(曹頔)ㆍ민상정(閔祥正)을 지밀직사(知密直事)로 삼았고, 또한 백상과 중연(仲沇)에게 정동성(征東省)의 사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 왕이 민상정ㆍ조염휘(趙炎輝)를 보내어 정승(政丞) 윤석(尹碩), 재상(宰相) 손기(孫琦)ㆍ김지경(金之鏡), 상호군(上護軍) 배전(裵佺)ㆍ오자순(吳子淳)ㆍ강서(康庶)ㆍ박련, 대언(代言) 이군해(李君侅)ㆍ윤환(尹桓), 대호군 구천우(丘天佑), 호군 최안수(崔安壽)ㆍ김천우(金天佑), 낭장 노영서(盧英瑞)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장백상이 윤석을 네 가지 죄목으로 심문하였으니, 일찍이 왕이 원 나라에 조회하러 갔을 때 석(碩)이 행저(行邸)의 전량(錢粮)을 억제하고 보내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죄요, 전왕이 소인들과 정사를 어지럽히는데도 정승으로서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죄요, 전왕과 함께 상국에 대하여 반란을 도모한 것이 세 번째 죄요, 환관 박련과 함께 왕의 부자 사이를 이간한 것이 네 번째 죄였다.
계유 2년(1333), 원 순제(順帝) 원통 원년
○ 봄 3월에 원 나라의 우승상(右丞相) 연첩목아(燕帖木兒)가 황태후와 황태자에게 아뢰기를, “고려는 왜(倭)와 경계를 인접하고 있는데, 지금 그 왕이 오래도록 도하(都下)에 머무르고 있으니,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하여, 조칙을 내려 허가하여 주었다.
이때는 (원나라) 문종(文宗)과 영종(寧宗)이 잇달아 붕(崩)하고, 황태자가 아직 즉위하기 전이어서, 왕이 문종의 옛 신하로서 차마 급히 돌아올 수 없어 지체하고 떠나지 못하니, 원 나라 조정에서 이를 독촉하였다.
윤4월 정유일에 왕이 공주와 함께 동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랐으니, 이분이 곧 경화공주(慶華公主 충숙왕의 셋째 부인임)이다.
을해 4년(1335), 원 지원(至元) 원년
○ (4월) 우문군(佑文君) 양장(梁將)과 전 낭장(郞將) 조신경(曹莘卿)에게 명하여 인사행정을 맡게 하였다. …… 양장은 연남(燕南) 사람으로, 일찍이 왕삼석(王三錫)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에게 붙어서 권세를 부렸으므로 조야가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삼석(三錫)이 죽자, 장은 연남으로 돌아갔다가 왕이 조회하러 들어가니, 장이 또다시 장백상(蔣伯祥)과 흉모를 꾸미다가 이루지 못하고, 왕의 측근자들에게 아첨하고 섬기어 왕의 사랑을 받아 봉군까지 되고는 이름을 재(載)로 고치고, 환관들과 결탁하여 정권을 농락하였다.
청탁하는 사람이 문앞을 메웠고, 뇌물을 공공연히 받았으며, 사대부(士大夫) 중에 그 문을 통해 출세하는 자가 많았다.
신경(莘卿)은 일찍이 중이 되어 풍수(風水)노릇을 하였는데, 재(載)를 통하여 출세하여 함께 인사행정을 맡아보았다. ……
○ (12월) 전의부령(典儀副令) 이곡(李穀)이 원 나라에 가 있을 때 어사대에 말하여 우리나라에서 처녀를 구하는 것을 중지하여 줄 것을 청하고는, 그를 위해 대신 글월을 올렸다.
“옛날 우리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천하를 다스릴 적에 인심을 얻기에 노력하셨으며, 특히 풍속이 다른 외국에 대해서는 지방의 풍습에 따라서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천하의 모든 백성이 기뻐하여 북치고 춤추며, 여러 차례의 통역을 거쳐 들어와 조회하여 혹은 남보다 늦을까 오히려 걱정하였으니, 요ㆍ순의 정치도 이에 더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는 본래 해외에서 따로 한 국가를 형성하였으므로 중국에 성인이 있을 때가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교통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 태종(唐太宗)의 위엄과 덕망으로도 두 번이나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갔습니다.
국가(원 나라)가 처음 일어나자 제일 먼저 신복(臣服)하여, 왕실에 현저한 공훈을 세웠고, 세조 황제께서는 공주를 하가시켰으며, 인하여 조서를 보내어 장려하여 이르기를, '의복이나 예법은 선대의 풍습대로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풍속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지금 천하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백성과 사직이 보존되어 있는 곳은 오직 우리나라뿐입니다.
