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신입생 시절 1959
* 에피소드 1
나는 1959년 3월 경주중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대구의 명문고인 사대부고에 입학하였다.
대구시내 중학교 졸업생들은 무시험 전형으로 200명을 뽑고
기타 나같은 시골중학교 출신들은 입학시험을 치루고 100명을 뽑았으니
신입생은 모두 300명이었다.
당시는 戰後라 중학시절에는 유서깊은 본교사 건물은
육군병원으로 징발되어 사용중이어서
우리 중학생들은 그옆 공터에 판자로 지은
가교사(假敎舍)에서 3년동안 공부를 하였다.
이곳 역시 고등학교 운동장은 미군이 사용중이었고
손바닥만한 배구장과 학교교사 주위의 자투리 땅이
휴식공간의 전부였다.
나는 한시간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화장실로 가거나 밖에나가 놀다 들어오는데
다른 대다수의 급우들은 자리에 앉아
복습인지 예습인지 모르지만 책을 읽고있었다.
우리 교실은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구상고 교실과 인접해있었는데
그들은 유리창 청소를 하다가
우리를 보면 “어이 부고 아편쟁이” 하고 소리 첬고
우리는 “상고 엿쟁이” 하고 응수했었다.
우리학교 학생들이 안경잽이가 많았기 때문에
아편쟁이라고 불렀다 한다.
중학시절 가교사는 겨울에는 추워서
수업 중간에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판자집 교사 남향벽의 양지바른 곳에 한줄로 늘어서서
급우들과 햇빛을 쪼이며 떠들고 놀던 내게는
10분도 안되는 쉬는 시간에도 공부한다는 것이
생소한 광경이었다.
3학년 3반
* 에피소드 2
당시에는 고교생이 학교밖에서 별로 갈곳도 없었고
가난하던 시절이라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휴일이나 일요일에 시립 도서관에 갔었다.
중학시절에는 도서관에 가면 소설책을 빌려 읽었다.
대구시립도서관에 처음 갔던 날
나는 소설책 세권을 빌려
열람실에 앉아 읽기 시작하였는데
주변을 보니 놀랍게도
다른 학생들은 모두가
자기 책가방을 가져와서 학과공부를 하고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 도서관이란 거기 비치된
책들을 빌려 보는 곳으로 알았었는데
자기책을 가져와서 공부를하는 곳이기도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되었다.
졸업을 몇일 앞둔 어느날
* 에피소드 3
입학후 처음으로 중간고사를 치르던 날
영어과목이었는데 시험지를 받아보고는
좀 놀랐다.
중학시절에는 육필로 쓴 영어 문장 10개 항목 정도를
우리말로 번역하라는 문제를
등서판으로 질나쁜 종이에 프린트한 시험지였는데
이곳은 영문 타자기를 사용해서
페이지 가득 다양한 문제들로 채워져있었다.
나는 답안지를 모두 작성하고도 시간이 좀 남았지만
그냥 앉아있기 무료하여
다른 사람보다 좀 빨리 답안지를
선생님께 제출하고 나가려고 일어섯다.
몇걸음 걷다 무심코 답안지 뒷면을 보니
거기에도 문제들이 가득히 있었다,
다시 돌아갈수도 없으니 그냥 제출할 수밖에...
물론 나의 영어시험 점수는 60점도 안되었다.
이런것들이 나를 놀라게 했던
당시의 경주와 대구에있던 학교의 차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앞서가던 급우들을 따라잡는데
좀 힘든 시간을 보냈다.