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윤 칼럼(23-48)> 初伏, 상반기 人文學 강좌 종강
7월 11일(화요일) 초복(初伏)이며,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인문학 연구강좌의 상반기 종강일이다. 하반기 강의는 9월에 개강한다. 서울에는 시간당 60mm의 폭우가 내렸으며, 일부 지역에선 1시간 동안 72mm 비가 쏟아져 ‘극한호우’ 긴급재난 문자가 처음 발송됐다.
필자와 내자는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100년> 제9강 <미디어 아트>를 오후 2시부터 2시간동안 수강했다. 정하윤 박사(이화여대)가 백남준, 김구림, 박현기 등 미디어 아트 작가 3명의 생애와 작품에 관하여 설명했다.
<백남준(白南準, Nam June Paik)>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에미의 자택에서 75세에 별세했다.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백남준은 한국 태생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 예술가, 작곡가, 전위예술가(前衛藝術家, avant-gardist)이다. 그는 여러 가지 매체로 예술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비디오 아트(video art)라는 새로운 예술의 범주를 발전시켰다. 이에 백남준은 세계적으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백남준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8세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고등학교(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백남준은 1949년 홍콩 로이든(Royden)고등학교로 전학했으며,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이에 백남준은 도쿄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하여 미술사학(전공) 및 음악사학(부전공)을 공부했다.
1956년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학교 및 쾰른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독일 뮌헨 루트비치막시밀리안대학교에서 음악학 석사학위와 철학석사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백남준은 1958년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이 영감은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라는 것으로 규정된다.
수상은 쿠르트 슈비너스상(1989),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전시관 부문 황금사자장(1993),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1995), 제5회 한국 호암상(1996), 미국 뉴욕 괴테연구소 괴테상(1997), 일본 교토그룹 교토상(1999), 그리고 2000년에 한국 정부의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백남준의 주요 작품을 퍼포먼스, 전시 작품, 음악 작품, 비디오 아트, 위성 아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백남준의 첫 번째 음악 퍼포먼스는 1959년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으로 피아노를 파괴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1960)는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 소동으로 유명한 퍼포먼스이다. 오리기날레(1961), 작은 여름축제(1962), 바이올린 솔로(1962), 페스툼 플럭소룸 플럭서스(1963), 오페라 섹스트로니크(1967), 살아있는 조각을 위하 TV브라(1969) 등이 있다.
전시 작품에는 적분된 피아노(1958), 임의접속 음악(1963), 로봇 K-456(1964), 비디오 신시사이저(1969), TV 붓다(1974), TV 물고기(1975), TV 침대(1975), 달은 가장 오래된TV다(1975), TV 정원(1975), TV 시계(1976), 물고기가 하늘을 날다(1976), 다다익선(1988), 나의 파우스트(1989), 전자 초고속도로(1995), 라이트 형제(1995) 등이 있다. 음악 작품에는 영 페니스 심포니,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 교향곡 제5번,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압쉬츠심포니, 인 메모리암 조지 마키우나스, TV 첼로, TV 첼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콘서트(1982) 등이 있다.
‘비디오 아트’에는 버튼 해프닝(1965), 전자 오페라 No.1(1969), 비디오 코뮌(1970), 글로벌 그루브(1973), 머스 바이 머스 바이 백(1975), 조곡 212(1977), 과달카날 진혼곡(1977), 백팔번뇌(1998) 등이 있다. ‘위성 아트’에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어두운 미래의 전망에 대한 반박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호랑이는 살아있다(2000) 등이 있다. 백남준은 다양한 전시회를 13회 개최했다.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 1937-2015)는 일본의 조각가, 비디오 예술가이다. 그녀는 10대 때부터 일본 미술계에서 천재 소녀로 명성이 자자했다. 백남준에게 비디오 아트를 배운 구보타 시게코는 비디오 아트로 현대 미술계에 이름을 날리는 작가로 성장하였다. 그녀의 작품들은 세계 최고의 현대 미술관인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구겐하임 미술관(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등에 전시되기도 했다.
<김구림(金丘林, Kim Kulim)>은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행위예술가이자 전위예술가, 우리나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조이다. 1936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유명한 한의사 집안에서 출생했다. 6.25전쟁 당시 군대에 징집되어 군악대(軍樂隊)에 배치되었다. 전쟁 중에 의약품이 없어 사람들이 죽고, 시체를 아무데나 내동댕이 치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태양의 죽음(1964), 묘비 등 초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대구에서 학업을 하다가 우연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라이프(LIFE)지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전업 전위미술가(前衛美術家)가 되기로 결심했다. 부산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나, 첫날 오픈 때 어떤 화가가 ‘대학도 못나온 사람이 미술가를 한다’며 작품에다 컵을 던졌다. 이 때 김구림은 서울로 가야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2년동안 유영산업의 기획실장을 맡으면서 CF를 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돈으로 작품을 찍어 보는 게 어떨까하는 생각에 ‘문명, 여자, 돈’이라는 첫 미디어 작품을 만들었으며, 그 유명한 ‘1/24초의 의미’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한국아방가르드협회’와 ‘제4집단’을 만들어 그 당시로써는 충격적인 행위미술을 시작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품의 형태가 사라지는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이라는 대표작품을 만들었다.