고려의 입장으로서는 마땅히 현명하신 조서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선조 때부터 행하던 것을 그대로 따라서 정치와 교화를 닦고 밝히며, 조회와 문안을 제때에 행하여, 국가와 함께 아름다움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녀자와 환관의 무리들이 중국에 가서 자리를 잡고 그 무리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은혜와 사랑 받음을 믿고 도리어 본국을 잡아 흔들며, 심지어는 황제의 지시라고 허위로 칭탁하고 다투어 사자를 달려 보내어 해마다 처녀를 데려가는 자가 길에 잇닿았습니다.
대개 남의 딸을 데려다가 위에 잘 보여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 한 짓은 비록 고려가 자초한 일이지만, 황제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하니 어찌 나라에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
그러니 지금 자주 특지를 내려 남의 처녀를 빼앗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무릇 사람이 자식을 낳아 사랑하며 기르는 것은 그 자식에게 봉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존귀한 사람이거나, 비천한 사람이거나, 중국이거나 이적(夷狄)이거나 차이가 없는 것이니, 그것은 천성이 다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희들 고려의 풍속은 차라리 사내 자식은 다른 집으로 내보내더라도 딸은 자기집에 두고 내보내지 아니하니, 진(秦) 나라 때의 데릴사위 제도와 비슷한 것입니다. 무릇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딸이 맡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딸을 낳으면 은혜와 애정으로 수고를 다하면서 밤낮으로 그 딸이 자라서 능히 부모를 봉양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조에 그 딸자식을 품 안에서 빼앗겨 4천 리 밖에 보내게 되고, 한 번 문 밖을 벗어나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니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고려의 부녀 가운데 후비(后妃)의 반열에 끼어 있는 이도 있고, 왕후(王侯)의 귀한 짝이 된 이도 있어, 공경대신 중에는 고려의 외생(外甥) 출신이 많이 있사오나, 이것은 그 본국의 왕족이나 문벌 있는 부호의 집에서 특히 조지(詔旨)를 받았거나 혹은 자원하여 온 경우이며, 또한 중매의 예절을 갖춘 것이니, 진실로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익을 좋아하는 자들이 그것을 원용하여 예(例)로 삼고 있습니다. 대개 지금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두가 아내나 첩을 얻으려 하고 있으며, 동녀를 데려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릇 사방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황제의 은혜를 선포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시(詩)에, '두루 물어보고 두루 자문한다[周爰咨詢 周爰咨諏]' 하였는데, 지금은 외국에 사신으로 가면 곧 재물과 여자만을 탐내고 있으니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듣자오니,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감추고, 오직 그 비밀이 탄로날 것을 걱정하여 이웃 사람들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사신이 중국에서 그곳에 이를 때마다 곧 안색이 변하여 돌아보며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왔을까. 처녀를 잡으러 오지 않았을까. 아내와 첩을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얼마 후에 군리(軍吏)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 집집마다 뒤지고 찾는데, 만일 딸을 감춘 것을 알면 그 이웃까지도 연계하여 잡아들이고 그 친족을 구속하여 매질하고 고통을 주어 찾아내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한 번 사신이 오면 나라 안이 소란하여, 닭이나 개까지도 편안할 수 없습니다.
처녀를 모아놓고 선발하는데,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에 상관없이 혹 사신에게 잘 대접하여 배불리 먹여주면 비록 아름다운 여자라도 놓아주고, 그 여자를 놓아주고는 또 다른 여자를 찾습니다.
이때에 한 여자를 데려갈 적마다 수백 집을 뒤지는데 오직 사신이 하자는 대로 할 뿐이요, 아무도 감히 그 영을 어기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황제의 지시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1년에 한두 번이나 혹은 2년에 한 번 있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릅니다.
이미 그 선발에 뽑히게 되면 그 부모나 일가 친척들이 서로 모여 통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며, 국경에서 송별할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사신의 아내나 첩으로 데려가는 때는 비록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지라도 인정을 거스리고 원망을 사는 것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
삼가 생각하건대, 나라의 덕화(德化)가 미치는 곳마다 만물이 모두 이루어지는데, 고려 사람만이 유독 무슨 죄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옛날에 동해(東海) 지방에 원한 품은 여자가 있어 3년이나 크게 가물었다 하는데, 지금 고려에는 원한 품은 여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근년에 그 나라에는 홍수와 가뭄이 서로 연달아서 백성들 가운데 굶어 죽은 시체가 매우 많으니, 이는 아마도 그 원한과 한탄이 능히 순화한 기운을 해친 것인가 합니다.
지금 당당한 대국으로서 후궁으로 둘 사람이 모자라서 반드시 외국에서 데려와야만 합니까.
