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날아오른다
손택수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강이 날아오른다]({목련전차}, 창비, 2006년) 전문
손택수 시인은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고, 경남대 국문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 {호랑이 발자국}과 {목련 전차}를 출간했으며, 2005년도에는 제3회 ‘애지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그는 제3회 애지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바다를 떠난 뒤에 내가 머물게 된 곳은 ‘일산’이라는 땅이다. 나는 가끔씩 ‘일산’을 ‘흑산’이라고 바꿔 부른다. 파도 소리 대신 난생 처음 살아보는 아파트 옆으로 스물 네시간 내내 차바퀴 소리가 들려온다.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오는 차바퀴 소리를 몸에 감고 웅크린 나의 방은 아무도 찾지 않는 무인도다. 바다에 있을 때 찾던 무인도를 바다를 떠나게 된 뒤에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것도 서울 가까운 도시 한복판에서...... 떠돌면서 배운 것 하나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 본다는 것이다. 이 생에 귀향은 이제 물 건너 간 것이 아닌가. 아니, 귀향이란 꿈의 형식 속에서만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라고 말한 바가 있고, 또한 그의 두 번째 시집인 {목련 전차}의 [자서]에서, “아버지가 그랬다/ 시란 쓸모없는 짓이라고// 어느날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기왕이면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해보라고//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나의 슬픔이고 나를 버티게 한 힘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흑산’은 정약전이 유배되어 간 곳이며, 그 유배지를 벗어나려는 마음에서 {현산어보}를 썼던 곳이다.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형벌은 사형이며, 그 다음으로 무서운 형벌은 유배라는 형벌이다. 사형이란 말 그대로 목숨을 빼앗는 것을 의미하지만, 유배란 그 주체자에게 공동체 사회에서의 생활을 박탈하고, 머나 먼 오지奧地로 떠나보내는 것을 말한다. 그는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그에게는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커녕, 어떠한 안전보장 장치도 없게 된다. 그는 좋은 옷과 좋은 음식보다는 악의악식惡衣惡食에 익숙해져야 하고, 다른 한편, 생존만이 최고인 야만적인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유배생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미리부터 자포자기하거나 넋이 나가 버리기 마련이지만, 정약전은 ‘흑산’이라는 지명마저도 ‘현산’으로 바꾸고, 그 인간 의지를 통하여 {현산어보}라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책을 썼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어디에서나 행복하다’라는 말이 있다. 시인이란 자기 자신의 행복의 연주자이며, 언제, 어느 곳에서나 행복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유배의 명령을 내린 사람이며, 그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쓰기는 실제의 생활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짓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하여 그 무인도에서 자발적인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끊임없이 귀향을 꿈꾸면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 본다는 것, 아니, 그 쓸모없는 짓(시쓰기)에 최선을 다해본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염세주의자가 미리부터 자포자기하거나 체념으로 일관하면서 이 세상을 끊임없이 헐뜯고 비방해대고 있는 것이라면, 낙천주의자는 늘, 항상, 최악의 생존 조건 속에 처해 있을지라도, ‘흑산’을 ‘현산’으로 바꾸려는 그 집념으로,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성실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시인은 어느 곳에다가 자기 자신의 집을 지어야 하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곳, 그러나 도저히 어느 누구도 지을 수 없는 그런 곳에 자기 자신만의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 호머라는 천하의 절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보고, 괴테와 셰익스피어와 보들레르라는 고산영봉들을 좌우에 거느리면서, 사나운 눈보라와 뜬구름마저도 쉬어가는 그런 곳이 그의 안식처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이 최초의 시인이자, 최후의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최초의 시인이자 최후의 시인인 곳----. 모든 제일급의 시인들은 늘, 항상, 최악의 생존조건을 찾아나서는 자들이며, 이 세상을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낙천주의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손택수는 기사도적인 모험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에 투철한 낙천주의자이며,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강은 모든 문명의 발상지이자,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젖줄이다. 