국립극장에서 열린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백남준과 2인전, ‘피아노 위의 정사(情事)’(1970)를 연출하였다. 피아노 위에서 남녀 2인이 몸은 천으로 덮고 발만 내밀어 무작위적으로 피아노를 치는 퍼포먼스였는데, 윤리적인 문제로 거론되어 한국에서 다시 시연된 적은 없다. 1970년 제10회 한국미술협회전에서는 김구림 자신이 작품이 되는 ‘도(道)’ 퍼포먼스를 했다. 미술관 내에서 작품 대신 작가가 앉아 있는 모습에 경악한 기자들의 ‘이것도 미술인가?’ 싶어서 앞다투어 보도했다.
이에 한국 미술계 내에서는 ‘대학도 못 나온 놈’이 자기 명예나 날리려고 그런 이상한 짓만 하고 돌아다닌다‘며 화가 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이 때 한국 미술계에 크게 실망한 김구림은 197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미술계는 김구림을 환대했다. 삽(1973)과 걸레(1974) 작품을 동경에 전시했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수많은 일본 미술계 거물들과 교류를 하였다. 날이 갈수록 명성이 올라가자 한국에서도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10여 년간의 일본에서의 성공을 뒤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김구림의 열망은 미국 유학으로 이어졌다. 미국 미술을 배우면서 졸업 작품으로 ’미국의 유명한 미술가들 중 한명‘으로 뽑히기도 하고, 브루스 나우만과 같이 세계적인 작가들과 함께 그룹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모던 뮤지엄의 제안에 따라 LA에서 3년 동안 준비한 개인전시회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김구림이 해외에서 유명해지자 한국문예진흥원은 그에게 끊임없이 귀국 요청을 하였다. 정부지원예산까지 편성되자 김구림은 후배양성을 위한 명분도 있어 2000년 한국 복귀를 선언한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넓은 스펙트럼의 결과물들은, 자칫 안일함에 빠질 수 있었던 우리나라 미술계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는 김구림 작가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미국 뉴욕타임즈(NYT)에 김구림 작가가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아방가르드 운동의 중심인물로 소개됐다. 지난 2022년 6월 15일 발행된 데이비드 벨처 기자의 “A Founding Father of Korean Multimedia(한국 멀티미디어 창시자)”라는 제목의 기사에 김구림의 예술 생애와 그의 최근작까지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번 인터뷰는 김구림 작가가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열리는 유럽 아트페어 테파프(TEFAF/The European Fine Art Fair)에 참가하게 되면서 진행되었다.
<박현기(朴炫基, Park Hyun Kee)>는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여, 1945년 대구에 정착했다. 1961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으나, 1964년 건축과로 전과하여 졸업했다. 1970년대 초 대구로 낙향하여 건축 인테리어 사업(설계사무소 ’큐빅‘)을 하면서 번 돈으로 모니터와 카메라를 구입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백남준의 작품을 보고 비디오아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박현기는 1999년 8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2000년 1월에 타계했다. 58세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는 수많은 작품과 자료를 남겼다. 박현기 작가는 돌을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실제 돌, 인공 돌, 돌 비디오 아트 등을 이용한 돌탑 작업들이 유명하다. 그의 사후 여러 차례 박현기를 재조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는 ’TV 돌탑‘부터 ’만다라‘ 연작까지, 불꽃처럼 살았다.
박현기의 예술세계는 ’만다라‘ 연작에서 정점을 찍었다. 작가가 초기 디지털 영상 편집 기술이 도입되던 1990년대 중반에 집중한 ’만다라‘ 연작 4점이 있다. 1997년 뉴욕 킴 포스트 갤러리의 상영 방식과 동일하게 붉은색의 불교 의례용 헌화대 위에 기하학적 불교 도상(圖像)이 겹쳐져 무한 반복 재생되는 영상을 투사해 비밀스러운 느낌을 연출했다.
갤러리현대는 작가의 작고 10주기를 기념해 2010년 회고전 형식으로 마련한 <한국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박현기>전 <I’m Not a Stone>을 열었다. 박현기는 ‘한국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비디오 아트에 머물러 있지 않고 조각, 설치, 판화, 비디오, 퍼포먼스, 회화, 드로잉, 포토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든다.
박현기는 한국 비디오 미술의 선구자이다. 서구의 비디오 예술이 기술, 기계에 탐닉하는 반면에 박현기는 비디오라는 기술을 동양적 정신문화를 표현하는 단순한 수단으로 해석했다. 인화용 물통 수표면에 비친 램프의 물그림자를 손으로 휘저어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작업이 그의 최초 비디오 작업이었다. 이후 비디오를 통한 명상적인 영상을 선보이며 한국적 미니멀 비디오 아트(minimal video art)의 새 지평을 열었다.
<사진> (1) 백남준과 작품, (2) 김구림과 작품, (3) 박현기와 작품.
靑松 朴明潤 (서울대 保健學博士會 고문, AsiaN 논설위원), Facebook, 12 July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