비록 조석으로 총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지극한 정성인데, 이에 궁궐 안에 방치된 채 젊음을 그냥 보내고 헛되이 늙으며, 때로는 혹 환관에게 시집 보낸다 하더라도, 마침내 잉태 한 번 못하는 자가 열에 대여섯 명은 되니, 그 원기(怨氣)가 화(和)를 손상함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
바라건대, 덕음(德音)을 베푸시어, 감히 내지를 칭탁하고 위로 황제의 총명을 흐리게 하며, 아래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처녀를 데려오는 자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아내나 첩을 데려오는 자가 있다면 법령으로 명확히 금지하시어 그 후일의 기대까지도 근절하게 하옵소서. ……" 하니,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공녀 관련 사료임)
○ (3월) 명을 내려 전왕(아들인 충혜왕)이 쓰던 재물을 거두고, 천인으로서 양민이 된 자를 다시 노예로 환속시키고, 또 전왕 공신전(功臣田)을 몰수하여 모두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 12월에 원 나라에서 전왕이 근신하지 않는다 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었다.
무인 7년(1338), 원 지원 4년
○ 가을 7월에 원 나라에서 실리미(失里迷)를 보내어 황후 책립의 조서를 반포하고, 환자(宦者)ㆍ처녀ㆍ말을 요구하였다.
기묘 8년(1339), 원 지원 5년
○ 봄 3월 계미일에 왕이 침전에서 훙(薨)하였다.
○ (5월) 전왕(충혜왕)이 서모인 수비(壽妃) 권(權)씨와 간통하였다.
전왕은 남의 아내나 첩으로서 얼굴이 잘 생겼다는 말만 들으면 친척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총애하는 측근과 불량배들을 시켜 빼앗아 오거나, 혹은 그 집에 가서 음란한 짓을 하여, 절도가 없었다.
○ 6월에 기로 권부(權溥) 등이 행성에 글을 올려 전왕을 복위시켜 줄 것을 청하니, 행성에서는 그 글을 중서성(中書省)에 보냈다.
○ 8월에 전왕이 남(南)씨를 노영서(盧英瑞)의 아내로 삼았다.
남씨는 본래 양반의 아내였는데, 대행왕(죽은 충숙왕)이 빼앗아서 가까이 하였고, 폐신(嬖臣) 최안도(崔安道)ㆍ김지경(金之鏡)도 그와 간통하였다.
이때에 전왕도 그와 관계하고서 얼마 후에 영서(英瑞)에게 주고는, 또 그 집에 자주 다니며 사통하였다.
○ 경화공주(충숙왕의 부인)가 전왕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자리가 끝나도 전왕은 취한 체하며 물러나지 않고 있다가, 어두운 뒤에 공주의 침실로 뛰어드니, 공주가 놀라서 일어나는 것을, 전왕이 송명리(宋明理)의 무리로 하여금 공주의 몸을 붙들어서 꼼짝할 수 없게 하고 입을 틀어막아 말을 못하게 하여 그를 간음하였다.
공주가 이를 부끄럽게 여기어, 원 나라로 돌아가고자 사람을 시켜 말을 사려고 하니, 전왕이 이엄(李儼)ㆍ윤계종(尹繼宗) 등에 명하여서 마시(馬市)를 금하였다.
이때 조적(曹頔)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공주가 그를 불러 낱낱이 폭행당한 실상을 말하였다. 조적은 홍빈(洪彬)ㆍ성관(省官) 들과 함께 전왕의 궁으로 갔으나, 불량배들이 문을 막아서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전왕이 뒤쫓아와서 불렀으나, 적은 듣지 않고 영안궁에 이르러 백관들을 불러 모아 놓고, 모든 불량배들을 쫓아내겠다고 선언하였지만, 속으로는 심왕을 위하여 터전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 심왕의 종신 박전(朴全)이 평양에서 와서, 거짓말로 심왕이 이미 국왕이 되었다고 선전하였다.
○ …… 경술일 밤에 홍빈(洪彬)ㆍ신백(申伯)ㆍ황겸(黃謙)ㆍ백문거(白文擧)ㆍ왕백(王伯)ㆍ홍성(洪晟)ㆍ조염(趙廉)ㆍ전사의(全思義)ㆍ주주(朱柱) 등이 정동성관(征東省官)과 함께 조염휘(趙炎輝)ㆍ이휴(李休)ㆍ이영부(李英富)ㆍ이안(李安)ㆍ한승(韓昇)ㆍ장거재(張巨才)ㆍ배성경(裵成景)ㆍ민후(閔珝)ㆍ오운(吳雲) 등에게 시켜서 천여 명의 군사를 점검하고, 붉은 천을 잘라서 옷에 붙여 표지를 삼고, 모두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아가 전왕의 궁을 습격하였다.