황하강, 인더스강,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그리고 나일강 등은 우리 인간들의 고대문명의 발상지이며, 아직도 우리 인간들은 그 강들이 만들어 내는 비옥한 터전에서 살아간다. 손택수는 그 강을 ‘흐른다’고 말하지 않고, 그 ‘강이 날아오른다’라고 말한다. 손택수의 [강이 날아오른다]는 상형문자인 ‘乙’의 절묘한 활용과, 강과 인간, 강과 새, 그리고 새와 인간의 관계를 가장 역동적이면서도 절묘하게 결합시킨 제일급의 명시라고 생각된다.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에서의 “강이 휘어진다”라는 뜻은 새을자(乙字)의 그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굽힐 을자(乙字)의 그것일 수도 있다. 강은 언제, 어느 때나 유유히, 유장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굽이 굽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흘러가고, 또한 우리 인간들 역시도 언제, 어느 때나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등 굽은 아낙 하나”가 “아기를 업고 밭을” 매는 것처럼 힘들게 살아간다. 강도 힘들게 살아가고, 아낙도 힘들게 살아가고, 새들도 힘들게 살아간다. 아낙네의 밭매기는 등에 혹(아기)이 하나 붙어 있는 호미질이며, 그 호미질은 마치, 도로아미타불과도 같은 돌밭매기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강의 흐름 역시도 그 아낙네의 돌밭매기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힘겨움으로 간신히 저문 들을 껴안게 된다. 요컨대,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이 없으면 “저문 들을” 껴안을 수가 없는 것이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라는 제3연의 ‘乙, 乙, 乙’은 새을자의 ‘을’도 되고, 굽힐 을자의 ‘을’도 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천마리로, 만마리로 무리지은 새들이 강을 들어 올릴 때의 점점 더 고조되어가는 기합 소리(乙, 乙, 乙)의 그것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아무튼 강과 인간, 강과 새가 결합되고, 그 굽은 강이 살이 패이는 아픔으로 흐르다가 마침내, 드디어 날아오르는 모습은 ‘소쿠라지는 울음소리’의 기적이 아닐 수가 없다. 이때에, 또한, 새들의 울음소리와 새들의 군무群舞는 아주 빠른 물결이 용솟음치는 모습과 그 소리처럼 변주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연의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라는 시구는 어느덧 나도 모르게 물새떼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의 표현일 것이다. ‘까딱하면’은 ‘1, 고개를 앞으로 가벼이 꺾어 움직이는 모양, 2, 잘못 변동할 지도 모르는 모양, 3, 조금 움직이는 모양’ 등의 뜻이 있지만, ‘2의 뜻’, 즉, ‘잘못 변동할 지도 모르는 모양’이 된다. ‘까딱하면(잘못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라는 시구는, 그러니까 시인은 새가 아니면서도, 새가 된 것처럼, 그 새가 된 강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라는 표현이 된다.
손택수의 [강이 날아오른다]라는 시는 시인의 참신한 발상과 아주 뛰어나고 멋진 표현과, 그리고 내가 내 방식대로 표현해본다면, 그의 장중하고 울림이 큰 낙천주의가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상형문자인 ‘乙字’에서, ‘강과 인간’, ‘강과 새’, 그리고 ‘새와 인간’을 결합시킨 것은 매우 참신한 발상이며, 그 참신한 발상에 의해서 아주 뛰어나고 멋진 표현과 장중하고 울림이 큰 낙천주의 사상을 얻게 된다. 새들도 강처럼 휘어지는 아픔으로 살고 있고, 강도 새처럼 휘어지는 아픔으로 살고 있고, 인간도 강처럼 휘어지는 아픔으로 살고 있다. 따라서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등의 뛰어난 시구들이, 전혀 그 현실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그 수사적인 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강이 새을자로 휘어지고, 그 강의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가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는 멋진 표현과 아기를 업은 아낙이 돌밭을 매는 것처럼, 그 살이 패이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껴안는다라는 멋진 표현 앞에서 어느 누가 감동하지 않을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렵고 힘겨운 노역을 통해서,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의 역동성과, 새가 아니면서도, 마치 새가 된 것처럼, 그 날아오르는 강물 속으로 첨벙 뛰어 뛰어들고 싶다는 그 무아지경의 황홀함 앞에서 어느 누가 감동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유배명령을 내리고, 그 불모지대의 유배지를 지상낙원의 세계로 연출해내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인의 사명이기도 한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이 세계를 새롭게 해석해낼 수가 있다면, 바로 그때에는 이 지옥이 천국이 되고, 불모지대의 사막이 사시사철 늘 푸른 오아시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강이 새가 되고, 새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강이 된다. 강도 날아오르고, 새도 날아오르고, 사람도 날아오른다.
시인의 쓸모없는 짓의 역동성은 이렇게 해서 그 힘을 얻게 되고, 따라서 최악의 생존 조건이 존재하기는 커녕, 이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지상낙원의 삶만이 펼쳐지게 된다.
----반경환 명시감상 제1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