전왕이 행신(幸臣)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나와서 활을 쏘니, (조)적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친구가 그[조적]에게 나아가 망명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적이 듣지 않고 공주전(公主殿)으로 들어간 것을 왕의 군사가 쫓아 들어가 쏘아 죽이고, 그 시체를 순군소(巡軍所)의 남쪽 다리 아래에 옮겨 놓았다.
○ 전왕이 응방홀치(應坊忽赤) 60여 기(騎)를 평양부(平壤府)에 보내어 심왕을 붙잡아 두게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충숙왕 사후 전왕인 충혜왕과 심양왕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
○ (9월) 정동성 원외(征東省員外) 한첩목아불화(韓帖木兒不花), 전 찬성사(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전 낭장(郞將) 노영서(盧英瑞) 등이 원 나라에 가서 전왕의 습위(襲位)를 청하였다.
○ 겨울 11월 병진일에 원 나라에서 중서성 단사관(中書省斷事官) 두린(頭麟), 직성사인(直省舍人) 구통(九通)을 보내 왔다. 전왕이 선의문(宣義門) 밖에 나아가 그들을 맞이하니, 두린 등은 먼저 경화공주의 궁에 이르러 황제가 주는 술을 올리고, 드디어 전왕의 저택에 가서 국인(國印)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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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
충숙왕의 이름은 왕도(王燾)요, 어릴 때의 자는 의효(宜孝)이며 몽고 이름은 아라트나시리[阿剌訥忒失里]이다.
충선왕의 둘째 아들로 모친은 몽고여자인 예쉬진[也速眞 의비(懿妃)]이며 충렬왕 20년(1294) 갑오년 7월 을묘일에 태어났다.
다섯 살 때 강릉군승선사(江陵軍承宣使)2), 장성해서는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각각 책봉되었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입조했다.
충선왕 5년(1313) 3월 갑인일에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요청하자 원나라 황제가 다음과 같은 책문을 내렸다.
“아아! 그대 고려 왕세자 왕도(王燾)는 원나라의 훈척(勳戚)으로서 그대 나라는 조상대대로 우리의 번국(藩國)이 되어왔다. 그대 부친이 왕위를 내놓음으로써 편안히 지내려하니, 이제 그대는 가업을 이어 가문을 크게 경사롭게 할지어다.
이에 성대한 전례(典禮)에 따라 인장(印章)을 하사하고, 특별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정동행중서성좌승상(征東行中書省左丞相)·상주국(上柱國)·고려국왕(高麗國王)의 관작을 내리노니, 더욱 충효(忠孝)의 마음을 굳게 하여 길이 백성들을 잘 돌보도록 하라.”
충숙왕 17년(1330) 경오년
가을 윤 7월 갑신일. 왕이 원나라에 갔다.
【왕이 왕위를 물려준 뒤로부터 복위하기 24개월 간의 기록은 충혜왕(忠惠王) 세가(世家)에 수록되어 있다.】
충숙왕 후원년(1332) 임신년 봄 2월
【정월(正月) 이전은 충혜왕 2년에 들어 있다.】
갑자일. 원나라가 유수(留守) 보수(寶守)와 전 이문낭중(理問郞中) 장백상(蔣伯祥)1) 등을 보내 왕에게 복위2)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충숙왕 후8년(1339) 기묘년
봄 3월 계미일. 왕이 침전(寢殿)에서 죽으니 재위 기간이 25년이며 향년 46세였다.
성품이 엄격 침착하고 총명했으며 글을 잘 짓고 예서(隸書)에 능했다.
또 성격이 유달리 깔끔한 것을 좋아하여 한 달에 드는 목욕 비용으로 각종 향이 열 동이가 넘었고 모시베가 60여 필이나 되었는데 이를 수건이라 불렀다. 내수(內竪)들이 그 중 많은 양을 훔쳤으나 왕은 전혀 알지 못했다.
충혜왕(忠惠王) 후5년 12월에 원나라에서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주었고 공민왕(恭愍王) 6년 윤 9월에는 의효(懿孝)라는 존호를 덧붙였다.
사신의 논평
충렬(忠烈)·충선(忠宣)·충숙(忠肅)·충혜(忠惠)의 4대는 부자지간에 서로 다투면서 심지어 원나라의 조정에 함께 송사까지 함으로써 천하 후세의 비웃음을 샀다.
아비와 아들은 하늘이 낸 절친한 관계이며 효(孝)는 모든 행실에 우선하는 것으로 정치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근본을 이미 상실했으니 다른 것이야 더 볼 필요도 없으리라.
충숙왕은 만년에 국사를 내팽개치고 대궐을 떠나 지방과 도성 바깥에서 지내면서 박청(朴靑) 등 내시 3명을 신임하여 모든 권한을 주어버렸다. 이에 그 아들이나 손자들이 다 제 명대로 살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